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29. 낯선 울음

Author: 지호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5 10:19:00

김진섭이 오르디노에 도착한 건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

안도라라는 나라는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고, 오르디노는 그중에서도 더 한적한 마을이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겨울빛은 이미 기울어 골목 사이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

진섭은 캐리어를 한 손에 끌며 마을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그는 원래 겨울을 좋아했다. 차가운 공기, 바삭한 눈, 하얗게 내려앉은 산맥의 풍경은 늘 마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안도라는 스키로 유명한 나라였다.

진섭은 겨울 스포츠도 좋아했고, 작은 나라 특유의 아담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며칠쯤 머무르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았다. 오르디노는 겨울의 설경을 보기 위해 들른 첫 번째 목적지였고, 그는 이곳에서 며칠을 머문 뒤 스키를 타기 위해 솔데우로 옮길 생각이었다.

이번 여행은 심기일전의 의미에 가까웠다.

조연 배우로 활동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진섭은 아직도 제대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드라마에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ocked Chapter

Latest chapter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32. 또 다른 방향

    지호의 발목은 생각보다 금방 괜찮아졌다.하루 정도 차가운 찜질을 하자 붓기가 많이 가라앉았고, 발목도 처음처럼 욱신거리지는 않았다. 그래도 완전히 나은 건 아니어서 무리하면 안 됐고, 아직 눈길은 미끄러워 다시 넘어질 위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진섭은 지호를 어린아이 다루듯 챙겼다.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먼저 나서서 말렸고, 식재료가 떨어져 마트를 다녀와야 할 때도 제일 먼저 밖으로 나갔다. 지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처음엔 그 호의가 낯설었다. 익숙하지 않은 친절은 언제나 조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진섭은 그런 지호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다친 사람은 가만히 쉬어야 한다는 듯, 그는 지호를 공주 모시듯 대했다. 덕분에 지호는 방 안과 거실 사이를 오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오르디노는 날씨에 따라 인터넷이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했다. 틈틈이 대본을 써도 전송이 되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작업을 핑계 삼아 시간을 보내기엔 이곳은 너무 조용했고, 조용한 만큼 지호의 생각도 자주 같은 곳으로 흘렀다. 이 추운 겨울은 매 순간 휘웅을 떠올리게 했다. 벽난로 앞에 앉아 있어도, 창밖의 눈을 바라보고 있어도, 결국 마음 한구석은 그 사람에게 닿아 있었다.지호는 더는 이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진섭의 호의가 불편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이 마을은 지호에게 너무 많은 기억을 불러냈다. 머무는 동안마다 휘웅의 흔적이 자꾸만 겹쳐졌다. 그럴수록 지호는 더 지쳐 갔다. 잠깐 머물다 가려고 온 여행이었지만, 지금은 여기서 더 버티고 싶지 않았다.그날은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인터넷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지호는 노트북을 켜고, 무심한 표정으로 검색창에 글자를 입력했다.우유니 사막.화면에 뜬 사진을 보는 순간, 예전에 바탕화면에 띄워 두었던 이미지가 떠올랐다. 한참을 넋 놓고 바라보던 기억도 함께 따라왔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듯한 풍경. 끝이 보이지 않는 소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31. 아침과 저녁 사이

    진섭은 늦잠을 잤다.밤새 뒤척인 탓인지 몸은 무거웠고, 눈을 떠도 한동안 정신이 맑아지지 않았다. 어제 본 지호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울음을 삼키다 나온 듯한 붉은 눈가, 불빛 아래에서 유난히 하얗게 보이던 얼굴, 그리고 문 앞에 서서도 쉽게 안으로 들이지 않던 그 경계심까지. 그는 괜히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방 안은 조용했다. 진섭은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쉬고, 어디선가 스미듯 퍼져 오는 커피 향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거실을 지나 주방 쪽으로 걸어가자, 지호가 서 있었다. 커피 포트가 끓고 있었고, 지호는 그 옆에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마치 이 집의 원래 주인처럼, 익숙한 손놀림으로 재료를 꺼내고 접시를 챙기고 있었다.진섭은 잠깐 창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잠옷 위로 겉옷을 대충 걸친 모습이 영 성의 없어 보여서, 그는 무의식적으로 매무새를 고쳤다. 그 뒤에야 지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굿모닝이요.”지호는 고개만 아주 조금 끄덕였다. 대답은 없었지만, 거절도 아니었다. 그냥 그 정도만 허락하겠다는 식의 표정이었다.진섭은 그런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주방 쪽을 기웃거렸다. 식탁 위에는 간단한 아침상이 하나씩 차려지고 있었다. 계란프라이, 살짝 구운 베이글 반쪽, 베이컨 두 줄, 커피, 그리고 바나나와 사과가 담긴 작은 바구니까지.“아침은 각자 해 먹는 게 룰이긴 한데요.”지호가 짧게 말했다.“하는 김에 조금 더 했어요.”그 말에는 별다른 온도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갑기만 한 건 아니었다.지호는 다시 말이 없었다. 진섭은 그 침묵이 어색해서, 또는 어색한 걸 못 견뎌서였는지 곧바로 말을 잇기 시작했다.“와, 이 집 아침 되게 괜찮네요.”그는 식탁을 한 번 훑어보고는 웃었다.“원래 이렇게 잘 차리세요?”지호는 대답 대신 그를 바라봤다. 말이 많은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던지는 말들은 가볍고 빠르지만, 귀에 거슬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30. 문 앞의 그림자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림자를 보는 순간, 지호는 심장이 아래로 꺼지는 것 같았다.실루엣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큰 키에 넓은 어깨, 길게 떨어지는 코트 자락과 목도리까지. 방금까지 머릿속에서 떠올리고 있던 사람과 너무 닮아 있었다. 휘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는 그 짧은 순간, 지호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몇 초도 되지 않는 찰나였지만, 그 시간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문밖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는 분명 휘웅을 닮아 있었다. 지호는 거의 반사적으로 거실 불을 켰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던 공간이 환하게 밝아지며 문 앞의 남자를 드러냈다.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휘웅이 아니었다.낯선 남자는 키가 컸다.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린 듯한 구리빛 피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또렷한 이목구비와 날렵한 턱선이 단단한 인상을 만들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균형 잡힌 체격은 한눈에 봐도 운동을 오래 해온 사람처럼 보였다. 자세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무언가에 주눅 들거나 숨는 기색이 전혀 없는, 여유롭고 단단한 분위기였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존재감이 선명한 타입의 남자였다.지호는 그를 한 번 보고는, 곧바로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애매한 얼굴. 그건 묻고 싶은 기색과 모른 척하고 싶은 기색이 동시에 섞인 표정이었다. 지호는 그가 왜 저렇게 서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런데도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누구세요?”지호가 조심스럽게 묻자, 진섭은 아주 잠깐 지호를 바라보다가, 시선의 방향을 바꾸지 않은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다. 듣기 편한 톤이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기운이 묻어 있었다.“아, 놀라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저도 이 숙소에 묵으려고 왔어요.”짧은 대화가 오갔고, 몇 마디 더 나누는 동안 둘은 금세 같은 언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국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지호는 묘하게 더 당황했다. 낯선 나라의 조용한 민박집에서 한국어를 듣게 될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29. 낯선 울음

    김진섭이 오르디노에 도착한 건 오후 늦은 시각이었다.안도라라는 나라는 생각보다 훨씬 조용했고, 오르디노는 그중에서도 더 한적한 마을이었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겨울빛은 이미 기울어 골목 사이로 길게 번지고 있었다. 진섭은 캐리어를 한 손에 끌며 마을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섰다.그는 원래 겨울을 좋아했다. 차가운 공기, 바삭한 눈, 하얗게 내려앉은 산맥의 풍경은 늘 마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무엇보다 안도라는 스키로 유명한 나라였다. 진섭은 겨울 스포츠도 좋아했고, 작은 나라 특유의 아담한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며칠쯤 머무르기에는 딱 좋을 것 같았다. 오르디노는 겨울의 설경을 보기 위해 들른 첫 번째 목적지였고, 그는 이곳에서 며칠을 머문 뒤 스키를 타기 위해 솔데우로 옮길 생각이었다.이번 여행은 심기일전의 의미에 가까웠다.조연 배우로 활동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지만, 진섭은 아직도 제대로 이름을 알리지 못했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광고에서 그는 늘 어딘가에 있었고 어딘가에 없었다. 누군가의 친구, 동료, 형, 스쳐 가는 행인, 이름 없는 술집 손님. 존재감이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중심에 선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는 연예인이라는 자부심을 버린 적은 없었다.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서는 순간만큼은 자신이 분명히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고 믿었다.하지만 최근 1년은 유난히 길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아주지 않았다. 오디션도, 섭외도, 연락도 뜸했다. 불려 갈 일이 없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사람을 빨리 약하게 만들었다. 시작은 작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점점 무뎌졌다. 이러다 정말 연기를 포기해야 하나, 그런 생각도 스멀스멀 올라왔다. 진섭은 그 생각을 지우기 위해 일부러 낯선 곳을 골랐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도, 굳이 말을 붙이는 사람도 없는 곳. 잠시라도 배우 김진섭이 아니라 그냥 여행객으로 있을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오르디노는 그런 점에서 제격이었다. 사람이 많지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28. 상처가 없는 척 살아가기

    지호는 민박집 거실 한가운데 멈춰 선 채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작업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분명 있었지만, 당장 노트북을 펼칠 마음은 나지 않았다. 마감이 아주 먼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숨이 턱 막힐 만큼 바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지호는 늘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바쁘지도, 한가하지도 않은 시간을 길게 끌어안은 채, 스스로를 조용한 곳에 가둔 채 버텨 왔다.벌써 10년이었다.유진은 결국 대학 시절 만난 동학과 결혼했다.지호는 학교를 그만둔 뒤, 드라마 작가라는 이름만 붙여 둔 채 사실상 은둔하듯 지냈다. 사람을 만나지 않았고, 전화도 잘 받지 않았고, 세상과의 거리를 일부러 넓혔다. 그 와중에도 드라마 다섯 편을 성공시켜 얼굴 없는 유명 작가가 되었다. 써낸 작품들은 하나같이 로맨틱 코미디였지만, 지호 자신은 그 장르와는 정반대처럼 어둡고 가라앉은 사람이었다. 작업이 막히면 더 깊이 숨었고, 마음이 흔들리면 더 오래 방 안에 틀어박혔다. 그 생활은 오래된 버릇처럼 몸에 붙어 있었다. 조용한 시간은 편안한 동시에 잔인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시간 속에서는, 아무 일도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어쩌면 지호는 그저 익숙한 방식을 반복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상처를 잊는 대신, 상처가 없는 척 살아가는 방식.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표정을 지우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시간을 흘려보내는 방식.그 무렵 한 번, 지호는 간신히 집 밖으로 나간 적이 있었다.동학에게서 전해 들은 말 때문이었다. 휘웅이 어쩌면 결혼식에 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정확히 근거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그냥 흘러나온 소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지호는 그 한마디에 무너질 만큼 오래 휘웅을 기다리고 있었다. 믿고 싶어서가 아니라, 믿지 않으면 끝내 놓아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지호는 오랜만에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일도, 낯선 음악과 축하 인사들 사이에 서 있는 일도 모두 낯설었지만, 그날만큼은 꼭 휘웅을 보고 싶었다.그러나 결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27. 침묵의 기억

    지호가 오르디노에 도착한 건 한겨울이었다.산맥의 능선은 희뿌옇게 흐려져 있었고, 피레네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갑고 얇았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 양옆에는 짙은 초록빛 침엽수 숲이 끝도 없이 이어졌고, 나뭇가지 끝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희미하게 붙어 있었다.오르디노는 안도라 북쪽, 산기슭을 따라 낮고 조용하게 들어앉은 마을이었다. 화려한 풍경보다도 묵직한 고요가 먼저 닿는 곳이었다. 집들은 대부분 낮고 오래된 석조 건물이었고, 거친 돌벽과 짙은 갈색 나무 창틀, 검은 슬레이트 지붕이 겨울빛 속에서 더 단단해 보였다. 골목은 넓지 않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딱 맞을 정도였고, 자동차 소리보다 바람이 벽을 스치는 소리가 더 또렷하게 들렸다.지호는 작은 캐리어를 끌며 천천히 걸었다. 노트북과 잠옷, 속옷 몇 개, 외투와 여벌 옷 한두 벌. 정말 최소한의 짐만 챙긴 여행이었다.처음부터 어딘가를 보러 온 건 아니었다. 방송국 드라마 미니시리즈를 준비하던 작업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막혀 버렸다.몇 날 며칠을 붙잡고 있어도 한 줄이 써지지 않았고, 머릿속은 점점 텅 비어 갔다.지호는 10년 가까이 집에 틀어박혀 지내다시피 했다. 사람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 대학 시절 단짝이던 유진과 남편 동학이 가끔 들르긴 했지만, 그마저도 지호에게는 쉽게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아픈 기억과 맞닿아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늘 부담스러웠고, 그래서 그녀는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약속을 미뤘다.같은 공간에 오래 머물수록 생각은 더 굳어 갔다.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는 새로운 장면도, 새로운 문장도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지호는 자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여행을 계획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보다, 여행의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좋았다. 혼자 있어도 어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되는 조용한 마을을 골랐다.숙소는 마을 변두리에 있는 작은 민박집이었다. 돌집을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