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혈향연화: 핏빛 운명의 낙인: Chapter 11 - Chapter 20

20 Chapters

제11화. 지옥에서 건진 사내

유진의 작고 여린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생존의 울림.사내의 가슴 밑바닥에서 쿵 쿵 고동소리가 났다.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목숨이었으나 기뻐할 겨를 따위는 없었다.태풍의 잔해가 몰고 온 칼바람 속.그는 이내 체온을 빼앗겨 고스란히 동사할 게 뻔했다.유진은 언덕 가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작은 초가집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갔다.그리고 구석에 있던 커다란 멍석을 용케 찾아내 품에 안고 나왔다.다시 사내의 곁으로 돌아간 그녀는 그의 거구를 멍석 위로 굴리듯 겨우 눕혔다.“으읍……! 윽!”유진의 입에서 자연스레 비명이 튀어나왔다.궁궐에서 보았던 그 어떤 무장들보다 장대하고 단단한 체구였다.통나무처럼 굵직한 뼈대와 억센 근육으로 박힌 어깨는 사나운 야수의 모습에 가까웠다.멍석 끝자락을 양손으로 터질 듯 꽉 쥐었다.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갔다.끈적이는 바닷물과 사내의 어마어마한 무게가 그녀의 가냘픈 신체를 압박했다.땀방울이 턱끝을 타고 쇄골 골짜기로 뚝뚝 떨어졌다.손바닥의 살점이 쓸려나가 짓무르는 고통에 당장이라도 비명이 터질 것 같았다.하지만 유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여기서 멈추면 이 사내는 죽는다.오직 그 일념 하나로 사력을 다했다.그리고 겨우 사내를 초가집의 따뜻한 방 안에 눕힐 수 있었다.유진은 먼저 문 가득 들이치는 바람을 막기 위해 빗장을 걸어 잠갔다.그리고 거친 숨을 헐떡이며 사내의 상태부터 살폈다.우선 체온을 떨어트리는 젖은 옷부터 전부 벗겨내야 했다.유진의 손끝이 사내의 옷자락에 닿았다.여민국의 복식과는 완전히 다른, 이국적인 형태의 두꺼운 무복(武服)이었다.사각. 사각.젖은 천이 문질러지며 아슬아슬한 마찰음을 냈다.매듭을 풀고 옷깃을 넓게 벌려낸 순간.유진의 황금빛 눈동자가 거대한 충격과 함께 크게 확장되었다.“아…….”젖은 옷 아래 드러난 사내의 상체는 그야말로 잔혹한 전쟁터 그 자체였다.단단하게 갈라진 사내의 넓은 가슴과 복부 위로.끔찍하게 찢어지고 베인 깊은 자창(刺創)과 자상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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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핏빛 노을과 불청객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의 고삐를 바짝 잡아당겼다.마침내 청사(靑蛇)의 한적한 자락에 위치한 거처에 당도했다.말에서 뛰어내린 유진은 이미 바닷물과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었다.가녀린 숨을 헐떡이며 안채의 대청마루를 디디는 순간.저 멀리서 청색 비단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의 여인이 버선발로 뛰어 내려왔다.사가 시절부터 유진을 보필해 온 유모 최 상궁이었다.“아이고, 마마! 마마! 옷차림이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망측한 일입니까!”최 상궁은 경악을 금치 못한 얼굴로 잔소리를 사정없이 퍼붓기 시작했다.“하인들의 옷을 빌려다 입으신 것도 모자라, 도대체 밖에서 무얼 하고 오셨기에 온몸이 이토록 엉망진창이 되셨단 말입니까? 폐하의 눈밖에 나, 먼 청사(靑蛇)까지 유배를 오셨으면 제발 숨죽이고 자중하셔야지요.”최 상궁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하인들의 눈치를 살폈다.이내 유진의 귀밑에 대고 목소리를 바짝 낮추어 속삭였다.“천방지축 홀로 나돌아 다니시며, 그 해괴한 의술을 베푸신다는 소문이 만에 하나 낙성 궁 안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당장 부안군 마마께 어떤 불똥이 떨어질지 몰라 이러십니까?”유모의 애간장 태우는 간섭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유진은 다급하게 약장과 서랍들을 바쁘게 뒤적였다.마음이 벼랑 끝에 선 것처럼 급했다.유진의 옥수(玉手) 같은 손길이 한없이 분주하게 움직였다.서랍이 거칠게 열리고 닫히는 소리만이 방 안의 정적을 깨웠다.“아니, 마마! 이건 또 왜 챙기십니까? 해가 벌써 뉘엿뉘엿 저물어가는데.”“유모, 장은 언제까지 서지?”유진이 다급하게 최상궁의 주름진 손을 잡으며 절박한 눈빛으로 물었다.“갑자기 장이라니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만 하십시오. 아래 것들을 시켜 당장 구해올 테니.”유진은 대답 대신 창문 너머로 빠르게 기울어가는 붉은 석양을 바라보았다.하늘이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시간이 없다.두두두두ㅡ!묵직하고 소란스러운 수십 마리의 말발굽 소리가 마당 가득 거칠게 울려 퍼졌다.순식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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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유일한 혈육, 부안군

붉은 달이 든 저녁.정갈하게 단장을 하고 대청마루로 나선 유진은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아무리 천방지축으로 말썽을 부려도.그 화사한 미소 하나면.모든 과오가 씻겨 내려갈 만큼.그녀는 왕실과 나아가 여민국 최고의 귀한 꽃이었다.부안군은 그런 누이의 손을 잡고 청사(靑蛇)에서 가장 이름난 기방으로 향했다.휘황찬란한 등불과 풍악 소리가 가득한 기방.그곳의 문턱을 넘으며 유진이 조심스럽게 부안군의 소맷자락을 당겼다.“오라버니, 여긴……. 장차 세자가 되실 분이 이런 유흥가를 드나드신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괜찮다. 세자가 될지 말지도 모르는 마당에. 벌써부터 김칫국을 마시며 숨 막히게 살고 싶진 않구나. 게다가 기방은 사실 풍류와 산해진미를 한곳에서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도 하지. 나 아니면 널 이런 곳에 데려올 사람이 없으니, 새로운 경험이라 생각하고 즐기거라.”부안군의 뼈 있는 농담에 유진의 눈동자에 안쓰러움이 가득 차올랐다.폐하의 적통이자 이미 성인인 오라버니.하지만 조정을 장악한 선왕의 적자였던 대군의 아들, 경희군을 낳은 의빈의 기세에 밀려 왕실의 후계 구도가 흔들리고 있었다.“이미 장성한 오라버니를 두고 전하께서 겨우 열살 먹은 의빈의 소생을 염두에 두실 리 없습니다. 아무리 선왕의 자식이라고 해도 그건 성리학의 법도에…….”“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너무 신경 쓰지 말자꾸나. 내가 화를 내든 신경을 쓰든, 바뀌는 건 없으니.”자신을 걱정하는 유진을 안심시키듯.부안군은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하지만 정작 유진은 저녁 식사 내내 좌불안석(坐不安席)으로 초조해했다.자꾸만 먼 창밖을 내다보는 누이의 기색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부안군이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이번엔 도대체 또 무슨 사고를 친 게냐?”“사고라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와, 그나저나 이 해물 숙회가 참 쫄깃하고 맛있습니다!”유진이 황급히 젓가락질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부안군은 그 어설픈 속임수를 애써 모른 척 넘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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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핏빛 불길한 징조

푸르스름한 안개가 대지를 낮게 가로지르는 시린 새벽.유진은 치마 자락을 가볍게 움켜쥔 채.해안가 절벽 외딴 초가집으로 부안군을 조심스레 이끌었다.부안군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나직하게 물었다.“이런 외진 곳에 거처가 있을 줄이야…… 어찌 알고 찾아낸 게냐?”“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예전에 어부가 쓰던 집 같은데, 지금은 버려져 있기에 혼자 종종 시간을 보내는 곳입니다.”“그래서, 그 환자는 어디 있느냐?”유진이 나란히 붙은 두 개의 작은 방 중 안쪽의 문을 가리켰다.부안군은 조심스레 미닫이 방문을 열어젖혔다.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사내의 거구가 눈에 들어왔다.죽은 시신처럼 창백하게 질려있었다.“의식이 아예 없구나. 이대로 두면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듯싶구나.”조심스럽게 살피며 한 걸음 물러서는 부안군과 달리.일말의 망설임도 없이.유진은 사내의 몸을 덮고 있던 두꺼운 솜이불을 거칠게 걷어붙였다.그러고는 준비해 온 약초들을 그의 처참한 자상 위로 아낌없이 도포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잠시 방바닥을 확인하더니, 다급히 부엌으로 가 아궁이에 마른 장작들을 더 밀어 넣었다.넋이 살짝 나간 채 사내를 바라보는 부안군.유진은 대뜸 그에게 미음 그릇을 슥 건넸다.“오라버니, 이것 좀 도와주십시오. 사내의 턱을 벌려 고정해 주셔요.”“정명아, 차라리 관아에 알리거나 마을의 의원에게 이 자를 데려가는 게 어떻겠느냐? 이 자의 상태가 네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이 남자…… 여민국 백성이 아닙니다.”순간 부안군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방 안 구석을 예리하게 둘러보았다.그때 방 한켠에 둔 낯선 형태의 옷저고리가 보였다.흑색 비단에 기묘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사츠마의 무복.부안군의 검은 눈동자가 순간 사납게 가로질러 가늘어졌다.“사츠마…… 사람이냐? ”“오라버니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지요?”“그렇다면 더더욱 당장 관아에 알려 신원을 알아봐야한다. 밀정일지 누가 아느냐!”“그럼 이 자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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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황금빛과 검은 안광

사흘이 지났다.마침내 나흘째 되는 이른 아침의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밝아왔다.유진은 조반도 거른 채 서둘러 처소를 나섰다.며칠 동안 밤새 간호를 하느라 피곤했는지 부안군은 간만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유진은 홀로 안개 자욱한 산길을 따라 그 외딴 초가집으로 향했다.조심스레 나무문을 열고 들어선 방 안.여전히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사내는 나흘 전과 다름없이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유진은 다가가 누워 있는 남자의 이마 위로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번뜩ㅡㅡ!사내의 굳게 감겨 있던 두 눈이 맹수처럼 무섭게 치켜 올려졌다.찰나의 순간이었다.마치 전광석화처럼. 시신처럼 누워 있던 거구가 유진의 가느다란 손목을 우악스럽게 낚아챘다.“앗……!”무지막지한 사내의 힘에 속절없이 이끌렸다.쿵, 유진의 가녀린 몸집이 구들장 위로 힘없이 고꾸라졌다.순식간에 사내는 몸 아래 여자를 결박하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뼈를 부러뜨릴 듯 꽉 조여왔다.사내의 손에 박힌 억센 굳은살의 거친 감촉과 뜨거운 열기가 유진의 얇은 피부 너머로 파고들었다.통증에 유진의 맑은 미간이 구겨졌다.유진은 고개를 들어 사내를 똑바로 응시했다.칠흑 같은 밤하늘을 통째로 베어 문 듯.깊고 진한 사내의 눈매가 굶주린 호랑이처럼 그녀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한 눈에 상대의 영혼을 압도하는 사내의 강렬한 시선.유진은 숨을 들이켠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국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리고……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사내 역시 일순간 온몸이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사정없이 얽힌 찰나.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기묘하게 흔들렸다.이토록 결점 없이 정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은 생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무엇보다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저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황금빛 눈동자.아침 햇살을 받아 정제된 금을 녹여낸 듯 허상처럼 느껴졌다.사내는 움켜쥔 손을 잊은 채 넋을 잃고 유진을 응시했다.「あなた……誰?」낮게 긁히는 이국의 언어가 방 안의 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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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잔인한 핏빛 질투

여전히 혈향이 진동했다.눈물로 젖은 그녀의 입술을 숨막히게 겹쳐 물고 짓이기듯 타액을 들이켰다.지금 이 손을 놓치면. 이 가녀린 온기를 조금이라도 놓아주면.두 번 다시 그녀에게 닿지 못할 것이라는 지독하고도 처절한 공포.쇼의 검은 눈동자에 거대한 광기가 닻을 내렸다.유진의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고통 섞인 신음과 거친 울부짖음조차도.그의 흔들림 없는 잔혹한 소유욕을 꺾을 수는 없었다.이미 사냥감을 짓눌러 완전히 포획한 맹수.그녀는 이제 그의 완벽한 소유였다.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그는 그녀의 결박된 햐얀 두 손목을 단 한 손으로 거칠게 제압했다.서로의 살결이 맞닿은 경계면마다.피비린내 나는 붉은 열병이 들불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파도처럼 밀려든 몇 번의 강렬한 사정.숨이 터져 나갈 듯한 열기의 정점이 방 안의 모든 공기를 휩쓸고 지나갔다.한동안 두 사람은 지친 몸을 사슬처럼 엉킨 채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하얗게 피어오르는 뜨거운 숨결.고요를 깨뜨린 것은 서슬퍼런 칼날의 감촉이었다.쇼는 유진의 가녀린 두 손목을 옭아매고 있던 거친 포승줄을 향해 도검을 내밀었다.스윽, 탁―!단칼에 잘려 나간 밧줄 자국 위로 붉게 진물러진 손목 살결이 드러났다.뽀얀 백옥 같은 피부 위로 선명하게 새겨진 핏빛 흔적.곧이어 사내는 엉망으로 짓겨져 반쯤 풀어헤쳐진 그녀의 옷자락을 내려다보았다.무채색의 회색 승려복.굳은 살로 덮인 구리빛 손가락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뻗어 나갔다.그리고 남자의 두꺼운 손끝이 느리고 거칠게 움직이며, 유진의 흐트러진 치마끈을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순간 기진맥진한 채 인형처럼 널브러져 있던 유진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떨었다.흐릿했던 눈동자에 뒤늦은 수치심이 차올랐다.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두 손을 허우적대며 남자의 손길을 필사적으로 밀어냈다.하지만 가녀린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다.쇼는 유진의 가냘픈 두 손을 침상 위로 무겁게 눌러 고정했다.그의 안면은 마귀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그리고 그의 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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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정명(貞明)은 죽었다

거친 폭풍이 수십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납처럼 무거웠다.정사의 잔흔으로 완전히 탈진한 채.정신을 잃어버린 유진을 그대로 놔둔 채로.쇼는 단 한 순간도 등을 대고 눕지 않았다.온 세상을 제 발아래 꿇린 정복자의 거구.그럼에도 그는 극단적인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삼 년 전 영주 태산 자락.그녀를 허망하게 잃어버렸던 그 끔찍한 새벽이 여전히 그의 숨통을 조여오는 듯.그는 차가운 장검을 품에 단단히 안아 쥔 채 어둠 속에 우뚝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그의 매서운 안광은 방의 입구만을 매섭게 노려보았다.사방을 주시하는 날 선 경계 태세로.그는 오직 짐승처럼 얕은 선잠을 청할 뿐이었다.이윽고 창살 틈새로 하얀 아침 햇살이 칼날처럼 들이칠 무렵.“아…… 윽……!”유진의 정신이 겨우 정신을 돌아왔다.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허리와 골반 아래쪽은 마치 말에 짓밟힌 것처럼 부서질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간신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스스륵―.이불이 쓸리는 아주 작은 기척이었다.그 사소한 마찰음에.등지고 앉아 있던 쇼가 번뜩 몸을 돌렸다.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사내의 핏발 선 검은 눈동자가 유진을 서늘하게 쳐다보았다.그리고 그녀가 누워 있는 보료 앞으로 다가왔다.그러고는 기어이 그녀의 작은 얼굴을 거친 두 손으로 자비 없이 감싸 쥐었다.짓이겨져 터져버린 유진의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사내의 두껍고 단단한 엄지손가락이 유진의 찢어진 입술 위를 끈적하고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쓰라린 통증에 유진의 미간이 찌푸려졌으나 쇼는 손을 떼지 않았다.이내 그의 매서운 시선이 그녀가 누워 있던 이부자리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순백의 이부자리 여기저기에 엉망으로 번진 핏자국들이 어지럽게 묻어 있었다.거칠고 난폭했던 지난 밤의 흔적.그녀의 완전했던 순결을 가차 없이 도륙해버린 명백한 잔흔이었다.그 선연한 붉은 얼룩을 눈에 담는 순간.쇼의 잘생긴 미간에 불쾌한 듯 깊은 주름이 잡혔다.가슴 안쪽이 시리도록 저려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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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너는 여전히 정명인 것이냐

그때였다.쇼는 자신이 입고 있던 청색 유카타 자락을 미련 없이 벗어던졌다.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거구가 유진의 시야를 가득 덮쳐왔다.지독하게 압도적인 남자의 거대한 존재감.순간 유진은 겁부터 먹었다.그리고 그는 그녀가 몸을 담근 나무 욕조 안으로 가차 없이 걸어 들어왔다.출렁―.커다란 물보라가 일며 사내의 단단하고 탄탄한 하복부가 유진의 골반에 빈틈없이 밀착되었다.물속에서 느껴지는 사내의 뜨거운 아우라와 거대한 체구가 그녀를 압박했다.그는 그녀를 마주 보며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우악스럽게 끌어안았다.그리고 자신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강제로 앉혀버렸다.물속에서 여인의 여린 살결과 사내의 단단한 살결이 아무런 경계 없이 날것으로 맞닿았다.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풀무불의 용광로처럼 뜨겁게 들끓었다.유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시 버둥거렸다.수많은 전장의 흉터들이 새겨진 그의 단단한 가슴을 가냘픈 손으로 거세게 밀어냈다.물보라를 일으키며 자신을 또다시 완강하게 거부하는 그녀.그의 내면의 지독한 허기와 파괴적인 정복욕이 다시금 눈을 떴다.그는 유진의 가느다란 양팔을 거칠게 붙잡아 나무 욕조 가장자리에 거칠게 짓누르며 고정했다.그리고는 애절한 안광으로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사내의 목소리가 피폐하게 갈라져 나왔다.“넌 내 것이다. 넌…… 이제 온전히 내 몸 아래에서만 숨을 쉬고 내 허락 아래서만 살아야 하는 내 것이라고! 그러니까 나에게 통하지도 않을 그 가당치도 않은 저항을 하겠다고 아까운 힘 빼지 마라.”그의 손가락이 유진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꽉 움켜쥐었다.“내 손으로 또다시 널…… 어제처럼 처참하게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유진.”그에게 완전히 짓눌린 채.그녀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욕조 안에서 온몸을 벌벌 떨었다.밀려드는 수치심과 지독한 비참함.하얗고 연약한 어깨가 서럽게 들썩였다.“흑…… 아아…….”그는 다시금 그녀의 붉은 입술을 거칠게 탐하려 고개를 숙였다.그러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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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탈주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가학적이고 거친 결착이 마침내 끝났다.탕실 내부에는 숨이 턱 막힐 듯 무거운 정적이 감돌았다.초점을 잃은 황금빛 눈동자.영혼이 완전히 빠져나가 시신처럼 널브러진 유진의 살결 위로 서늘한 공기가 맴돌았다.쇼는 말없이 물에 적신 무명 천을 들었다.조금 전까지.짐승처럼 그녀를 탐하고 짓밟았던 사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상처 입은 여린 살결을 훔쳐내는 손길은 기이하리치만치 정성스러웠다.그는 그녀의 붉게 짓눌린 목덜미와 허벅지 안쪽의 흔적을 조심스레 닦아냈다.그리고 사츠마국 특유의 화려한 붉은 비단 의복을 가져왔다.놋빛 기름불 아래.뽀얀 살결 위로 포개지는 선붉은 비단.쇼는 유진의 가녀린 몸 위에 옷을 입히고 매듭을 단단히 여며 옷고름을 고정했다.유진은 줄이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 같았다.어떠한 감각도 온기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차갑게 식은 몸을 사내의 손길에 내맡기고 있을 뿐이었다.사내의 몸에서는 여전히 비린 철분 냄새가 풍겼다.이윽고 쇼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쥐고 끌어당겼다.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그의 압도적인 악력.그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무거운 걸음을 내딛던 바로 그 찰나.“……아악!”짧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방 안의 공기를 갈랐다.유진의 가녀린 작은 몸집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 위로 무참하게 쓰러져 내렸다.바닥에 발걸음을 제대로 내딛자마자.밤새도록 이어졌던 거친 난도질과 가혹한 찬탈의 통증이 해일처럼 솟구쳤다.하복부 전체를 찌르는 듯한 끔찍한 파열통.붉은 비단 치마자락 사이로 드러난 가녀린 두 다리가 경련하듯 떨렸다.실핏줄이 터지듯 힘이 완전히 풀려버렸다.제 의지로는 단 한 걸음조차 서 있을 수 없었다.순간, 유진의 황금빛 눈동자 너머로 다시금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유진은 온몸을 바르르 떨었다.과거의 간절했던 사랑이 오늘의 가장 끔찍한 저주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 영혼을 다해 사랑했고.살려내고자 제 숨결까지 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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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타카오의 충고, 단식

굳게 닫힌 나무 대문 너머. 유진은 붉은 비단 치마자락을 움켜쥐며 차가운 문고리를 잡은 채 숨을 죽였다.그때 타카오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유진의 귓가에 잔인하게 닿았다.“……쇼군께서 대본영의 군무를 마치고, 곧 이곳 별채 침소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마마, 부디 그 어떤 헛된 짓도 도모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문 너머로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서늘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만약 이곳에서 마마에게 만에 하나라도 불상사가 생긴다면, 바로 그 순간 저를 비롯한 이 저택의 모든 이들의 목이 베여 나가는 광경을 가장 먼저 보게 되실 겁니다.”서서히 내려앉는 그의 시선.그의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불안과 애틋한 감정이 낮게 일렁이고 있었다.“그리고 이 땅의 모든 백성들 또한 남김없이 모조리 도륙 내어 피바다로 물들 것입니다. 물론 도망친 여민국의 왕실과 세자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공주 마마라는 유일한 협상 가치가 그들에게서 사라진다면, 이 여민국에서 쇼군의 자비 어린 관용 따위는 단 한 자락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시오.”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타카오의 끔찍한 경고.유진은 버티고 있던 다리의 힘이 풀려 결국 제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문을 등진 채 뺨을 타고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오직 그의 정욕을 채우며 만족시켜야만 모두가 안전하다는 굴욕적인 구속.달빛마저 무서운 듯 서늘하게 비껴버린 어두운 별채 안.도망칠 모든 길을 완벽하게 잃어버린 공주의 처절한 절망만이 사방에 울려 퍼져 깊어 가고 있었다.끼이익ㅡ.순간 귓가를 치고 들어온 문소리에 마치 거대한 벼락이라도 맞은 듯.유진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방 안으로 도망쳐 들어왔다.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와 제어가 안됐다.숨을 쉴 때마다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것만 같았다.그때 정적을 깨고 별채의 두꺼운 미닫이문이 느리게 열렸다.조금 전, 탈주하려 문턱을 넘어설 때의 극한의 한기가 채 가시기도 전이었다.스으윽―.쇼군이 칠흑 같은 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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