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Kabanata 261 - Kabanata 270

328 Kabanata

261화. 식지 않은 차

소월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묵이 일어섰다.무릎을 낮춘 채 보요의 배에 이마를 대고 있던 사내였다. 검은 머리칼이 옥색 치마에서 미끄러지고, 조금 전 아이를 기다리던 손이 곧장 칼집을 찾았다.보요가 그 손목을 잡았다."칼은 두고 가세요.""태후가 황제를 잡아갔다.""그래서 더더욱요. 칼을 든 왕야가 먼저 들이닥치면, 내일 남는 글에는 모자가 아니라 왕야의 역모만 적힐 겁니다."진묵의 손등에서 힘줄이 일었다. 소월백이 문밖 세 걸음에서 허리의 검을 풀어 노강에게 건넸다."저도 두고 가겠습니다."진묵은 흰 칼집을 한 번 보았다."폐하가 되기도 전에 겁이 많군.""삭왕 전하께 오래 배우면 목숨이 남지 않을 듯하여서요."보요가 진묵의 소매를 당겼다."왕야."느슨하게 풀린 한마디에 그가 끝내 칼을 놓았다. 대신 보요의 허리를 받쳐 일으키고 제 검은 겉옷을 둘러 주었다. 가을 문턱의 밤바람은 아직 미지근했으나, 옷 안에는 닷새를 달려온 사내의 열과 마른 침향 냄새가 남아 있었다.자녕궁의 붉은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마당에는 사람 하나 없고 처마 밑 등촉만 줄지어 탔다. 태후가 늘 앉던 방의 찻상에는 백자 잔 두 개가 놓였다. 한 잔은 차갑고, 다른 잔은 입술이 닿은 자리만 아직 젖어 있었다.병풍은 넘어져 금빛 학의 목이 바닥에 꺾여 있었다. 향로 안에는 백단이 반쯤 타다 꺼졌고, 약과를 담은 접시에는 손자국 하나가 깊게 눌렸다. 궁인들이 차를 올리고 물러난 뒤 갑자기 들이닥친 손이 방을 쓸고 간 모양이었다. 뜰 모퉁이에는 한 짝만 남은 내관의 검은 신이 피에 젖어 있었다.보요가 잔 받침을 들었다. 밑에는 노란 꽃가루가 얇게 묻었다. 궁 안에서 그 꽃이 피는 곳은 하나뿐이었다. 스물여덟 해 전 선귀비가 살던 함향전 뜰이었다.윤태가 서쪽 작은 문에서 들어왔다. 갑옷 어깨에 잘린 붉은 술이 걸려 있었다."폐하의 작은 가마가 서쪽 회랑으로 들었습니다. 어가를 호위하던 여덟은 칼을 빼앗긴 채 묶여 있었고, 자녕궁 궁인 스물넷은 모두 지하 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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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화. 귀비의 방

약절구 소리가 멎었다.함향전 문 안에서 빗장이 한 번 흔들렸다. 진묵이 어깨를 대자 오래 썩은 문설주가 낮게 울었다. 힘을 더 주면 부서질 문이었다.보요가 그의 팔을 눌렀다."아직요."창호 너머 등불 그림자는 둘이었다. 황제는 서 있었고 태후는 낮은 침상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 상에는 김이 가신 약사발과 노란 황지, 동궁 때 쓰던 작은 옥인이 놓였다.함향전은 폐한 뒤 한 번도 새로 칠하지 않은 곳이었다. 창살의 붉은 칠은 손가락만 한 조각씩 벗겨졌고, 처마 끝 풍경은 혀를 잃어 바람 속에서도 울지 않았다. 뜰의 노란 꽃만 담을 넘어 제멋대로 번졌다. 한때 귀비가 걸었다는 돌길 위로 잡초가 무릎까지 올라와 있었다."스물여덟 해나 지났습니다."황제가 말했다."그동안 한 번도 이 방에 오지 않으셨지요.""네가 오지 못했지. 그년이 죽던 꼴을 보았으니.""소자가 아니라 모후께서 보지 못한 겁니다."무언가 바닥에 깨졌다. 매운 약 냄새가 문틈으로 번졌다. 노궁인이 품에 안고 온 검은 옻합에서 나던 것과 같은 냄새였다.태후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도장을 찍어라. 허씨의 군량죄는 승상의 독단, 온씨의 역모는 삭왕의 사주라 쓰면 된다. 네 아우는 다시 강호로 내보내고, 저 늙은 어미 하나 폐궁에 가두어라. 네 옥좌는 남는다.""또 빈 종이입니까.""네가 열한 살 때도 그랬지. 도장을 내주고 묻지 않았어. 그래서 살았다."문밖의 소월백이 눈을 감았다. 흰 소매 아래 손이 말렸으나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묵은 그를 보지 않고 보요 어깨의 겉옷만 다시 여며 주었다.회랑 아래로 발소리가 모였다. 중서성 늙은 재상 둘과 어사대 관원들, 종친 세 사람이 등촉 뒤에 섰다. 허 승상은 포승에 묶였고 허연교는 찢어진 소복 차림 그대로였다. 허 도위가 아버지의 포승 끝을 직접 쥐었다.늙은 재상은 급히 나오느라 관복 위에 잠옷 띠를 둘렀고, 젊은 어사는 먹도 갈지 못한 채 붓끝을 입술로 적셨다. 누구도 서로에게 묻지 않았다. 닫힌 문 안에서 황제와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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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화. 세 개의 나이

함향전 문이 안쪽에서 열렸다.황제는 용포 대신 흰 중의를 입고 있었다. 소매에는 붉은 약물이 튀었고 맨발에는 깨진 사기 조각이 박혀 피가 났다. 태후는 검붉은 대례복을 갖춰 입은 채 침상에 앉아 있었다. 칠순의 머리 위로 아홉 봉황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문밖의 관원들을 본 황제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누가 불렀느냐.""신첩이 불렀사옵니다."보요가 답했다.진묵은 그녀보다 반 걸음 앞에 섰다. 칼은 없었으나 먹빛 옷 아래 넓은 어깨가 문 하나를 가득 막았다. 황제의 눈이 벗겨진 그의 손목과 보요를 감싼 겉옷을 차례로 훑었다."역적이 황궁을 드나드는구나.""폐하께서 문을 안에서 잠그셨습니다.""짐이 잠근 것이 아니다."태후가 웃었다."또 모르셨다 하시는구나."보요는 검은 옻합을 방 안 상으로 옮기게 했다. 이어 `황자 생` 세 글자가 남은 비단, 귀비의 붉은 매듭, 허강의 삼릉 화살촉, 허연교의 혼수 장부가 차례로 놓였다.노궁인이 옻합을 열었다. 검게 죽은 은침이 등불을 받았다."폐하께서는 세 살이셨습니다. 병풍 뒤에서 갓난 황자의 입을 막으셨지요."황제의 엄지가 제 손바닥을 문질렀다."그때 짐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맞사옵니다."보요가 고개를 숙였다."스무 해 전에는 열한 살이셨습니다. 모후께 빈 종이와 옥인을 내주셨으나, 여덟 살 황자를 죽이라 쓰인 줄은 모르셨지요.""그 또한—""오늘의 폐하는 서른하나이십니다."황제의 말이 끊겼다.회랑에서 붓 긁는 소리가 났다. 어사대 관원 셋이 같은 말을 서로 다른 종이에 적고 있었다. 종친들은 닫힌 낯으로 황제의 맨발만 보았다.보요가 허씨 장부를 펼쳤다."허 승상이 북강 군량을 팔고 군사 서른여섯을 죽게 한 줄 아셨습니다. 딸의 빈 수결이 쓰인 줄도 보셨고요. 그래도 죄를 따로 봉해 두고 진묵과 온가를 먼저 베라 명하셨습니다. 이것도 모르셨습니까."황제가 태후를 돌아보았다."모후께서 군량까지 허씨에 내주셨습니까.""네 옥좌를 지키는 집이다. 창고 몇 칸이 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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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4화. 남은 반쪽

황제의 자복을 들은 태후가 봉황잠 하나를 뽑았다.금빛 날 끝이 아들의 목에 닿았다. 머리에서 풀린 흰 가닥들이 검붉은 대례복 위로 쏟아졌다. 황제가 뒤로 물러나자 깨진 약사발이 맨발 아래서 잘게 부서졌다.진묵이 움직이려 했다."왕야."보요의 손이 그의 손등에 닿았다. 멎은 손가락이 천천히 펴졌다. 칼 없는 사내의 눈만 깊고 서늘해졌다.태후가 황제의 목을 끌어당겼다."이 아이가 죽으면 옥좌는 피로 빈다. 밖의 황자와 역적이 오늘 밤 궁을 에워쌌으니, 누가 시해범이 될 것 같으냐."금침 끝에 푸른 물이 맺혔다. 함향전 약사발에서 나던 냄새가 한 걸음 늦게 번졌다. 노궁인이 숨을 삼켰다."귀비마마께 먹인 것과 같은 독이옵니다."황제의 눈이 붉어졌다."끝내 소자도 죽이시려 합니까.""너는 내가 살린 목숨이다. 거둘 수도 있어."태후의 다른 손이 옷깃 안으로 들어갔다. 낡은 비단 조각 하나가 나왔다. 가장자리는 칼로 잘렸고, 붉은 인장의 용 발톱이 절반 남아 있었다.보요가 소매 속 향갑을 열었다. 물길 아래서 건진 `황자 생` 비단을 흰 천 위에 올렸다. 둘의 잘린 올이 같은 자리에서 이어졌다.노궁인이 떨리는 손으로 남은 반쪽을 읽었다."둘째 황자 생. 진규에게 내어 북문으로 보냄."두 조각이 맞닿자 전 황제의 작은 어새가 온전히 드러났다.소월백이 한 걸음 들어왔다. 그가 태후를 보는 낯에는 분노도 승리도 없었다. 귀비의 붉은 매듭만 손가락 사이에서 천천히 조여졌다."그 반쪽을 왜 지니셨습니까."태후가 웃었다."네 형이 나를 버리는 날 보여 주려고. 제 옥좌가 죽은 아우의 자리 위에 섰다는 것을."황제의 입술이 떨렸다. 어미가 지킨 것은 아들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아들이 평생 벗어나지 못할 목줄도 함께 간직했다.보요가 비단 두 조각 사이를 눌렀다."전 황제의 글은 이미 북강에서 열 사람의 눈을 거쳤습니다. 이것을 찢어도 이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회랑의 늙은 재상이 계단을 내려가 두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종친 셋도 머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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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5화. 벗은 용포

종묘의 북이 밤을 세 번 갈랐다.첫 북에는 궁문이 열렸고, 둘째 북에는 종친과 삼사의 관원들이 뜰을 채웠다. 셋째 북이 멎자 황제가 흰 중의 차림으로 계단 위에 섰다. 피 묻은 맨발에는 누구도 신을 올리지 못했다.장 내관이 용포를 들고 뒤따랐다. 황제는 그것을 받지 않았다.뜰 한쪽에는 태후가 무릎을 꿇었다. 봉황관도 비녀도 사라진 흰 머리가 어깨를 덮었다. 허 승상은 그보다 아래에서 포승에 묶였고, 허 도위와 허연교는 서로 떨어져 섰다.보요는 진묵의 팔에 손을 얹고 종묘 기둥 곁에 섰다. 밤새 굳은 발목이 신 안에서 욱신거렸다. 그가 말없이 제 발을 그녀 신 앞에 붙여 기대게 했다. 남의 눈에는 검은 옷자락 둘이 겹친 것뿐이었으나, 보요의 무게 절반이 그 단단한 장화 위로 옮겨 갔다.노궁인의 독합, 검은 화살촉, 이어 붙인 비단, 허씨 장부가 긴 상 하나에 놓였다. 어사대 관원이 함향전에서 받아 적은 종이 셋을 차례로 읽었다.귀비 독살.갓난 황자의 첫 출궁 뒤 추격.스무 해 전 여덟 살 황자의 재호송 습격.군량 매각과 북강 군사 서른여섯의 죽음.온가와 진묵의 동시 처결 명.말이 하나씩 뜰에 떨어질 때마다 태후의 허리가 더 꼿꼿해졌다. 황제는 반대로 고개를 숙였다."첫 죄를 보았을 때 짐은 세 살이었다. 두 번째 칼에 옥인을 내주었을 때는 열한 살이었다."그가 맨발을 한 계단 아래로 내렸다. 피가 흰 돌에 찍혔다."그 뒤 스무 해는 누구의 나이로도 숨지 않겠다. 짐은 아우가 산 것을 알았고, 모후의 죄를 알았으며, 옥좌를 잃지 않으려 입을 다물었다. 최근에는 삭왕을 부르려고 아이 가진 왕비를 미끼로 삼았고, 허씨의 군량죄를 덮어 온가와 북강을 함께 베려 했다."태후가 웃음을 터뜨렸다."네가 내려오면 저 천한 장사꾼의 아들이 황제가 된다!"소월백은 종묘 뜰 맨 아래에 검은 융복을 입고 서 있었다. 백옥 패만 가슴에 걸렸고 황자의 관은 쓰지 않았다.황제가 그를 보았다."그가 무엇이 될지는 짐이 정하지 않는다. 다만 짐이 더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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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6화. 남문의 봉화

빈 용상 앞에서 종친들이 먼저 다투었다.황제가 옥대를 내려놓은 지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선황의 친필을 받들어 소월백을 곧바로 옥좌에 앉혀야 한다 했고, 어떤 이는 장사꾼으로 산 세월을 물었다. 늙은 종친 하나는 피 묻은 돌 위에 무릎을 꿇고도 황통의 체면부터 찾았다.소월백은 계단 아래에서 듣고 있었다.검은 융복 자락에는 함향전의 노란 꽃잎이 붙었고, 가슴의 백옥 패는 새벽 이슬에 젖어 있었다. 황자의 관을 가져온 예관이 두 손으로 바쳐 들었으나 받지 않았다."옥문부터 여십시오."종친들의 말이 멎었다."전하, 먼저 종묘에 이름을—""내 이름 때문에 갇힌 사람부터 꺼내십시오. 형부 옥의 온씨 부자, 별원에서 끌려간 열한 사람, 내전의 강무와 허강 가족까지. 한 사람이라도 쇠를 찬 채면 이 관을 받지 않겠습니다."그가 황자 관을 지나쳐 중서성 상 앞에 섰다. 다섯 고을 관인과 선황 어새, 열 사람의 증언이 아직 젖은 종이 위에 놓였다."이것들을 맞대는 동안 국새는 중서성에서 지키십시오. 금군은 윤태와 허 도위가 반씩 맡고, 두 사람의 명이 함께 없으면 궁문을 열지 마십시오."허 도위가 피 묻은 이마를 바닥에 댔다."신은 죄인의 아들이옵니다.""그래서 혼자 맡기지 않았습니다."소월백의 대답은 짧았다. 허 도위는 더 변명하지 않고 금군패를 반으로 나누어 윤태에게 건넸다.보요는 종묘 기둥 곁 낮은 걸상에 앉았다. 진묵이 어디서 가져왔는지 따뜻한 대추물을 손에 쥐여 주었다. 놋잔에서는 단내와 김이 올랐다."한 모금.""지금 마실 때가—""마셔."거친 한마디 뒤에 잔을 받치는 손은 흔들림이 없었다. 보요가 두 모금 삼키자 그제야 진묵이 용상 쪽을 보았다."관 하나 쓰는 데 말이 많군. 북강이면 추워서라도 빨리 끝냈다."소월백이 들었다."삭왕 전하께서는 벗기고 싶은 관이라 성급하신 듯합니다.""써야 벗기지."보요의 입술 끝이 잔 너머에서 잠깐 올라갔다. 종친들은 웃지 못하고 목만 가다듬었다.그때 남쪽 성루에서 봉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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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화. 천이백 그릇

"남문을 여세요."보요의 답에 종친 셋이 동시에 일어섰다."가병 천이백이 문밖에 있사옵니다!""닫아 두면 성밖 백성부터 베고 문을 두드릴 겁니다."그녀는 허연교에게 손을 내밀었다."외운 장부에 가병들의 녹도 있습니까.""열 달치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름을 지웠으나 유모가 식구 수를 곁에 적었습니다."허연교는 먹도 없이 빈 종이에 줄을 그었다. 첫 별장의 군사 이백넷, 아내가 있는 자 백서른, 부모를 모시는 자 마흔둘. 둘째 별장과 셋째 별장도 숫자가 이어졌다. 군량을 판 금전은 허씨 내탕으로 들었으나 가병에게 나간 녹은 석 달째 끊겨 있었다."천이백 명이 허씨의 밥을 먹었다 하셨지요."그녀가 아버지를 보았다."아닙니다. 저들이 허씨를 열 달 먹였습니다."남문 위에는 허씨 깃발이 들판 끝까지 찼다. 누런 먼지 속에 농기구를 고쳐 만든 창과 낡은 활이 섞여 있었다. 앞줄의 별장들은 갑옷을 입었으나 뒤에는 짚신도 맞지 않는 소작인들이 서 있었다.진묵은 금군 서른셋만 데려갔다. 검은 겉옷 안에는 갑주도 없었다. 보요가 그의 손목에 새 무명을 감고 매듭을 지었다."칼은 뽑지 마세요.""저쪽이 먼저 뽑으면.""손만 베세요.""많이 봐줬군."그는 순순히 팔을 내주고 성루 아래로 내려갔다. 소월백은 황자패를 들고 문 가운데 섰다. 허 도위와 허연교가 그 양쪽을 맡았다.빗장이 들리자 가병들이 함성을 질렀다.그러나 열린 문으로 나온 것은 기병이 아니었다. 큰 솥 열둘과 쌀가마, 허씨 혼수 궤였다. 온가 찬모와 형장에서 풀려난 아낙들이 성밖 길에 솥을 걸었다. 물이 끓고 쌀이 익자 흰 김이 먼지 위로 퍼졌다.쌀에는 조와 수수가 섞였으나 오래 불려 낟알이 부드러웠다. 찬모는 소금과 참기름을 한 방울씩 떨어뜨리고, 잘게 찢은 말린 고기를 그릇마다 얹었다. 뜨거운 김이 굶은 얼굴에 닿자 앞줄의 사나운 눈보다 뒤에 선 아이 같은 눈들이 먼저 흔들렸다.허연교가 첫 궤를 열었다. 비녀와 진주, 금팔찌가 햇빛 아래 쏟아졌다."석 달치 녹을 여기서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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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화. 첫 번째 이름

온 대인은 풀려난 뒤에도 딸에게 가지 않았다.남문 밖 큰 솥 앞에 앉아 허씨 가병의 밥부터 펐다. 부러진 오른손은 가슴에 매단 채 왼손으로 나무주걱을 들었다. 첫 그릇은 허 도위에게, 둘째는 화살을 쏜 별장에게 주었다."먹고 벌을 받아라. 배고픈 자의 말은 절반이 배의 말이다."별장은 손등이 부은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진묵의 장화 자국이 목에 검게 남아 있었다.종묘 앞 뜰에서는 새 판결문이 읽혔다.소월백은 아직 황제의 관을 쓰지 않았다. 종친과 중서성이 선황 친필의 자획, 어새의 깨진 자리, 다섯 고을 관인과 북강 증언을 모두 맞댄 뒤였다. 그는 둘째 황자 옥대를 두르고 계단 아래에 섰다.첫 판결은 태후에게 갔다.황후와 태후의 존호를 거두고 허씨 서인으로 내린다. 귀비 독살, 황자 두 차례 살해 모의, 황명 도용과 내관 둘의 죽음은 종친부와 형부가 함께 묻는다. 판결 전까지 함향전에 가두되 시중은 두지 않는다.태후는 흰 머리를 쓸어 올리며 웃었다."내가 앉힌 옥좌에서 나를 심판하느냐.""아직 앉지 않았습니다."윤태가 태후를 일으켰다. 그녀는 잡힌 팔을 뿌리치고 제 발로 함향전 쪽을 향했다. 지나가던 궁인들이 벽에 붙어 이마를 숙였으나, 예전처럼 무릎 꿇는 이는 없었다. 칠순의 맨머리 위로 가을 볕만 희게 내려앉았다.소월백은 그녀를 보지 않고 다음 글을 들었다.폐위한 황제는 왕호도 봉지도 받지 못한다. 동쪽 선황릉 곁 작은 전각에 머물며 스물여덟 해의 죽음과 스무 해의 침묵을 친필로 적는다. 만나기를 청한 유족이 있으면 거절하지 못한다.흰 중의를 입은 폐제는 고개를 숙였다."받겠다."허 승상에게는 북강 군량 매각과 황명 사칭, 가병을 일으킨 죄로 참형이 내려졌다. 압수한 금전과 농장은 북강 사망자 서른여섯의 집과 굶주린 군사에게 돌린다.허 승상이 딸을 향해 몸을 돌렸다."연교야. 한마디만—"허연교는 오라비의 피 묻은 어깨를 감고 있었다. 눈을 들지 않았다."딸의 빈 수결을 가져다 쓰실 때 이미 다 하셨습니다."허 도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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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화. 아홉 계단

소월백은 아홉 계단을 혼자 올랐다.사흘 동안 비가 내린 뒤의 아침이었다. 젖은 기와는 검고, 편전 뜰에는 새로 씻은 흰 돌이 눈부셨다. 검은 곤룡포 위 금실 용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물결처럼 굽었다. 평생 입던 흰 옷은 보이지 않았으나 백옥 패만 안쪽 옷깃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첫 계단에서 운수 상단 사람들이 이마를 숙였다. 둘째에는 다섯 고을 관원, 셋째에는 북강 장수와 금군이 섰다. 소월백은 어느 쪽도 오래 보지 않았다.상단주들은 비단 관복 대신 낡은 장삼을 입었다. 북강 장수들의 갑옷에는 장례 때 묻은 흙이 아직 남았고, 다섯 고을 아전들은 제가 찍었던 관인의 부본을 품에 안았다. 노궁인은 사람들 맨 뒤에 작은 의자를 받고 앉았다. 잘린 새끼손가락 위로 선귀비의 붉은 끈을 감고 있었다.온 대인과 큰공자는 죄수복을 벗었으나 새 옷을 입지 않았다. 씻어 말린 회색 포의의 터진 자리를 그대로 꿰매 입고 온가 사람들과 섰다. 허연교는 오라비의 빈 금군 자리에서 한참 떨어져 흰 소복의 검은 발자국을 감추지 않았다.아홉째 계단 앞에서 예관이 황제의 관을 들었다. 검은 관에 드리운 붉은 술이 그의 눈가를 스쳤다.북이 아홉 번 울렸다. 매번 다른 문이 열리고, 마지막 울림에는 편전 뒤 종묘문까지 한꺼번에 열렸다. 바람이 긴 뜰을 지나오며 문무백관의 소매를 같은 쪽으로 눕혔다. 소월백의 관술만 얼굴 곁에서 가늘게 떨렸다."폐하, 옥좌를 향해 서시옵소서."그가 몸을 돌렸다.뜰 맨 아래 보요가 보였다. 연한 연두 치마 위에 먹빛 겉옷을 걸쳤고, 둥근 배 앞에는 두 손을 포갰다. 진묵은 바로 곁에 검은 예복을 입고 서 있었다. 왕호 없는 사내의 허리에는 검도 옥대도 없었다.소월백은 더 내려다보지 않고 용상 앞에 앉았다.새 황제의 첫 교지는 남문에서 밥을 받은 가병과 형장에 끌려갔던 백성의 죄를 지웠다. 둘째는 선귀비의 신원을 되돌리고 위패를 모시는 글이었다. 셋째는 북강 군량을 나라 곳간에서 먼저 채우라는 명이었다.넷째 교지가 펼쳐지자 뜰의 시선이 진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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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0화. 마지막 세 걸음

진묵은 정확히 세 걸음 물러났다.편전 문은 열려 있었고 안팎을 가르는 주렴만 내려왔다. 검은 예복 자락이 주렴 밖에 멎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칼집 없는 허리에 얹힌 손의 그림자는 비단 사이로 선명했다.상엄이 새 삭왕 옥대를 들고 다가왔으나 진묵은 손을 저었다. 보요가 안에서 나오기 전에는 매지 않겠다는 듯했다. 노강은 옥대와 의장검을 함께 든 채 한 발 물러났고, 편전 궁인들은 못 본 체 주렴의 구슬 수만 세었다.보요가 아홉 계단을 오르려 하자 소월백이 먼저 내려왔다. 셋째 계단에서 손을 내밀었다가, 주렴 밖의 그림자를 보고 거두었다."혼자 오를 수 있어?""천천히는.""그럼 천천히 와."황제의 곤룡포를 입고도 말은 국숫집 평상에서처럼 짧았다. 보요는 난간을 짚고 올라가 용상 아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소월백은 용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맞은편 계단에 앉았다.상 위에는 맑은 차 두 잔과 백옥 패가 놓였다. 차에서는 막 덖은 어린 잎 냄새가 났다. 그는 제 잔을 들지 않았다."가?""가야지.""언제.""닷새 뒤.""벌써 가는구나.""오래 있었어.""알아."주렴 밖에서 옷깃 스치는 소리가 났다. 진묵이 같은 자리에 서 있는지 그림자 끝이 조금 짙어졌다.소월백이 백옥 패를 보요 쪽으로 밀었다. 스무 해 전 국숫집 평상에서 맡겼다가, 어머니의 이름을 찾는 동안 다시 꺼냈던 물건이었다."이건 네가 가지고 있어.""황제 신물이야.""내가 살아 있는 걸 처음 믿은 사람 물건이기도 해.""월백.""돌려달라는 말은 안 할게."그는 웃었다. 황제의 관에 드리운 붉은 술이 눈을 가려, 웃음이 오래 남지 못했다.보요는 패를 집지 않았다. 대신 목에서 침향 매듭을 풀었다. 진묵의 것과 반으로 나눈 끈이었다. 그 아래에 패를 묶어 다시 소월백 쪽으로 밀었다."잃지 마. 네 어머니가 네 가슴에 닿게 길이를 잰 거야.""너는 늘 내 것을 돌려주네.""네 거니까.""한 번도 내 것이 아니었던 건."말이 거기서 멎었다. 보요는 답을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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