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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14일간의 계약 연애: Chapter 121 - Chapter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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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도현이 놓고 간 업무용 보조 휴대전화였다.개인 휴대전화는 가지고 나갔지만, 비상 연락용 기기는 충전기에 꽂힌 채 남아 있었다.소율은 화면을 보지 않으려 했다.그러나 잠금 화면 위로 알림의 일부가 그대로 떠올랐다.[Atelier Moreau: Monsieur Cha, 요청하신 케이스의 최종 잠금 장치는...]소율의 호흡이 멎었다.아틀리에 모로.파리 방돔 광장 인근에서 왕실 보석과 고급 필기구를 수리하고 제작해 온 백 년 전통의 프라이빗 공방. 예약조차 소개 없이는 어렵다는 곳이었다.감사패를 제작하는 업체가 아니었다.소율은 자신도 모르게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알림은 뒷부분이 잘려 있었고, 잠금을 풀지 않는 이상 전체 내용을 볼 수 없었다.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도현 역시 소율의 휴대전화 비밀번호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감춰야 할 사생활은 거의 없었고, 필요할 때는 서로의 기기를 자연스럽게 사용했다.손가락 하나만 움직이면 비밀을 확인할 수 있었다.그러나 소율은 끝내 화면을 열지 않았다.지난번 편지를 봉인할 때 도현은 그녀가 직접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이번에는 자신의 차례였다.그 비밀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억지로 열어보는 순간 도현이 준비한 마음까지 훔쳐보는 셈이었다.소율은 휴대전화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대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식은 커피는 이상할 만큼 썼다.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소율도 집을 나섰다.도현의 뒤를 쫓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사진을 보관할 투명 슬리브와 편지 봉투를 사기 위해 전날부터 들르려던 문구점이 있었다.그렇게 스스로에게 설명하며 택시에 오른 지 십오 분쯤 지났을 때였다.오페라 지구로 접어든 차창 너머에 익숙한 검은 세단이 보였다.태성 지사 임원 차량이었다.도현이 뒷좌석에서 내려 기사에게 서류 봉투를 건넸다. 기사는 곧바로 라데팡스 방향으로 차를 돌렸고, 도현은 길가에 대기하던 택시로 옮겨 탔다.회사 차량의 운행 기록과 기사에게 행선지를 남기지 않으려는 행동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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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오후 1시 50분.소율은 도현보다 먼저 펜트하우스로 돌아왔다.문구점에서 산 투명 슬리브와 봉투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도 한참 동안 숨을 고르지 못했다. 거울을 확인하니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잠시 후 현관문이 열렸다."소율아?"도현이 거실로 들어섰다. 소율이 소파에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한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풀렸다."점심은 먹었어?""아직이요. 도현 씨랑 먹으려고 기다렸어요.""먼저 먹으라고 했잖아.""아침을 늦게 먹어서 안 배고팠어요."도현은 그녀의 옆에 앉아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쌌다. 그의 코트에서 가죽과 금속, 왁스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왜 얼굴이 빨개?"도현의 손등이 소율의 이마에 닿았다."열 있나?"얼마 전 39.1도의 체온으로 출근하려 했던 남자가 할 말은 아니었다."도현 씨한테 옮았나 봐요.""지금은 장난칠 때 아니야."그가 진지한 얼굴로 체온계를 찾으려 일어서자 소율이 손목을 붙잡았다."농담이에요. 뛰어와서 그래요.""어디 갔다 왔어?"도현의 시선이 탁자 위 종이봉투로 향했다.소율은 거짓말하지 않았다."문구점이요. 사진 넣을 슬리브를 사러 갔어요.""어느... 문구점?""오페라 지구 쪽이요."도현의 눈빛이 아주 잠깐 멎었다.그는 공방 맞은편에 문구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거기까지 왜 갔어?""후기가 제일 좋았어요.""그게 전부야?"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소율은 공방 앞까지 따라갔다는 말을 입 안에서 삼켰다. 오늘 자신이 한 일이 전부 옳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도현이 위험한 곳에 들어간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돌아왔어야 했다.다만 지금 털어놓으면 그가 애써 준비한 순간을 먼저 설명하게 만들 것 같았다. 도현이 자신의 비밀을 직접 꺼내는 날, 소율도 그때 오늘의 일을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었다."제가 사 온 건 이것뿐이에요."소율은 탁자 위의 종이봉투를 가리켰다.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방 맞은편 문구점의 봉투와 발갛게 달아오른 소율의 얼굴을 번갈아 보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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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파리 생활 12개월 차.한소율이 14일간의 가짜 연애 계약서에 서명한 날로부터 정확히 1년이 되는 아침이었다.차도현은 새벽 다섯 시에 눈을 떴다.알람이 울린 것은 아니었다. 잠들기 전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시간을 확인한 탓에 깊이 잠들지 못했을 뿐이었다.평소의 도현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소율의 체온을 조금 더 누리고 나서야 침대를 벗어났다. 기상 시간을 앞당기기는커녕, 품 안의 여자가 깨어나지 않도록 알람까지 진동으로 바꾼 남자였다.그러나 오늘은 달랐다.도현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율은 그의 팔을 베개 삼아 깊이 잠들어 있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왼손은 도현의 가슴 위에 편안하게 놓여 있었다.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네 번째 손가락.그의 시선이 그곳에 오래 머물렀다.오늘 저녁이면 저 손가락에 자신이 준비한 반지가 놓일 것이다. 계획대로라면 그랬다.수십억 유로가 걸린 협상장에서도, 태성그룹 이사회에서 자신의 해임이 거론되던 순간에도 이토록 긴장하지는 않았다. 숫자와 조건은 분석할 수 있었고, 상대의 다음 선택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하지만 한소율의 대답만큼은 예측해서는 안 됐다.그것은 오직 그녀가 결정할 몫이었다.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이미 서로의 미래를 수없이 약속했다. 이혜민 회장은 태성가의 안주인에게만 전해지는 루비 브로치를 소율의 옷깃에 직접 달아주었고, 소율도 도현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겠다고 답했다.그런데도 가슴 한편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1년 전, 작은 캐리어를 끌고 자신의 곁을 떠나던 소율의 뒷모습이 아직 선명한 까닭이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말과 행동이 그 여자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 도현은 너무 늦게 깨달았다.이번에 내밀 계약은 소율을 붙잡기 위한 족쇄가 아니어야 했다. 도망치지 못하게 가두는 약속은 더더욱 아니었다.그녀가 자신의 손을 잡고도 꿈과 이름을 잃지 않도록, 한소율이라는 사람의 모든 시간을 존중하겠다는 맹세여야 했다.도현은 소율의 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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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도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평생 숫자와 논리로 타인을 설득해 온 남자였다. 그러나 소율에게 건넬 물건의 의미를 몇 개의 단어로 설명하는 일은 수백 장짜리 사업 계획서를 완성하는 것보다 어려웠다."3년 전, 제가 너무 무심하게 건넨 싸구려 만년필입니다. 팀원들에게 똑같이 나눠준 기념품이었고, 누구에게 무엇을 줬는지 기억조차 못 했습니다."그의 손가락이 낡은 클립의 상처를 천천히 쓸었다."그런데 제 여자는 이걸 3년 동안 버리지 않았습니다. 혼자 저를 좋아하면서 이 펜으로 마음을 숨기고, 제 지시를 받아 적고, 결국 자신을 떠나보낼 계약서에 서명했죠."도현의 음성이 조금 낮아졌다."이 펜을 쥔 채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저는 아직도 전부 알지 못합니다."에밀은 재촉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그래서 바꿔주고 싶습니다."도현의 눈동자에 단단한 빛이 서렸다."앞으로는 아픈 이별이나 계약 종료가 아니라, 자신이 이룬 성과와 행복한 기억을 쓰게 하고 싶습니다.""가장 크고 화려한 다이아몬드를 원하십니까?""아니요."대답은 즉시 나왔다."전시할 보석이 아니라 매일 손에 쥘 수 있는 만년필이어야 합니다. 그녀는 중요한 기획을 시작할 때 종이에 첫 문장을 직접 쓰는 버릇이 있습니다. 무게가 손목에 부담을 줘서도 안 되고, 보석 때문에 균형이 흐트러져서도 안 됩니다.""상반되는 주문이군요. 세상에서 가장 빛나되,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그래서 이곳에 온 겁니다."도현이 에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으려고 찾아온 게 아닙니다."오만하기 짝이 없는 요구였으나 에밀은 불쾌해하는 대신 낮게 웃었다."소문대로군요. 한국의 얼음 황태자는 사랑을 맡길 때도 협박부터 하는 모양입니다.""정확한 결과를 요구하는 겁니다.""좋습니다. 대신 완성될 때까지 제 방식에 간섭하지 마십시오."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그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뭐라고요?""제 연인의 손에 들어갈 물건입니다. 확인하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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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일주일 전.도현은 최종 검수를 위해 주말 아침 펜트하우스를 나섰다.소율에게는 두 시간 안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했지만, 캡 중앙의 빛이 한쪽으로 쏠리는 듯 보여 예상보다 확인이 길어졌다. 그는 전용 차량이 공방 골목에 들어가는 것을 피하려 중간에 택시로 갈아탔다.소율에게 프러포즈를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아틀리에의 문 앞에서 에밀이 케이스를 열어 보였을 때도 도현은 쉽게 만족하지 못했다."빛이 한쪽으로 쏠립니다.""자연광의 각도 때문입니다.""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같은 빛이어야 합니다.""...보석은 태양이 아닙니다, 차 본부장님.""그러니 장인의 손으로 바로잡아야 합니다."에밀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단 하나뿐이어야 합니다.""이미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입니다.""그 사람이 3년 동안 견딘 시간보다 가벼워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매일 손에 쥘 수 있어야 합니다."도현의 손가락이 딥블루 몸체 위를 조심스럽게 스쳤다."전시할 보석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을 함께 써 내려갈 물건이기 때문입니다."에밀은 결국 마지막 미세 조정을 받아들였다.어치피 이 남자의 고집은 못 꺾는 걸 알기에.도현은 그때까지 알지 못했다.골목 맞은편 문구점 쪽에서 소율이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펜트하우스로 돌아왔을 때 소율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도현은 탁자 위 종이봉투를 보는 순간 발걸음을 멈출 뻔했다. 공방 맞은편에 있는 문구점의 이름이 선명하게 찍힌 봉투였다.소율은 사진을 넣을 슬리브를 사러 갔다고 했다. 어느 문구점인지 물었을 때는 오페라 지구 쪽이라고 대답했으며, 거기까지 간 이유도 후기가 좋아서였다고 설명했다.거짓말은 아니었다.다만 진실의 전부도 아니었다.도현은 공방 근처까지 갔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보았는지 추궁하지도 않았다.소율의 눈빛에는 비밀을 알아낸 사람의 난처함보다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지켜주려는 설렘이 담겨 있었다. 정말 일부를 알아차렸더라도 자신이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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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오후 1시 20분.아틀리에 모로의 작업실.에밀은 아무 말 없이 딥블루 비단 케이스를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다섯 달 동안 스물일곱 번의 수정과 세 번의 전면 재세공을 거쳐, 일주일 전 최종 검수까지 끝낸 결과물이었다. 오늘 남은 것은 보관 상태를 확인하고 완성품을 인도받는 일뿐이었다.도현이 케이스를 열었다.높은 창으로 늦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빛이 캡에 닿는 순간 열네 개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차례로 빛을 이어받았다. 눈부시지만 과하지 않았으며, 깊은 남색 몸체 위로 흐르는 광채는 센강의 밤물결에 에펠탑 조명이 부서지는 모습을 닮아 있었다.도현은 흰 장갑을 끼고 만년필을 들어 올렸다.손에 닿는 무게와 캡을 여는 압력, 손가락이 놓이는 그립의 곡선을 차례대로 살폈다. 딥블루 잉크가 종이 위로 흐르는 속도도 마지막으로 확인했다.펜촉은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빠르게 획을 그어도 잉크가 끊기지 않았고, 손가락을 옮길 때 보석이 걸리는 부분도 없었다.도현은 시험지 위에 세 글자를 적었다.[한소율]처음으로 그 이름을 계약서의 종료가 아닌 미래의 시작 위에 쓰는 기분이었다."어떻습니까?"에밀이 물었다.도현은 만년필을 들어 빛의 방향을 바꾸어 보았다. 어느 각도에서도 다이아몬드의 광채는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다."완벽합니다."다섯 달 동안 그 말을 처음 들은 에밀이 긴 숨을 내쉬었다."드디어 제 경력도 무사히 끝낼 수 있겠군요."도현은 만년필을 케이스에 내려놓고 안쪽의 백금 장식을 눌렀다.딸칵.숨겨진 두 번째 칸이 천천히 열렸다.투명한 다이아몬드 반지가 짙은 비단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도현의 호흡이 미세하게 멎었다.수십 번 도면과 시제품으로 확인한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완성된 반지를 보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소율의 손가락이 아니었다.1년 전 계약서를 가슴팍에 내밀며 이별을 선언하던 그녀의 얼굴이었다.3년 동안 이어진 자신의 어리석은 짝사랑을 14일과 함께 정리했다고 말하던 목소리도 뒤따랐다.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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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시점: 14일간의 계약 종료 1년 후 / 파리 센강 프러포즈 직후] 에펠탑의 조명이 한 차례 밤을 밝히고 잦아들었다. 긴 입맞춤이 끝난 뒤에도 한소율은 한동안 눈을 뜨지 못했다. 도현의 팔은 여전히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조금 전 반지가 끼워진 왼손은 그의 가슴 위에 놓여 있었다. 손가락 끝에 낯선 무게가 느껴졌다. 소율은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다이아몬드가 아니었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도현의 얼굴이었다. 늘 차갑고 빈틈없던 남자의 눈가가 옅게 붉어져 있었다.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긴장이 턱선과 입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청혼을 받은 사람보다 청혼한 사람이 더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도현 씨..." "응." "이제 숨 쉬어도 돼요." 도현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쉬고 있어." "아닌 것 같은데요." 소율이 그의 가슴을 가볍게 눌렀다. 손바닥 아래에서 심장이 빠르고 세게 뛰고 있었다. "여기는 아직 비상사태인데?" "방금 대답을 들었으니까 곧 정상으로 돌아와." "얼마나 걸리는데요?" "모르겠어... 처음 겪는 일이라." 차도현의 입에서 모른다는 말이 이렇게 순순히 나오는 날도 있었다. 소율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차오르던 눈물이 웃음과 함께 뺨을 타고 흘렀다. 도현은 엄지로 그 눈물을 닦았다. 손길은 조심스러웠지만 시선은 소율의 왼손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불편하지 않아?" "뭐가요?" "반지. 손가락 움직여봐." 소율이 천천히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낮게 세팅된 반지는 마디에 걸리지 않았고, 옆 손가락을 찌르는 부분도 없었다. "딱 맞아요." "통증은?" "없어요." "무게는?" "괜찮고요." "밴드 안쪽이 거슬리지는 않아?" 소율은 네 번째 질문이 나오기 전에 손을 들어 도현의 입술을 막았다. "반지는 완벽해요." 그가 말없이 다음 답을 기다렸다. "반지는 안 불편해요. 그런데 도현 씨가 제 손이랑 반지를 계속 쳐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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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넷째, 감정 과입을 적극 권장한다.]"이 조항은 누가 만들었어요?""내가.""짐작은 했어요.""문제 있어?""현재까지 위반자는 없겠네요.""당신은 아직 부족해.""제가요?""나는 1년째 과입 중인데 당신은 자꾸 공사 구분하잖아.""회사에서는 해야죠.""그래서 적극 권장이라고 쓴 거야. 강제 조항으로 쓰면 당신이 싫어할 테니까."사랑의 강도를 계약 문구로 조정하는 남자는 세상에 차도현밖에 없을 것이다.소율은 다섯 번째 조항까지 읽었다.[다섯째, 계약 기간은 두 사람이 함께 쓰는 모든 계절로 하며 만료일을 두지 않는다.]마지막 문장 아래에는 빈칸이 넉넉히 남아 있었다.도현이 딥블루 만년필을 소율에게 건넸다."확인했으면 서명해줘."소율은 펜을 받았지만 바로 이름을 적지 않았다.손에 닿는 무게가 놀라울 만큼 편안했다. 반짝이는 보석이 촘촘히 들어갔는데도 손목이 눌리지 않았고, 손가락이 닿는 부분에는 걸리는 곳 하나 없었다.도현이 지난 다섯 달 동안 무엇을 확인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소율은 펜촉을 빈 서명란 위에 가져갔다가 옆으로 옮겼다."음...""왜?""조항이 하나 빠졌어요."도현의 시선이 계약서로 향했다."어떤 조항?""아주~ 중요한 거요."소율은 다섯 번째 조항 아래에 숫자 하나를 더 적었다. 딥블루 잉크가 부드럽게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여섯째, 차도현 역시 힘든 날에는 혼자 견디지 않으며 한소율에게 사랑받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문장을 다 쓴 뒤 펜을 내려놓자 도현이 낮게 말했다."세 번째 조항과 겹쳐.""안 겹쳐요.""힘든 날에는 혼자 견디지 않는다고 이미 썼잖아.""그건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하는 공동 조항이고요. 이건 도현 씨만 지켜야 하는 특별 조항이에요.""왜 나만 특별 조항이 필요한데?"소율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39.1도인데 출근하려고 해서요."도현이 입을 다물었다."그건... 예외적인 상황이었어.""의사가 쉬라고 했는데 노트북부터 찾았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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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소율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처음에는 정말 이상해서 따라간 거예요. 외도 같은 건 전혀 의심하지 않았지만, 본사 인사 문서까지 숨기고 자꾸 혼자 나가니까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았어요.""본사 문서는 아직 확정된 내용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거야.""알아요. 지금은 그 얘기 말고요."소율은 딥블루 만년필을 바라보았다."공방 앞에서 도현 씨 목소리를 들었어요. 제가 오래 손에 쥘 물건이어야 한다고 했죠. 매일 쓰게 될 거라고도 했고요.""케이스 안은?""안 봤어요.""정말?""도현 씨가 등을 돌렸을 때 돌아왔어요. 끝까지 도현 씨한테 받고 싶었으니까."도현의 굳었던 눈매가 조금 누그러졌다."왜 바로 말하지 않았어?""도현 씨도 제가 편지 내용을 직접 말할 때까지 기다려줬잖아요. 저도 그러고 싶었어요."소율은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그리고 감사패 준비한다는 거짓말까지 배운 사람의 노력을 망치고 싶지 않았고요."도현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그건 거짓말이 아니라 보안상 필요한 설명이었어.""감사패 제작 업체에서 왁스 향이 왜 묻느냐고 물었을 때는요?""제작 방식에 따라 필요할 수도 있지.""아틀리에 모로에서 감사패도 만들어요?""..."도현은 대답하지 못했다.소율이 웃음을 터뜨리자 그가 낮게 불렀다."한소율.""왜요?""그래서... 하나도 안 놀랐어?"그 질문에는 아주 희미한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다섯 달 동안 스물일곱 번의 수정을 거친 남자에게는 프러포즈의 성공만큼 놀라움의 정도도 중요한 모양이었다.소율은 웃음을 거두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반지는 조금 예상했어요."도현의 입술이 단단히 다물렸다."하지만 이건 몰랐어요."소율은 테이블 위의 낡은 만년필과 새 만년필, 두 사람의 서명이 들어간 파일을 차례로 가리켰다."제가 혼자 좋아했던 3년을 버리지 않고 가져와 줄 줄도, 제 꿈을 지키겠다는 계약서를 먼저 써놓을 줄도 몰랐어요."도현의 눈동자가 소율에게 고정됐다."무엇보다 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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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소율이 할 말을 찾는 동안 도현의 입가에는 드문 승자의 미소가 떠올랐다."정말 평생 유효하게 만들 거예요?""응. 쿠폰도 계속 내가 보관할 거야.""왜 그렇게까지 해요?""당신이 준 약속은 전부 기억하고 오래 가지고 있고 싶으니까."기습적으로 돌아온 대답에 소율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정석적인 계약 공방 끝에 꼭 이런 식으로 심장을 치고 들어오는 것이 차도현의 방식이었다.두 사람은 센강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도현은 몇 걸음마다 소율의 왼손을 확인했고, 소율은 그럴 때마다 일부러 손가락을 움직여 반지를 반짝였다. 그가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어느 순간부터는 가로등 아래를 지날 때마다 손을 들어 보이기까지 했다."일부러 그러는 거지?""뭘요?""반지 보여주는 거.""잘 보라고 끼워준 것 아니에요?""맞아. 계속해."부끄러워할 줄 알았던 남자가 오히려 당당하게 요구했다.소율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팔에 매달렸다.펜트하우스로 돌아온 시각은 밤 열한 시를 조금 넘긴 뒤였다.도현은 서재 수납장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소율이 소원 쿠폰을 보관하던 것과 비슷한 크기였으나 내부에는 짙은 천이 깔려 있었다.낡은 플라스틱 만년필을 왼쪽에, 새 다이아몬드 만년필을 오른쪽에 놓자 두 사람의 지난 시간이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소율은 오래된 펜의 벗겨진 도금과 잔기스를 손끝으로 쓸었다."정말,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니...""버릴 수 없었어.""예전에는 제가 이 펜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잖아요.""그래서 더 가지고 있어야 해. 내가 놓친 시간을 잊지 않게."도현은 새 만년필을 소율의 손에 다시 쥐여주었다."이건 아끼지 말고 써.""다이아몬드에 흠집 나도요?"잠깐의 망설임이 그의 눈을 스쳤다. 다섯 달 동안 미세한 빛의 방향까지 따지던 완벽주의자에게 쉬운 허락은 아닐 터였다."나도... 연습할게.""뭘요?""흠집이 생겨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소율은 천천히 미소 지었다."그럼 첫 기록부터 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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