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Kabanata 91 - Kabanata 100

328 Kabanata

91화. 아무도

말끝이 입술 아래로 사라진 뒤, 마차는 궁문을 하나 더 지났다.바퀴가 돌턱을 넘을 때마다 온보요의 몸이 사내의 가슴으로 밀렸다. 진묵은 흔들림을 고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허리를 감은 팔만 깊이 했다. 사흘 묵은 말 냄새와 찬 바람, 마른 피 냄새가 먹빛 융복에 엉겨 있었다. 그 거친 냄새 사이로 익숙한 침향이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입술은 한 번 떨어졌다가, 숨 하나만큼 멀어졌다."왕야.""왜."갈라진 입술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다시 눌렀다. 물음은 했으나 답을 기다리는 입술은 아니었다. 온보요가 그의 옷깃을 쥐었다. 말 위에서 구겨진 깃은 뻣뻣했고, 그 아래 목의 맥은 뜨거웠다.사가에 닿았을 때에는 누가 먼저 마차에서 내렸는지 알 수 없었다. 진묵은 그녀를 안은 채 주칠 대문을 넘었다. 마당에 엎드린 하인들이 먹빛 장화와 그 아래 흔들리는 옥색 치맛자락을 보고 이마를 더 낮췄다.방문이 닫혔다.그가 풀지 못한 검은 끈을 온보요가 풀었다. 머리칼이 어깨 위로 무겁게 쏟아졌다. 먼지 묻은 몇 올이 손가락 사이에서 서걱거렸다. 그녀가 그 머리칼을 빗어 내리는 동안 사내는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 손끝부터 달아오르게 하는 눈이었다."먼저 씻으셔야······.""늦었다."옷고름이 손가락에 걸렸다. 한 번 당기자 매듭이 풀렸고, 두 번째에는 그녀의 등이 문에 닿았다. 쿵. 작은 소리 뒤로 숨이 겹쳤다."하아······."먼 길을 달려온 손인데도 서두르지 않았다. 턱선을 받치고, 귓불 아래를 지나, 목까지 여민 깃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옷감 너머의 맥이 손바닥을 두드렸다. 진묵의 입가가 아주 조금 기울었다.그 여유가 오래 묵은 가시를 건드렸다."왕부에는······."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말이 짧은 숨으로 끊겼다."침수 시중을 따로 드는 여인이 있었다지요."진묵이 멎었다.온보요는 제 손이 그의 어깨를 놓지 못한 것을 보았다. 풀어진 속고름 끝이 두 사람 사이에서 가늘게 떨렸다."없었다.""한둘쯤은 숨기셔도—""스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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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하나 더

세 번째 심지는 켜지지 않았으나, 두 번째 심지가 탄 냄새는 아침까지 남았다.온보요는 눈을 뜨자마자 입을 막았다. 등잔 기름의 매캐한 끝이 목 안을 긁었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진묵의 팔이 허리를 받쳤다. 밤새 흐트러진 이불이 어깨 아래로 미끄러졌고, 먹빛 중의 자락이 그녀의 무릎을 덮었다."등불을 치우라."문밖에 떨어진 목소리에 앵무가 대답했다. 곧 문이 열리고, 놋쟁반 위 등잔 둘이 나갔다. 방 안에 찬 공기가 들자 울렁임은 조금 가라앉았다.진묵은 묻지 않았다. 그녀의 등을 쓸던 손이 손목으로 내려왔다. 맥이 뛰는 자리에 두 손가락을 대고 오래 있었다. 전장에서 피가 얼마나 남았는지는 읽어도, 그 맥이 품은 이름까지 읽을 손은 아니었다."언제부터냐.""경성에 든 뒤부터 냄새가 조금······.""알고 있었군.""의심했을 뿐이옵니다."사내의 눈이 목까지 여민 그녀의 깃을 한 번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어젯밤 제 손으로 남긴 구김과 자국을 보는 눈이었다. 턱의 선이 단단해졌다."어젯밤으로 생긴 아이가 아니옵니다.""그건 안다."대답이 너무 빨라 온보요는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에서 등잔을 든 앵무가 기침을 삼켰다.황제의 금패가 다시 쓰였다. 열흘 뒤 오라던 늙은 어의는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 사가로 끌려왔다. 어제보다 허리가 더 굽어 보였다. 방 안에는 진묵과 온보요, 어의만 남았다. 문밖에는 일영의 그림자가 문짝 절반을 덮었다.흰 명주가 손목 위에 놓였다. 노인의 세 손가락이 가볍게 눌렀다가, 깊어졌다. 한쪽 손목, 다른 쪽 손목. 지난번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어의가 손을 거두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경하드리옵니다. 맥이 전보다 또렷하옵니다. 아직 초입이라 몸을 각별히 돌보셔야 하나, 회임이 맞사옵니다."방 안이 조용했다.진묵은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움직이지 않아, 어의가 잘못 말한 사람처럼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얼마나 되었나.""한 달을 조금 넘긴 듯하옵니다."그 밤이었다.온보요가 제 손으로 심지를 죽이고,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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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조심

한 사람 더 있다는 말은 그날 저녁, 침상 둘레에 이불을 세 겹이나 쌓아 놓았다.등불은 하나뿐이었다. 향로는 마당으로 쫓겨났고, 작은 상에는 매실물과 얇게 썬 배만 놓였다. 진묵은 침상 가장자리에 앉아 장계를 읽었다. 온보요와의 사이는 팔 하나가 족히 들어갈 만큼 벌어져 있었다.스무 해 동안 아무도 없었다던 사내가, 한 밤 만에 다시 스무 해를 참을 낯을 하고 있었다.온보요는 배 한 조각을 베어 물었다. 사각. 맑은 소리가 유난히 크게 났다. 진묵의 눈이 장계에서 배로, 배를 문 입술로 옮겨 왔다가 다시 글자로 돌아갔다.두 번째 조각은 더 천천히 먹었다.이번에는 붓이 멎었다."왜 그러십니까.""네가 알겠지.""신첩은 그저 배를 먹고 있사온데."온보요가 세 번째 조각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손목이 붙잡혔다. 끌려간 손이 사내의 무릎 위에 놓였다. 진묵은 장계를 덮고 그녀를 보았다. 느리고 무거운 눈길이 목까지 여민 흰 중의를 따라 내려왔다."어의가 조심하라 하였습니다.""조심한다 했지."허리를 감은 손이 그녀를 한 번에 옮겼다. 세 겹 이불이 구겨지고, 벌어져 있던 팔 하나의 거리가 사라졌다."놓는다 하진 않았다."등 뒤에 사내의 가슴이 닿았다. 중의 두 겹을 사이에 두고도 열이 곧장 스며들었다. 진묵은 그녀의 머리칼을 한쪽 어깨로 쓸어 넘겼다. 손가락이 귓바퀴 뒤를 지나 목덜미에 닿자, 배를 들고 있던 손이 흔들렸다."아······."아삭한 조각이 놋쟁반 위에 떨어졌다."배나 먹고 있었나.""왕야께서······ 놓쳤습니다.""본왕이 잡은 것은 따로 있지."낮은 목소리가 귓속에서 천천히 굴렀다. 잡힌 손목은 놓였으나 손은 도망가지 못했다. 사내의 손가락이 손등을 따라 올라와 소매 끝으로 들었다. 맥이 뛰는 자리를 엄지가 누르지 않고 빙글 돌았다. 아침에 어의가 짚었던 곳이었다.입술은 그보다 위에 닿았다. 관자놀이, 눈꺼풀, 달아오른 귀 끝. 아래로 갈 듯하다가 돌아오고, 돌아온 듯하다가 옷깃 안쪽의 가장자리만 스쳤다. 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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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대신

마르지 않은 봉랍은 다음 날 편전의 긴 상 위에서 완전히 굳었다.상 위에는 문서가 두 장 놓여 있었다. 하나는 노강이 선실에서 받아 둔 고변장의 부본, 다른 하나는 감찰관이 조정에 올린 장계였다. 첫 장의 출발 시각 칸은 비어 있었고, 둘째 장에는 묘시 삼 각이라 적혀 있었다.붓은 같았다. 먹빛은 달랐다.태후는 주렴 뒤에 앉아 있었다. 붉은 비단실로 엮은 구슬이 숨을 쉴 때마다 아주 작게 부딪혔다. 허 승상과 허 도위는 상 왼편, 진묵과 온보요는 오른편에 섰다. 황제는 두 문서를 번갈아 보았다."삭왕의 부관이 왕을 사칭하여 황명의 배를 속였다는 고변입니다."허 승상이 입을 열었다. 수염 끝까지 가지런한 목소리였다."황명을 받은 것은 닷새 뒤입니다. 그 전에는 삭왕의 사선이었지요."온보요의 말에 허 도위가 눈을 들었다."왕비께서는 조정의 문답에 끼실 자리가 아닙니다."진묵의 손이 그녀의 의자 등받이에 놓였다. 앉으라는 말은 없었다. 온보요가 앉자 손은 그대로 남았다. 편전에서 가장 높은 자가 누구인지 잠깐 흐려지는 동작이었다."내 왕비가 끼지 못할 자리는 본왕도 앉지 않는다."황제가 손가락으로 상을 두드렸다."계속하라."온보요가 빈 시각 칸을 가리켰다."감찰관은 삭왕이 언제 봉지를 떠났는지 몰랐습니다. 모르면서 죄목을 먼저 적었고, 배를 묶은 뒤 시각을 채웠사옵니다.""그렇다 해도 부관이 전하의 행세를 한 죄는 남습니다."허 승상이 둘째 장을 밀었다.진묵이 받지 않았다."내가 시켰다."편전의 소리가 한꺼번에 죽었다."봄 조운을 노리는 자가 있어 빈 선실에 그림자를 하나 세웠지. 노강은 군령을 받든 것이다.""신하에게 용안을 흉내 내게 하는 군령이 어디 있습니까.""본 적도 없는 얼굴을 누가 흉내 냈다는 거냐. 발 두 겹을 치고 밥 두 술 뜬 것이 역모면, 경성의 굶는 자들은 모두 삭왕이겠군."황제의 입가가 움직였다. 주렴 안쪽에서는 구슬 하나가 더 세게 부딪혔다.허 도위가 무릎을 꿇었다."곡선 서른 척에는 북강 군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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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화. 경사

새 흰 명주는 편전 한가운데 놓인 작은 탁자 위에 펼쳐졌다.늙은 어의는 들어오자마자 황제에게 먼저 부복했다. 전날 진묵이 금패와 함께 일러 둔 순서였다. 태후의 눈이 그 한 번의 절을 오래 보았다.온보요가 손을 내밀었다. 소매를 걷는 손은 고르지 못했다. 진묵이 곁에 서 있었다. 닿지 않았는데도 먹빛 그림자가 의자와 그녀를 함께 덮었다.명주 위로 손가락 셋이 내려앉았다.편전 밖에서는 처마 끝 풍경이 울렸다. 맑은 소리가 한 번, 두 번. 어의의 손끝이 맥을 따라 움직일 때마다 허 승상의 염주도 한 알씩 넘어갔다. 태후는 웃고 있었고, 황제는 웃지 않았다."고하라."황제의 말에 어의가 손을 거두었다."삭왕비마마께서 회임하셨사옵니다. 한 달을 조금 넘긴 듯하오며, 놀란 일이 있고 먼 길을 오셨으니 안정을 취하셔야 하옵니다."태후가 가장 먼저 웃었다."경사로구나. 삭왕가의 적통이니 왕실의 기쁨이 아니겠느냐."적통이라는 두 글자가 아이보다 먼저 족쇄를 찼다.진묵의 손이 온보요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세지도 가볍지도 않은 무게였다. 편전 안의 모든 눈이 그 손을 보았다."그리 경사라 하시니 폐하께 청이 있사옵니다."온보요가 일어나 무릎을 꿇었다."말하라.""신첩이 경성에서 자객의 칼을 받았사옵니다. 이제 삭왕의 후사까지 품었으니, 신첩과 태중의 아이를 해하는 자는 왕실의 혈맥을 해한 죄로 다스려 주시옵소서."허 도위의 눈이 잠깐 주렴으로 갔다. 태후가 먼저 경사라 불렀다. 이제 그 입으로 왕실의 아이가 아니라고 거둘 수 없었다.황제가 용상 팔걸이를 한 번 쥐었다 놓았다."그리한다. 삭왕비와 태중의 아이를 해하는 자는 황실을 범한 죄로 묻겠다. 왕비는 삭왕과 함께 사가에 머물며 어의의 돌봄을 받으라. 누구도 황명 없이 처소를 옮기지 못한다."진묵의 경성 억류가 두 사람의 울타리로 바뀌었다. 담의 높이는 같았으나, 문을 잠글 손이 하나 줄었다.태후의 웃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내가 너무 염려하여 아이 가진 이를 내전에 오래 두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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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화. 무향

빈 향갑과 경사를 품은 향갑은 해가 진 뒤에도 서안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모란 향은 벌써 방 밖으로 쫓겨났다. 진묵이 향가루를 비단째 싸서 마당 끝 우물가에 내놓았고, 창문을 모두 열었다. 찬 봄 공기가 방을 훑었다. 그래도 은판의 이음새에는 단내가 남아 있었다.온보요는 비녀 끝으로 새 향갑의 밑판을 열었다. 딸깍. 빈 공간이 드러났다. 자객이 떨어뜨린 것과 똑같이, 종이 한 장 숨길 깊이였다.소월백이 두 향갑을 등불 아래 돌려 보았다."여기."꽃받침 안쪽에 깨알만 한 끌자국이 있었다. 빈 향갑에는 마흔일곱, 새 향갑에는 마흔여덟. 은장이가 물건을 섞지 않으려 찍는 차례표였다."한 벌이군.""어디서 만든 것인지 아십니까.""경성에서 은판을 이만큼 얇게 겹치는 곳은 궁의 은장방뿐이야."진묵이 두 향갑 사이에 손을 내려놓았다. 소월백의 손이 먼저 물러났다."내일 간다.""왕야께서는 조사 중이십니다. 궁의 공방까지 드시면—""황제의 금패가 있지.""그 금패로 여인의 패물을 보러 가시게요?""내 여인을 죽이러 온 패물이다."말은 그것으로 끝났다.소월백이 돌아간 뒤, 창문에는 성긴 발이 내려왔다. 향 하나 피우지 않은 방은 낯설 만큼 맑았다. 남은 냄새는 매실물과 씻어 말린 무명, 온보요의 젖은 머리칼뿐이었다.진묵은 경대 앞에 앉은 그녀의 머리칼을 수건으로 눌러 말렸다. 전장에서는 사람의 목을 꺾었을 손이, 물기 밴 머리카락 몇 올을 끊을까 봐 더디게 움직였다. 수건이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온보요의 어깨가 가늘게 좁아졌다."왕야. 다 말랐사옵니다."손은 멎지 않았다."아직 젖었다.""어디가요."수건이 경대 위에 떨어졌다. 진묵이 의자째 그녀를 돌렸다. 느린 눈이 이마에서 입술로 내려왔다. 낮에 모란 향을 견디느라 몇 번 깨물었던 입술이었다."여기."엄지가 아랫입술을 쓸었다. 온보요가 숨을 들이쉬자 손가락이 열린 입술 안쪽의 온기를 잠깐 훔쳤다. 곧 입술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하아······."향 없는 입맞춤은 핑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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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화. 은장

차갑게 식은 향갑 둘은 이튿날 황제의 금패와 함께 궁 서편 문을 넘었다.은장방은 내전의 가장 낮은 담 아래 있었다. 망치 소리가 담을 넘지 않도록 땅을 파 내려 지은 공방이었다. 계단을 여섯 내려가자 숯불의 열과 녹은 붕사 냄새가 얼굴을 쳤다. 장인들은 금패를 보고 일제히 망치를 놓았다.가장 늙은 은장이가 두 향갑을 받았다. 왼손 엄지와 검지가 은가루에 오래 닳아 지문이 희미한 사내였다. 그는 꽃잎의 모서리를 만지고, 밑판을 열고, 끌자국을 등잔 가까이 들었다."소인이 만든 것이옵니다.""누가 시켰나."진묵의 물음에 늙은 손이 떨렸다."지난달에 마흔여덟 개를 만들었습니다. 도안은 궁에서 내려왔고, 새 은도 내탕에서 보내왔사옵니다."온보요가 향갑 안쪽을 가리켰다."밑판까지 도안에 있었습니까.""그렇사옵니다. 스무 해 전 쓰던 도안이라 쇠판에 녹이 많았습니다. 밑판의 깊이는 손톱 한 폭도 바꾸지 말라 적혀 있었지요."늙은 은장이는 벽장 아래에서 장부를 꺼냈다. 물건 이름과 수량, 은의 무게를 맞추고 내어 준 자의 패를 찍어 두는 책이었다. 손가락이 지난달 장을 찾는 동안 종이마다 검은 손때가 일었다."여기······."말이 끝나기 전에 망치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쨍그랑.공방 안쪽에서 불길이 솟았다. 숯불에 쏟아진 것이 물이 아니었다. 기름이 바닥 홈을 타고 퍼지며 푸른 불을 뿜었다. 장인들이 출구로 몰렸다. 계단 위 문이 닫히고, 빗장 거는 소리가 났다."엎드려."진묵의 먹빛 겉옷이 온보요의 머리와 어깨를 덮었다. 몸이 들려 그의 가슴에 붙었다. 다음 순간 은판을 두드리던 긴 상이 날아가 문짝을 쳤다. 쿵. 빗장은 버텼다.불은 장부를 먼저 먹었다. 마른 종이가 오그라들며 붉은 혀를 세웠다. 늙은 은장이가 장부로 손을 뻗자 진묵이 그의 뒷덜미를 잡아 끌었다."목숨부터.""저것이 없으면 증좌가—"온보요가 불붙은 장부 사이에서 은빛 하나를 보았다. 향갑의 매화 꽃잎을 찍는 쇠판이었다. 불은 종이를 먹어도 쇠까지 삼키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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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화. 불씨

살려서 잡으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잿빛 궁장은 두 번째 담을 넘었다.일영은 그 뒤를 밟았다. 기와 하나가 깨지고, 담 너머에서 짧은 비명이 났다. 잠시 뒤 잿빛 사내가 마당으로 굴러 들어왔다. 오른쪽 발목이 꺾인 채였다. 입 안으로 손을 넣으려 했으나 일영의 칼집이 먼저 턱을 쳤다. 검은 환약 하나가 돌바닥을 굴렀다.진묵의 장화가 환약을 밟아 부쉈다. 쓴 살구 냄새가 재 냄새 사이로 퍼졌다."죽는 것은 묻고 난 뒤다."사내는 입술을 깨물었다. 온보요는 타다 남은 공방 처마 아래 의자를 가져오게 했다. 앉는 순간 배 안쪽이 단단히 당겼다. 손이 저절로 배 위로 갔다가, 소매를 정리하는 척 무릎으로 내려왔다.진묵이 보았다.그는 아무 말 없이 제 겉옷을 벗어 의자 등과 그녀 사이에 접어 넣었다. 불에 그슬린 옷에서는 연기와 말린 가죽 냄새가 났다. 손등의 물집은 찬 공기 속에서 더 붉어졌다.늙은 은장이가 포박된 사내를 알아보았다."은장방의 물건을 궁 안으로 나르던 내관입니다. 지난달 향갑의 은도 저자가 가져왔습니다."온보요가 물었다."패는 누구의 것이었습니까."노인은 타 버린 공방과 사내의 허리춤을 번갈아 보았다. 일영이 허리띠 안쪽에서 검은 나무패 하나를 꺼냈다. 앞에는 편전의 구름무늬, 뒤에는 장(張)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황제의 그림자, 장 내관의 패였다."불을 놓으라 한 자는."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진묵이 무릎을 굽혔다. 불에 덴 손으로 사내의 턱을 잡았다. 물집이 터져 맑은 물이 손목으로 흘렀으나 낯은 변하지 않았다."대답 하나에 손가락 하나씩 아끼지."온보요가 그의 소매 끝을 잡았다."왕야의 손부터 아끼셔야지요."진묵의 눈이 그녀에게 왔다. 잡힌 소매를 내려다본 뒤 손을 놓았다. 사내의 숨이 그제야 터졌다."장 내관께서······ 장부에 이름을 남기지 말라 하셨습니다. 향갑이 누구 손에 갔는지 묻는 자가 오면, 공방을 닫으라고.""닫으라는 말이 불을 놓으라는 말이더냐.""오늘 새벽, 명이 바뀌었습니다.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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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화. 먹향

회색 비둘기가 붉은 지붕 사이로 사라진 뒤, 사가의 서안에는 빈 장부 한 권이 놓였다.겉은 불에 그을린 듯 먹물을 문질렀고, 안에는 은장방 물목을 베껴 쓴 세 장만 끼웠다. 네 번째 장부터는 희었다. 훔쳐 간 자가 등불 아래 펼치기 전에는 가짜인 줄 알 수 없었다.온보요가 마지막 글자를 쓸 때까지 진묵은 등 뒤에 서 있었다. 불에 덴 오른손에는 흰 무명이 감겨 있었다. 왼손은 의자 등받이에 놓여, 그녀의 어깨와 서안을 한꺼번에 가뒀다."남문까지는 소 공자가 듭니다. 은을 옮기던 상단 수레가 있어야—"등받이의 손가락이 한 번 접혔다."다른 자로.""궁의 눈이 얼굴을 압니다.""그래서 싫다."온보요가 붓을 놓고 돌아보았다. 진묵은 노기도 숨기지 않았다. 불길 속으로 들어갈 때와 같은 낯으로, 흰 옷 입은 사내가 장부를 드는 일을 싫어하고 있었다."판은 그분의 길을 빌려야 합니다.""길만 빌려. 사내까지 얹지 말고.""장부가 스스로 걸어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진묵이 의자를 돌렸다. 온보요의 무릎이 그의 다리 사이에 들어갔다. 먹빛 옷자락이 연청색 치맛단을 덮었다."네가 자꾸 그 사내의 쓸모를 말하면."왼손이 턱을 들었다. 무명 감은 오른손은 닿지 못하고 허공에서 한 번 굽었다."본왕은 다른 쓸모가 생각난다.""이를테면요.""네게서 가장 먼 곳에 처박는 것."터무니없는 말인데 목소리는 지극히 평평했다. 온보요의 입가가 움직였다. 웃음이 되기 전 입술이 눌렸다.입맞춤에서는 먹향이 났다. 방금까지 물고 있던 붓대와 따뜻한 찻물의 맛도 섞여 있었다. 진묵은 다친 오른손 대신 왼팔 하나로 그녀를 들어 제 무릎에 앉혔다.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서안 아래에서 길게 났다."왕야, 장부가······.""안 탄다. 불이 없으니.""구겨집니다.""펴면 되지."손이 등허리를 타고 올라와 목덜미를 받쳤다. 한쪽뿐인 손이 두 손보다 더 집요했다. 입술이 귓불 아래를 천천히 누르자 붓을 쥐었던 손가락이 먹빛 옷깃을 그러쥐었다."아······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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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진품

편전의 푸른 밀랍은 자정이 되기 전 남문 문서고의 자물쇠를 열었다.소월백의 수레가 먼저 들어갔다. 흰 옷 위에는 장사치의 검은 덧옷을 걸쳤고, 품에는 가짜 장부가 있었다. 문이 닫힌 뒤 지붕 위의 그림자 셋도 숨을 죽였다.진묵은 가장 낮은 처마에 엎드려 있었다. 조사 중인 왕이 밤마다 수도의 지붕을 밟는다는 것을 병부가 알면 장계가 열 장은 더 생길 터였다. 그는 그런 종이보다 문 안의 흰 사내가 더 거슬리는 낯이었다.온보요는 맞은편 찻집 이층에서 창호지 틈을 보고 있었다. 일영의 만류에도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미끼가 누구를 물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삼경 목탁이 멀어졌다.남문 쪽에서 가마 하나가 왔다. 푸른 천으로 네 귀를 가렸고, 앞장선 내관은 편전 구름무늬 패를 내밀었다. 문지기가 자물쇠를 열었다.내관이 문 안으로 들어간 순간 지붕의 먹빛이 떨어졌다.쿵.진묵의 장화가 문을 닫았다. 안에서 칼 뽑는 소리가 둘, 쓰러지는 소리가 하나 났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문이 열렸을 때 소월백은 가짜 장부를 든 채 서 있었고, 진묵의 손에는 푸른 밀랍을 품은 내관이 들려 있었다."장 내관의 사람입니다."소월백이 말했다."안다.""놓으시지요. 걸을 수는 있습니다.""내 손도 걸을 수 있지."진묵은 끝내 내관을 끌고 갔다.새벽 편전에는 등촉이 하나도 없었다. 황제는 창으로 드는 푸른 빛 속에 앉아 있었다. 상 위에는 빈 향갑, 매화 쇠판, 가짜 장부, 붙잡힌 내관의 구름무늬 패가 차례로 놓였다.장 내관은 황제 곁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놀란 낯은 아니었다."공방에 불을 놓은 것은 태후전의 붉은 실이었습니다."온보요가 말했다."그러나 은을 보내고, 장부를 없애라 처음 명한 것은 편전이옵니다. 어젯밤 가짜 장부를 거두러 온 자도 폐하의 사람이었고요."황제는 부정하지 않았다.진묵의 무명 감은 손이 검 손잡이에 얹혔다."말해."황제는 빈 향갑을 집었다. 엄지가 매화 다섯 잎을 천천히 쓸었다."짐이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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