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교수님의 숨겨진 여자: Chapter 31 - Chapter 40

77 Chapters

[31]

“이상하네. 내 메시지를 읽었는데도 아직 답장이 없어. 대체 어디 간 거야?” 레나타는 욕조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목욕 가운을 몸에 단단히 두른 뒤, 머리를 말리고 있는 도미닉이 앉아 있는 화장대로 걸어갔다.도미닉이 그녀를 힐끗 바라봤다. “이번엔 또 왜?”“셀리.” 레나타가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짜증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도미닉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맙소사. 아직도 그 얘기야?”“응. 걱정되니까 그렇지, 돔!” 의도했던 것보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도미닉은 헤어드라이어를 끄고 완전히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자기야… 너무 과하게 걱정하는 건 좋지 않아.”레나타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어깨에 어린 불안감이 역력했다. 자신의 지나친 걱정이 민망한 듯했다.도미닉이 자신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이리 와.”레나타가 가까이 다가가자 도미닉은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몸이 그의 품에 안기는 순간, 레나타의 호흡은 가빠졌다. 여전히 머릿속 생각만 저 멀리 앞서 달려가는 사람처럼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레나타…” 도미닉이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감싸며 차분하게 말했다. “셀리는 그냥 네 친구야. 가끔은 사람에게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어. 네 잘못이 아니야.”레나타가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셀리는 원래 이러지 않아. 항상 답장을 해주거나… 적어도 그 못생긴 스티커라도 보내는데.” 그녀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냥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도미닉은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등을 천천히 어루만지자 레나타의 긴장이 조금씩 풀렸다. “네 두려움에 너무 휘둘리고 있는 거야. 숨부터 천천히 쉬어, 자기야. 모든 일이 꼭 나쁘게 끝나는 건 아니잖아.”레나타가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다가 조금 누그러졌다. “알아… 그런데 자꾸 생각나는 걸 어떡해.”“뭔가 잘못됐다면 셀리가 연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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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네가 내가 시킨 대로 팬티를 입고 왔는지—아니, 정확히는 입지 않고 왔는지 확인하려는 거야.”알렉스는 그 말을 허공에 남겨둔 채, 어두운 장난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셀리를 바라봤다. 셀리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목구멍은 모래 한 움큼을 삼킨 것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희미한 조명만 드리워진 복도가 두 사람을 중심으로 점점 좁아지는 듯했고, 공기는 무겁고 숨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알렉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입가의 옅은 미소는 눈까지 닿지 않았다. 천천히, 의도적으로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손짓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무서운 명령이었다.셀리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떨리는 손가락이 버건디색 드레스 자락을 찾아냈다. 그녀는 허벅지가 드러날 만큼만 천을 위로 끌어올렸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쳤다. 손을 옷 안으로 집어넣자, 조금 전 입었던 섬세한 레이스 팬티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닿았다. 두려워서였다. 어쩌면 조금이라도 말을 따르면 그가 봐줄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제 벗어야 했다.부드럽게 한 번 잡아당기자 검은 레이스가 엉덩이를 타고 내려와 무릎을 지나 발목에 걸렸다. 셀리는 작은 천 조각에서 발을 빼냈다. 차가운 공기가 맨살 사이를 스치자 몸이 저절로 떨렸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채 그녀는 허리를 숙여 팬티를 주워 들었다. 아직 자신의 체온이 남아 있는 그것을 알렉스가 내민 손 위에 올려놓았다.알렉스는 서두르지 않았다. 눈을 감더니 레이스를 코끝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최고급 빈티지 와인을 음미하는 감정가처럼 길고 느리게,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을 내쉴 때 그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고, 만족스러운 낮은 신음이 목구멍에서 흘러나왔다.“난 네 냄새가 늘 좋았어.” 그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하고. 달콤하고. 살짝 짭조름하지…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 사실 네 친구 레나타와도 크게 다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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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셀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헬레나가 런던에서 있었던 세드릭의 미친 교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젖히고 웃어대던 바로 그 순간, 알렉스의 혀가 다시 한번 그녀의 살결을 핥아 내렸다. 느릿하고, 의도적이며, 지독하게 악의적인 감촉이었다. 그 짜릿한 자극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셀리의 전신을 꿰뚫었다. 허벅지 사이로 걷잡을 수 없이 뜨겁고 축축한 애액이 터져 나오며 아래에 깔린 가죽 시트를 적셨다. 두 뺨은 불타오르듯 붉어졌고, 가쁜 숨이 잘게 터져 나왔다. 눈꼬리에는 눈물이 아슬아슬하게 맺혔다.“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갈라진 목소리가 불쑥 터져 나왔다. 그녀가 너무 급하게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바닥을 긁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세드릭이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셀, 괜찮아?”“괜찮아. 그냥… 얼굴에 물 좀 묻히고 오려고. 안이 좀 덥네.”셀리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서둘러 식당을 빠져나왔다.복도는 끝없이 길게 느껴졌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버건디색 비단 드레스가 젖어 드는 맨살에 닿으며, 속옷조차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잔인하게 일깨워 주었다.그녀는 복도 끝에 있는 손님용 화장실로 헐떡이며 들어서자마자 문을 잠그고, 문에 기대어 푹 쓰러졌다. 가슴이 격렬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눈을 감은 채 어떻게든 이성을 되찾으려 애썼다.10초. 어쩌면 그보다도 짧은 시간이었다.문고리가 가볍게 달깍거렸다.끼익.outside에서 잠금장치가 무력하게 풀렸다.포식자 같은 얇은 미소를 띤 알렉스가 걸어 들어왔다. 늑대처럼 번뜩이는 녹색 눈동자였다.“이까짓 잠금장치는 그냥 장식일 뿐이야, 달링.”낮고 나른한 목소리로 말하며 그는 뒤로 문을 닫았다. 찰칵. 그가 데드볼트를 다시 돌려 두 사람을 안에 가두었다.“교수님… 제발… 그만하세요.” 셀리가 목소리를 떨며 나지막이 사정했다. “더는 못 하겠어요.”그는 말로 답하지 않았다. 그저 거리를 좁혀 들어와 그녀의 턱을 억세게 쥐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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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셀? 너무 오래 걸리는데… 안에 괜찮아?”“괜찮아! 나 기다리지 마.”“정말 괜찮아?”“응, 세드릭. 괜찮다고 했잖아!”셀리는 여전히 욕실 안에 갇힌 채 반쯤 소리를 질렀다.“알겠어… 난 식탁에 있을게. 그래도 너무 오래 있지는 마.”셀리는 손님용 욕실 거울 앞에서 깊고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엉망이 된 얼굴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두 뺨에 끼얹은 차가운 물로도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의 열기는 가시지 않았다. 번진 마스카라는 최대한 닦아냈고, 클러치에서 립글로스를 꺼내 부어오른 입술에 살짝 덧발랐다. 하지만 다리의 떨림도,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허벅지 안쪽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따뜻한 감각도 감출 수 없었다.셀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를 내다봤다. 아무도 없었다. 식당 쪽에서 헬레나와 세드릭의 희미한 웃음소리만 들려왔고, 그 사이로 접시와 잔이 부딪히는 작은 소리가 섞여 있었다.셀리는 최대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 식당으로 돌아갔다. 이제 버건디색 드레스가 지나치게 짧고 얇게 느껴졌다. 마치 모두가 그 아래에서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천이 피부에 스칠 때마다 그녀는 입 안쪽을 깨물었다. 가라앉았어야 할 욱신거림은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그녀가 문가에 모습을 드러내자 세드릭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걱정이 가득 번졌다. 그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보호하듯 꼭 끌어안았다.“셀, 세상에… 정말 토한 거야?”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대고 속삭이며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얼굴이 너무 창백해. 위층으로 데려가서 좀 누워 있을래?”따뜻하고 진심 어린 그의 품에는 사랑이 가득했다.그래서 오히려 셀리의 가슴은 죄책감으로 짓눌렸다.그의 품에 안겨 있는 순간에도 그녀는 알렉스의 흔적을 온몸에서 느낄 수 있었다.아직도 선명했다.아직도 남아 있었다.“괜찮아, 세드릭. 정말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셀리는 최대한 가볍게 들리도록 목소리를 다듬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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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연결문이 달칵거리는 나지막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소리는 셀리의 귓가에 마치 망치가 내리쳐지는 것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알렉스는 침대 스탠드의 희미한 불빛 아래 서 있었다. 훤칠하고 큰 체구가 윤이 나는 목재 바닥 위로 긴 그림자를 늘어뜨렸다. 그의 검은색 파자마 바지는 골반 걸쳐져 있었고, 반소매 셔츠는 가슴까지 풀어헤쳐져 있었다. 쉰 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단단한 근육질 몸매가 드러났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탐욕과 무자비함으로 가득 찬 채 셀리를 정면으로 노려보았다.셀리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때까지 쥐어짜듯 하얀 침대 시트를 꽉 쥐고 있었다. 숨이 얕고 가쁘게 가빠왔다. 그녀는 여전히 구겨진 버건디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옷에서는 은은한 와인 향과 땀 냄새가 났다.“교수님… 제발요.”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위층에 세드릭이 있어요. 헬레나도요. 만약 둘이 듣기라도 하면…”알렉스는 방 안으로 더 깊숙이 걸어 들어오며 얇은 미소를 지었다. 서두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먹잇감이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아는 포식자의 걸음걸이처럼, 느리고 계산된 걸음이었다.“조용히 해.”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밤 넌 나한테 약속했잖아. 나 화나게 하지 마.”셀리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약속한 적 없어요. 당신이 강요한 거잖아요.”그는 셀리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 거대한 위압감에 그녀는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려야만 했다. 그는 오늘 밤 이미 몇 번이고 그랬듯 다시 한번 그녀의 턱을 억세게 움켜쥐고, 강제로 얼굴을 위로 들어 올렸다.“화장실에서 네 입으로 직접 말했잖아.”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아랫입술을 거칠게 문지르며 그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두 번이나 그랬지. '저는 당신 거예요.' 기억 안 나?”셀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부정하고 싶었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몸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미 알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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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그날 밤, 세드릭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침대 협탁 위 시계가 00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안방 천장의 어둠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은 둥그렇게 떠져 있었다. 시차 적응 때문에 머리가 베개에 닿자마자 골아떨어졌어야 정상이었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가느다랗고 집요한 뭔가가 끊임없이 그를 잡아끄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촉이라고 해야 할까. 세드릭은 비과학적인 직감을 믿는 편이 아니었지만, 오늘 밤만큼은 그 본능이 아주 또렷하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그는 널찍한 킹사이즈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이 밝게 빛났지만 샐리에게서 온 새 메시지는 없었다. 저녁 식사 전, 오늘 오후에 나누었던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너무 피곤해서 일찍 자고 싶다던 샐리였다.그런데 왜 이 찜찜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는 걸까.결국 그는 포기하고 침대 밖으로 가만히 빠져나왔다. 잠잘 때 입었던 회색 반팔티와 반바지 차림 그대로였다. 커다란 해링턴 저택은 에어컨의 낮게 깔린 기계음과 복도 시계의 미세한 쨉깍거림 외에는 죽은 듯 정적에 싸여 있었다.샐리의 상태를 직접 확인해보면 답이 나올지도 몰랐다. 혹시 아직 깨어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대학 시절 기숙사 발코니에 앉아 날이 새도록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처럼,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터였다.옛 추억에 그의 입꼬리가 옅게 호선을 그렸다. 그는 가만히 방문을 열고 어스름한 2층 복도로 발을 내디븠다. 발걸음에 맞춰 동작 감지 벽등이 은은하게 불을 밝혔다.다행히 티크나무 계단은 그가 내려가는 동안 단 한 번도 삐걱거리지 않았다. 이런 밤에 딱 어울리는 설계였다.1층은 한층 더 어두웠다. 거실의 커다란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만이 작은 손님방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겨우 비추고 있었다.세드릭은 혹여 누군가를 깨울까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복도 끝으로 샐리의 방문이 보였다. 굳게 닫힌 문 아래로는 빛 한 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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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다음 날 아침, 캠퍼스는 평소보다 더욱 북적거렸다. 인도 위의 돌길을 따라 학생들이 밀려들었고, 길가에 주차된 스쿠터들의 엔진 소리와 웃음소리, 수다 소리가 뒤섞였다. 해는 높이 떠올랐지만, 12월의 찬바람은 레나타로 하여금 청재킷을 더 꽁꽁 여미게 만들 만큼 여전히 쌀쌀했다.그녀는 한쪽 어깨에 백팩을 짊어지고, 바람에 기다란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주차장에서 강의동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오늘 아침 첫 수업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이상심리학’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차량 공유 서비스를 내린 직후부터 자꾸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마치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레나타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주차장은 차들로 가득 차 있었고, 다들 저마다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상한 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정전기처럼 끈질기게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선이 떼어지지 않은 채 그녀의 등 뒤에 똑똑히 박혀 있는 듯했다.'그냥 내 기분 탓이겠지.' 그녀는 발걸음을 촉촉이 바삐 옮기며 스스로를 다독였다.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이 감도는 긴 복도가 한층 정적에 싸여 있었다. 그녀는 플랫 슈즈의 부드러운 굽 소리를 내며 2층으로 올라갔다. 다시 한번 뒤를 살짝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선이 가닿지 않는 시야 모퉁이 너머에서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오는 느낌은 여전히 남아있었다.점심시간이 되어서야 그녀는 농구장이 내려다보이는 창가 구석 자리, 학생식당의 늘 앉던 자리에서 샐리를 만날 수 있었다.샐리는 이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최근 들어 늘 그랬듯 얼굴은 파리했고 눈가는 옅게 부어있었다. 그녀 앞에는 손도 대지 않은 아이스 티 한 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샐!” 레나타는 친구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으며 옆 의자에 가방을 내던졌다. “너 점점 살 빠지는 것 같아. 뭐라도 좀 먹어, 얘.”샐리는 눈가까지 도달하지 못하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Ren.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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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헬레나는 백테라스에 서서 느릿하고 기계적인 손길로 난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호스에서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도자기 화분 속으로 촉촉이 스며들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까마득히 먼 곳에 가 있었다. 지난밤의 잔상이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1층에서 들려오던 미세한 소리들, 세드릭의 발소리,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날카로워지는 집요한 직감까지. 오늘 아침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세드릭은 “샐리를 데리러 간다”며 일찍 캠퍼스로 떠나버린 뒤였다.꽃무늬 카디건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나직하게 진동했다. 그녀는 호스를 내려놓고 앞치마에 축축한 손을 닦은 뒤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세드릭이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Cedric: [엄마… 나 방금 아버지가 레나타랑 같이 있는 거 봤어요. 샐리가 아니라 레나타요. 아버지 연구실에서.]순간 온 세상이 멈춰 선 듯했다. 시원하게 불어오던 오후의 바람이 갑자기 피부를 찌르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휴대폰을 쥔 그녀의 손이 격하게 떨렸다.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글자들이 제자리를 찾아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는 메시지를 세 번, 네 번이나 고쳐 읽었다. 그녀의 시선은 ‘레나타’라는 이름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샐리가 아니었다. 언젠가 며느리가 될지도 모를 그 아이가 아니었다. 샐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전염성 강한 웃음소리를 지닌 채 집에 놀러 오곤 했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헬레나 이모’라고 부르던, 식사 자리에 가족처럼 함께 앉아 있던 그 맑은 눈의 아이, 레나타였다.헬레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무너진 둑 터지듯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수년 전 알렉스의 서랍에서 발견했던 출처 모를 팬티, ‘늦은 회의’를 마치고 들어온 그의 셔츠에 남아있던 저렴한 향수 냄새, 너무 길고, 너무 자주, 너무 수상하게 이어지던 ‘학생 상담’이라는 끝없는 핑계들. 아이들을 위해, 완벽한 가족이라는 환상을 지키기 위해, 홀로 욕실에서 눈물을 삼키며 침묵을 선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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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세드릭은 복도 한쪽 구석에 서서 레나타가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자신의 커다란 몸으로 막고 있었다. 복도 끝 창문으로 희미한 저녁 햇살이 스며들어 그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만들었다. 레나타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모습보다 위협적으로 보였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숨은 거칠었으며, 양옆으로 늘어진 주먹은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지나치게 세게 움켜쥐어져 있었다.레나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가방은 어깨에 힘없이 걸려 있었고, 발은 타일 바닥에 못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그녀에게서는 알렉스의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땀과 값비싼 향수,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역겨운 무언가. 자신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을 게 분명했고, 치마도 완전히 정돈되지 않았으며, 머리카락 역시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아버지 사무실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레나타?” 세드릭이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날카로웠다. 마치 칼날이 천천히 살을 긁어내는 것처럼.레나타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눈물이 금세 차올라 뺨을 적셨다.“나… 세드… 내가 설명할 수 있어…” 그녀는 마침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세드릭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는 레나타를 몰아붙여 차가운 벽에 등이 닿게 했다. 아직 그녀에게 손을 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서 있었기에, 분노로 뜨거워진 그의 숨결이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더 이상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다. 깊은 상처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난 전부 봤어. 아버지가… 저 책상 위에서 너랑 관계하는 것도 봤다고. 논문 지도였다고 하지 마. 아무것도 아니었다고도 하지 마.”레나타는 더욱 크게 흐느꼈다. 한 손으로 입을 막아 울음소리를 억누르려 했지만, 온몸이 심하게 떨렸다.“난 이런 걸 원한 적 없어, 세드…” 그녀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사람이… 나를 강제로… 처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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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레나타는 샤워기의 따가운 물줄기 아래 서 있었다. 뜨거운 물이 마치 결코 충분하지 않을 속죄처럼 그녀의 몸 위로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벌써 거의 30분째였다. 그녀는 비누로 미친 듯이 몸을 문질렀다. 특히 허벅지 사이와 목, 가슴까지 집요하게 닦아냈다. 알렉스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싶었다.땀 냄새와 값비싼 향수 냄새,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역겹고 훨씬 더 지독하게 남아 있는 무언가를.하지만 아무리 씻어도 사라지지 않았다.눈물이 물줄기와 뒤섞여 조용히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두 눈을 질끈 감았지만, 머릿속으로는 원치도 않았던 장면들이 거칠게 밀려들었다.레나타는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에서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주먹으로 타일 벽을 내리치자 손마디가 욱신거렸다. 그리고 그날 오후, 세드릭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에 가득했던 순수한 혐오감과, 그녀를 향해 내뱉었던 ‘내 아버지의 창녀’라는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후벼 팠다. 그때의 최후통첩도 여전히 머릿속에 울리고 있었다.그만두지 않으면 네 인생을 망가뜨리겠다는 말.그리고 도미닉……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다정하게 자신을 안아주던 도미닉은 내일 피오나와 약혼식을 올린다고 했다.레나타는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가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전히 뜨거운 물이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마침내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더는 삼킬 수도 없는 처절하고 통제할 수 없는 흐느낌이었다.이제 자신에게는 아무도 없었다.셀리?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 셀리마저 무너뜨릴 이야기를 어떻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알렉스? 그 괴물은 그저 비웃으며 자신을 더 깊은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갈 뿐이었다.세드릭? 이제 온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도미닉? 내일 다른 여자와 약혼하는 사람.마침내 레나타는 샤워기를 잠갔다. 뜨거운 물을 맞고 있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수건으로 몸을 감싼 그녀는 휘청거리는 다리로 욕실을 빠져나왔다.도미닉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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