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당신이 사랑한 왕비는 내가 아니다 : Chapter 21 - Chapter 30

42 Chapters

제21화. 내 죽음을 숨기지 마요

“폐하가 먼저 선을 넘었습니다.”에이슬라는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봤다.바이렌의 팔은 밤새 검 위를 건너와 있었고, 그녀의 손끝은 검자루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내 팔이 선을 넘었다.”“제 손은 검을 잡으려 했고요.”“잡지 않았다.”“폐하께서 먼저 막으셨으니까요.”바이렌이 손을 놓자 손목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에이슬라가 소매를 내리려는 순간, 목덜미 안쪽이 바늘로 꿰매지는 듯 당겼다.손끝으로 짚자 피부 아래의 검은 줄이 한 번 꿈틀거리며 쇄골 쪽으로 내려왔다.바이렌이 침대 곁으로 다가섰다.“어제는 거기까지 없었다.”“보셨습니까?”“네가 잠든 뒤 세 번.”에이슬라는 거울을 끌어당겨 목을 비췄다.검은 독맥은 턱 아래에서 시작해 심장을 향해 길을 내고 있었다.어젯밤보다 손가락 한 마디는 길어져 있었다.“타론.”복도 끝의 발소리가 곧장 멎었다.“벨시안을 데려와.”에이슬라가 바이렌의 소매를 붙잡았다.“그 사람은 왕비가 죽었다고 판정했습니다.”“그래서 부른다.”“오진인지 거짓말인지 확인하려고요?”“둘 다.”벨시안은 해가 뜨기 전에 왕비궁으로 들어왔다.그는 침대와 소파 사이의 검, 소파 아래로 늘어진 담요를 차례로 보았지만 묻지 않았다.진료 가방에서 회색 잉크병과 자를 꺼내 탁자에 놓았다.사망 원인을 확정하지 못한 기록에만 쓰는 잉크였다.“목을 보여 주십시오.”“누구에게 올릴 기록입니까?”에이슬라의 질문에 벨시안의 펜촉이 멈췄다.“왕실 의료 규정에 따른 절차입니다.”“규정은 사람 이름이 아닙니다.”벨시안은 답하지 않고 검은 줄의 길이를 쟀다.한 번.다시 한 번.세 번째에는 자의 끝이 쇄골 아래로 미끄러졌다.“어젯밤보다 두 치 늘었습니다.”에이슬라가 자를 붙잡았다.“어젯밤에도 보셨군요.”벨시안의 손등이 굳었다.“기존 진단표와 비교한 겁니다.”“첫 기록은 언제 작성됐죠?”“석 달 전입니다.”“날짜를 물었습니다.”“답해.”벨시안은 접었던 자를 다시 폈다가 곧 내려놓았다.“왕비 전하께서 숨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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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화. 제가 웃으면 누가 죽죠

왕비가 웃자 후작이 해독제를 삼켰다.에이슬라는 아직 연회장 문턱도 완전히 넘지 못한 채였다.“왕비 전하의 쾌유를 감축드립니다.”후작은 축하를 입에 올리면서 소매 안의 작은 병을 비웠다.그 뒤에 선 귀족들도 잔보다 먼저 허리춤과 장갑 안쪽을 확인했다.오늘 모인 사람들은 부활한 왕비를 축하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네르시아가 정말 살아났는지, 살아났다면 누구를 먼저 죽일지 구경하러 왔다.에이슬라는 목까지 올라온 보석 깃을 손끝으로 눌렀다.그 아래에서는 검은 독맥이 한 달이라는 시한을 품고 심장을 향해 자라고 있었다.바이렌은 세 걸음 앞에서 멈춰 그녀를 돌아봤다.“돌아가도 된다.”근위병들이 열린 문에서 일제히 비켜섰다.도망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남을지 말지를 그녀에게 돌려준 것이었다.에이슬라는 문밖을 한 번 보고 바이렌의 곁으로 걸어갔다.“오늘은 제 선택으로 남겠습니다.”바이렌이 손을 내밀었다.에이슬라가 그 위에 손끝을 얹자 연회장 곳곳에서 숨이 엇갈렸다.후작의 빈 해독제 병이 바닥으로 굴러왔다.에이슬라는 몸을 굽혀 병을 주웠다.“유통기한이 지났습니다.”후작의 얼굴이 굳었다.“용서해 주십시오.”“왜요?”“전하 앞에서 해독제를 먹었습니다.”“살고 싶어서 먹은 것을 왜 사과하죠?”에이슬라가 병을 돌려주자 후작은 받지도 못하고 손을 떨었다.“제가 웃으면 독을 쓰는 습관이라도 있었습니까?”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침묵이 곧 네르시아의 과거였다.바이렌이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말했다.“그 질문은 위협으로 들렸을 거다.”“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데요.”“그게 더 무섭겠지.”에이슬라가 다시 웃을 뻔하다 입술을 다물었다.그 작은 움직임에도 앞줄의 귀족 둘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그때 은발의 귀부인이 무리에서 빠져나왔다.“전하께서는 지난겨울 제 동생의 잔에 무엇을 넣으셨는지 기억하십니까?”주변 귀족들이 일제히 길을 열었다.에이슬라는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네르시아의 기억을 빌려 무죄를 주장할 수도, 모른다는 말 뒤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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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거짓말이면 제 목을 치세요

깨진 술잔에서 번진 향보다 먼저 비명이 터졌다.“왕비가 폐하의 잔을 깼다!”타론이 검을 뽑아 에이슬라와 바이렌 사이를 가로막았다.근위병들이 출구를 막았고, 귀족들은 독에서 멀어지려다 서로의 옷자락을 밟았다.바이렌은 깨진 잔을 내려다보지 않았다.그의 시선은 에이슬라가 붙잡은 손목에 머물러 있었다.“손을 놓아라.”에이슬라는 그제야 손을 뗐다.“죄송합니다.”“잔을 깬 것인가, 나를 붙잡은 것인가.”“둘 다 아닙니다.”그녀는 바닥에 번진 술을 가리켰다.“더 빨리 막지 못한 것을 사과했습니다.”대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왕비 전하께서 축복의 잔을 모욕하셨습니다.”“잔보다 폐하의 목숨이 먼저입니다.”“독이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에이슬라는 치맛자락을 걷어 깨진 조각 앞에 무릎을 굽혔다.쓴 단내는 벌써 희미해지고 있었다.흰 황혼은 공기와 닿으면 향부터 사라졌다.증명할 시간이 길지 않았다.“은숟가락을 가져오세요.”시종 하나가 떨리는 손으로 식탁 위의 은숟가락을 건넸다.에이슬라는 숟가락 끝을 술웅덩이에 담갔다.연회장 안의 시선이 작은 은빛 조각에 매달렸다.한 번. 두 번.아무 변화도 없었다.은은 처음과 같은 빛을 유지했다.누군가 헛웃음을 흘렸다.“변하지 않았군.”“독이 없다는 뜻 아닙니까?”말은 번지는 불처럼 빠르게 퍼졌다.은발의 귀부인이 앞으로 나섰다.“전하께서는 조금 전에도 기억이 없다고 하셨습니다.”그녀는 깨진 잔과 에이슬라를 번갈아 봤다.“이제는 없는 독까지 보이십니까?”에이슬라는 숟가락을 꺼내 냄새를 맡았다.향은 거의 남지 않았다.그러나 혀뿌리에 올라오는 마비감은 틀릴 수 없었다.스승이 그녀에게 먹인 것과 같은 독이었다.“흰 황혼은 은에 반응하지 않습니다.”대신관의 웃음이 짧게 끊어졌다.“그런 독은 왕실 독물 목록에 없습니다.”“목록에 없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그럼 어디서 배웠습니까?”질문이 에이슬라의 본래 이름을 겨눴다.왕실 약제사 에이슬라 모렌만 알던 독이라고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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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화. 제 독을 삼키지 마요

“제 몸이 대답하게 해야죠.”에이슬라가 술에 젖은 손가락을 들어 올린 순간, 손톱 아래의 붉은빛이 사라졌다.손끝이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닌 듯 희게 식었다.바이렌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씻어.”“이미 늦었습니다.”“해독제는.”“성분을 확인하지 않고 먹으면 독보다 먼저 심장이 멎어요.”에이슬라는 시종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모래시계와 바늘을 가져오세요.”“왕비 전하께서 직접 시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대신관이 막아서자 에이슬라는 바닥의 은숟가락을 들어 보였다.“이게 대답하지 않았으니 제가 해야죠.”“통증을 참는 연기일 수도 있습니다.”에이슬라는 바늘을 받아 독이 묻지 않은 오른손 검지를 찔렀다.피가 솟자 손가락이 본능적으로 움찔했다.이어 독이 묻은 왼손을 찔렀다.바늘 끝이 살을 파고들었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첫 번째 증상은 접촉 부위의 감각 소실입니다.”시종장이 모래시계를 뒤집었다.“기록하세요. 독이 닿은 뒤 서른두 번의 박동이 지났습니다.”에이슬라는 술웅덩이 곁에 떨어진 은숟가락을 발끝으로 돌렸다.표면은 여전히 흠 없이 맑았다.그 깨끗함이 오히려 독이 사람을 속이는 방식처럼 보였다.“은은 변하지 않았는데 사람만 변했습니다.”은발의 귀부인이 앞으로 나왔다.“은에 반응하지 않는 독이 정말 존재합니까?”“흰 황혼은 은이 잡아내는 성분을 쓰지 않습니다.”“그 이름은 왕실 독물 목록에 없습니다.”“사람을 죽인 뒤 기록까지 지웠으니까요.”연회장 안의 소리가 한꺼번에 끊겼다.바이렌이 에이슬라를 돌아봤다.“누가 지웠지.”“그 이름까지 말하면 오늘 여기서 독보다 먼저 죽을 사람이 생깁니다.”에이슬라는 목을 가린 보석 깃을 손끝으로 눌렀다.검은 독맥이 심장을 향해 움직이는 듯 욱신거렸다.왼손의 창백한 빛은 벌써 두 번째 마디를 넘어가고 있었다.“두 번째 증상은 맥박의 간격이 흐트러지는 겁니다.”그녀가 손목을 짚었다.한 번, 빈자리. 뒤늦게 두 번이 겹쳤다.바이렌이 직접 그녀의 맥을 잡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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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화. 내 대신 죽지 마

바이렌의 혀에 독이 닿는 순간, 에이슬라는 다시 죽었다.오스테론이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입을 벌려.”죽던 날과 같은 명령이 귓속에서 되살아났다.흰 약액이 혀 위로 쏟아지고, 스승의 엄지가 삼키지 않으려는 혀뿌리를 눌렀다.“왜 저를 죽이세요?”“죽이는 게 아니다.”오스테론은 빈 병을 빛에 비췄다.“네가 사라진 뒤 무엇이 남는지 확인하는 거지.”기억 속 약제실이 무너졌다.에이슬라의 무릎이 꺾이자 바이렌이 깨진 잔 위로 쓰러지는 몸을 받아 냈다.“왕비.”그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목소리는 오스테론의 웃음에 묻혔다.에이슬라는 바이렌의 가슴을 밀었다.“토하게 하지 마세요.”“내가 아니라 네가 삼켰다.”“그래서 안 돼요.”흰 황혼은 억지로 게우게 하면 식도를 타고 두 번째 독성을 일으켰다.설명해야 했지만 혀가 입천장에 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물도, 우유도 주지 마세요.”시종장이 들고 오던 잔을 멈췄다.“그럼 무엇을 먹여야 하지?”“아무것도요.”바이렌의 팔이 그녀의 허리와 무릎 아래로 들어왔다.몸이 바닥에서 들리자 귀족들이 일제히 길을 비켰다.대신관만이 두 사람 앞을 막았다.“폐하, 왕비 전하께서는 스스로 독을 취했습니다.”“봤다.”“독의 존재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바이렌은 에이슬라의 희어진 손을 들어 대신관 앞에 보였다.손끝의 회색 반점은 손톱을 넘어 두 번째 마디까지 번져 있었다.“내 잔에 있던 것을 왕비가 대신 몸에 넣었다.”“그것이 연기라면요?”“연기라면 내 잔을 네가 마셔라.”바이렌은 멈추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왕비가 거짓말을 했는지는 나중에 판결한다.”그의 팔 안에서 에이슬라의 몸이 한 번 크게 떨렸다.“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건 지금 확인했다.”연회장 안에 남은 의심이 그 문장 하나에 갈라졌다.왕비가 잔을 깨뜨렸다.왕비가 독을 증명했다.왕비가 왕 대신 쓰러졌다.더는 누구도 세 문장을 서로 다른 사건으로 만들 수 없었다.“타론.”“명하십시오.”“깨진 잔과 은숟가락을 봉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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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화. 죽은 내 이름을 부르지 마요

“스승님.”에이슬라가 정신을 잃은 뒤에도 그 호칭은 방 안에 남았다.바이렌은 침대 곁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왕실의가 맥을 확인하려 손을 뻗자 그가 먼저 물었다.“무엇을 하려는 거지.”“독의 잔류량을 확인하겠습니다.”“어떻게.”“손끝의 피를 채취해야 합니다.”바이렌은 이불 위에 놓인 에이슬라의 손을 보았다.“깨어난 뒤 허락을 받아.”“치료가 늦어질 수 있습니다.”“환자가 금지한 처치를 서두르는 건 치료가 아니다.”왕실의들이 물러난 뒤 바이렌은 타론을 불렀다.“왕실 약제원에서 최근 죽은 사람을 찾아.”“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자를 찾으시는 겁니까?”“아니.”바이렌의 시선이 에이슬라의 얼굴에 머물렀다.“저 호칭을 마지막으로 남긴 사람을 찾는다.”한 시간 뒤, 검은 봉투가 왕비궁으로 들어왔다.지난 한 달간 사망한 왕실 약제사는 한 명뿐이었다.에이슬라 모렌.스물일곱 살.사인은 원인 불명의 심장 정지.사망 확인자는 대신관 오스테론.바이렌이 이름을 읽는 순간 침대 위의 손가락이 움직였다.“에이슬라 모렌.”감겨 있던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타론이 침대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들었군요.”“물러나.”“반응을 더 확인해야 합니다.”“깨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시험할 생각은 없다.”바이렌은 기록을 접지 않은 채 다음 장을 넘겼다.에이슬라는 죽기 전날 독물 저장고의 재고를 조사했다.그날 반출된 것은 빈 장부 한 권과 흰 유리병 세 개였다.장부는 돌아오지 않았고 유리병은 목록에서 삭제됐다.마지막 출입자는 에이슬라와 오스테론 두 사람뿐이었다.“방은 봉인됐나.”“사망 직후 오스테론이 직접 명령했습니다.”“유품은.”타론이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은제 약숟가락 하나.푸른 리본 한 묶음.마른 찻잎이 든 주머니.바이렌은 약숟가락을 들어 손잡이의 닳은 부분을 살폈다.오른손잡이가 오래 쓴 흔적이었다.그는 침대 위 에이슬라의 오른손을 바라봤다.약을 섞을 때마다 엄지와 검지가 닿는 자리.그곳에도 같은 굳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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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화. 죽은 나를 왜 훔쳤죠

죽은 에이슬라는 기록 속에서 하루 먼저 죽어 있었다.“왜 네가 죽은 여자의 이름으로 울지.”에이슬라는 사망 기록 위에 떨어진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번진 잉크 아래에서도 자신의 이름은 선명했다.“이 기록이 이상해서요.”“무엇이.”“날짜가 하루 빠릅니다.”바이렌이 기록을 다시 내려다봤다.“네가 그 여자의 죽은 날을 어떻게 알지.”대답할수록 정체에 가까워졌다.침묵할수록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질 터였다.에이슬라는 사망 기록을 접어 유품 상자에 넣었다.“시신을 확인하면 알 수 있습니다.”“나와 함께 가.”“안 됩니다.”“이유.”“폐하가 움직이면 누군가 먼저 시신을 치울 테니까요.”바이렌의 시선이 문까지 이어졌다가 그녀에게 돌아왔다.“이미 없다고 생각하는군.”“장례 기록도, 매장지도 없잖아요.”그는 길을 막지 않았다.대신 탁자 위의 작은 호각을 에이슬라 앞으로 밀었다.“문제가 생기면 한 번 불어.”“근위병이 오나요?”“내가 간다.”에이슬라는 호각을 챙겼다.바이렌이 허락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돌아올 방법이었다.“해 뜨기 전까지 돌아와.”“명령입니까?”“부탁이다.”그 한마디가 걸음을 더 무겁게 했다.왕비궁을 나온 뒤 메브라가 외투를 씌워 주었다.“폐하께서 정말 보내 주셨습니까?”“막지 않으셨어요.”“그게 더 무섭습니다.”“저도요.”두 사람은 지하 수로를 지나 왕궁 시체실로 향했다.새벽의 돌바닥에는 마른 진흙 자국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관을 옮길 때 쓰는 수레바퀴 자국이었다.그 흔적은 시체실에서 나와 왕비궁 방향으로 뻗다가 북쪽 통로 앞에서 지워졌다.시체실 문틈으로 종이 타는 냄새가 새어 나왔다.에이슬라는 호각 대신 비녀를 뽑았다.네르시아의 손이 잠금장치의 홈을 찾아 한 번에 빗장을 밀었다.문 안에서는 늙은 관리인이 화로에 장부를 던지고 있었다.“불에서 손 떼세요.”관리인이 돌아보는 순간 불붙은 종이가 손에서 떨어졌다.에이슬라는 치맛자락으로 불을 덮어 껐다.남은 글자는 이름 하나뿐이었다.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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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화. 누가 내 관을 비웠죠

“왕비 전하께서 살아 있는 약제사의 시신을 먼저 가져가라 명하셨습니다.”관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이슬라는 반쯤 탄 명령서를 움켜쥐었다.왕비궁 북쪽 계단.발급 시각은 자신이 죽기 세 시간 전이었다.네르시아는 에이슬라의 죽음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죽기 전부터 시신이 생길 자리를 알고 있었다.“메브라, 돌아가요.”“왕비궁으로요?”“제 시신이 먼저 돌아간 곳으로요.”두 사람은 지하 수로를 따라 왕비궁 북쪽 복도로 향했다.벽에는 촛대 하나 없었지만 바닥의 먼지는 일정한 폭으로 밀려 있었다.관을 실은 수레가 여러 번 오간 흔적이었다.에이슬라는 주머니 속 호각을 쥐었다.한 번만 불면 바이렌이 올 것이다.그러나 그가 움직이는 순간 왕을 감시하는 자들도 이곳을 알게 된다.그녀는 호각에서 손을 뗐다.“폐하께 말씀드리지 않아도 괜찮을까요?”“괜찮지 않아요.”에이슬라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그래도 제가 먼저 봐야 해요.”북쪽 계단은 벽으로 막혀 있었다.에이슬라가 명령서의 붉은 인장을 돌 홈에 눌렀다.벽 안에서 오래 잠든 장치가 깨어났다.돌문이 열리고 아래로 이어진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세 번째 계단을 밟으려는 순간, 에이슬라의 왼발이 저절로 옆으로 비켜났다.곧 발밑에서 칼날이 솟구쳤다.메브라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방금 알고 피하신 겁니까?”“아니요.”에이슬라는 자신의 발을 내려다봤다.“이 몸이 먼저 피했어요.”네르시아는 이 길을 여러 번 오갔다.함정을 만든 사람이거나, 그보다 오래 살아남은 사람이었다.계단 끝의 문에는 손잡이도 열쇠 구멍도 없었다.중앙에는 이름을 새겼다가 칼로 도려낸 자국이 남아 있었다.에이슬라가 손바닥을 대자 목의 검은 독맥이 세차게 뛰었다.문 안에서도 같은 간격으로 무언가 울렸다.한 번.한 번.마치 자신의 심장을 기다리는 박동 같았다.에이슬라는 시체실에서 찾은 푸른 실을 틈에 끼웠다.문이 안쪽으로 열렸다.말라붙은 검은 백합 냄새가 두 사람을 덮쳤다.지하실 중앙에는 이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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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화. 찾고 나면 날 죽일 건가요

호각 소리는 벽에 부딪혀 에이슬라에게 돌아왔다.검은 연기는 발목을 삼키고 무릎까지 차올랐다.메브라가 관 뚜껑을 두드렸다.“밖에서는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들으라고 만든 호각이 아니었어요.”에이슬라는 손바닥 안의 은제 호각을 뒤집었다.구멍 안쪽에 검은 백합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바이렌이 건넨 호각과 모양은 같았지만,이 지하실에서 소리를 삼키도록 미리 만들어진 가짜였다.누군가 왕비궁 안에서 바꿔치기했다.“메브라, 촛불을 꺼요.”“그러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연기는 불이 있는 곳으로 모이고 있어요.”불꽃이 꺼지자 관 틈에서 피어오르던 연기가 잠시 방향을 잃었다.에이슬라는 관 뚜껑 안쪽의 문장을 더듬었다.[ 내 죽음을 빌려가라. ]마지막 획만 다른 글자보다 깊었다.손톱을 걸어 당기자 얇은 판이 들리고, 그 아래 붉은 끈이 드러났다.네르시아의 왼손이 먼저 움직였다.끈을 세 번 감아 아래로 당겼다.벽이 벌어지며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날 틈이 열렸다.“이 몸은 출구도 알고 있었어요.”“그럼 우리를 가둔 사람도 알았겠군요.”에이슬라는 연기가 들어오는 틈을 돌아봤다.“살아 나갈 사람까지 정해 뒀을지도 모르죠.”두 사람은 몸을 숙여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뒤에서 관 뚜껑이 저절로 닫혔다.좁은 길 끝에는 쇠창살이 내려와 있었다.메브라가 열쇠를 바꿔 끼웠지만 자물쇠는 꿈쩍하지 않았다.그때 반대편에서 돌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렸다.횃불보다 먼저 피 묻은 손이 창살 사이로 들어왔다.바이렌이었다.“뒤로 물러나.”그가 검자루로 잠금판을 내리치자 창살이 비스듬히 들렸다.에이슬라가 몸을 빠져나오며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손바닥은 돌문을 억지로 열다 찢겨 있었다.“호각은 들리지 않았을 텐데요.”“네가 돌아오지 않았다.”“해 뜨기 전까지라고 하셨잖아요.”“해가 떴다.”바이렌은 그녀의 목부터 확인했다.검은 독맥이 보석 깃 아래로 한 마디 더 내려와 있었다.“안에 무엇이 있었지.”“제 관이요.”그의 시선이 멈췄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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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화. 내 몸을 돌려줘

“넌 누구로 살아남을 생각이지?”바이렌의 손끝이 빈 서명란에 머물렀다.에이슬라는 펜을 들었지만 어느 이름도 적지 못했다.네르시아 아벨룬을 쓰면 남의 삶을 훔치는 것 같았다.에이슬라 모렌을 쓰면 스스로 목을 내미는 셈이었다.“오늘은 비워 두겠습니다.”“대답을 미루는 건가?”“제가 고를 이름이 남아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해요.”바이렌은 서명란을 접어 감추지 않았다.“찾을 때까지 비워 둬.”에이슬라는 관에서 가져온 검은 백합을 협정서 옆에 펼쳤다.꽃잎에 맺힌 흰 결정은 심장 자리에서 떼어 낸 것만 두 겹으로 굳어 있었다.그녀는 자신의 사망 기록과 네르시아의 기록을 나란히 놓았다.실제 맥이 멎은 시각은 같았다.14일 새벽 두 시. 같은 독.같은 시각. 죽기 전에 준비된 관.왕비궁으로 옮겨진 약제사의 시신.“네르시아는 제 죽음을 기다린 게 아니에요.”“그럼.”“죽는 시각을 맞췄어요.”에이슬라는 백합 줄기를 갈랐다.속에서 머리카락보다 가는 푸른 실 두 가닥이 나왔다.한 매듭으로 묶인 실은 한쪽 끝만 불에 그슬려 있었다.오스테론이 금지된 공명 실험을 설명할 때 보여 준 형태였다.“한쪽이 끊어지면 남은 것을 다른 쪽으로 보내는 매듭입니다.”“무엇을 보낸 거지?”“기억인지, 숨인지, 영혼인지는 아직 모릅니다.”“그럼 네르시아가 널 이 몸으로 불렀다는 뜻인가?”에이슬라는 대답 대신 관 뚜껑의 문장을 베낀 종이를 거울 앞에 세웠다.[ 내 죽음을 빌려가라. ]‘빌려가라’의 마지막 획이 반사된 글씨 속에서 화살표로 이어졌다.화살표는 비밀 약제실의 마지막 선반을 가리켰다.‘왕비 자신에게’라고 적힌 병이 놓였던 자리였다.병은 사라졌지만 선반 바닥에는 둥근 얼룩이 남아 있었다.에이슬라가 얇은 판을 들어 올리자 마른 피와 유리 가루가 묻어 나왔다.그 아래에는 접힌 조제표가 숨겨져 있었다.흰 황혼. 모렌.두 번째 심장. 빈 몸.모두 네르시아의 필체였다.그러나 마지막 줄만 오스테론의 글씨였다.몸이 비면 들어온 자가 남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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