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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할 말이 없어서

last update Veröffentlichungsdatum: 21.08.2026 07:29:42

한참의 침묵 끝에, 휘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는 책상 모서리를 짚은 채,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송경숙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이 드라마, 지호의 작품 맞습니다.”

송경숙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의 분노는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고, 이제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긴장만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다만.”

휘웅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저는 그녀의 오랜 친구입니다. 아버지의 이혼과 동시에, 지호는 외부와의 인연을 전부 끊어 버렸습니다. 10년 동안, 정말 단 한 명도 만나지 않고 그 집 안에서만 지냈습니다.”

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십 년이라는 숫자가 허공에 놓이자, 집무실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송경숙 씨를 캐스팅하기로 했습니다.”

송경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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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62. 셋이 마주하기 전

    지호는 오랜만에 촬영장에 나와 있었다.오늘은 진섭의 분량이 많은 날이었다. 촬영장 한쪽 모니터 앞에 앉아, 지호는 그가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봤다.〈가면의 집〉은 애초에 딸과 엄마, 두 여자의 이야기였다.무너진 가정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애쓰는 두 사람.그 곁을 지키는 남자친구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비중이 크지 않았다.애초에 사랑 이야기를 하려던 작품이 아니었으니까.게다가 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남자친구 캐릭터가, 사실은 지난 십 년 동안 자신이 써 온 수많은 로맨스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들과 뿌리가 같다는 걸.키가 크고, 다정하고, 한 사람만 오래 바라보는 남자.그 얼굴을 이번 작품에서까지 크게 키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충분히 써먹은 인물이었다.그런데도.모니터 속 진섭이 대사를 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다른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저 장면, 조금만 더 늘려도 좋을 텐데.''저기서 대사 한 줄만 더 넣으면 훨씬 살아날 텐데.'그런 생각이 스칠 때마다, 지호는 스스로에게 제동을 걸었다.'안 돼. 이 작품에 사심 담는 건 송경숙 한 명으로 충분해.'이 드라마는 철저히 계산된 복수였다. 그 계산 안에 자신의 사적인 감정까지 섞어 넣는 순간, 작품 전체의 균형이 흐트러질 것 같았다.지호는 그 욕심을 애써 눌러 담으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촬영은 예정보다 조금 늦게 끝났다. 마지막 테이크까지 무사히 오케이가 난 뒤, 진섭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호에게 다가왔다.“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왜요?”“제가 예약해 둔 데가 있어서요.”진섭이 씩 웃으며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혜화역 근처에 볼리비아 음식점 있대요. 거기 알아봤는데, 사장님이 진짜 볼리비아 사람이래요.”지호의 눈이 살짝 커졌다.“진짜요?”“네! 우유니 사막 얘기했더니 반가워하시더라고요. 오늘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해 주신다고 했어요.”진섭은 신이 난 얼굴로 말을 쏟아냈다. 그날 시장에서 샀던 부적 얘기, 마녀시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61. 할 말이 없어서

    한참의 침묵 끝에, 휘웅이 먼저 입을 열었다.“말씀드리겠습니다.”낮고 담담한 목소리였다. 그는 책상 모서리를 짚은 채,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송경숙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이 드라마, 지호의 작품 맞습니다.”송경숙의 시선이 천천히 그에게로 향했다. 방금 전까지의 분노는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고, 이제는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긴장만이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다만.”휘웅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저는 그녀의 오랜 친구입니다. 아버지의 이혼과 동시에, 지호는 외부와의 인연을 전부 끊어 버렸습니다. 10년 동안, 정말 단 한 명도 만나지 않고 그 집 안에서만 지냈습니다.”담담한 어조였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의 무게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십 년이라는 숫자가 허공에 놓이자, 집무실 공기가 한층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그런 그녀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내기 위해서, 송경숙 씨를 캐스팅하기로 했습니다.”송경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봤다.“믿든 안 믿든, 그건 송경숙 씨 마음입니다.”휘웅의 목소리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이제 더 감출 것이 없다는 듯, 오히려 차분해진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호도 피해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엄연히 가해자고요.”그 말에 송경숙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반박하고 싶었지만, 정작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어둠 속에서 그저 대본만 썼습니다. 원래도 얼굴 없는 작가로 유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녀가 이번 작품에 직접 참여하게 된 것도, 사실은 순전히 송경숙 씨를 캐스팅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는 조건이었습니다.”집무실 안에는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송경숙은 그 자리에 선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슴 한가운데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분노인가.아니면, 자기 자신에 대한 경멸인가.그것도 아니면, 도무지 이름 붙일 수 없는 다른 무언가인가.송경숙은 그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60.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대표님.”문이 열리며 유경훈이 서류를 든 채 들어왔다. 노크는 했지만, 대답을 기다릴 새도 없이 반쯤 열려 있던 문을 마저 밀고 들어온 참이었다. 그는 방 안의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얼굴이었다.“윤지호 작가는 언제 만나실 거예요?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윤지호?”송경숙의 목소리가 방 안을 갈랐다.유경훈이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봤다. 여전히 방 안에 감돌던 팽팽한 긴장은 눈치채지 못한 채, 그저 갑작스러운 반응에 당황한 얼굴이었다.“…네, 저희 작가님이요. 왜 그러세요?”송경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 이름을 다시 한번 낮게 되뇌었다.“윤지호.”입 안에서 몇 번이고 그 이름을 굴렸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어디서 들었는지, 처음엔 떠오르지 않았다.마치 오래된 서랍 깊숙한 곳에 넣어 두고 잊고 있던 물건을 다시 꺼내려는 것처럼, 기억이 손끝에서 자꾸만 미끄러졌다.“윤지호…… 윤지호……”그러다, 순간.머릿속에서 뭔가가 번쩍였다.“아……!”송경숙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방금 전까지 붉게 달아올라 있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 여자 작가, 이름이 윤지호였어요?”유경훈은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는데요. 왜 그러세요, 대표님도 그렇고 두 분 다 왜 그러세요.”송경숙은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이미 허공 어딘가에 고정된 채, 빠르게 과거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있었다.윤. 지호.그 성.그리고 그 나이.지금 이 드라마 속 딸 캐릭터의 나이와, 그날 이후 흘러간 세월을 더해 보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나이였다.“…윤용석.”송경숙이 낮게 중얼거렸다.“윤용석 사장. 그 사람 딸 이름이…… 지호였지.”정확히 기억났다. 오래전, 아직 결혼 얘기가 오가기도 전에, 윤용석의 입에서 몇 번 스치듯 나왔던 이름이었다.딸 얘기는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 무심하게 흘리듯 말했었다.'지호가 요즘 학교 다니느라 바쁜가 보더라고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59. 당신 나를 알고 있었나

    촬영이 끝나자마자, 송경숙은 대본을 챙겨 들고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매니저가 뒤따라오며 다음 스케줄을 물었지만, 그녀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먼저 가. 나 잠깐 어디 좀 들렀다 갈 데가 있어.”“어디를요? 오늘 스케줄 다 끝난 거 아니에요?”“상관없어. 나 혼자 갈게.”매니저는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챘지만, 더 캐묻지 못했다. 송경숙은 그대로 자신의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운전대를 잡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조수석에 던져 둔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몇 번이고 다시 읽어 봐도, 그 장면은 변하지 않았다. 이혼 서류. 마르지 않은 잉크. 서둘러 잡힌 결혼 날짜.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떼어 온 것 같은 문장들.제작사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동안에도, 송경숙은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되뇌었다.'누가 알고 있었을까. 어떻게 알았을까.'그리고 그 답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작품을 기획하고, 자신을 그렇게까지 공들여 캐스팅했던 사람.대표실 앞에 도착했을 때, 송경숙은 망설이지 않았다.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비서가 다급하게 뒤따라 들어오며 말렸지만, 송경숙은 이미 휘웅의 집무실 한가운데까지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뒤였다. 화장은 이미 반쯤 지워져 있었고, 두 눈에는 붉은 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촬영장에서 곧장 달려온 게 분명했다.“대표님, 죄송합니다. 제가 막았는데——”“괜찮아요. 나가 보세요.”휘웅은 서류에서 시선을 든 채 침착하게 말했다. 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나가자, 집무실 안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송경숙의 손에는 구겨진 대본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성큼 다가와, 그 대본을 책상 위로 거칠게 집어 던졌다. 종이가 흩어지며 몇 장은 바닥으로 떨어졌다.“이거.”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이거 누구 아이디어예요?”휘웅은 던져진 대본을 잠시 내려다봤다. 겉으로는 동요하지 않은 얼굴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58.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송경숙은 원래 그날 촬영이 없었다.며칠 전 뺨을 맞는 장면을 찍은 뒤로, 붓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메이크업으로도 가려지지 않을 정도라 후속 장면 몇 개가 통째로 미뤄졌고, 오늘에서야 붓기가 겨우 자연스러워 보일 만큼 빠졌다. 매니저에게서 "오늘 오후에 추가 촬영 있으시대요"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도, 송경숙은 별다른 생각 없이 알겠다고 답했다. 촬영장에서는 흔한 일이었다.도착한 촬영장은 평소보다 조용했다. 오늘은 단독 씬 두어 개만 찍는 날이라 스태프도 많지 않았다. 송경숙은 대기 의자에 앉아 조연출이 건넨 사이드를 받아 들었다.“오늘은 이 씬부터 갈게요. 짧은데 감정은 좀 세게 가야 돼서요.”조연출이 가볍게 설명을 덧붙이고는 다른 배우 쪽으로 걸어갔다.송경숙은 대본을 펼쳤다.몇 줄 읽지 않아, 손끝이 조금씩 굳어 갔다.장면은 짧았다. 극 중 남편이 아직 이혼 서류의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에 재혼 소식을 흘리는 장면. 결혼 날짜까지 서둘러 잡아 버리는 장면. 아내 역의 배우는 그 소식을 뉴스로 접하고 무너져 내리는 얼굴을 연기해야 했다.'…이거.'송경숙은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혼 서류. 잉크도 마르기 전. 재혼 발표. 서둘러 잡힌 결혼 날짜.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정확히, 자신이 겪었던 일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저질렀던 일이었다. 윤용석과의 결혼을 서두르며, 이혼 절차가 채 끝나기도 전에 기사부터 터뜨렸던 그날의 선택. 그 세세한 순서까지도, 대본은 마치 그날의 일지를 그대로 옮겨 적은 것처럼 정확했다.우연이라기엔 지나쳤다.세상에 비슷한 사연을 가진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순서까지 똑같이 맞아떨어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누군가 실제로 그 일을 알고 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디테일이었다.송경숙의 머릿속에서 지난 몇 주간의 조각들이 순식간에 다시 맞춰지기 시작했다.처음 이 배역을 제안받았을 때부터 이상했다. 한물간 배우 취급을 받던 자신에게, 젊은 대표

  • 첫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57. 웃으며 부딪친 잔

    “진섭 씨, 인사하세요. 저희 대표님이세요!”유경훈의 목소리가 룸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진섭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밖에서, 아무 이유 없이 시비를 걸던 그 남자가 대표라니. 그것도 이 작품을 만들고 있는 제작사의, 다름 아닌 대표.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다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자신만 몰랐다는 듯이. 진섭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아…… 안녕하십니까.”목소리에서 티가 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스스로도 어색한 게 느껴졌다. 손끝이 미세하게 굳는 것도 그대로 느껴졌다.“강휘웅입니다.”휘웅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 골목에서 던지던 말투와는 완전히 다른, 정중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였다. 표정도, 자세도, 방금 전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매끄러웠다.“말씀 많이 들었어요. 이번 작품, 진섭 씨 연기 덕분에 훨씬 살아난다고들 하던데.”너무나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방금 전까지 “작가 꼬봉이냐”며 비아냥거리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진섭은 그 손을 맞잡으며 속으로 헛웃음이 났다.'이 사람, 진짜 뭐지.'겉으로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지만, 속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몇 분 전만 해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시비를 걸던 사람이, 지금은 방송용 미소를 짓고 있었다.“감사합니다. 저도 대표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좀처럼 얼굴 뵙기 힘드시다고.”에둘러 던진 말이었다. 조금 전 골목에서의 일을 은근히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휘웅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요즘 좀 바빴어요. 이제라도 이렇게 인사드리네요.”태연한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 태연함이 더 얄미웠다. 진섭은 순간 이 남자가 정말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은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주변 스태프들은 두 사람의 인사를 흐뭇하게 지켜보며 술잔을 권했다.“자자, 두 분 첫 만남인데 한잔하셔야죠!”누군가의 외침에 사람들이 술잔을 들었다. 진섭과 휘웅도 마주 앉아 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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