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Chapter 71 - Chapter 80

328 Chapters

71화. 서문(序文)

담 너머의 향은 사흘 밤을 내리 탔다. 나흘째 아침, 궁에서 문안 채비의 기별이 왔다.문안 대기전은 여인들의 조정이었다.성수 참례로 입경한 왕비와 명부(命婦)들이 차례를 기다리는 전각. 발 디딜 자리마다 서열이 있고, 앉는 방석의 수가 품계를 말했다. 전각 안은 여인들의 향이 겹겹이라, 숨을 쉴 때마다 다른 집 향이 코를 스쳤다. 사향, 매화향, 용연향. 향으로도 서열이 갈렸다. 온보요의 자리는 서쪽 둘째 줄— 이성왕비의 자리로는 낮고, 죄인의 여식 자리로는 높았다. 자리 하나로 두 가지를 동시에 이르는 배치였다."북강은 춥지요." 곁자리의 군왕비가 부채 너머로 말을 건넸다. "고생이 많으시겠어.""물이 좋아, 지내기 좋습니다.""물이 좋다니, 다행이네." 부채가 접혔다 펴졌다. "사람은 어떻고.""물을 닮았습니다."부채 너머의 눈들이 잠깐 바빠졌다가, 다른 화제로 흘러갔다. 동쪽 첫 줄에서는 누구의 머리꽂이가 진주 몇 알인지가 화제였고, 서쪽 끝줄에서는 부채 뒤의 눈들만 바빴다. 차는 식지 않게 계속 갈렸다. 갈리는 찻잔 수만큼, 말도 갈렸다. 전각 안에는 그런 물음이 방석 수만큼 있었다. 온보요는 반은 웃고 반은 흘리며, 어느 방석이 어느 담장과 이어져 있는지를 지도 삼아 접었다.차가 두 순배 돌았을 때, 상궁 하나가 문갑을 받쳐 들고 왔다."태후마마의 분부시옵니다. 성수 축하연의 서문을 명부들께서 한 문장씩 이어 적는 것이 연례라— 삭왕비마마께서도 한 문장 얹어 주시지요."문갑 위에는 반쯤 채워진 두루마리와 붓이 놓여 있었다. 앞서 적은 명부들의 문장이 갖은 서체로 이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연례였다. 연례라기에는, 두루마리를 받쳐 든 상궁의 눈이 그녀의 손끝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글씨가 좋으십니다. 규방의 붓이 아깝습니다.북강의 저녁 문안상에서 들었던 목소리가, 전각을 건너 되살아났다. 온보요는 붓을 받았다. 먹을 묻히고, 숨을 하나 고르고— 어깨의 힘을 뺐다.먹을 묻히는 짧은 사이, 다른 벼루 하나가 스쳐 갔다. 사각사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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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성수(聖壽)

매화 물표가 눌린 두루마리는 그날로 태후전에 걷혀 갔다. 사흘 뒤— 그 두루마리의 임자가 그녀를 불렀다.태후전의 문턱은 유난히 높았다.문턱을 넘는 순간 향이 바뀌었다. 대기전의 향이 꽃이라면, 이 안의 향은 나무였다. 오래된 나무. 백단의 밑동 같은, 무겁고 조용한 냄새. 그 냄새 속에 태후가 앉아 있었다. 전각 안의 물건은 적었다. 병풍 하나, 문갑 하나, 상 하나. 향로는 보이지 않는데 향은 있었다. 적은 물건이 전부 오래된 것들이라, 방이 물건이 아니라 세월로 차 있었다.칠순의 낯은 곱게 늙어 있었다. 주름은 웃는 자리에만 앉았고, 눈은 젊은 사람처럼 맑았다. 금실로 봉황을 놓은 자줏빛 대수삼이 몸에 실린 것이 아니라 몸을 받치고 있는 듯했다. 온보요는 배운 대로 절했다. 이마가 바닥에 닿는 시간까지, 배운 대로."가까이 오너라."목소리는 물처럼 순했다. 다가가 고개를 들자, 맑은 눈이 그녀의 낯을 오래 건너다녔다. 이마에서 눈으로, 눈에서 입매로. 값을 매기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매겨 둔 값을, 물건과 맞춰 보는 눈이었다."온가의 여식이.""예, 마마.""북강 물이 사람을 바꾸었구나. 삼 년 전 간택전에서 본 낯이 아니야.""거친 물을 마셔, 낯이 상했나 보옵니다.""상한 것이 아니라." 태후는 웃었다. 웃음이 주름의 제자리에 정확히 앉았다. "여물었지."다과가 올랐다. 연꽃 문양 유밀과였다. 노을빛으로 반질한 결, 겹겹이 눌러 새긴 잎맥. 북강의 찻상에서 본 것과 같은 다방의 솜씨였다. 접시는 태후가 손수 밀었다. 금가락지 낀 손이 접시를 정확히 반 뼘 밀고, 멎었다. 온보요는 하나를 집어, 맛있게 먹었다. 겉이 바스라지는 소리까지 얌전하게. 바스라지는 소리 틈으로 엉뚱한 목소리 하나가 다녀갔다. 단 것을 먹었으면 값을 치러야지— 입술 끝을 느리게 쓸던 엄지. 태후전 한복판에서 떠올릴 것이 못 되어, 그녀는 찻물로 그것을 눌러 삼켰다. 태후는 그 먹는 양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태후의 찻잔은 상 위에서 움직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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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실

약조된 "조용한 차"는 성수 큰 잔치가 끝나고 사흘 뒤에 왔다. 그 사흘 동안 사가의 담 너머 향은 두 번 탔고, 두 번 다 초저녁이었다.두 번째 태후전은 발이 내려져 있었다.시립한 상궁도 둘뿐. 찻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발 그림자가 두 사람의 낯에 가는 줄무늬를 드리웠다. 줄무늬는 태후의 낯에서는 주름과 나란했고, 그녀의 낯에서는 낯설게 얹혔다. 차는 태후가 손수 따랐다. 칠순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찻잔은 백자가 아니라 오래 쓴 갈색 다완이었다. 잔 안쪽에 찻물 든 세월이 나이테처럼 앉아 있었다. 차향은 어리고, 잔은 늙어 있었다."북강 서고가 크다더구나."첫 마디가 그것이었다. 온보요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쳤다."장서가 많사옵니다.""장서 말고." 태후는 제 잔에 차를 마저 따랐다. "장부 말이다. 병적이며, 군량이며, 성곽의 것이며— 서고 안쪽 깊은 방에 있다지. 부부 금슬이 그리 좋다니, 열쇠가 어디 걸렸는지쯤은 알겠구나.""신첩은 살림 장부만 만지옵니다.""그래. 살림." 태후는 웃었다. "살림 잘하는 여인이 이 나라에 제일 귀한 법이지. 살림이란 게 별것이더냐. 제집 것 아껴 쓰고— 남의 집 것 잘 보아 두는 게지."발 너머로 상궁 하나가 소리 없이 차 주전자를 갈아 놓고 물러났다. 새 주전자에서 김이 곧게 올랐다. 김이 발 그림자 사이로 흩어졌다.발 너머 마당에서 새 한 마리가 울고 그쳤다. 그친 자리의 고요가 길었다."서고 안쪽 방의 물목. 그것 하나면 된다." 목소리는 여전히 찻물처럼 순했다. "병적이 몇 권인지, 성곽도가 몇 축인지— 세어만 오너라. 가져올 것도 없어. 그 쉬운 셈 하나에, 네 오라비가 금부에서 나와 조카 걸음마를 본다. 네 아비 난 옆에 사람이 앉고.""마마.""급할 것 없다." 태후는 유밀과 접시를 그녀 쪽으로 반 뼘 밀었다. "성수 끝나고 북강 돌아가서, 가을쯤— 단풍 문안이나 한 장 보내려무나. 물목은 그 봉투가 알아서 하겠지." 식어 가는 다완을, 태후는 다시 채우지 않았다. 빈 다완 바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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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회랑(回廊)

"입에는 답니다만— 목에 걸리는 봄이옵니다."답을 받은 회랑에는 두 사람과 기둥 스물넷뿐이었다. 봄볕이 기와 그늘을 반듯하게 잘라, 바닥에 명암의 계단을 놓고 있었다.허도위는 북강에서보다 관복이 한 급 올라 있었다. 감찰의 일을 잘 마친 자의 옷. 옷은 새것인데 낯은 조금 야위어, 매끄러움 밑으로 뼈의 선이 드러났다. 새 비단이 걸음마다 빳빳한 소리를 냈다. 소리 나는 옷을 입은 사내와, 소리를 죽인 신을 신은 여인이 마주 섰다.온보요는 격식대로 반 걸음 비켜섰다. 비켜서며, 소매 안의 손끝으로 옷섶의 백옥 패 자리를 한 번 짚었다. 소리 죽인 표가, 거기 있었다."감찰— 아니, 이제 무어라 불러 드려야 할지.""부르시던 대로 부르시지요. 관명이 바뀌어도 하는 일은 같습니다.""재는 일 말씀이십니까."허도위의 입가가 아주 얕게 움직였다. 회랑의 볕이 기둥 사이로 칸칸이 떨어져, 두 사람은 볕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북강 일은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마마 내외분 덕이 컸지요. 돌까지 정중히 돌려받았으니.""물목이 고왔다 하셨지요.""고왔지요. 한데— 요즘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허도위는 소매 안에 손을 넣은 채, 볕 칸 너머에서 말했다. "북강 어느 폐광에서, 겨우내 화덕이 탔다는 소문. 쇠 두들기는 소리가 밤마다 났다는 소문 말입니다.""산에는 본래 소리가 많지요.""많지요. 한데 그 산의 숯장수가— 봄 들며 갑자기 남쪽으로 이사를 갔답니다. 숯 두 섬 값을 갑절로 받았다고, 자랑을 하며." 숯장수의 새 집이 어느 고을인지까지는, 말하지 않았다.온보요는 낯을 바꾸지 않았다. 바꾸지 않는 값으로, 속의 저울이 바삐 움직였다. 이 사내는 철장산을 알고 있다. 어디까지— 인두까지인가, 인두의 낙관까지인가."감찰께서는 소문이 많으십니다.""소문을 먹고 사는 자리라." 허도위가 이번에는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음이 회랑 천장에 낮게 닿았다 내려왔다. 허도위는 볕 칸을 하나 건너, 반 걸음 가까워졌다. 목소리가 회랑 바닥으로 낮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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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면회(面會)

저울을 배우지 못한 아이. 그 말을 온보요는 사가로 돌아오는 가마 안에서 내내 뒤집어 보았다. 앞으로 읽으면 경고였고, 뒤로 읽으면— 오라비가 누이에게 하는 부탁 같기도 했다.이튿날, 금부에서 기별이 왔다. 면회를 윤허한다는 것이었다.태후전의 성의였다. 성의는 빚이고, 빚에는 값이 붙는다. 알면서도 그녀는 채비를 서둘렀다. 가마가 금부 골목에 들어서자 길가의 소리가 낮아졌다. 금부 담장은 이끼도 마른 잿빛이었고, 문 앞의 아전들은 왕비의 문첩을 받고도 반 각을 세워 두었다. 세워 두는 것까지가 이 집의 격식이었다. 문첩을 돌려주는 아전의 손에, 노잣돈 한 꿰미가 얹혔다 사라졌다. 어머니가 들려 보낸 옷 보퉁이와, 사가 부엌에서 새로 찐 수수떡 한 합을 챙겼다. 세 켜짜리였다. 떡집 것이 아니라 부엌 것이니, 신호가 아니라 그냥 떡이었다. 그냥 떡인 것이, 오라비에게는 나을 것이었다.금부의 면회방은 창이 하나였다.창으로 든 볕이 바닥에 좁고 긴 금을 그었고, 그 금 이쪽과 저쪽에 남매가 앉았다. 방에서는 묵은 종이와 곰팡이 냄새가 났다. 오라비는 수염이 자라 있었다. 자란 수염 아래로, 웃는 입매만 예전 그대로였다. 오라비는 야위어 있었다. 야윈 낯으로 웃는 것부터 했다."우리 보요가 왕비마마가 되어 오셨네.""오라버니.""절은 안 한다. 옥살이 몸이 구겨져서, 절을 하면 도로 못 편다."우스개가 예전 그대로라, 눈이 먼저 뜨거워졌다. 온보요는 옷 보퉁이를 금 너머로 밀었다. 옥리가 보퉁이를 풀어 헤집고, 도로 밀어 주었다. 수수떡 합도 같은 길을 다녀왔다. 오라비는 떡 한 점을 그 자리에서 베어 물었다."집 맛이다. 안에서는 소금이 귀하거든." 오라비는 두 점째를 집었다. "귀한 것 치고— 눈물나게 흔한 것이 또 소금이지.""사가 부엌 것입니다.""네가 시킨 맛이면 집 맛이지." 오라비는 떡을 마저 삼키고, 목소리를 반 눈금 낮췄다. "아버지는 강녕하시다. 난 치시는 솜씨가 늘었어. 하도 쳐서— 화선지가 동이 났다더라.""그래서— 그 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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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살구 가지

한 장은, 너한테. 그 끊긴 말을 안고 돌아온 저녁— 사가의 부엌 시비가 저자에서 떡을 사 왔다.남문 밖 그 집의 수수떡이었다. 채반에 담긴 떡이 이번에는 두 켜였다. 시비는 떡집 앞이 하도 붐벼 겨우 샀다고 자랑을 했다. 붐비는 떡집이 굳이 두 켜를 낸 아침이었다. 떡은 어제 것보다 콩고물이 두터웠다. 두터운 고물이, 손끝에 묻어났다.두 켜면 담을 넘어라.담은 그날 밤 넘어왔다. 삼경, 마당의 어둠 속에서 호위 아이가 그림자 하나를 맞아들였다. 물상 차림의 중년 사내— 스무 해 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사내는 절도 인사도 없이 기름종이 꾸러미 하나를 내밀고, 담을 도로 넘어 사라졌다. 온 시간을 다 합쳐도 차 한 모금 식을 시간이 못 되었다. 사내가 넘어간 담 위로 기와 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마당의 어둠이 도로 고요해질 때까지, 호위 아이는 단검 자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꾸러미 안에는 밀서 한 통과, 마른 가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살구 가지였다. 꽃이 피었던 자리마다 마른 꽃받침이 별처럼 남은, 한 뼘 길이의 가지. 왕부 담장의 그 나무의 것이었다. 부러뜨린 자리가 칼로 벤 듯 매끈했다. 꽃받침 하나 다치지 않은, 벤 자리였다.밀서의 문면은 군령이었다. 겉봉도 없이 세 번 접힌 종이. 접은 각이 낯익었다. 왕부 서재의 그 손이 접는 각이었다.강녕한가. 사가의 담은 높은가. 떡집의 켜는 늘 세어 보아라— 그리고 줄이 바뀌고, 먹이 조금 진해진 자리에 넉 자가 있었다.위가의 화덕이 꺼졌다.철장산의 폐광이 비워졌고, 숯가마 다섯이 헐렸고, 밤수레의 길에 풀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 넉 자 뒤에 붙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인 것으로, 북강의 사내가 봄내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가 다 보였다. 장계를 자르던 그 속도로 산을 자르고 가마를 헐었을, 반듯한 손도.서신의 끝에는 아무 말도 없이, 획 하나가 길게 그어져 있었다. 무엇을 쓰려다 만 자리인지, 쓰지 않기로 한 자리인지— 먹이 종이 뒤까지 눌린, 낯익은 필압이었다.온보요는 등불을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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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어연(御宴)

물병의 살구 가지에서 마른 꽃받침 하나가 떨어진 아침, 성수 본연회의 부름이 왔다.대전 앞뜰에 상이 삼백이었다. 붉은 융단이 계단을 타고 내려와 뜰을 가로질렀고, 처마마다 홍사초롱이 줄지어 걸렸다. 악공만 마흔. 향로의 연기가 뜰 위로 얇은 지붕을 한 겹 더 만들었다. 북강의 연회가 냄새부터 먹였다면, 경성의 연회는 눈부터 먹였다. 상마다 오른 것도 눈요기부터였다. 통째로 쪄 낸 잉어가 비늘에 금가루를 입고 눕고, 두부로 빚은 봉황이 국화 꽃잎 위에 앉았다. 젓가락을 대기 아까운 것들이, 젓가락을 대라고 삼백 상에 깔렸다.온보요의 자리는 서열대로— 대전 계단에서 상 아홉 개 거리였다. 아홉 상 너머의 계단은, 볕이 먼저 올라가 기다리고 있었다.황제는 미시 정각에 나왔다.용포의 노란빛이 계단 위에서 번쩍했고, 삼백 개의 상이 일제히 엎드렸다. 온보요는 이마를 조아린 채,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를 세었다. 젊은 발소리였다. 무겁게 걸으려고 애쓰는, 젊은 발소리. 발소리가 지나는 자리마다, 엎드린 등들이 물결로 낮아졌다 일어났다."평신하라."낯을 들어도 되는 거리에서 처음 본 황제는, 용포가 아직 어깨에 큰 사내였다. 서른 초입. 눈매가 예리한데, 예리함이 자주 태후전 쪽 처마를 다녀왔다.잔이 세 순배 돌고, 축수의 서문이 낭독되었다. 명부들이 한 문장씩 이어 적은 그 두루마리였다. 낭독하는 학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문장을 지날 때— 서툰 글씨로 적힌 그 문장을 지날 때— 태후의 눈이 뜰을 건너 그녀에게 잠깐 다녀갔다. 온보요는 잔을 들어 입술만 적셨다. 금가루 잉어에는 끝내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연한 살을 골라 얹어 주던 손이, 이 삼백 상 어디에도 없었다.일은 술이 다섯 순배째 돌 때 났다.내관 하나가 그녀의 상 곁을 지나다 발이 걸렸고, 쟁반의 술 주전자가 기울었다. 기운 주전자의 술이 그녀의 소매를 향해 쏟아지는— 찰나, 곁상의 허연교가 제 부채를 펴며 반 걸음 일어섰다. 술은 부챗살을 타고 흘러 융단에 떨어졌다. 연분홍 부채 한 자루가 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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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편전(便殿)

편전으로 드는 회랑은 대전 뜰의 소란이 거짓말처럼 조용했다.내관은 문 앞에서 물러났다. 편전 안에는 등촉이 여섯. 황제는 용포의 어깨끈을 반쯤 늦춘 채, 서안 앞에 앉아 있었다. 연회의 낯이 아니었다. 연회의 낯보다 다섯 살은 젊고, 열 살은 지쳐 보였다. 서안 위에는 장계가 세 무더기. 붉은 인주 함이 뚜껑 열린 채였고, 곁의 찻잔은 바닥이 말라 있었다. 마른 잔을 갈아 줄 손도 물려 둔 방이었다."가까이."온보요는 격식대로 나아가 부복했다."평신. 자리를 주어라— 아, 물릴 사람이 없지." 편전 안에 내관 하나 두지 않은 것을, 그 말로 처음 알았다. 황제는 저 혼자 짧게 웃고, 손수 곁의 방석을 가리켰다. "앉으라. 오래 붙들 생각은 없다."앉는 자리가 서안에서 세 걸음. 독대라기에는 가깝고, 하문이라기에는 헐거운 거리였다. 등촉 여섯의 불빛이 그 세 걸음 사이에 얕은 강처럼 깔렸다."삭왕은."첫 물음이 그것이었다."강녕하시옵니다.""그것을 물은 게 아니다." 황제는 서안 위의 붓을 만지작거렸다. 만지작거리는 손이, 무겁게 걸으려 애쓰던 발소리와 같은 결이었다. "짐은 그자를 아홉 살에 마지막으로 보았다. 선황 곁에 세자로 서 있던— 그때 그자가 짐에게 감꽃을 주웠다 주었지. 짐이 그걸 실에 꿰어 목에 걸었더니— 모후께서 걷어 버리셨다. 황자가 거지 목걸이를 한다고. 한데 지금 조정이 말하는 삭왕은 사람을 삶아 먹는다더군. 어느 쪽이 참이냐.""둘 다 아니옵니다.""하면.""감꽃을 줍던 손으로, 지금은 북강의 성벽을 줍고 계시옵니다." 온보요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답했다. "돌 하나가 빠지면 그 틈으로 겨울이 들어오는 까닭에— 스무 해째, 줍고 계시옵니다."편전 안의 등촉 하나가 심지를 태우며 잘게 소리를 냈다. 황제는 오래 말이 없었다."조정은 그 성벽이 짐을 향해 쌓인다 하던데.""성벽은 등이 없사옵니다. 안에서 보면 감싼 것이고, 밖에서 보면 막아선 것이지요." 그녀는 거기서 반 호흡을 두고, 마저 얹었다. "폐하께서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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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겉봉 두 장

네가 고른 답을 보내라. 그 말은 사가의 밤까지 따라와, 등불 곁에 오래 앉아 있었다.답을 고르려면, 먼저 판을 골라야 했다. 온보요는 서안 위에 나무패를 놓았다. 황상의 패. 태후전의 패. 허가의 패. 경성에 와서 새로 깎은 패가 둘— 편전의 지친 웃음과, 회랑의 야윈 저울. 패와 패 사이에 명주실을 걸며, 그녀는 북강 서재의 밤들을 생각했다. 그때는 등 뒤에 사람이 있었다. 지금은 실을 혼자 걸었다. 거는 손끝이 마르면, 물병의 살구 가지를 한 번 보았다. 마른 가지는 마른 채였고— 물병의 물만 조금씩 줄고 있었다.혼자 거는 실은, 대신 가벼웠다. 가볍게— 그녀는 실 하나를 위가의 패에서 허가의 패로 옮겨 걸었다.이튿날, 두 가지 일이 있었다.하나. 앵아가 저자 심부름을 나갔다. 왕비의 분부로 남쪽 침향을 사러— 북강 저자의 그 향 가게와 같은 물건을 파는, 경성 서시(西市)의 향 가게로. 앵아는 심부름을 반겼다. 반기는 낯이 아침 볕에 발그레했고, 나서는 뒷모습의 소매가 여느 날보다 반듯하게 여며져 있었다. 앵아의 소매에는 왕비의 서신 초 한 장이 접혀 들어 있었다. 초에는 지어낸 것 하나가 심겨 있었다. 온가의 옛 문서가— 북강 왕부의 서고에 있다는 것.둘. 같은 시각, 기별 시종이 관아 앞 저자에서 사람 하나와 어깨를 스쳤다. 스치며, 소매에서 소매로 얇은 것 한 장이 건너갔다. 북강 향 가게의 겉봉을 그대로 본뜬—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겉봉 한 장. 접은 각까지 같은. 받은 사람은 허부의 문객이었고, 문객의 주인은 요즘 저울눈을 의심하기 시작한 감찰이었다. 스침은 세 걸음이면 끝났다. 어깨가 닿고, 떨어지고, 두 사람은 각자의 방향으로 반 마장을 더 걸었다. 저자의 소음이 그 세 걸음을 덮고 지나갔다.겉봉 두 장이 각자의 길을 갔다.한 장은 향 가게의 문갑으로 들어가, 초하루의 심부름꾼을 기다릴 것이었다. 태후전은 문서가 북강에 있다고 읽고— 서고의 물목을 더 급하게 원하게 될 것이었다. 급해진 손은 서두르고, 서두르는 손은 자국을 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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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밤손님

밀려난 기와는 밤새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침 볕에 그 틈이, 지붕 위에 가는 그림자 한 줄을 그었다.이튿날 호위 아이는 말없이 마당의 물건들을 옮겼다. 장독 둘을 담 밑으로, 빨랫줄을 반 자 낮게, 마른 살구 가지가 꽂힌 물병을 창가에서 안쪽 서안으로. 옮기는 손이 야무져서, 사가의 시비들은 봄맞이 청소로만 알았다. 저녁상을 물리며 아이는 마마의 방에 화로 부젓가락을 하나 더 들여놓았다. 들여놓으며, 눈으로 서안과 창 사이의 거리를 한 번 쟀다.온보요는 그날 밤 등불을 일찍 껐다. 끄고, 옷을 갈아입지 않은 채 이불 위에 앉아 있었다.삼경이 넘어, 마당의 소리가 한 겹 얇아졌다.풀벌레가 먼저 그쳤다. 다음은 바람. 담 위에서 무언가가 젖은 종이처럼 소리 없이 내려앉았고— 방문의 창호지에 사람 그림자가 스몄다. 하나. 처마 쪽에서 둘.문이 열리는 것과 그림자가 방바닥을 딛는 것과 호위 아이의 단검이 어둠을 긋는 것이, 한 호흡 안에 있었다. 어둠 속의 칼은 소리로 먼저 왔다. 천이 갈리는 소리. 나무가 쪼개지는 소리. 서안 모서리가 한 뼘 날아갔다.쇠와 쇠가 물리는 소리. 등불 없는 방 안에서 소리만이 싸움의 꼴을 그렸다. 온보요는 이불을 걷어 첫 그림자의 낯을 향해 던지고, 서안 뒤로 물러났다. 서안 위의 벼루가 손에 잡혔다. 두 번째 그림자가 창을 넘던 순간— 벼루가 날았고, 이마에 맞은 그림자가 창틀에서 반 호흡 무너졌다.그 반 호흡 사이로, 마당에서 흰 것이 들이쳤다.소월백의 검은 그믐밤의 그 검이 아니었다. 살기가 실려 있었다. 첫 합에 한 자루가 꺾이고, 둘째 합에 비명이 났다. 그림자 둘이 담을 되넘어 달아나는 소리가 지붕 위로 흩어졌다. 쫓지 않았다. 소월백의 검끝이 문께의 어둠을 반 바퀴 훑고서야, 내려왔다. 그리고— 방 안에는 피 냄새와, 향 냄새가 남았다."등불."소월백의 목소리에 앵무가 덜덜 떨며 불을 붙였다.호위 아이가 문설주에 기대앉아 있었다. 왼팔 소매가 검게 젖어 갔다. 낯은 태연한데, 단검을 쥔 오른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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