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os capítulos de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Capítulo 21 - Capítulo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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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살아남는 것부터

다행히 미선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응급 처치와 며칠간의 집중 치료 끝에, 그녀의 상태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갔다. 위태롭게 이어지던 숨이 조금씩 고르게 돌아왔고, 각종 수치들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히려 휘웅의 마음은 그때부터 더 무거워지기 시작했다.담당 의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상태를 설명했다.“산모분이 그동안 제대로 식사를 못 하신 것 같습니다. 영양 상태가 많이 안 좋아요. 태아도 임신 주수에 비해 발육이 더딘 편이고요.”서류를 넘기던 의사는 고개를 들어 휘웅을 바라봤다.“지금부터라도 관리가 중요합니다. 이 상태가 계속되면, 산모도 태아도 위험해질 수 있어요.”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낯선 나라. 통하지 않는 말. 곁에 아무도 없던 시간들. 그 모든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전화를 피했다.며칠에 한 번, 안부를 묻는 것조차 버거워하며 미뤘던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그 생각이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미안함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원망이 뒤엉켜 가슴을 짓눌렀다. 숨이 막히는 것처럼 답답했다.병실로 돌아왔을 때, 미선은 잠든 상태였다.수액이 연결된 팔은 가늘었고, 얼굴은 놀랄 만큼 창백했다. 이불 위로 드러난 손등은 핏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휘웅은, 조용히 결심했다. 이건 더 이상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그는 병실을 나와 본가에 전화를 걸었다.몇 번의 신호음 끝에,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상황을 설명하는 내내, 목소리는 점점 가라앉았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휘웅아… 우리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그 말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듣자 더 무겁게 내려앉았다.“그 애가 정말 네 형 아이를 가진 게 맞는지… 우리도 확신할 수가 없잖니. 형은 이미 없는데, 무슨 근거로…”말끝이 흐려졌다.매정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감당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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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비 오는 옥상

병실 문을 열었을 때, 미선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링거 거치대만 덩그러니 서 있었고, 반쯤 흘러내린 이불 끝이 허공에 늘어져 있었다.“미선 씨?”대답은 없었다. 화장실 문도 열려 있었다.그 순간, 휘웅의 등줄기를 서늘한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그는 본능처럼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 간호사를 붙잡았다.“저기, 703호 환자분 못 보셨어요? 안 계세요.”간호사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스쳤다. 곧 병원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휘웅은 정신없이 복도를 달렸다.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 계단으로 향하고, 로비와 화장실을 번갈아 확인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미선의 모습은 없었다.창밖으로는 어느새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다.'설마.'머릿속을 스친 그 생각에, 휘웅은 곧장 비상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한 칸씩 뛰어오를수록 가슴은 더 빠르게, 더 거칠게 뛰었다.옥상 문을 밀어젖힌 순간, 차가운 빗줄기가 얼굴을 사납게 때렸다.그리고 그곳에, 미선이 있었다.환자복 차림 그대로, 비를 흠뻑 맞은 채 난간 앞에 서 있는 가녀린 몸이 빗속에서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미선 씨!”휘웅의 외침에 미선이 천천히 돌아보았다.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눈물인지 빗물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입술은 떨리고 있었다.“오지 마.”“미선 씨, 제발… 거기서 내려와요.”휘웅은 한 걸음도 함부로 떼지 못한 채, 최대한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하지만 미선은 난간을 놓지 않았다.“나… 아무것도 아니야.”그녀의 목소리는 비에 젖은 종잇장처럼 얇았다.“여기서 그냥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사람이야.”“무슨 소리예요. 아이는요. 아이 생각은 안 해요?”그 말에 미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비에 젖은 얼굴 위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분노인지 절망인지 모를 것들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었다.“그 아이도… 나처럼 될 거야.”미선은 떨리는 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아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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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책임이라는 말

옥상에서의 그 밤 이후로도, 미선의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들은 서서히 아물어갔지만, 마음은 그 자리에 멈춰버린 듯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그녀는 점점 더 말을 잃어갔다. 누군가 말을 걸어도 대답 대신 짧은 숨만 내쉬었고, 시선은 늘 어딘가 먼 곳에 머물러 있었다. 병실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휘웅의 불안도 함께 깊어졌다.가장 큰 문제는 식사였다. 간호사가 가져다주는 식판은 번번이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 물러났다. 억지로 몇 숟갈을 떠먹이려 하면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돌렸고, 결국 그마저도 포기하는 일이 반복됐다.수액에 의지하는 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미선은 간병인의 눈을 피해 링거 바늘을 뽑아버리기 일쑤였고, 어느 날은 수액 줄이 바닥에 늘어진 채 텅 빈 병상만 남아 있는 일도 있었다. 간병인이 급히 그녀를 찾아 나서야 했다.“미선 씨, 이러면 안 돼요. 이러다 정말 큰일 나요.”휘웅이 몇 번이고 설득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미선은 그저 벽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자신을 세상과 단절시키듯 눈을 감아버렸다.담당 의사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굳어갔다.“산모분 상태가 계속 나빠지고 있습니다. 영양 결핍이 심각해요. 태아 체중도 임신 주수에 비해 현저히 낮습니다. 지금 8개월인데, 추정 체중이 1킬로그램 남짓입니다.”의사는 잠시 말을 고르더니, 더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이대로 가면 자연 분만은커녕, 태아 생존 자체가 위험할 수 있습니다.”그 말을 들을 때마다 휘웅의 심장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머릿속으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받아들이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그는 매일 병실을 지켰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말없이 곁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손을 잡고, 때로는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내가 방법을 찾아본다고 했잖아요.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줘요.”그 말은 점점 더 힘을 잃어갔다.“반드시 찾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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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마지막 데이트

미선은 큰 소동을 일으키고 난 후 한동안 잠잠했다. 휘웅이 뜬금없이 데이트를 하자고 했을 때, 지호는 눈을 깜빡였다.“지금요?”“응. 우리, 제대로 된 데이트 해본 적 별로 없잖아.”지호는 괜히 웃음이 났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로, 둘은 함께 있어도 늘 어딘가 급한 사람들처럼 지나쳐 온 적이 많았다.“갑자기 왜 그래요?”“그냥. 오늘은 너랑 있고 싶어서.”그 말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지호는 오히려 잠깐 멈칫했다. 평소보다 조용한 얼굴이었지만, 그 조용함이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그가 데려간 곳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놀이공원이었다.입구를 지나자마자 지호는 피식 웃었다.“왜 또 여기예요?”“처음 생각나서.”휘웅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지만, 지호는 그 짧은 말이 괜히 좋았다. 처음 왔던 날의 어색한 공기, 회전목마 불빛, 별것 아닌 대화까지 그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가슴이 조금 간질거렸다.둘은 오래 걷고, 군것질을 나눠 먹고, 놀이기구도 여러 개 탔다. 생각보다 휘웅이 더 신나 보여서 지호는 자꾸 웃음이 났다. 정작 놀이기구를 탈 때마다 지호는 심장이 쿵쾅거려서 정신이 없었는데, 그게 스릴 때문인지 옆자리 휘웅 때문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됐다.“오빠, 왜 이렇게 좋아해요?”“네가 웃어서. 네가 웃는 거 좋으니까.”지호는 그 말에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귀까지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괜히 물병만 만지작거렸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람 마음을 흔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해가 기울 무렵, 둘은 회전목마 앞에 섰다.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말들이 천천히 원을 그리자, 지호는 문득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회전목마에서 흘러나오던 피아노 선율.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음악.지호가 먼저 말을 꺼냈다.“오빠.”휘웅이 돌아보자, 지호는 살짝 웃었다.“그날 회전목마에서 나오던 음악 있잖아요.”“응.”“아직도 찾아서 듣고 있어요.”“그 노래 제목이 뭔지 알아요?”휘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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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침묵의 기억

지호가 오르디노에 도착한 건 한겨울이었다.산맥의 능선은 희뿌옇게 흐려져 있었고, 피레네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갑고 얇았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 양옆에는 짙은 초록빛 침엽수 숲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나뭇가지 끝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희미하게 붙어 있었다.오르디노는 안도라 북쪽, 산기슭을 따라 낮고 조용하게 들어앉은 마을이었다. 화려한 풍경보다도 묵직한 고요가 먼저 닿는 곳이었다. 집들은 대부분 낮고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고, 거친 돌벽과 짙은 갈색 나무 창틀, 검은 슬레이트 지붕이 겨울빛 속에서 더 단단해 보였다. 골목은 넓지 않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딱 맞을 정도였고, 자동차 소리보다 바람이 벽을 스치는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지호는 작은 캐리어를 끌며 천천히 걸었다. 노트북과 잠옷, 속옷 몇 개, 외투와 여벌 옷 한두 벌. 정말 최소한의 짐만 챙긴 여행이었다.처음부터 어딘가를 보러 온 건 아니었다. 방송국 드라마 미니시리즈를 준비하던 작업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막혀 버렸다.몇 날 며칠을 붙잡고 있어도 한 줄이 써지지 않았고, 머릿속은 점점 텅 비어 갔다.지호는 10년 가까이 집에 틀어박혀 지내다시피 했다. 사람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대학 시절 단짝이던 유진과 남편 동학이 가끔 들르긴 했지만, 그마저도 지호에게는 쉽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아픈 기억과 맞닿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늘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그녀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약속을 미뤘다.같은 공간에 오래 머물수록 생각은 더 굳어 갔다.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는 새로운 장면도, 새로운 문장도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지호는 자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여행을 계획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보다, 여행의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좋았다. 혼자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마을을 골랐다.숙소는 마을 변두리에 있는 작은 민박집이었다. 돌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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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상처가 없는 척 살아가기

지호는 민박집 거실 한가운데 멈춰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있었지만, 당장 노트북을 펼칠 마음은 나지 않았다. 마감이 아주 먼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숨이 턱 막힐 만큼 바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지호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바쁘지도, 한가하지도 않은 시간을 길게 끌어안은 채, 스스로를 조용한 곳에 가둔 채 버텨 왔다.벌써 10년이었다.유진은 결국 대학 시절 만난 동학과 결혼했다.지호는 학교를 그만둔 뒤, 드라마 작가라는 이름만 붙여 둔 채 사실상 은둔하듯 지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전화도 잘 받지 않았고, 세상과의 거리를 일부러 넓혔다. 그 와중에도 드라마 다섯 편을 성공시켜 얼굴 없는 유명 작가가 되었다. 써낸 작품들은 하나같이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지호 자신은 그 장르와는 정반대처럼 어둡고 가라앉은 사람이었다. 작업이 막히면 더 깊이 숨었고, 마음이 흔들리면 더 오래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 생활은 오래된 버릇처럼 몸에 붙어 있었다. 조용한 시간은 편안한 동시에 잔인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는, 아무 일도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어쩌면 지호는 그저 익숙한 방식을 반복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상처를 잊는 대신, 상처가 없는 척 살아가는 방식.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표정을 지우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식.그 무렵 한 번, 지호는 간신히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동학에게서 전해 들은 말 때문이었다. 휘웅이 어쩌면 결혼식에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정확히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흘러나온 소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호는 그 한마디에 무너질 만큼 오래 휘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지 않으면 끝내 놓아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지호는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일도, 낯선 음악과 축하 인사들 사이에 서 있는 일도 모두 낯설었지만, 그날만큼은 꼭 휘웅을 보고 싶었다.그러나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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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낯선 울음

김진섭이 오르디노에 도착한 건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안도라라는 나라는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고, 오르디노는 그중에서도 더 한적한 마을이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겨울빛은 이미 기울어 골목 사이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 진섭은 캐리어를 한 손에 끌며 마을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그는 원래 겨울을 좋아했다. 차가운 공기, 바삭한 눈, 하얗게 내려앉은 산맥의 풍경은 늘 마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안도라는 스키로 유명한 나라였다. 진섭은 겨울 스포츠도 좋아했고, 작은 나라 특유의 아담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며칠쯤 머무르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았다. 오르디노는 겨울의 설경을 보기 위해 들른 첫 번째 목적지였고, 그는 이곳에서 며칠을 머문 뒤 스키를 타기 위해 솔데우로 옮길 생각이었다.이번 여행은 심기일전의 의미에 가까웠다.조연 배우로 활동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진섭은 아직도 제대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광고에서 그는 늘 어딘가에 있었고 어딘가에 없었다. 누군가의 친구, 동료, 형, 스쳐 가는 행인, 이름 없는 술집 손님. 존재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중심에 선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연예인이라는 자부심을 버린 적은 없었다.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분명히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최근 1년은 유난히 길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았다. 오디션도, 섭외도, 연락도 뜸했다. 불려 갈 일이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사람을 빨리 약하게 만들었다. 시작은 작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점점 무뎌졌다. 이러다 정말 연기를 포기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진섭은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낯선 곳을 골랐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도, 굳이 말을 붙이는 사람도 없는 곳. 잠시라도 배우 김진섭이 아니라 그냥 여행객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오르디노는 그런 점에서 제격이었다. 사람이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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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문 앞의 그림자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림자를 보는 순간, 지호는 심장이 아래로 꺼지는 것 같았다.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길게 떨어지는 코트 자락과 목도리까지.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던 사람과 너무 닮아 있었다. 휘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는 그 짧은 순간, 지호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몇 초도 되지 않는 찰나였지만, 그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문밖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는 분명 휘웅을 닮아 있었다. 지호는 거의 반사적으로 거실 불을 켰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공간이 환하게 밝아지며 문 앞의 남자를 드러냈다.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휘웅이 아니었다.낯선 남자는 키가 컸다.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듯한 구리빛 피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또렷한 이목구비와 날렵한 턱선이 단단한 인상을 만들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균형 잡힌 체격은 한눈에 봐도 운동을 오래 해온 사람처럼 보였다.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무언가에 주눅 들거나 숨는 기색이 전혀 없는, 여유롭고 단단한 분위기였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존재감이 선명한 타입의 남자였다.지호는 그를 한 번 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애매한 얼굴. 그건 묻고 싶은 기색과 모른 척하고 싶은 기색이 동시에 섞인 표정이었다. 지호는 그가 왜 저렇게 서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누구세요?”지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진섭은 아주 잠깐 지호를 바라보다가, 시선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듣기 편한 톤이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기운이 묻어 있었다.“아,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저도 이 숙소에 묵으려고 왔어요.”짧은 대화가 오갔고, 몇 마디 더 나누는 동안 둘은 금세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국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지호는 묘하게 더 당황했다. 낯선 나라의 조용한 민박집에서 한국어를 듣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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