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섭이 오르디노에 도착한 건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안도라라는 나라는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고, 오르디노는 그중에서도 더 한적한 마을이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겨울빛은 이미 기울어 골목 사이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 진섭은 캐리어를 한 손에 끌며 마을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그는 원래 겨울을 좋아했다. 차가운 공기, 바삭한 눈, 하얗게 내려앉은 산맥의 풍경은 늘 마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안도라는 스키로 유명한 나라였다. 진섭은 겨울 스포츠도 좋아했고, 작은 나라 특유의 아담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며칠쯤 머무르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았다. 오르디노는 겨울의 설경을 보기 위해 들른 첫 번째 목적지였고, 그는 이곳에서 며칠을 머문 뒤 스키를 타기 위해 솔데우로 옮길 생각이었다.이번 여행은 심기일전의 의미에 가까웠다.조연 배우로 활동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진섭은 아직도 제대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광고에서 그는 늘 어딘가에 있었고 어딘가에 없었다. 누군가의 친구, 동료, 형, 스쳐 가는 행인, 이름 없는 술집 손님. 존재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중심에 선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연예인이라는 자부심을 버린 적은 없었다.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분명히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최근 1년은 유난히 길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았다. 오디션도, 섭외도, 연락도 뜸했다. 불려 갈 일이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사람을 빨리 약하게 만들었다. 시작은 작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점점 무뎌졌다. 이러다 정말 연기를 포기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진섭은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낯선 곳을 골랐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도, 굳이 말을 붙이는 사람도 없는 곳. 잠시라도 배우 김진섭이 아니라 그냥 여행객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오르디노는 그런 점에서 제격이었다. 사람이 많지
Última atualização : 2026-08-05 Ler ma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