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한 왕비는 내가 아니다

당신이 사랑한 왕비는 내가 아니다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7-19
Por:  루니Atualizado ago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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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해당한 약제사가 눈을 뜬 곳은, 국왕을 세 번이나 죽이려 했던 악녀 왕비의 시체였다. 왕은 되살아난 아내의 숨결까지 의심하고, 에이슬라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그를 사랑하는 척한다. 그런데 가짜 다정함에 먼저 무너진 것은 왕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원하게 될수록 왕비의 몸에 숨겨진 독, 왕가의 영혼 실험, 조작된 죽음이 터져 나온다. 마침내 죽은 줄 알았던 진짜 왕비가 돌아와 선언한다. “그 남자가 사랑한 건 내 얼굴이야. 그런데 그 얼굴로 사랑받은 건 너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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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pítulo 1

제1화. 흰 황혼

“스승님, 제 사망 시각이 한 시간 뒤인데 독은 왜 벌써 먹이셨죠?”

에이슬라는 감각이 둔해진 혀로 말을 끝냈다.

책상 위 장부에는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이슬라 모렌.

투약 시각, 오늘 자정 전.

회수 시각, 맥박 정지 직후.

보관 상태, 양호.

마지막 줄에는 오스테론의 서명이 있었다.

대성당의 종이 열한 번 울렸다.

오스테론은 장부가 아니라 문부터 잠갔다.

“어디서 찾았지?”

“아침 차에 세 방울. 지금 손끝이 식는 속도로 보면 흰 황혼이네요.”

그의 손이 잠깐 멎었다.

“역시 내 제자답구나.”

“죽일 사람에게 할 칭찬은 아니죠.”

에이슬라는 장부를 넘겼다. 열두 명의 이름이 줄지어 있었다.

자신이 약을 지어 살려 보낸 환자들이었다.

퇴원 다음 날 다시 끌려온 시각, 두 번째 투약량,

맥박이 멎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처방란에는 같은 문장이 반복됐다.

빈자리 확보.

“이 사람들, 치료한 게 아니군요.”

“치료의 다음 단계를 확인했지.”

“죽인 겁니다.”

“죽음은 결과 중 하나다.”

오스테론은 흰 장갑 끝을 맞춘 뒤 투명한 약병을 집었다.

병목에 굳은 흰 가루가 보였다.

흰 황혼.

영혼과 몸의 결속을 느슨하게 하는 무색 독.

치사량에 닿기 전 기억이 끊어지고, 맥박이 제 박자를 잃는다.

“그래서 제 체온과 수면 시간을 몇 년이나 적었습니까?”

아침마다 내어 주던 차.

손이 떨린다며 짚어 보던 맥.

밤새 연구했다는 말을 들으면 쉬라고 다독이던 목소리.

모두 제자를 걱정한 흔적이 아니었다.

실험 기록이었다.

에이슬라는 엄지로 검지 마디를 세 번 문질렀다.

“처음부터였어요?”

“네가 약제원에 들어온 날부터.”

“제자로 받은 게 아니라 고른 거네요.”

“가능성을 방치하는 건 죄다.”

“허락 없이 사람을 쓰는 건요?”

오스테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에이슬라는 마지막 장을 뜯어 소매에 넣었다.

책상 아래 비상종 줄을 잡아당겼지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잘린 줄 끝이 손바닥에 떨어졌다.

복도에서 무거운 것이 쓰러졌다.

경비병의 열쇠 꾸러미가 문틈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은방울꽃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수면제를 지나치게 먹였을 때 남는 냄새였다.

“경비에게 뭘 먹였죠?”

“잠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깨어나지 못할 만큼요?”

“회복 여부는 각자의 몸이 결정한다.”

오스테론이 병마개를 열었다.

에이슬라는 창문까지 거리를 셌다.

여섯 걸음. 뛰어내리면 다리를 잃는다.

여기 남으면 이름을 잃는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무릎이 꺾였다.

차에 든 세 방울이 심장까지 도달했다.

“저 병은 뭡니까?”

“확정 투약.”

에이슬라는 쓰러지는 척 화로를 향해 굴렀다.

장부를 불길에 던지는 순간, 표지 안쪽에 숨겨 둔 명단만 빼내 배수구로 밀어 넣었다.

종이는 물길을 타고 아래층 조제실로 사라졌다.

한 사람만 발견하면 된다.

거기에는 죽은 환자들의 본명과 투약 날짜,

약을 운반한 성직자들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오스테론의 구두가 타는 장부를 밟았다.

“죽으면서도 기록을 남기는구나.”

“스승님이 가르쳤잖아요. 처방에는 투약자와 허락한 사람의 이름을 남기라고.”

“판단 능력이 있는 환자에게만 해당하는 원칙이다.”

“판단을 빼앗은 사람이 정하는 기준이군요.”

에이슬라는 책상 다리를 걷어찼다.

약병이 떨어져 깨졌고 독이 바닥에 쏟아졌다.

그러나 오스테론은 깨진 유리 조각에 남은 액체를 모아 그녀의 입술에 댔다.

에이슬라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코를 막았다.

숨을 참자 폐가 먼저 버티지 못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독이 흘러들었다.

한 모금.

손끝 감각이 끊겼다.

두 모금.

심장이 한 박자를 건너뛰었다.

에이슬라는 혀 밑의 은박 조각을 깨물었다.

독 성분을 남기는 채취지였다.

살아서 못 나가면 시체라도 증거가 되어야 했다.

“왜 저예요?”

“네가 가장 오래 견뎠으니까.”

“독을요?”

“질문을.”

시야가 기울었다.

소매에서 마지막 장이 빠져나왔다.

대상 둘.

동시 투약.

공명 조건 확인.

첫 번째 대상은 에이슬라 모렌.

에이슬라는 남은 감각으로 바닥을 긁었다.

죽는 것보다 이름이 지워지는 게 더 두려웠다.

두 번째 이름은 검은 잉크로 지워져 있었다.

열린 창으로 달고 쓴 약향이 밀려왔다.

이 방에서 나온 냄새가 아니었다.

왕비궁 첨탑의 창 하나가 붉게 빛났다.

동시에 에이슬라의 심장이 멎었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 가슴 안에서 다른 박동이 시작됐다.

한 번.

자신의 것이 아닌 심장이었다.

두 번.

왕비궁의 붉은 불빛이 같은 간격으로 흔들렸다.

“두 번째 대상은 왕비 네르시아죠?”

오스테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굽혀 에이슬라의 맥을 짚었다.

수없이 가르쳐 준 정확한 자리였다.

“좋은 그릇은 비어 있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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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죽은 왕비의 숨
“왕비 전하께서 죽은 지 한 시각 만에 제 손목을 잡으셨습니다!”비명과 함께 에이슬라의 눈이 열렸다.숨보다 먼저 왼손이 움직였다.가느다란 손가락이 침대 곁 시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있었다.시녀의 피부가 하얗게 질릴 만큼 강한 힘이었다.에이슬라는 놓으려 했지만 손은 한 박자 늦게 풀렸다.시녀가 뒤로 넘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살려 주십시오, 전하.”에이슬라는 대답하지 못했다.자신의 손이 아니었다.희고 긴 손가락, 약지의 왕가 인장, 손톱 밑에 남은 검붉은 피.검은 장례 수의가 가슴까지 덮여 있었고 손목에는 죽은 사람에게 묶는 흰 끈이 감겨 있었다.심장이 다시 뛰었다.한 번.짧은 틈 뒤 두 번.약제원에서 죽기 직전 들었던 낯선 박자였다.“거울을 가져오세요.”목소리마저 다른 여자의 것이었다.방 안의 시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누구도 거울을 가지러 가지 않았다.가장 어린 시녀는 자기 목을 두 손으로 감쌌다.손가락 사이로 오래된 긁힌 자국이 보였다.“제가 누구죠?”침묵이 길어졌다.“대답하세요.”그 말에 시녀 하나가 엎드린 채 몸을 떨었다.“네르시아 아벨룬 전하이십니다.”왕비 네르시아.국왕을 세 번 죽이려 했고 오늘 저녁 사망했다는 여자.오스테론의 장부에서 지워진 두 번째 대상.에이슬라는 오른손을 들려 했다.또 왼손이 먼저 올라왔다.몸은 명령을 알아들었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따르지 않았다.“오늘 날짜와 시각.”“일식제 사흘 전, 자정 종이 끝난 직후입니다.”자정 전 동시 투약.맥박 정지 직후 회수.에이슬라 모렌은 자정에 죽었다.왕비 네르시아는 같은 시각 다시 숨을 쉬었다.“왕실 약제원으로 사람을 보내세요.”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에이슬라 모렌의 생사를 확인해야 합니다.”시녀들의 표정이 바뀌었다.두려움 속에 다른 것이 섞였다. 혐오였다.나이 든 시녀가 입술을 깨물었다.“그 이름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왜죠?”“왕비 전하를 독살한 자입니다.”에이슬라는 침대 기둥을 붙잡았다.“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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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왕의 첫 질문
“열 번 숨 쉬기 전에 공모자의 이름을 대라.”바이렌의 검끝이 에이슬라의 목을 눌렀다.첫 번째 숨.핏방울이 검은 수의 안으로 스며들었다.그는 살아 돌아온 아내를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죽어야 할 죄인이 다시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하러 온 왕이었다.“공모자는 없습니다.”“벌써 한 번을 낭비했군.”“검부터 치우세요. 목이 잘리면 대답도 끝납니다.”“거짓말이 끝나는 편이 빠르지.”두 번째 숨.왕실의가 은쟁반을 들고 다가왔다.타다 남은 조제표, 깨진 약병, 작은 은제 숟가락이 놓여 있었다.“왕비 전하의 위에서 흰 황혼이 검출됐습니다.처방자는 왕실 약제원 소속 에이슬라 모렌입니다.”자기 이름이 살인범으로 불렸다.에이슬라의 입술이 굳었다.바이렌이 물었다.“그 약제사는 어디 있지?”죽었다.오스테론에게 독을 먹고, 차가운 바닥에서 맥이 멎었다.하지만 왕비의 얼굴로 그 죽음을 안다고 할 수 없었다.자신이 에이슬라라고 밝히는 순간, 진실은 정신이 나간 왕비의 변명이 된다.세 번째 숨.“조제표를 보여 주세요.”“내 질문부터 답해.”“그 종이가 가짜라면 질문도 틀렸습니다.”바이렌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왕실의가 조제표를 펼쳤다.필체는 에이슬라와 닮아 있었다.약재량을 적는 순서도, 숫자 일곱의 모양도 같았다.그러나 이름 끝의 획이 아래로 꺾여 있었다.에이슬라는 언제나 마지막 획을 위로 올렸다.“위조입니다.”검끝이 살을 더 눌렀다.“왕비가 평민 약제사의 서명을 어떻게 알지?”네 번째 숨.에이슬라는 대답 대신 은제 숟가락을 가리켰다.“손잡이 홈을 긁어 보세요.”왕실의가 가느다란 침으로 홈을 훑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흰 황혼을 저었다면 결정이 남아야 합니다. 저 숟가락은 약에 닿은 적이 없어요.”“그걸 병만 보고 알았나?”“약이 아니라 증거를 본 겁니다.”“네르시아는 약병과 술병도 구분하지 못했다.”다섯 번째 숨.에이슬라의 손끝이 멈췄다.그는 독살범을 찾는 것만이 아니었다.눈앞에 선 여자가 정말 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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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거울 속 타인
“네 얼굴이 누구 것인지 거울에게 물어.”바이렌이 에이슬라를 방 안으로 밀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정면 거울 속 왕비가 웃었다.에이슬라는 웃지 않았다.검은 수의를 입은 수십 명의 네르시아가 벽마다 서 있었다.대부분은 놀란 얼굴로 에이슬라를 따라 보고 있었다.정면의 얼굴만 입꼬리를 올린 채였다.“지금 웃었습니까?”문밖에서 바이렌이 답했다.“네르시아는 이 방에서 혼잣말을 자주 했지.”“제가 아니라 거울에게 물었습니다.”잠금쇠가 하나 닫혔다.“거울이 답하면 이름부터 물어.”두 번째 잠금쇠.“다음에 문을 열 때도 네가 누군지 모르면, 두 심장을 모두 확인하겠다.”세 번째 잠금쇠가 잠겼다.발소리가 멀어졌다.에이슬라는 정면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반사된 왕비의 입은 다시 다물려 있었다. 웃음도 사라졌다.착각일 수 있었다.흰 황혼은 치사량보다 적게 흡수되면 기억과 감각을 흔든다.지금 보는 것이 독에 의한 환각일 가능성부터 배제해야 했다.에이슬라는 오른손을 들었다.거울 속 오른손이 올라갔다.왼손을 들었다.수십 개의 왼손이 따라왔다.손을 내리자 정면 거울의 손만 허공에 남았다.에이슬라는 숨을 멈췄다.한 박자 뒤에야 반사된 손이 내려갔다.“늦었어.”이번에는 소리가 났다.아주 작았다. 유리 안쪽에서 입술이 맞부딪히는 소리였다.에이슬라는 거울에 다가갔다.“누가 늦었다는 겁니까?”모든 반사가 같은 표정을 지었다.정면 거울만 눈동자가 아래로 움직였다.목을 보라는 뜻이었다.에이슬라는 수의의 깃을 벌렸다.바이렌의 검이 누른 자국 아래로 검은 선이 번지고 있었다.단순한 멍이 아니었다.선은 목 오른쪽에서 시작해 쇄골을 감고, 오른쪽 갈비뼈 아래로 내려갔다.두 번째 박동이 있는 자리였다.한 번.검은 선이 수축했다.두 번.피부 아래에서 가지 하나가 뻗어 왼쪽 심장을 향했다.에이슬라는 손가락으로 선을 눌렀다. 독맥은 손끝을 피하듯 옆으로 움직였다.“흰 황혼이 아직 남아 있어.”거울 속 왕비가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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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왕비를 무서워하는 방
“그 잔을 내려놓으십시오. 전에는 사람의 머리를 깨셨습니다.”에이슬라의 손이 멈췄다.거울방에서 나온 지 채 열 걸음도 되지 않았다.시녀가 건넨 물잔을 들었을 뿐인데 방 안의 세 사람이 동시에 머리를 감쌌다.가장 어린 시녀는 벽까지 물러나 무릎을 꿇었다.에이슬라는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작은 소리에도 시녀의 어깨가 들썩였다.“누구를 다치게 했죠?”시녀장 메브라가 접은 수건의 모서리를 맞췄다.허리의 열쇠 꾸러미가 짧게 흔들렸다.“산 사람부터 말씀드릴까요, 죽은 사람부터 말씀드릴까요?”“죽은 사람부터요.”메브라의 손이 멎었다.“리제입니다.”“어떻게 죽었습니까?”“비 오는 날 창문을 닫았습니다.”“그게 이유였다고요?”“전하께서 열라고 하셨으니까요.”방 안의 누구도 에이슬라를 보지 않았다.어린 시녀의 이마에는 잔에 맞아 찢어진 흔적이 남아 있었고,다른 시녀는 오른손 손가락 두 개를 펴지 못했다.메브라는 그 상처들을 하나씩 이름으로 불렀다.열일곱 명.다친 사람의 수였다.“리제는 제 친구였습니다.”에이슬라는 변명하지 않았다.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라고 말해도 이들의 상처가 사라지지 않는다.“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겠군요.”“기억도 없는 사과는 더 잔인합니다.”“그럼 기억하겠습니다.”“기억은 벌이 아닙니다.”메브라는 물잔 손잡이를 문 쪽으로 돌렸다.누가 건드렸는지 알아보기 위한 습관처럼 보였다.“국왕 폐하를 죽이려 한 것도 세 번이라고 들었습니다.”시녀들의 호흡이 끊겼다.메브라는 문부터 닫았다.“첫 번째는 독주였습니다. 폐하께서 잔을 바꾸지 않았다면 죽으셨습니다.”“독은?”“검은 백합이라고 들었습니다.”흰 황혼이 든 약병 바닥에도 검은 백합 꽃잎이 붙어 있었다.“두 번째.”“침실에서 단검을 휘두르셨습니다. 갑옷이 막았습니다.”왕비의 왼손이 바이렌의 소매 속 무기를 찾아낸 이유였다.이 몸은 그를 죽이는 동작을 기억했다.“세 번째는요?”메브라는 수건을 다시 접었다.“모릅니다.”“살해 시도였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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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독 없는 차
“왕비가 먼저 마셔. 쓰러지면 이 방의 문은 아무도 열지 않는다.”바이렌이 들어오는 순간, 메브라는 피 묻은 초상화를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검은 천 끝이 미처 들어가지 못한 채 바닥에 남았다.에이슬라는 그 앞을 가로막으며 찻잔을 들었다.“독은 없습니다.”“그 말을 믿고 세 번 죽을 뻔했지.”바이렌은 의자에 앉지 않았다.탁자 위 두 잔과 주전자, 메브라의 소매에 묻은 검붉은 자국을 차례로 보았다.“차는 누가 준비했나?”“제가 물을 끓였습니다.”메브라가 답했다.“찻잎은 왕비 전하께서 직접 고르셨습니다.”바이렌의 시선이 에이슬라에게 돌아왔다.“네르시아가 찻잎을 골랐다고?”“죽었다 살아난 뒤 취향이 생겼습니다.”“약초 지식까지 함께?”첫 질문부터 목을 겨눴다.에이슬라는 대꾸 대신 주전자를 들었다.레몬밤 세 잎, 말린 감초 한 조각, 끓인 물. 독성을 감출 재료는 없었다.잔도 끓는 물로 씻었고, 은 숟가락에도 변색은 없었다.그녀는 두 잔에 차를 나눠 따랐다.“어느 잔을 드시겠습니까?”“네가 고른 잔.”“둘 다 같습니다.”“그 말을 증명하려면 하나를 골라야지.”바이렌이 두 잔의 위치를 바꿨다.왕비의 검은 문장이 새겨진 잔이 그의 앞에 놓였다.황금 문장의 잔은 에이슬라 앞으로 왔다.첫 번째 암살 때도 잔이 바뀌었다.메브라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네르시아는 독이 든 술을 올렸고, 바이렌은 잔을 바꿔 살아남았다.그는 지금 같은 장면을 다시 만들고 있었다.“제가 먼저 마시면 됩니까?”“내가 살아남을 잔을 네가 정해.”어느 쪽을 고르든 함정이었다.안전한 잔을 정확히 고르면 독을 구별한 왕비가 된다. 위험한 잔을 내밀면 살해 의도가 된다.에이슬라는 두 잔을 모두 자기 앞으로 끌어왔다.“같은 주전자에서 나왔으니 아무거나 마시겠습니다.”바이렌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그가 황금 문장의 잔을 집어 들었다. 엄지가 인장 반지를 한 번 돌렸다.딸깍.너무 작은 소리였다.에이슬라는 반지 옆면이 잠깐 벌어졌다 닫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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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해독제의 맛
“그 병을 먹이면 제가 아니라 폐하가 저를 죽이는 겁니다.”에이슬라가 왕실의의 손을 쳐냈다.붉은 약병이 바닥을 굴렀다.근위병의 검이 목 앞에 멈췄지만, 그녀는 병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혀끝은 이미 굳었고 오른손 약지는 접히지 않았다.차를 삼킨 뒤 마흔두 번째 박동이었다.바이렌이 물었다.“독을 알아챘나?”“검은 백합 씨껍질입니다.”“언제?”“폐하가 반지를 돌렸을 때는 못 봤습니다. 삼킨 뒤 알았어요.”그의 인장 반지 옆면에는 가느다란 틈이 있었다.잔을 바꿀 때 그곳에서 가루가 떨어졌다.“해독제는 언제 먹었지?”“아직 안 먹었습니다.”바이렌의 손이 에이슬라의 손목을 잡았다.“그런데 왜 쓰러지지 않지?”“치사량은 아닙니다. 대신 순서를 틀리면 죽어요.”왕실의가 바닥의 붉은 병을 주웠다.“심장부터 살려야 합니다. 당장 드셔야 합니다.”“그게 독을 퍼뜨립니다.”“왕실 처방입니다.”“틀린 처방이에요.”방 안이 잠잠해졌다.에이슬라는 엄지로 검지 마디를 세 번 문질렀다.손끝의 감각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검은 백합은 심장보다 식도와 말초 신경부터 굳힙니다.심박을 먼저 올리면 독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요.”바이렌이 붉은 병을 집었다.“왕실의가 틀리고 네가 옳다?”“제가 틀리면 곧 죽습니다.”“몇 번 남았지?”에이슬라는 맥을 셌다.“쉰여덟 번.”바이렌이 탁자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안에는 검은 가루, 소금물, 붉은 뿌리즙이 놓여 있었다.필요한 재료가 이미 정확한 순서로 준비돼 있었다.시험이었다.독을 넣은 순간부터 그녀가 어떻게 살아남는지 보려 했다.“순서를 말해.”“먼저 숯가루를 물에 풀어 절반만 삼킵니다.”“왜 절반이지?”“전부 마시면 다음 약을 흡수하지 못합니다.”바이렌이 검은 가루를 물에 풀었다.에이슬라는 잔을 받아 절반만 삼켰다.거친 가루가 혀와 입천장에 달라붙었다.“다음.”“소금물로 입과 목을 씻습니다. 삼키면 안 됩니다.”왕실의가 반박했다.“그 처방은 기록에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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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아무것도 모르는 왕비
“기억을 잃었다면, 내 목을 베지 마.”바이렌이 단검을 던졌다.에이슬라는 피할 생각이었다.그러나 왕비의 왼손이 먼저 손잡이를 낚아챘다.칼날이 뒤집혔다. 엄지는 손잡이 끝을 눌렀고,팔꿈치는 몸 가까이 붙었다. 왼발은 반 걸음 물러나 도망로를 막았다.검을 처음 쥔 사람의 자세가 아니었다.바이렌의 뒤에 선 근위병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아무도 움직이지 마라.”그의 명령은 에이슬라가 아니라 근위병들에게 향했다.“폐하가 먼저 물러나세요.”“왜?”“이 손이 다음에 어디를 찌를지 저도 모릅니다.”“그걸 보려고 준 거다.”바이렌이 한 걸음 다가왔다.왕비의 몸이 반응했다.단검이 그의 목으로 솟구쳤다.에이슬라는 오른손으로 왼쪽 손목을 후려쳤다.검끝이 턱 아래를 스치고 지나가며 피부를 얇게 갈랐다.피가 맺혔다.바이렌은 손등으로 닦지 않았다.“목을 노렸군.”“제가 아닙니다.”“네 손에 든 검이다.”“손이 제 말을 듣지 않아요.”“그럼 누구 말을 듣지?”오른쪽 갈비뼈 아래에서 두 번째 박동이 울렸다.한 번.검은 독맥이 쇄골을 따라 꿈틀거렸다.거울 속 네르시아가 남긴 경고가 떠올랐다.도망쳐.하지만 이 방에서 도망치려는 것은 에이슬라뿐이었다.왕비의 몸은 바이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갔다.“검을 빼앗으세요.”“직접 놓아.”“놓을 수 없습니다.”“기억은 없다면서 살해 습관은 남았군.”바이렌이 빈손을 내밀었다.칼을 달라는 뜻이 아니었다.덤비라는 도발이었다.에이슬라는 뒤로 물러나려 했다. 왼발은 움직이지 않았다.단검 끝이 바이렌의 목에서 겨드랑이로 내려갔다.갑옷 이음새가 벌어지는 자리.폐까지 가장 짧게 닿는 각도.에이슬라는 알지 못했다.몸은 알고 있었다.“폐하, 갑옷을 입으세요.”“네르시아는 갑옷을 입으면 다른 곳을 찔렀다.”바이렌이 겉옷을 벗어 의자에 던졌다.흰 셔츠 아래로 오래된 흉터 세 개가 드러났다.왼쪽 가슴, 오른쪽 옆구리, 쇄골 아래.왕비의 손이 차례로 그 자리를 짚었다.처음 보는 상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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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악녀의 기록
“네 손은 내 심장 앞에서 멈췄지만, 이 기록 속 손은 사람을 죽였다.”바이렌이 검은 문서함을 에이슬라 앞에 떨어뜨렸다.단검은 이미 바닥에 놓여 있었다.그런데도 왼손은 여전히 무언가를 찌르려는 모양으로 굳어 있었다.바이렌의 셔츠에는 칼끝이 남긴 피 한 방울이 번지고 있었다.“흑요안이 십 년 동안 모은 네르시아 아벨룬의 죄다.”문서함이 열렸다.시녀 폭행.협박.실종.국왕 암살 시도.종이마다 왕비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증언자가 사라진 사건도, 시체가 없던 사건도 결론은 같았다.왕비의 소행으로 종결.“읽어.”“제가 하지 않은 일입니다.”“그 몸이 했지.”“그 몸과 제가 같다는 증거는요?”“방금 내 심장을 찌르려 한 손이면 충분하다.”에이슬라는 반박하지 못했다.바이렌이 피 묻은 손가락으로 첫 장을 밀었다.“죄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네르시아가 대답하겠지.”“대답하지 않으면요?”“그때는 네가 대신 책임져.”에이슬라가 종이를 집으려는 순간 왼손이 먼저 움직였다.문서 더미를 헤집더니 아래에서 일곱 번째 기록을 뽑았다.첫 번째 희생 사건.오른쪽 갈비뼈 아래에서 두 번째 박동이 세게 울렸다.바이렌이 손을 내려다봤다.“모르는 문서를 정확히 찾았군.”“제가 고른 게 아닙니다.”“그 말로 죄까지 나눌 생각인가?”에이슬라는 기록을 펼쳤다.732년 4월 18일, 제삼 종 직후.북쪽 회랑에서 왕비와 다투던 시종이 실종됨.왕비가 살해를 자백함.시체 미발견.피해자의 이름은 먹으로 지워져 있었다.“왜 이름을 없앴죠?”흑요안 관리가 빈 봉투를 내놓았다.“왕비 전하의 요구였습니다.”“요구서가 이 안에 있었습니까?”“자백문과 함께 보관됐습니다.”“지금은 비었고요.”“왕비 전하가 숨진 다음 날 분실됐습니다.”바이렌이 관리에게 시선을 돌렸다.“왜 보고하지 않았지?”“봉투가 봉인된 상태라 내용물까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에이슬라는 봉투를 들었다.겉면에는 네르시아의 서명이 있었지만 봉랍은 한 번 녹였다 다시 굳힌 흔적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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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목욕실의 칼
“첫 번째 시체를 찾았으면, 다음은 왕비 차례입니다.”시녀가 목욕실 문을 잠갔다.에이슬라는 욕조 안에서 고개만 돌렸다.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흙탕물이 흘렀다.공동묘지에서 돌아온 뒤 손톱 밑의 흙조차 다 씻어 내지 못한 상태였다.시녀의 손에는 수건 대신 칼이 들려 있었다.“메브라는 어디 있죠?”“왕비 전하께서 혼자 씻고 싶다고 하셨습니다.”“나는 그런 명령을 하지 않았어요.”“알고 있습니다.”칼이 날아왔다.에이슬라는 몸을 숙이려 했다.그보다 먼저 왼손이 욕조 가장자리를 밀었다.몸이 물속으로 미끄러졌고 칼날은 귀 옆을 지나 벽에 박혔다.시녀가 곧바로 두 번째 칼을 뽑았다.“역시 그 몸은 기억하는군.”에이슬라는 물속에서 은제 비누 접시를 쥐었다.“누가 보냈습니까?”“죽고 나서 물으십시오.”시녀가 욕조 안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왕비의 몸이 다시 먼저 움직였다.왼손이 칼날의 옆면을 비누 접시로 쳐 냈다.오른손은 상대의 손목을 잡아 물 안으로 끌어당겼다.시녀의 상체가 욕조 위로 기울었다.에이슬라는 밀쳐 내고 도망치려 했다.그러나 왼손은 놓지 않았다.엄지가 손목 안쪽의 힘줄을 눌렀다.칼을 쥔 손가락이 풀렸다.이어 팔꿈치를 꺾고 목을 욕조 가장자리에 찍으려 했다.“멈춰.”자기 손에 하는 명령이었다.왼손은 듣지 않았다.시녀가 비어 있는 손으로 에이슬라의 머리채를 잡았다.얼굴이 물속으로 처박혔다.숨이 막혔다.에이슬라는 팔을 휘저었지만 왕비의 몸은 허둥대지 않았다.물속에서 상대의 무릎 뒤를 걷어차고, 균형이 무너진 순간 손목을 더 깊게 비틀었다.칼이 떨어졌다.얼른 그것을 낚아챘다.에이슬라가 물 위로 올라왔을 때 칼끝은 이미 시녀의 목 아래에 닿아 있었다.찌르면 경동맥이 끊긴다.“죽이지 마.”손목이 앞으로 밀렸다.에이슬라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붙잡았다.시녀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그 손과 싸우고 있군.”“입 다물어요.”“주인을 몰아내고도 몸은 빼앗지 못했나?”에이슬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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