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나는 백테라스에 서서 느릿하고 기계적인 손길로 난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호스에서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도자기 화분 속으로 촉촉이 스며들었지만, 그녀의 정신은 까마득히 먼 곳에 가 있었다. 지난밤의 잔상이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1층에서 들려오던 미세한 소리들, 세드릭의 발소리,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날카로워지는 집요한 직감까지. 오늘 아침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려 했지만, 세드릭은 “샐리를 데리러 간다”며 일찍 캠퍼스로 떠나버린 뒤였다.꽃무늬 카디건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나직하게 진동했다. 그녀는 호스를 내려놓고 앞치마에 축축한 손을 닦은 뒤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세드릭이 보낸 메시지가 떠올랐다.Cedric: [엄마… 나 방금 아버지가 레나타랑 같이 있는 거 봤어요. 샐리가 아니라 레나타요. 아버지 연구실에서.]순간 온 세상이 멈춰 선 듯했다. 시원하게 불어오던 오후의 바람이 갑자기 피부를 찌르는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휴대폰을 쥔 그녀의 손이 격하게 떨렸다.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글자들이 제자리를 찾아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그녀는 메시지를 세 번, 네 번이나 고쳐 읽었다. 그녀의 시선은 ‘레나타’라는 이름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샐리가 아니었다. 언젠가 며느리가 될지도 모를 그 아이가 아니었다. 샐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전염성 강한 웃음소리를 지닌 채 집에 놀러 오곤 했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헬레나 이모’라고 부르던, 식사 자리에 가족처럼 함께 앉아 있던 그 맑은 눈의 아이, 레나타였다.헬레나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숨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무너진 둑 터지듯 기억들이 밀려들었다. 수년 전 알렉스의 서랍에서 발견했던 출처 모를 팬티, ‘늦은 회의’를 마치고 들어온 그의 셔츠에 남아있던 저렴한 향수 냄새, 너무 길고, 너무 자주, 너무 수상하게 이어지던 ‘학생 상담’이라는 끝없는 핑계들. 아이들을 위해, 완벽한 가족이라는 환상을 지키기 위해, 홀로 욕실에서 눈물을 삼키며 침묵을 선택
Last Updated : 2026-09-05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