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아침.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의복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방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사방에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대지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긴 했으나, 당장 비를 쏟아낼 것 같은 먹구름은 아니었다.유진은 가만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배를 타셨겠구나.]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침소에서 점심 식사를 받았다.넋을 놓은 채 숟가락만 만지작거리는 공주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유모 최 상궁이 고개를 기우뚱하며 물었다.“웬일이십니까, 마마? 이리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늦잠도 주무시고, 식사도 처소에서 다 하시고 말입니다. 급한 환자가 있다 하시더니 어찌 이리 맥을 못 추십니까?”“그동안 많이 아팠던 사람이 이제 다 나았어.”“아이고, 그거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매일 새벽같이 나돌아 다니시느라 피골이 상접해 보였는데, 차라리 잘되었습니다.”하지만 쉬이 줄어들지 않은 밥상.최상궁은 걱정 어린 목소리를 높였다.“헌데, 왜 이리 한 숟갈도 제대로 뜨지 못하십니까? 혹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있는 겝니까? 안색이 백지장 같사옵니다, 마마.”유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왠지 모르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도무지 나질 않았다.그때 그녀의 밥상 시중을 들던 시종 아이가 그녀가 손도 대지 않은 고기조림 반찬에 침을 삼켰다.꾸울꺽ㅡ.침 삼키는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유진의 이목을 붙잡았다.“선아. 이걸 먹고 싶은 모양이구나. 잘 됐다. 이쪽으로 어서 오거라.”몸집이 아주 작은 아이. 유난히 큰 눈이 강아지 같이 귀여웠다.그리고 유진보다 네 살이 어린, 아직 소녀라고 부르기도 앳된 꼬맹이였다.유진은 그녀를 향해 음식을 밀어주며 그녀를 불렀다.순간 최상궁이 시종아이를 째려보았다.하지만 시종 아이는 자신에게 내려꽂힌 사나운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공주의 보료 위에 덥석 앉아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여전히 날개가 꺾인 새처럼 의기소침하게 축 처진 유진.최 상궁이 이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약속했던 한 달.그 유예의 기한이 푸른 파도 너머로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외딴 해안가 초가집에서.서로의 숨결을 나누던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빠르게 기운을 잃고 종말을 향해 달려갔다.유진은 반쯤 벌어진 사내의 저고리 깃 사이로 드러난 요스케의 상처를 소독하다 슬그머니 손길을 늦추며 머뭇거렸다.그녀는 차마 사내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서툰 사츠마의 단어로 머뭇머뭇 핑계를 늘어놓았다.“아직…… 겉피부에서 미세하게 진물이 나옵니다. 지금 배에 올랐다간 상처가 다시 터져 덧나기 십상이니, 일주일쯤 뒤에 출발하시는 게 안전할 듯싶습니다.”사내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그렇게 다시 눈 깜짝할 사이 일주일이 흔적도 없이 지나갔다.유진은 먼바다를 가득 메운 검은 비구름과 거칠게 몰아치는 파도를 바라보며, 또다시 핑계를 만들어냈다.“날씨가 몹시 좋지 못하네요. 폭풍우 속에 항해를 나섰다간 바다 한복판에서 변을 당할 수도 있을 터이니, 차주로 출발 일정을 미루시는 게 나을 듯싶습니다.”유진은 그렇게 겹겹이 핑계를 치며, 그를 곁에 붙잡아 두었다.그 역시 매일 아침마다 자신의 상처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상처가 빨리 아무는 것이 속상할 정도였다.하지만 하늘이 허락한 기적 같은 유예는 영원할 수 없었다.밀려드는 죄책감 그리고 매일 곁을 지키는 여인을 향한 위험한 갈증.그는 더 이상 그녀에게 폐를 끼치며 제 안의 정념을 키워갈 수 없었다.결국 그는 청사(靑蛇) 항구에서 출발하는 상선의 일정을 유진에게 통보했다.“내일모레. 사츠마로 향하는 상선이 이곳 청사(靑蛇) 항구로 들어옵니다. 난 그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요스케는 담담하고도 서늘한 음성으로 이별을 통보했다.순간 유진의 눈빛이 흔들렸으나 이내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건강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려 보내는 길.의원으로서 보람과 기쁨만 가득한 순간이거늘.이상하게도 가슴 한편이 잘려 나간 것처럼 텅 비어버렸다.그와 헤어지기 바로 전날.유
몸의 움직임이 현저히 적다 보니 꼭두새벽부터 눈이 번뜩 떠졌다.요스케는 초가집 뒷숲의 마른 대나무를 꺾어다 투박한 낚싯대를 만들었다.그러고는 해안가 돌무더기 앞에 홀로 앉아 거친 파도 속에 낚싯대를 길게 드리웠다.[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망중한인 건가.]지난 십삼 년의 세월 동안.그는 단 하루도 쉬지 못한 채, 매 순간 죽음의 문턱에서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다.그런 피폐한 삶 끝에 기적처럼 주어진 평온이었다.요스케는 붉게 타오르는 새벽 일출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헛헛했던 가슴 전부를 채워갔다.오랜만의 낚시질이었으나, 몸에 밴 손재주는 녹슬지 않았는지 생각보다 큼지막한 생선들이 줄줄이 낚여 올라왔다.요스케는 칼을 빼 들어 능숙하게 생선들의 배를 갈랐다.내장을 도려내고 속을 바닷물에 깨끗이 씻어낸 뒤, 해초 줄기에 단단히 엮어서 초가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툇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유진의 눈에, 저 멀리 은빛 해무를 뚫고 걸어오는 거대한 사내의 자태가 들어왔다.그의 드넓은 어깨 선과 통나무처럼 굵직한 골격은 멀리서 보아도 위압적이고 독보적으로 도드라졌다.그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가늘게 눈살을 찌푸리며 짐짓 엄한 목소리로 잔소리를 퍼부었다.“휴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른 아침부터 어디서 무엇을 하셨습니까?”그때 그의 커다란 손에 들린 십여 마리의 생선들이 보였다.유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그녀는 생선들을 쳐다보다 이내 사내를 매섭게 째려보았다.속이 상했는지 모국어와 서툰 사츠마의 언어가 뒤섞여 터져 나왔다.“도대체 왜 이리 体 (몸)을 가만두지를 못하는 거지. 진짜 이러다 봉합한 부위가 다시 터지기라도 하면 얼마나 大事 (큰일)인데. 진짜 미치겠네!”「夜を明かしたのですか?」“밤을 새우신 건가요?”그녀의 추궁에, 순간 머쓱해진 그가 핑계를 대듯 중얼거렸다.“아닙니다. 아침 몇 시간을 했을 뿐입니다. 제 말 이해했습니까?”“대충 이해했습니다. 어떻게 이 짧
생사의 갈림길을 넘어 대지를 딛고 서 있었다.그는 낯선 바닷가를 천천히 둘러보며 깊은 숨을 들이켰다.차가운 바닷바람이 허물어진 옷깃 틈새로 스며들 때마다.가슴팍을 촘촘하게 메운 꿰맨 자국이 욱신거리는 통증을 만들어냈다.그때.저 멀리 홀로 말을 타고 해안가 숲길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오는 여인이 보였다.가녀린 소녀는 보기와 달리 숙련된 손길로 말에서 가볍게 내렸다.요스케는 처음으로 한 걸음 떨어진 시선으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아주 집요하게 뜯어보았다.[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계집이군.]초라하고 수수한 옷차림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위풍당당한 명마.그리고 매일같이 어디선가 공수해 오는 최고급 식재료와 약재들.나이는 대체 얼마나 되었을까.열다섯? 많아야 열일곱 즈음이나 되었을까.아직 뺨에 앳된 티가 채 가시지 않은 어린 계집이거늘.살을 찢고 장기를 도려내는 그 기괴하고도 잔혹한 의술을 어찌 이리 능숙하게 부린단 말인가.도무지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존재였다.사내의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선과 소매 아래 드러난 흰 손목을 훑고 지나갔다.빤히 바라보는 사내의 시선이 너무도 묵직하고 뜨거웠던 탓이었을까.묵묵히 찬상을 차려내던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바로 그 순간이었다.먹구름을 뚫고 동쪽 하늘에서 쏟아진 눈부신 아침 햇살이 정면으로 거칠게 부딪쳤다.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유리알 같던 눈동자가 오묘하고 농밀한 황금빛으로 번뜩이며 이채를 띠었다.쿵ㅡㅡ!순간 하복부 밑바닥에서부터 뜨거운 전율이 솟구치며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가슴팍이 터질 것처럼 빨라지는 사내의 심장 박동 소리.뜨거운 혈류가 온몸을 타고 하복부로 무겁게 쏠렸다.요스케는 황급히 자신의 단단한 가슴을 억세게 움켜쥐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부상이 심해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인가.]태어나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파괴적이고도 강렬한 충격이었다.툇마루에 앉아 유진은 사내와 나란히 거리를 둔 채 조용히 점심 식사를 마쳤다.정
어느덧 꼬박 아흐레째가 되던 늦은 오후.집채만 한 차가운 파도가 몽돌 해변에 부딪혀 무수히 부서지며 하얀 포말을 흩뿌렸다.나흘 전까지만 해도 송장처럼 누워 거친 숨만 헐떡이던 사내.이제는 제법 단단해진 두 다리로 딛고 서서 초가집 앞 몽돌 해변을 천천히 거닐며 외출을 즐기고 있었다.툇마루 끝에 서서 사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부안대군이 나직한 목소리로 누이에게 물었다.“얼마나 더 치료해야 저자를 사츠마의 상선에 태워 보낼 수 있겠느냐?”“이 정도의 빠른 회복 속도라면, 앞으로 한 달이면 충분할 겁니다.”순간 유진의 눈동자에 지난 며칠간의 아찔하고 처절했던 사투가 스쳐 지나갔다.“사실 손이 떨릴 만큼 겁이 났었습니다. 혹시라도 제 미숙한 손길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서.”부안대군은 누이의 가녀린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네 손길이 아니었다면, 저자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을 게다.”수평선 너머로 검붉은 먹구름이 나지막하게 드리워져 있었다.사내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저만치 툇마루 끝으로 향했다.나비처럼 가녀린 자태로 자신을 걱정스레 쫓고 있는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그 곁에서 지극히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를 다독이는 남자의 존재.수수한 낡은 무명 옷을 입은 여인과 달리.남자의 의복은 한눈에 보아도 고귀한 옥색 비단이었다.두 사람 주위로 흐르는 완벽한 유대감과 기품.그리고 스스럼없는 다정한 손길.순간 요스케의 가슴 한구석이 묘한 불편함으로 뒤틀리며 두 사람의 정체와 관계에 의문이 솟구쳤다.그때 부안대군의 눈빛이 남쪽 바다 건너 아득한 사츠마국을 향해 무겁게 가라앉았다.“난 당장 내일 새벽, 낙성으로 돌아가야 할 듯싶다. 청사(靑蛇)에 내려와 한참 깜깜무소식이었으니, 전하께서도 네 안위가 무척이나 궁금하셨겠지.”“그럼 빨리 돌아갈 채비를 하세요.”“근데…… 저 정체 모를 이국의 사내와 너를 이곳에 두고 떠나려니,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구나. 차라리 돈을 쥐여주고 다른 곳에
외딴 별채에 기형적인 정적과 평화가 찾아왔다.결국 여민국의 공주가 아무런 저항 없이 침상 위에 주저앉아 포로의 역할을 다하자, 더 이상의 끔찍한 살육도 비명도 들리지 않는 비현실적인 고요함이 찾아왔다.하지만 별채의 담벼락 너머로 지나치는 불안한 시선들.사츠마의 하인들과 정예 무사들의 눈동자에서조차 확연하게 드러나는 절대적인 경외심과 극도의 공포.그가 지나갈 때면, 수십 명의 무사들이 숨을 죽인 채 바닥에 피가 나도록 이마를 찧었다.쇼군(將軍), 쇼 요스케(尙 洋介)는 아군에게마저도 절대 악의 군주였다.그는 수십만 장병을 호령하며 대륙을 정벌하러 온 피에 굶주린 정복자였다.문득 떠오른 삼 년 전 기억.산속에서 만난 도적 떼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홀로 사지를 찢어 몰살시켰던 그의 무시무시했던 무공.[아아…… 내가 잠시 미쳤었구나.]뼛속까지 서러웠다.과거 그토록 잔인하고 포악한 자를 살리고 그에게 배움을 간청하며 사부라 불렀다.그리고 숨결마저 나누며 함께 목숨까지 다하기로 약조하였다.가슴을 치는 끊임없는 후회와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그런 자신의 어리석은 영혼이 너무도 사무치게 원망스러울 뿐이었다.*무사로 태어난 사내의 인생은 매일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고 지옥이었다.사방이 적이었고 매 순간이 배신이었다.극도의 긴장감 속에서 날마다 적들의 목을 쳐내던 살육의 잔혹함.결국 그 끝에서 맞이했던 건 배신과 아득한 죽음뿐이었다.그때.잿빛 죽음의 턱밑에서 그를 건져 올린 것은 여민국의 공주, 유진이었다.그의 유일한 구원이자 삶의 전부인 여인.오직 그녀만을 가슴에 품은 채 피눈물로 잔혹한 세월을 버텨냈다.그녀가 없는 사츠마에서의 시간은 숨을 쉬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껍데기에 불과했다.그저 살아도 죽어도 그녀 앞에 있고 싶었다.그래서 피바다를 건너 기어이 그녀를 찾아냈다.예전 그가 그토록 반대했던 여민국의 침략계획이었음에도.그 계획은 천황이 자신을 모략해 제거하려는 배신의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