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평생 숫자와 논리로 타인을 설득해 온 남자였다. 그러나 소율에게 건넬 물건의 의미를 몇 개의 단어로 설명하는 일은 수백 장짜리 사업 계획서를 완성하는 것보다 어려웠다."3년 전, 제가 너무 무심하게 건넨 싸구려 만년필입니다. 팀원들에게 똑같이 나눠준 기념품이었고, 누구에게 무엇을 줬는지 기억조차 못 했습니다."그의 손가락이 낡은 클립의 상처를 천천히 쓸었다."그런데 제 여자는 이걸 3년 동안 버리지 않았습니다. 혼자 저를 좋아하면서 이 펜으로 마음을 숨기고, 제 지시를 받아 적고, 결국 자신을 떠나보낼 계약서에 서명했죠."도현의 음성이 조금 낮아졌다."이 펜을 쥔 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저는 아직도 전부 알지 못합니다."에밀은 재촉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래서 바꿔주고 싶습니다."도현의 눈동자에 단단한 빛이 서렸다."앞으로는 아픈 이별이나 계약 종료가 아니라, 자신이 이룬 성과와 행복한 기억을 쓰게 하고 싶습니다.""가장 크고 화려한 다이아몬드를 원하십니까?""아니요."대답은 즉시 나왔다."전시할 보석이 아니라 매일 손에 쥘 수 있는 만년필이어야 합니다. 그녀는 중요한 기획을 시작할 때 종이에 첫 문장을 직접 쓰는 버릇이 있습니다. 무게가 손목에 부담을 줘서도 안 되고, 보석 때문에 균형이 흐트러져서도 안 됩니다.""상반되는 주문이군요. 세상에서 가장 빛나되,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그래서 이곳에 온 겁니다."도현이 에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으려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오만하기 짝이 없는 요구였으나 에밀은 불쾌해하는 대신 낮게 웃었다."소문대로군요. 한국의 얼음 황태자는 사랑을 맡길 때도 협박부터 하는 모양입니다.""정확한 결과를 요구하는 겁니다.""좋습니다. 대신 완성될 때까지 제 방식에 간섭하지 마십시오."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뭐라고요?""제 연인의 손에 들어갈 물건입니다. 확인하지
Last Updated : 2026-08-31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