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e Kapitel von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Kapitel 1 – Kapitel 10

20 Kapitel

1화. 사혼(賜婚)

교지는 서리보다 먼저 왔다.동트기 전, 온부(溫府)의 주칠 대문이 열리고 황명을 받든 내관의 행렬이 마당을 채웠다. 시비들이 떨리는 손으로 온보요에게 예복을 입혔다. 향안이 차려지고, 가문 전체가 마당에 엎드렸다. 늦가을 새벽의 돌바닥은 얼음장 같았다.내관의 목소리는 높고 가늘었다. 문장은 길었으나 뜻은 한 줄이었다.온가의 여식을 삭왕에게 시집보내라.엎드린 등들이 일제히 굳는 것을, 보요는 이마를 조아린 채로 느꼈다. 누군가 숨을 삼켰다. 큰오라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분노를 누르는 떨림이었다. 북강. 삭풍이 벼려지는 땅.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벤다는 전신의 왕부. 경성 사람들에게 그곳은 유배지보다 먼 곳이었다."성은이 망극하옵니다."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평생 조정에서 다듬어진 평온이었다. 그러나 보요는 알았다. 그 평온 아래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를.그녀는 배운 대로 절했다. 손끝의 각도, 숙이는 깊이, 일어서는 순서까지 흐트러짐 없이. 한 떨기 꽃잎처럼. 온가의 여식은 그렇게 존재해야 했으므로.내관이 물러가자 온부는 초상집이 되었다. 곳간에서는 혼수가 꾸려지는데 우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한 것이, 오히려 곡소리보다 무거웠다. 둘째 오라비가 사랑채에서 언성을 높이다 아버지의 한마디에 끊기는 소리가 담을 넘어왔다. 보요는 수틀 앞에 앉아 있었다. 바늘은 한 땀도 나아가지 않았다.해가 지고, 방어멈이 들어와 문을 닫았다. 늙은 유모는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치맛자락으로 눈가를 눌렀다."따라가겠습니다, 아가씨. 이 늙은 몸이라도 데려가셔야지요.""어멈이 없으면 나는 머리도 못 올리는걸."보요가 웃자 방어멈은 끝내 소리 죽여 울었다. 그녀는 유모의 굽은 등을 오래 쓸어 주었다. 그 손길만은, 배운 것이 아니었다.밤이 깊어서야 아버지가 건너왔다. 아버지는 오래 말이 없었다. 등잔 심지 타들어 가는 소리만 방을 채웠다."애비가," 마침내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못난 탓이다.""아버님.""황상께서는 삭왕을 묶을 끈이 필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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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왕부의 교지

북강의 바람은 소리부터 달랐다. 경성의 바람이 스치는 것이라면, 이곳의 바람은 베는 것이었다.왕부의 담은 성벽을 닮아 있었다. 꾸밈이라곤 문루의 현판 하나뿐, 처마 끝에 등롱 하나 달지 않은 집이었다. 잿빛 담장 위로 마른 눈가루가 낮게 날렸다.교지를 받든 내관의 행렬이 왕부 문루 앞에서 언 발을 구른 지 한 시진째였다. 삭왕이 사냥에서 돌아오지 않은 탓이었다.이윽고 돌아온 사냥 행렬은 단출했다. 선두의 흑마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말 위의 사내는 먹빛 갖옷 하나로 삭풍을 받아내고 있었다. 장식이라곤 없는 차림인데, 문루의 등불이 죄 그쪽으로 쏠리는 듯했다. 어깨에 내려앉은 서리가 녹지도 않은 채였다. 사내는 활집조차 열지 않은 채였고, 안장에는 토끼 한 마리 걸려 있지 않았다."또 빈손이시네."어린 시종이 소곤거리다 부관 노강의 눈짓에 입을 다물었다.진묵은 말에서 내려 곧장 내관 앞을 지나쳤다. 향안 앞에 무릎을 꿇는 둥 마는 둥 하는 그를 보며 내관의 이마에 식은땀이 배었다. 낭독이 시작되었다. 문장은 길고 화려했으나, 뜻은 한 줄이었다.온가의 여식을 삭왕의 비로 내리노라.낭독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묵이 손을 내밀었다. 내관이 머뭇거리다 교지를 넘겼다. 그는 선 채로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웃었다. 소리 없이, 이 사이로."검이 무서우면 칼집을 보내실 일이지. 비단 끈을 보내시는군.""와, 왕야, 그 말씀은······.""성은이 망극하다 적어 보내라."진묵이 손을 휘휘 저었다."물러가라. 춥다."내관의 행렬이 쫓기듯 문루를 빠져나간 뒤, 정당(正堂)에는 총관 상엄과 부관 노강만 남았다. 진묵은 교지를 탁자 위로 던졌다."경성에서 사람이 온다. 규방에서 곱게 자란, 한떨기 꽃잎 같은 아가씨겠지."상엄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왕야, 황상께서 심으신 눈입니다. 왕부의 안채에 세작을 들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세작이니 들이는 거다."진묵은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 큰 몸이 앉자 의자가 삐걱, 앓는 소리를 냈다."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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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너울

혼례는 붉었다.문루에서 정당까지 붉은 비단이 깔리고, 처마마다 붉은 등이 걸렸다. 눈발 얹힌 잿빛 기와 위로 홍등이 줄지어 흔들렸고, 그 빛이 쌓인 눈에 비쳐 마당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붉은 비단이 곳간에서 풀려 나갈 때마다 총관 상엄의 미간은 좁아졌고, 하례객들은 술잔을 든 채 서로 눈치만 살폈다. 웃자니 왕야의 낯이 무섭고, 웃지 않자니 혼례가 무색했다. 진묵은 그 붉은 것들 한가운데 서서, 오늘 하루치의 귀찮음을 재고 있었다. 절이 몇 번, 잔이 몇 순배, 하례객의 낯간지러운 소리가 몇 마디. 전장의 하루보다 길 것이 분명했다. 혼례의 홍포는 갑주보다 무거웠고, 관은 투구보다 이마를 눌렀다.신부는 보름 길을 왔다고 했다. 붉은 너울 아래로 보이는 것은 흐트러짐 없는 어깨선과, 배운 대로 움직이는 손끝뿐이었다. 절하는 각도며 일어서는 순서까지 자로 잰 듯했다.꽃잎이군.진묵은 새기듯 생각하고, 남은 절차를 견뎠다.밤이 되어서야 붉은 것들이 물러갔다. 신방에는 화촉 두 자루가 타고 있었다. 창에는 붉은 깁이 발려 바깥의 눈빛을 걸렀고, 화로의 숯이 이따금 낮게 튀었다. 침상에는 원앙을 수놓은 금침이 깔려 있었다. 북강 왕부에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한 고운 물건들이었다. 그 침상 모서리에 신부가 앉아 있었다. 여전히 너울 아래였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촛불 타는 소리만 남았다.진묵은 다가섰다. 그의 그림자가 먼저 그녀에게 닿았다. 너울 아래 앉은 사람 하나쯤은 통째로 덮고도 남는 그림자였다.상 위에 놓인 저울대를 집어 들었다. 격식이라는 것이었다. 너울 자락에 저울대 끝을 걸고, 걷어 올렸다.붉은 것이 흘러내렸다.그리고 진묵은, 저울대를 든 채로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한떨기 꽃잎이라 들었다.미치게 아름다운 꽃봉오리라고는, 아무도 고하지 않았다.화촉 불빛이 여인의 얼굴 위에서 일렁였다. 갓 벌어지려는 꽃망울처럼 싱그러운 낯이 다소곳이 숙여져 있었다. 붉은 대수삼 위로 금실 원앙이 날개를 접고 있었고, 깃 위로 드러난 목덜미는 눈보다 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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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계산 밖

북강은 소문보다 가난하지 않았다.신부 행렬의 붉은 가마 안에서, 온보요는 주렴을 반 치 걷고 성 안을 읽었다. 성벽의 보수 흔적은 최근 것이었고, 저자의 곡물전 앞에는 줄이 짧았다. 군마는 살이 올랐는데 백성의 낯빛이 상하지 않았다. 저자 어귀에서 마른 약초와 무두질한 가죽 냄새가 주렴 틈으로 스며들었고, 성벽 쪽에서 대장간 망치 소리가 고르게 울렸다. 겁에 질린 성읍의 소리가 아니었다. 폭군이 다스리는 땅의 얼굴이 아니었다.소문은 부풀려졌거나, 만들어졌거나.그녀는 주렴을 내렸다. 어느 쪽이든 쓸모 있는 기별이었다.혼례는 배운 대로 치렀다. 절의 각도, 잔을 받는 손, 너울 아래의 호흡까지. 스무 해를 연습한 춤이었다. 다만 맞절 상대의 그림자가 컸다. 너울 너머로도 짐작되는 크기였다.신방에 앉아 그녀는 무릎 위에 손을 포갰다. 너울 안쪽은 제 숨으로 데워져 있었다. 초 심지 타는 냄새에 낯선 향이 섞여 들었다. 송진 냄새라고, 그녀는 짚었다. 북쪽의 나무가 타는 냄새였다.사흘 안에 왕부의 사람 배치를 파악할 것. 이레 안에 안채의 살림 문서를 손에 넣을 것. 보름 안에 경성으로 보낼 첫 서신의 내용을—문이 열렸다.발소리가 다가왔다. 그림자가 먼저 무릎 위에 얹혔다. 저울대가 너울 자락에 걸리고, 붉은 것이 흘러내렸다.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배운 떨림을 속눈썹에 실었다. 겁먹은 사슴. 물기 어린 눈. 사내들이 좋아하는 것들.침묵이 길었다.예법에 없는 길이였다.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붉은 혼례복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붉은 것이 어울릴 리 없는 사내에게, 지독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넓은 어깨에서 옷자락이 무겁게 떨어졌고, 금실 깃 위로 드러난 목에는 오래된 흉 하나가 화촉 불빛에 얕게 패어 있었다.끝까지 꺾어야 닿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먹으로 그은 듯 짙은 눈썹 아래 눈매는 깊고 서늘했다. 콧날은 칼등처럼 곧았고, 다문 입매에는 온기가 없었다. 깎아낸 것이 아니라 벼려낸 낯이었다. 삭풍이 이십 년을 두고 사람을 다듬으면,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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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총애

"신첩이 무엇을 적어 보내면 되겠습니까?"밤은 깊어 있었다. 화촉은 반 넘게 짧아졌고, 붉은 초농이 촛대 아래 겹겹이 흘러 굳어 있었다. 화로의 숯이 낮게 튀는 소리, 창밖에서 문풍지를 훑는 바람 소리. 그 사이에 여인의 물음이 놓였다.진묵은 잔을 든 채 여인을 내려다보았다.울거나. 빌거나. 잡아떼거나. 세작이 정체를 들킨 밤에 하는 짓은 셋 중 하나였다. 여인은 셋 중 무엇도 하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파르르 떨리던 속눈썹은 거짓말처럼 고요했고, 물기가 걷힌 눈은 저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혼례 성장을 벗지 못한 채였다. 붉은 대수삼의 깃이 화촉 빛 아래 짙게 가라앉았고, 분을 반쯤 지운 낯은 그런데도 환했다. 겁박하듯 붉은 것들 가운데서, 그 낯만이 제 빛으로 희었다."간도 크군.""담이 작으면 북강까지 오지 못합니다."진묵의 입가가 비틀렸다. 웃음 비슷한 것이었다. 저 스스로도 오랜만에 듣는 소리였다. 문밖을 지키던 야번 군사가 들었다면 제 귀를 의심했을 소리이기도 했다.그는 잔을 비우고 침상 기둥에 어깨를 기댔다. 북강의 침상은 경성 법도로 짠 물건이 아니었다. 기둥은 아름드리였고, 금침 아래에는 짐승 가죽이 깔려 있었다. 사내 하나가 갑주째 쓰러져 자도 남을 너비였다. 화촉 불빛 아래 여인의 낯이 지나치게 환했다. 눈을 두기 싫은데 자꾸 두게 되는 것이, 거슬렸다."적어 보내라.""하명하시지요.""삭왕이 신부에게 푹 빠져, 첫날밤부터 눈을 떼지 못하더라고."여인이 처음으로 눈을 깜빡였다. 배운 동작이 아니라, 새어 나온 동작이었다.지어낸 기별 치고는 지어낸 데가 없다는 것을, 말한 자만 알고 있었다."······왕야.""총애받는 세작이라야 오래 쓰인다." 진묵은 짧게 말했다. "황상은 버린 패를 거두지 않아."여인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기울이더니, 웃었다. 배운 웃음인지 아닌지, 이번에는 진묵도 가려낼 수 없었다. 그것도 거슬렸다."과연. 명심하겠습니다."알아듣는 것이 빨랐다. 지나치게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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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찬물

동트기 전에 눈이 떠졌다. 낯선 천장이었다.잠에서 깬 자리는 홀로인데, 이불은 제 몸에 두 번 감겨 있었다. 밤새 감고 자던 사람이 빠져나가며 도로 여며 두고 간 모양새였다. 이부자리에 남의 온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나간 지 한 시진은 지났다는 뜻이었다. 새벽 군무든 조련이든, 전신은 부지런한 사내였다.온보요는 잠시 누운 채로 왕부의 소리를 들었다. 담 너머로 말굽 소리가 몰려갔다가 흩어졌다. 우물가에서 두레박 부딪는 소리, 부엌 쪽에서 장작 패는 소리가 고르게 울렸다. 일찍 깨는 집이었다. 잘 조련된 집이기도 했다.시비 둘이 세숫물을 들여온 것은 해가 뜨고도 한참 뒤였다.대야에서 김이 오르지 않았다."마마." 방어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늙은 유모는 대야에 손끝을 넣어 보고는 낯빛이 변했다. "이것들이 감히—""어멈."온보요는 소매를 걷고 찬물에 두 손을 담갔다. 얼음을 갓 걷어낸 물이었다. 손끝이 저릿하다 못해 아렸다. 그녀는 천천히 낯을 씻었다.경성에서 온 세작에게 더운물은 없다. 왕부의 첫 문안 인사였다.물을 데우지 말라 명한 자는 없을 것이다. 데우라 명한 자도 없을 것이다. 시킨 자가 있는 냉대라면 그 하나를 꺾으면 그만이지만, 알아서 식은 물은— 다른 물건이었다.사흘은 받아 주기로 했다. 그 사이 누가 눈을 피하고 누가 눈을 흘기는지, 부엌의 불이 누구 손에 있는지 가려 둘 것이었다.낯 닦을 마른 무명을 받아 들 때였다. 문밖을 두리번거리던 가장 어린 시비 하나가, 김이 오르는 작은 대야를 안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마, 마마. 손이라도······."말끝도 맺지 못하는 아이였다. 열둘이나 되었을까. 온보요는 그 물에 손을 녹였다. 쓸 만한 아이다, 와 고마운 아이다, 가 같이 떠올랐다. 어느 쪽이 먼저였는지는 그녀도 가리지 않기로 했다.방어멈이 아이의 손에 엿 반 가락을 쥐여 내보냈다.조반상이 들어올 무렵, 문이 벌컥 열렸다.시비들이 일제히 엎드렸다. 진묵이었다. 새벽 군무를 마치고 오는 길인지 먹빛 무복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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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위패

총관 상엄은 왕부에서 마흔 해를 살았다.선대 삭왕이 세자이던 시절에 들어와, 두 분 주인의 혼례와 장례를 다 제 손으로 치렀다. 왕부의 법도는 절반쯤 그가 만들었고, 나머지 절반은 그가 지켜 왔다. 그러니 법도를 아뢰는 일로 새 왕비의 깜냥을 재는 것도, 소임이라면 소임이었다.그는 작정하고 쏟아냈다.제사의 규례, 곳간과 열쇠의 소재, 문서가 드나드는 길, 안채 사람들의 이름과 위계, 절기마다 갈리는 상차림. 반나절에 나눠 아뢸 것을 한 호흡에 몰아넣었다. 경성의 세가 아가씨라면 절반을 알아듣고, 그 절반의 절반을 기억하면 다행일 터였다.여인은 끝까지 들었다.되묻지 않았다. 받아 적지도 않았다. 무릎 위에 손을 포갠 채 이따금 고개만 까딱였는데, 그 까딱임이 말의 매듭이 지어지는 자리마다 어김없이 떨어졌다.다 듣고 나서, 여인이 물은 것은 하나였다."가묘 참배는 어느 날에 올리면 되겠습니까."상엄은 잠깐 말을 멈췄다.아직 아뢰지 않은 대목이었다. 시어른이 아니 계신 왕부에서 새 왕비가 올릴 첫 법도는 폐백이 아니라 사당의 예다. 순서로 치면 가장 앞이되, 그는 일부러 뒤로 미뤄 두었다. 그것을 짚어내는지 보려던 것인데, 여인은 듣지 못한 것부터 짚었다."······사흘 뒤가 길일이옵니다.""그리 채비하겠습니다."사흘 뒤, 사당은 쓸려 있었다.북강의 사당은 경성의 것과 달랐다. 단청도 금박도 없이, 오래 문지른 나무의 결만 어두웠다. 위패는 둘이었다. 선대 삭왕과, 선왕비.여인은 문턱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사당 안을 오래 보았다. 향로에 앉은 재의 자국을. 무릎 자리가 닳아 옅어진 바닥을. 그러고는 들어가, 가르친 적 없는 북강의 예로 향을 살랐다. 경성처럼 셋을 사르지 않고, 하나만. 절의 깊이도, 손을 포개는 자리도 틀리지 않았다.상엄은 문가에 시립한 채 그것을 보았다. 배운 적 없는 것을 틀리지 않으려면, 하기 전에 읽어야 한다. 여인이 문턱에서 오래 멈춰 섰던 것이, 그제야 마음에 걸렸다.선왕비의 위패 앞에서, 여인의 걸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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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먹

북강에 온 지 이레째 되는 밤이었다.시종들을 물린 처소에 등불 하나만 남았다. 창밖에서 삭풍이 문풍지를 낮게 훑고 지나갔다. 온보요는 서안 앞에 앉아 먹을 갈았다. 벼루 위에 먹이 돌 때마다 물이 조금씩 어두워졌다. 갈수록 짙어지는 그 빛이 이 집 주인의 눈빛을 닮아 있어서, 그녀는 까닭 없이 먹을 한 바퀴 더 갈았다. 신방에서 접어 두었던 마지막 매듭이었다. 보름 안에 경성으로 보낼 첫 서신.수신인은 아버지였다. 읽는 자는 아버지가 아니었다.경성으로 가는 왕부의 서신은 역참을 세 번 갈아타고, 그때마다 봉랍 아래를 다녀가는 손이 있을 것이었다. 딸의 문안은 아버지께 닿기 전에 먼저 황궁의 서탁에 닿는다. 그러니 이 편지는 처음부터 세 사람에게 쓰는 것이었다. 아버지께는 안부를. 황상께는 기별을. 그리고 이 방의 주인에게는, 오늘 밤 넘어야 할 문턱을.첫 줄은 쉬웠다. 문안 여쭙는 격식이야 눈을 감고도 썼다.둘째 줄부터가 판이었다. 붓끝을 벼루 가에 고르며, 그녀는 종이 위에 놓일 글자들의 자리를 먼저 비웠다. 쓰는 것보다 쓰지 않는 것이 많은 글이 될 터였다.왕야가 정해 준 기별은 한 줄이었다. 삭왕이 신부에게 푹 빠졌더라. 허나 그 말을 그대로 적으면 황상은 웃고 덮을 것이다. 의심 많은 자는 제가 찾아낸 것만 믿는다. 하여 그녀는 그 한 줄을 쓰지 않았다. 대신 흘렸다.왕야는 소문처럼 무서운 분이라 적었다. 밤이면 홀로 술을 드시고, 신첩은 아직 그 심기를 다 읽지 못하겠노라 적었다. 다만, 하고 붓을 한 번 쉬었다가, 곁에 두려 하신다고 적었다. 그 연유는 신첩도 모르겠노라고. 그리고 겁이 글에 스미도록, 셋째 줄의 획 끝을 반 톨씩 흔들었다.손이 떨리는 사람의 획은 삐치는 자리에서 무너진다. 스승 하나가 필적을 읽는 법과 함께, 필적을 꾸미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저잣거리의 그 노인은 지금쯤 남쪽 물가에서 낚싯대나 드리우고 있을 것이었다.찾아낼 것이다. 의심 많은 눈은 행간을 뒤져, 무서운 왕이 신부를 놓지 못한다는 그림을 제 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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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꾀꼬리

첫눈이 마당을 덮은 아침, 왕부에 꾀꼬리가 날아들었다.눈을 쓸던 하인들이 빗자루를 세우고 문간을 바라보았다. 쓸다 만 눈 위로 작은 발자국이 총총 찍혔다."앵아 아가씨 오셨네!"문간 하인들의 목소리부터 달랐다. 온보요는 그 온도를 놓치지 않았다. 찬물을 들이던 손들이, 저 이름 앞에서는 데워졌다. 곳간지기가 감춰 둔 곶감을 꺼냈고, 마구간 노복은 아이가 미끄러질세라 길의 눈을 다시 쓸었다.유앵아. 전사한 장수의 유녀로 선대 삭왕께서 거두셨다는, 왕부의 은혜 입은 아이. 열예닐곱쯤 되었을까. 눈처럼 흰 낯에 겁먹은 듯 큰 눈이, 품에 안기 좋은 작은 새를 닮아 있었다. 걸친 것은 낡은 털배자였다. 낡았으되 정갈했고, 정갈하되 왕부 하인들의 것보다도 수수했다. 은혜 입은 아이가 입어야 할 옷을, 아이는 정확히 입고 있었다."왕비마마를 뵈옵니다." 절부터 서툴렀다. 서툰 것이 흠이 되지 않는, 그런 서툶이었다.방어멈이 차를 내오는 사이 아이는 조잘조잘 말을 풀었다. 왕부의 겨울은 유난히 춥다는 것. 왕야는 무서워 보여도 원래 저러신 분이라는 것. 저는 어릴 적부터 봬 와서 안다는 것. 동쪽 곳간 뒤 매화나무가 봄이면 왕부에서 제일 먼저 핀다는 것. 아무도 못 들어가는 왕야의 서재 앞까지, 저는 어릴 적 가 본 적이 있다는 것. 낯선 마마께서 오셔서 왕부 사람들이 다들 어려워한다는 것."저는 기뻐요. 왕부에 마님이 아니 계신 지 오래라······."말끝에 눈물이 차올랐다.온보요는 찻잔을 들며 그 눈물을 보았다. 정확히는, 눈물이 차오른 순간을 보았다. 방어멈이 찻상을 놓으며 아이 쪽을 돌아본 직후였다. 조금 전 단둘이 마주 앉았던 동안에는, 그 큰 눈이 마른 채로 반짝이기만 했다.보는 사람이 생긴 뒤에야 차오르는 눈물이었다.찻잔 속에서 찻잎 하나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온보요는 그것이 바닥에 닿을 때까지, 아이의 말을 다 들어 주었다."선왕비마마도 남쪽 분이셨대요." 아이가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고우신 분이 북강 겨울을 못 이기셨다고, 어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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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빈손

사냥은 이번에도 빈손이었다.겨울 산은 조용했다. 눈 아래서 산이 숨을 죽이면 짐승들도 죽은 듯이 지낸다. 활집은 이번에도 열리지 않았고, 매 한 마리 날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왕야는 한나절을 산에서 보내고서야 말머리를 돌렸다."또 빈손이시네."뒤따르는 어린 시종의 소곤거림을 진묵은 못 들은 척했다. 노강이 눈을 부라리는 것도 못 본 척했다. 빈손 사냥이 잦아질수록 시종들은 왕야의 활 솜씨를 의심했고, 의심은 언제나 소곤거림에서 멈췄다. 목이 아까우면 그쯤에서 멈추는 것이 좋았다. 눈 덮인 관도를 말들이 느리게 밟았다. 말굽이 눈을 누르는 소리만 한동안 이어졌고, 입김이 눈발에 섞여 흩어졌다.성문이 보일 즈음, 노강이 말머리를 붙이며 왕부의 일들을 아뢰기 시작했다. 사냥에서 돌아오는 길의 오랜 격식이었다."사당 참배는 무탈히 끝났사옵니다. 한데······." 노강이 뜸을 들였다. "마마께서 선왕비마마 위패에 맑은 물을 올리셨다 하옵니다. 남쪽의 예라고."진묵은 대답하지 않았다.고삐를 쥔 손에 잠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그것뿐이었다. 노강은 더 아뢰지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그 침묵의 결을 아는 것이 부관의 밥값이었다."안채 세숫물이 요즘 미지근하다 하옵니다.""누가 데우라 했나.""그것이······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그리 되고 있다 하옵니다."시키지 않았는데 식었던 물이, 시키지 않았는데 데워지고 있었다. 여인이 온 지 이레하고도 이틀 만이었다. 진묵은 눈길 끝의 성문을 보며, 그것이 성가시지 않은 제 속이 성가셨다."총관은 뭐라던가.""상엄 총관은······." 노강이 말을 골랐다. "마마께서 법도를 물으실 때마다 아뢸 것이 줄어서, 그것이 근심이라 하옵니다.""어제는 앵아가 다녀갔사옵니다. 마마께 문안을 올리고······."진묵이 손을 휘휘 저었다. 노강은 그 대목을 통째로 접었다."경성 허부에서 또 예물이 왔사옵니다. 승상 댁 여식께서 보내신 것으로, 이번에는 남해 진주가······."손이 다시 휘휘 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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