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dos os capítulos de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Capítulo 61 - Capítulo 70

86 Capítulos

61. 할 말이 없어서

한참의 침묵 끝에, 휘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씀드리겠습니다.”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는 책상 모서리를 짚은 채,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송경숙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이 드라마, 지호의 작품 맞습니다.”송경숙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의 분노는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고, 이제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긴장만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다만.”휘웅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저는 그녀의 오랜 친구입니다. 아버지의 이혼과 동시에, 지호는 외부와의 인연을 전부 끊어 버렸습니다. 10년 동안, 정말 단 한 명도 만나지 않고 그 집 안에서만 지냈습니다.”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십 년이라는 숫자가 허공에 놓이자, 집무실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런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송경숙 씨를 캐스팅하기로 했습니다.”송경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믿든 안 믿든, 그건 송경숙 씨 마음입니다.”휘웅의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감출 것이 없다는 듯, 오히려 차분해진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호도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엄연히 가해자고요.”그 말에 송경숙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정작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저 대본만 썼습니다. 원래도 얼굴 없는 작가로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이번 작품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도, 사실은 순전히 송경숙 씨를 캐스팅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는 조건이었습니다.”집무실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송경숙은 그 자리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 한가운데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분노인가.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인가.그것도 아니면, 도무지 이름 붙일 수 없는 다른 무언가인가.송경숙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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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셋이 마주하기 전

지호는 오랜만에 촬영장에 나와 있었다.오늘은 진섭의 분량이 많은 날이었다. 촬영장 한쪽 모니터 앞에 앉아, 지호는 그가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봤다.〈가면의 집〉은 애초에 딸과 엄마, 두 여자의 이야기였다.무너진 가정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애쓰는 두 사람.그 곁을 지키는 남자친구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크지 않았다.애초에 사랑 이야기를 하려던 작품이 아니었으니까.게다가 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남자친구 캐릭터가, 사실은 지난 십 년 동안 자신이 써 온 수많은 로맨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과 뿌리가 같다는 걸.키가 크고, 다정하고, 한 사람만 오래 바라보는 남자.그 얼굴을 이번 작품에서까지 크게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충분히 써먹은 인물이었다.그런데도.모니터 속 진섭이 대사를 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다른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저 장면, 조금만 더 늘려도 좋을 텐데.''저기서 대사 한 줄만 더 넣으면 훨씬 살아날 텐데.'그런 생각이 스칠 때마다, 지호는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다.'안 돼. 이 작품에 사심 담는 건 송경숙 한 명으로 충분해.'이 드라마는 철저히 계산된 복수였다. 그 계산 안에 자신의 사적인 감정까지 섞어 넣는 순간, 작품 전체의 균형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지호는 그 욕심을 애써 눌러 담으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촬영은 예정보다 조금 늦게 끝났다. 마지막 테이크까지 무사히 오케이가 난 뒤, 진섭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호에게 다가왔다.“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왜요?”“제가 예약해 둔 데가 있어서요.”진섭이 씩 웃으며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혜화역 근처에 볼리비아 음식점 있대요. 거기 알아봤는데, 사장님이 진짜 볼리비아 사람이래요.”지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진짜요?”“네! 우유니 사막 얘기했더니 반가워하시더라고요. 오늘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해 주신다고 했어요.”진섭은 신이 난 얼굴로 말을 쏟아냈다. 그날 시장에서 샀던 부적 얘기, 마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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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엇갈린 길

촬영장 주차장 앞, 진섭은 차 문을 열려던 손을 잠시 멈췄다.멀리서 낯익은 실루엣이 다가오고 있었다. 회식장에서 처음 마주쳤던, 그 대표였다.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거리는 아직 제법 있었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진섭은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평소의 여유롭던 얼굴이 아니었다. 걸음걸이도, 표정도, 무언가에 쫓기듯 조급해 보였다.'저 사람, 오늘은 뭔가 심상치 않아.'진섭은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확신했다. 지금 저 사람과 지호를 마주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인 감이었다.저 불안한 눈빛으로 다가오는 사람 앞에, 아무것도 모르는 지호를 그대로 세워 둘 수는 없었다.“지호 씨, 얼른 타요.”진섭은 서둘러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왜요? 뭐 두고 왔어요?”“아니, 그냥. 빨리 가서 배부터 채워야죠.”지호는 별생각 없이 차에 올라탔다. 진섭은 곧바로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백미러로 슬쩍 뒤를 확인했을 때, 휘웅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차는 그대로 주차장을 빠져나갔다.휘웅은 조급하게 걷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멀어지는 차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낮게 숨을 뱉었다.“…하.”헛웃음이 새어 나왔다.“김진섭, 진짜……”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자신을 보고, 일부러 피한 거였다. 그 눈치 빠른 얼굴이 무엇을 감지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지호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 사실이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내려앉았다.오늘 여기까지 온 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으로 직접 전하고 싶어서였다.그런데 그 기회가 이렇게 허무하게 미끄러져 버렸다.볼리비아 음식점은 생각보다 훨씬 소박하고 예쁜 곳이었다.작은 골목 안쪽, 간판도 크지 않은 가게였다.안으로 들어서자 낯익은 향신료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우유니에서 먹었던 그 라마 스테이크집의 냄새와 비슷했다.“라마 스테이크는 없어요?”지호가 장난스럽게 묻자, 진섭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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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털어놓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지호는 한동안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앉아 있었다.식당 안의 소란스러움도, 진섭이 건네는 말도 잠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송경숙은 이제 알았겠지.'그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두렵기보다는, 궁금했다. 그녀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 어떤 말을 할지. 십 년 넘게 상상만 해 왔던 순간이 드디어 현실이 되려 하고 있었다.피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혼자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지호 씨?”진섭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지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진섭 씨.”“네.”“저 할 얘기가 있어요.”두 사람은 식당을 나와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지호는 그 차가움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해 주는 것 같았다.“사실은요.”지호는 오랫동안 눌러 왔던 말을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저희 부모님, 제가 스무 살 때 이혼하셨어요.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셨거든요.”진섭은 아무 말 없이 귀를 기울였다.“그 상대가…… 송경숙 배우예요.”순간 진섭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는 끼어들지 않고 계속 듣기만 했다.“그러니까, 〈가면의 집〉은 그냥 드라마가 아니었어요. 처음부터 그 사람을 캐스팅하려고 짜 놓은 작품이었어요. 엄마 역할로 앉혀서, 실제로 자신이 저지른 일을 거꾸로 연기하게 만들려고요.”말을 하는 지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는 오랫동안 삭혀 온 감정이 배어 있었다.“복수하고 싶었어요. 아주 오랫동안. 그런데……”지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막상 이렇게 되고 나니까, 마음이 편치가 않아요.”“왜요?”진섭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모르겠어요.”지호는 고개를 저었다.“그 사람이 날 원망하고 있을까 봐. 아니, 원망할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그런데도 자꾸 신경 쓰여요. 제가 뭘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진섭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호는 그 침묵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이 모든 걸 다 말했다는 사실에 후련함을 느꼈다.“힘들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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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세트장 복도에서, 지호는 마침내 송경숙과 마주쳤다.몇 걸음 떨어진 거리. 송경숙이 먼저 그녀를 발견했다.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주변을 오가던 스태프들의 발소리, 어디선가 들려오던 조명 스태프의 무전기 소리까지, 그 순간만큼은 전부 아득하게 멀어지는 것 같았다.송경숙은 한참 동안 지호를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놀람, 원망, 그리고 무언가 더 복잡한 것.지호도 그녀를 마주 봤다. 며칠 전 의상 피팅 자리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눈빛이었다. 그때는 그저 낯선 배우와 낯선 작가의 첫 만남이었지만,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지 완전히 드러난 채였다.지호는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다.“저……”하지만 그 한마디를 채 잇기도 전이었다.송경숙이 먼저 몸을 돌렸다.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등을 보이며 복도 반대편으로 걸어갔다.빠른 걸음이었다. 도망치듯이.지호는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저기요……”작게 불러 봤지만, 목소리는 이미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지호는 뭐라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십 년 넘게 마음속으로만 되뇌었던 말들이, 정작 이 순간에는 단 한마디도 떠오르지 않았다.진섭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괜찮아요?”지호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괜찮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뭐가 괜찮지 않은지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진섭은 그런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싶었지만, 주변에 스태프들이 오가는 걸 의식하며 손을 거뒀다. 지금은 섣불리 끼어들 상황이 아니었다. 그저 옆에 서 있는 것 말고는, 그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가요, 여기.”진섭이 낮게 말하며 지호의 팔을 살짝 잡아끌었다. 지호는 순순히 그를 따라 복도를 벗어났다.같은 순간, 촬영장 위쪽 통로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다.휘웅이었다.오늘 그는 몇 번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촬영장에 발을 들였다. 송경숙이 지호를 보자마자 멱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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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오랜만이야

촬영장을 나서는 내내, 지호의 머릿속에는 아까 그 눈빛이 떠나지 않았다.송경숙의 눈빛.사죄는 아니었다. 사죄라면 좀 더 애처로운 기색이 있었을 것이다. 원망도 아니었다. 원망이라면 좀 더 날카롭거나 방어적인 기색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조용히 등을 돌리지도 않았을 것이다.그건, 후회에 가까운 눈빛이었다.무엇에 대한 후회일까.이 드라마에 출연하겠다고 응한 것에 대한 후회일까.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오래전, 십 년도 더 지난 그날의 선택에 대한 후회일까.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지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눈빛 하나가, 예상했던 그 어떤 반응보다도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화를 내거나, 억울해하거나, 혹은 매섭게 쏘아붙였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조용한 후회는, 지호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차에 오른 뒤로도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진섭은 라디오도 켜지 않은 채 묵묵히 운전만 했다. 지호는 그 침묵이 오히려 편안했다.한참을 달리다가, 진섭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지호가 먼저 낮게 입을 열었다.“그 사람 눈빛이요.”“네.”“후회하는 눈빛이었어요.”진섭이 슬쩍 그녀를 돌아봤다.“그게 무슨 후회인지는 저도 모르겠어요.”지호는 손끝으로 무릎을 매만지며 말을 이었다.“근데 확실한 건 하나 있어요. 적어도 저를 원망하는 눈빛은 아니었어요. 저를 원망했다면, 그 자리에서 저한테 와서 따졌겠죠. 근데 그런 눈빛이 아니었어요.”진섭은 한동안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춰 서자, 그는 그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지호 씨.”“네.”“오늘 도망 안 쳤잖아요.”지호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지호 씨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근데 지호 씨는 오늘,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어요. 그거면 된 거예요.”담담한 목소리였지만, 그 말이 지호의 마음속 어딘가를 조용히 어루만졌다.“결과가 어떻든, 오늘 지호 씨는 할 만큼 했어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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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핏줄

집에 돌아온 송경숙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다가 잠시 멈춰 섰다.머릿속에는 여전히 지호의 얼굴이 맴돌고 있었다. 촬영장을 나서고, 차를 타고, 집 앞까지 오는 내내 그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정확히는 얼굴보다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을 바라보던 그 눈빛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거실 소파에는 윤용석이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저녁 풍경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그 익숙한 광경이 낯설게 느껴졌다.“왔어?”윤용석이 리모컨을 든 채 힐끗 그녀를 돌아봤다.“…네.”송경숙은 짧게 답하며 소파 한쪽에 걸터앉았다.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채였다.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그녀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당신.”“응?”“전처랑 딸, 요즘 어떻게 사는지 알아요?”윤용석의 손이 리모컨 위에서 잠시 멈췄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다시 채널을 돌리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몰라.”“몰라요?”“알 필요가 있나.”너무 아무렇지 않은 대답이었다. 송경숙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이혼한 지가 언젠데. 서로 남남 된 지 오래잖아.”윤용석은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그쪽도 나 안 궁금해할걸.”송경숙은 그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오늘 낮에 봤던 지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마주하고도 아무 말 하지 못하던 그 표정. 십 년이 넘도록 마음에 담아 왔을 그 무게가, 지금 이 남자에게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전처는 그렇다 쳐요.”송경숙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근데 딸은요.”“…….”“그 애는 당신 핏줄이잖아요.”윤용석이 그제야 리모컨을 내려놓고 그녀를 돌아봤다.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갑자기 왜 그래.”“그냥 궁금해서요. 자식인데, 어떻게 사는지 한 번도 안 궁금했어요?”“지호는.”윤용석은 그 이름을 마치 오래전에 잊은 단어처럼 어색하게 발음했다.“어릴 때부터 지 엄마랑 더 친했어. 나한테 정 준 적도 별로 없고. 이제 와서 내가 나서는 것도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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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오랜만이야, 그 한마디

그날 하루, 휘웅은 제대로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회의 자리에 앉아 있어도, 머릿속은 온통 촬영장에서의 장면뿐이었다.등을 돌리던 송경숙.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호.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면서도 끝내 내려가지 못했던 자신.'오늘도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그 자책이 하루 종일 그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회의 중에도, 결재 서류에 서명을 하는 순간에도, 문득문득 그 장면이 떠올랐다. 복도 저편으로 멀어지던 송경숙의 뒷모습, 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어 있던 지호의 어깨. 그 모습을 이층 난간에서 내려다보기만 했던 자신의 비겁함이 하루 종일 그를 괴롭혔다.점심시간, 유경훈이 지나가는 말로 오늘 지호 작가가 촬영장에 다녀갔다고 전했을 때도, 휘웅은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정작 그 순간 지호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 없었다.지호에게 직접 알려야 한다는 결심은 이미 며칠 전에 끝낸 것이었다. 문제는 실행이었다. 촬영장까지 가서도 결국 다가가지 못했던 자신을, 오늘은 넘어서야 했다.퇴근 후,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은 휘웅은 오랫동안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앉아 있었다.이제는 정말 미룰 수 없었다.지호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그것 말고는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송경숙을 막을 수도, 상황을 되돌릴 수도 없다면, 적어도 지호에게만큼은 자신의 입으로 사정을 전해야 했다.휘웅은 몇 번이고 통화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지호의 번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유경훈을 통해 알아낸 지 오래였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르지 못했던 번호였다.'뭐라고 해야 하지.'십 년 동안 준비해 온 말들이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 설명하고 싶다는 말, 이해해 달라는 말. 그 모든 문장이 머릿속에서 뒤엉킨 채 떠돌았다.한때는 이런 순간이 오면, 아주 길고 완벽한 사과를 준비해 두었다고 생각했다. 지호를 다시 만나게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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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문 앞에서

침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끊을게요.”지호의 목소리가 마침내 들려왔다. 낮고, 떨리고, 그러나 분명한 목소리였다.휘웅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통화는 그대로 끊겼다.뚝, 하는 신호음이 귓가에 오래도록 남았다.휘웅은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한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호가 마지막으로 남긴 그 짧은 한마디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반가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더는 이 침묵을 견딜 수 없다는, 그런 목소리였다.그 목소리의 온도를 몇 번이고 되짚어 봤다. 원망도, 그리움도 아닌, 그저 지쳐 있는 듯한 떨림. 십 년이라는 시간이 그 짧은 한마디 안에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온도를 이해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전화가 끊긴 뒤에도, 휘웅은 텅 빈 사무실에 홀로 남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통화 시간을 알려 주던 숫자가 화면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창밖은 이미 완전히 캄캄해져 있었다. 사무실을 나서면서도, 그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마치 그 자리에 아직 지호의 목소리가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그날 밤, 휘웅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침대에 누워도, 눈을 감아도, 머릿속에는 온통 지호의 목소리만 맴돌았다. 십 년 만에 들은 그 목소리는 기억 속의 것과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달랐다. 더 단단해진 것 같기도 했고, 더 지쳐 있는 것 같기도 했다.몇 번이고 다시 전화를 걸어 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손이 멈췄다. 지금 다시 전화를 건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지호가 아예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포기하고 눈을 뜬 채 천장만 바라봤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몇 분이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렇게,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앉아 밤을 밀어내고 있었다.새벽 무렵, 휘웅은 결국 몸
last updateÚltima atualização : 202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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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텅 빈 집

문이 완전히 열리자, 지호가 서 있었다.휘웅은 순간 숨을 삼켰다.스무 살 그때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때보다 더 투명해진 것 같았다. 흰 피부는 더 하얗게 비쳤고, 눈빛은 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때는 건강하게 웃던 얼굴이었는데, 지금은 야윈 뺨과 가느다란 손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정말로, 은둔 생활 그 자체를 하고 있던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을 마주한 순간, 휘웅의 가슴 한쪽이 무너지듯 아려 왔다.기억 속 지호는 늘 웃음이 많고, 말이 빠르고, 조금이라도 서운한 일이 있으면 금세 얼굴에 티가 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선 그녀는, 표정에서부터 십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읽혔다. 감정을 다 지운 듯한 얼굴. 휘웅은 그 낯선 얼굴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 사람을 방치해 두었는지 절감했다.한때는 사소한 일에도 눈을 반짝이며 조잘거리던 사람이었다. 놀이공원에서 포카칩을 나눠 먹으며 웃던 얼굴, 회전목마 앞에서 짓던 그 웃음. 그 모든 기억이 지금 눈앞의 무표정한 얼굴과 겹쳐지며 더 아프게 다가왔다.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복도의 센서등 불빛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침묵이 짧으면서도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먼저 입을 연 건 휘웅이었다.“……더는 미룰 수 없을 것 같아서, 찾아왔어.”목소리가 낮게 떨렸다.“내 말 좀…… 들어봐 줄래.”지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옆으로 비켜서며 문을 더 활짝 열었다.들어오라는 뜻이었다.그 작은 몸짓 하나에, 휘웅은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문전박대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지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내주고 있었다. 그 침묵의 허락이 오히려 더 무겁게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보여 준 최소한의 여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 휘웅은 잘 알고 있었다.휘웅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그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집 안은 모델하우스보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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