FAZER LOGIN살해당한 약제사가 눈을 뜬 곳은, 국왕을 세 번이나 죽이려 했던 악녀 왕비의 시체였다. 왕은 되살아난 아내의 숨결까지 의심하고, 에이슬라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그를 사랑하는 척한다. 그런데 가짜 다정함에 먼저 무너진 것은 왕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하게 될수록 왕비의 몸에 숨겨진 독, 왕가의 영혼 실험, 조작된 죽음이 터져 나온다. 마침내 죽은 줄 알았던 진짜 왕비가 돌아와 선언한다. “그 남자가 사랑한 건 내 얼굴이야. 그런데 그 얼굴로 사랑받은 건 너였지.”
Ver mais“스승님, 제 사망 시각이 한 시간 뒤인데 독은 왜 벌써 먹이셨죠?”
에이슬라는 감각이 둔해진 혀로 말을 끝냈다.
책상 위 장부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이슬라 모렌.
투약 시각, 오늘 자정 전. 회수 시각, 맥박 정지 직후. 보관 상태, 양호.마지막 줄에는 오스테론의 서명이 있었다.
대성당의 종이 열한 번 울렸다.
오스테론은 장부가 아니라 문부터 잠갔다.
“어디서 찾았지?”
“아침 차에 세 방울. 지금 손끝이 식는 속도로 보면 흰 황혼이네요.”
그의 손이 잠깐 멎었다.
“역시 내 제자답구나.”
“죽일 사람에게 할 칭찬은 아니죠.”
에이슬라는 장부를 넘겼다. 열두 명의 이름이 줄지어 있었다.
자신이 약을 지어 살려 보낸 환자들이었다.
퇴원 다음 날 다시 끌려온 시각, 두 번째 투약량,
맥박이 멎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처방란에는 같은 문장이 반복됐다.
빈자리 확보.
“이 사람들, 치료한 게 아니군요.”
“치료의 다음 단계를 확인했지.”
“죽인 겁니다.”
“죽음은 결과 중 하나다.”
오스테론은 흰 장갑 끝을 맞춘 뒤 투명한 약병을 집었다.
병목에 굳은 흰 가루가 보였다.
흰 황혼.
영혼과 몸의 결속을 느슨하게 하는 무색 독.
치사량에 닿기 전 기억이 끊어지고, 맥박이 제 박자를 잃는다.
“그래서 제 체온과 수면 시간을 몇 년이나 적었습니까?”
아침마다 내어 주던 차.
손이 떨린다며 짚어 보던 맥.
밤새 연구했다는 말을 들으면 쉬라고 다독이던 목소리.
모두 제자를 걱정한 흔적이 아니었다.
실험 기록이었다.
에이슬라는 엄지로 검지 마디를 세 번 문질렀다.
“처음부터였어요?”
“네가 약제원에 들어온 날부터.”
“제자로 받은 게 아니라 고른 거네요.”
“가능성을 방치하는 건 죄다.”
“허락 없이 사람을 쓰는 건요?”
오스테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에이슬라는 마지막 장을 뜯어 소매에 넣었다.
책상 아래 비상종 줄을 잡아당겼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잘린 줄 끝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복도에서 무거운 것이 쓰러졌다.
경비병의 열쇠 꾸러미가 문틈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은방울꽃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수면제를 지나치게 먹였을 때 남는 냄새였다.
“경비에게 뭘 먹였죠?”
“잠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깨어나지 못할 만큼요?”
“회복 여부는 각자의 몸이 결정한다.”
오스테론이 병마개를 열었다.
에이슬라는 창문까지 거리를 셌다.
여섯 걸음. 뛰어내리면 다리를 잃는다.
여기 남으면 이름을 잃는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무릎이 꺾였다.
차에 든 세 방울이 심장까지 도달했다.
“저 병은 뭡니까?”
“확정 투약.”
에이슬라는 쓰러지는 척 화로를 향해 굴렀다.
장부를 불길에 던지는 순간, 표지 안쪽에 숨겨 둔 명단만 빼내 배수구로 밀어 넣었다.
종이는 물길을 타고 아래층 조제실로 사라졌다.
한 사람만 발견하면 된다.
거기에는 죽은 환자들의 본명과 투약 날짜,
약을 운반한 성직자들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오스테론의 구두가 타는 장부를 밟았다.
“죽으면서도 기록을 남기는구나.”
“스승님이 가르쳤잖아요. 처방에는 투약자와 허락한 사람의 이름을 남기라고.”
“판단 능력이 있는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원칙이다.”
“판단을 빼앗은 사람이 정하는 기준이군요.”
에이슬라는 책상 다리를 걷어찼다.
약병이 떨어져 깨졌고 독이 바닥에 쏟아졌다.
그러나 오스테론은 깨진 유리 조각에 남은 액체를 모아 그녀의 입술에 댔다.
에이슬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코를 막았다.
숨을 참자 폐가 먼저 버티지 못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독이 흘러들었다.
한 모금.
손끝 감각이 끊겼다.
두 모금.
심장이 한 박자를 건너뛰었다.
에이슬라는 혀 밑의 은박 조각을 깨물었다.
독 성분을 남기는 채취지였다.
살아서 못 나가면 시체라도 증거가 되어야 했다.
“왜 저예요?”
“네가 가장 오래 견뎠으니까.”
“독을요?”
“질문을.”
시야가 기울었다.
소매에서 마지막 장이 빠져나왔다.
대상 둘.
동시 투약. 공명 조건 확인.첫 번째 대상은 에이슬라 모렌.
에이슬라는 남은 감각으로 바닥을 긁었다.
죽는 것보다 이름이 지워지는 게 더 두려웠다.
두 번째 이름은 검은 잉크로 지워져 있었다.
열린 창으로 달고 쓴 약향이 밀려왔다.
이 방에서 나온 냄새가 아니었다.
왕비궁 첨탑의 창 하나가 붉게 빛났다.
동시에 에이슬라의 심장이 멎었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가슴 안에서 다른 박동이 시작됐다.
한 번.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이었다.
두 번.
왕비궁의 붉은 불빛이 같은 간격으로 흔들렸다.
“두 번째 대상은 왕비 네르시아죠?”
오스테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굽혀 에이슬라의 맥을 짚었다.
수없이 가르쳐 준 정확한 자리였다.
“좋은 그릇은 비어 있어야 하지.”
죽은 에이슬라는 기록 속에서 하루 먼저 죽어 있었다.“왜 네가 죽은 여자의 이름으로 울지.”에이슬라는 사망 기록 위에 떨어진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번진 잉크 아래에서도 자신의 이름은 선명했다.“이 기록이 이상해서요.”“무엇이.”“날짜가 하루 빠릅니다.”바이렌이 기록을 다시 내려다봤다.“네가 그 여자의 죽은 날을 어떻게 알지.”대답할수록 정체에 가까워졌다.침묵할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질 터였다.에이슬라는 사망 기록을 접어 유품 상자에 넣었다.“시신을 확인하면 알 수 있습니다.”“나와 함께 가.”“안 됩니다.”“이유.”“폐하가 움직이면 누군가 먼저 시신을 치울 테니까요.”바이렌의 시선이 문까지 이어졌다가 그녀에게 돌아왔다.“이미 없다고 생각하는군.”“장례 기록도, 매장지도 없잖아요.”그는 길을 막지 않았다.대신 탁자 위의 작은 호각을 에이슬라 앞으로 밀었다.“문제가 생기면 한 번 불어.”“근위병이 오나요?”“내가 간다.”에이슬라는 호각을 챙겼다.바이렌이 허락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돌아올 방법이었다.“해 뜨기 전까지 돌아와.”“명령입니까?”“부탁이다.”그 한마디가 걸음을 더 무겁게 했다.왕비궁을 나온 뒤 메브라가 외투를 씌워 주었다.“폐하께서 정말 보내 주셨습니까?”“막지 않으셨어요.”“그게 더 무섭습니다.”“저도요.”두 사람은 지하 수로를 지나 왕궁 시체실로 향했다.새벽의 돌바닥에는 마른 진흙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관을 옮길 때 쓰는 수레바퀴 자국이었다.그 흔적은 시체실에서 나와 왕비궁 방향으로 뻗다가 북쪽 통로 앞에서 지워졌다.시체실 문틈으로 종이 타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에이슬라는 호각 대신 비녀를 뽑았다.네르시아의 손이 잠금장치의 홈을 찾아 한 번에 빗장을 밀었다.문 안에서는 늙은 관리인이 화로에 장부를 던지고 있었다.“불에서 손 떼세요.”관리인이 돌아보는 순간 불붙은 종이가 손에서 떨어졌다.에이슬라는 치맛자락으로 불을 덮어 껐다.남은 글자는 이름 하나뿐이었다.에이
“스승님.”에이슬라가 정신을 잃은 뒤에도 그 호칭은 방 안에 남았다.바이렌은 침대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왕실의가 맥을 확인하려 손을 뻗자 그가 먼저 물었다.“무엇을 하려는 거지.”“독의 잔류량을 확인하겠습니다.”“어떻게.”“손끝의 피를 채취해야 합니다.”바이렌은 이불 위에 놓인 에이슬라의 손을 보았다.“깨어난 뒤 허락을 받아.”“치료가 늦어질 수 있습니다.”“환자가 금지한 처치를 서두르는 건 치료가 아니다.”왕실의들이 물러난 뒤 바이렌은 타론을 불렀다.“왕실 약제원에서 최근 죽은 사람을 찾아.”“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자를 찾으시는 겁니까?”“아니.”바이렌의 시선이 에이슬라의 얼굴에 머물렀다.“저 호칭을 마지막으로 남긴 사람을 찾는다.”한 시간 뒤, 검은 봉투가 왕비궁으로 들어왔다.지난 한 달간 사망한 왕실 약제사는 한 명뿐이었다.에이슬라 모렌.스물일곱 살.사인은 원인 불명의 심장 정지.사망 확인자는 대신관 오스테론.바이렌이 이름을 읽는 순간 침대 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에이슬라 모렌.”감겨 있던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타론이 침대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들었군요.”“물러나.”“반응을 더 확인해야 합니다.”“깨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시험할 생각은 없다.”바이렌은 기록을 접지 않은 채 다음 장을 넘겼다.에이슬라는 죽기 전날 독물 저장고의 재고를 조사했다.그날 반출된 것은 빈 장부 한 권과 흰 유리병 세 개였다.장부는 돌아오지 않았고 유리병은 목록에서 삭제됐다.마지막 출입자는 에이슬라와 오스테론 두 사람뿐이었다.“방은 봉인됐나.”“사망 직후 오스테론이 직접 명령했습니다.”“유품은.”타론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은제 약숟가락 하나.푸른 리본 한 묶음.마른 찻잎이 든 주머니.바이렌은 약숟가락을 들어 손잡이의 닳은 부분을 살폈다.오른손잡이가 오래 쓴 흔적이었다.그는 침대 위 에이슬라의 오른손을 바라봤다.약을 섞을 때마다 엄지와 검지가 닿는 자리.그곳에도 같은 굳
바이렌의 혀에 독이 닿는 순간, 에이슬라는 다시 죽었다.오스테론이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입을 벌려.”죽던 날과 같은 명령이 귓속에서 되살아났다.흰 약액이 혀 위로 쏟아지고, 스승의 엄지가 삼키지 않으려는 혀뿌리를 눌렀다.“왜 저를 죽이세요?”“죽이는 게 아니다.”오스테론은 빈 병을 빛에 비췄다.“네가 사라진 뒤 무엇이 남는지 확인하는 거지.”기억 속 약제실이 무너졌다.에이슬라의 무릎이 꺾이자 바이렌이 깨진 잔 위로 쓰러지는 몸을 받아 냈다.“왕비.”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오스테론의 웃음에 묻혔다.에이슬라는 바이렌의 가슴을 밀었다.“토하게 하지 마세요.”“내가 아니라 네가 삼켰다.”“그래서 안 돼요.”흰 황혼은 억지로 게우게 하면 식도를 타고 두 번째 독성을 일으켰다.설명해야 했지만 혀가 입천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물도, 우유도 주지 마세요.”시종장이 들고 오던 잔을 멈췄다.“그럼 무엇을 먹여야 하지?”“아무것도요.”바이렌의 팔이 그녀의 허리와 무릎 아래로 들어왔다.몸이 바닥에서 들리자 귀족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대신관만이 두 사람 앞을 막았다.“폐하, 왕비 전하께서는 스스로 독을 취했습니다.”“봤다.”“독의 존재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바이렌은 에이슬라의 희어진 손을 들어 대신관 앞에 보였다.손끝의 회색 반점은 손톱을 넘어 두 번째 마디까지 번져 있었다.“내 잔에 있던 것을 왕비가 대신 몸에 넣었다.”“그것이 연기라면요?”“연기라면 내 잔을 네가 마셔라.”바이렌은 멈추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왕비가 거짓말을 했는지는 나중에 판결한다.”그의 팔 안에서 에이슬라의 몸이 한 번 크게 떨렸다.“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건 지금 확인했다.”연회장 안에 남은 의심이 그 문장 하나에 갈라졌다.왕비가 잔을 깨뜨렸다.왕비가 독을 증명했다.왕비가 왕 대신 쓰러졌다.더는 누구도 세 문장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만들 수 없었다.“타론.”“명하십시오.”“깨진 잔과 은숟가락을 봉인
“제 몸이 대답하게 해야죠.”에이슬라가 술에 젖은 손가락을 들어 올린 순간, 손톱 아래의 붉은빛이 사라졌다.손끝이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닌 듯 희게 식었다.바이렌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씻어.”“이미 늦었습니다.”“해독제는.”“성분을 확인하지 않고 먹으면 독보다 먼저 심장이 멎어요.”에이슬라는 시종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모래시계와 바늘을 가져오세요.”“왕비 전하께서 직접 시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대신관이 막아서자 에이슬라는 바닥의 은숟가락을 들어 보였다.“이게 대답하지 않았으니 제가 해야죠.”“통증을 참는 연기일 수도 있습니다.”에이슬라는 바늘을 받아 독이 묻지 않은 오른손 검지를 찔렀다.피가 솟자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움찔했다.이어 독이 묻은 왼손을 찔렀다.바늘 끝이 살을 파고들었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첫 번째 증상은 접촉 부위의 감각 소실입니다.”시종장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기록하세요. 독이 닿은 뒤 서른두 번의 박동이 지났습니다.”에이슬라는 술웅덩이 곁에 떨어진 은숟가락을 발끝으로 돌렸다.표면은 여전히 흠 없이 맑았다.그 깨끗함이 오히려 독이 사람을 속이는 방식처럼 보였다.“은은 변하지 않았는데 사람만 변했습니다.”은발의 귀부인이 앞으로 나왔다.“은에 반응하지 않는 독이 정말 존재합니까?”“흰 황혼은 은이 잡아내는 성분을 쓰지 않습니다.”“그 이름은 왕실 독물 목록에 없습니다.”“사람을 죽인 뒤 기록까지 지웠으니까요.”연회장 안의 소리가 한꺼번에 끊겼다.바이렌이 에이슬라를 돌아봤다.“누가 지웠지.”“그 이름까지 말하면 오늘 여기서 독보다 먼저 죽을 사람이 생깁니다.”에이슬라는 목을 가린 보석 깃을 손끝으로 눌렀다.검은 독맥이 심장을 향해 움직이는 듯 욱신거렸다.왼손의 창백한 빛은 벌써 두 번째 마디를 넘어가고 있었다.“두 번째 증상은 맥박의 간격이 흐트러지는 겁니다.”그녀가 손목을 짚었다.한 번, 빈자리. 뒤늦게 두 번이 겹쳤다.바이렌이 직접 그녀의 맥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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