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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카이아, 어떻게 이렇게 일찍 돌아왔어? 벌써 돈을 구한 거야?"벨 언니에게 할머니의 입원 영수증을 건네며 고개를 들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딜런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매의 눈으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듯 서 있었다.그가 비죽거리며 웃자 나는 인상을 찌푸린 뒤 다시 벨 언니를 바라보았다. "돈 구하는 거야 어디서 구해야 할지만 알면 쉬운 일이지 뭐." 무덤덤하게 대답했다.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돈을 구했다'는 말은 사실 딜런에게 돈이 썩어날 정도로 많았다는 뜻일 뿐이었다. 부럽기도 하지. "할머니는 주무셔?" 덧붙여 물었다.언니는 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돈 마련하려면 시간 좀 걸릴 테니까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어제부터 너만 기다리셨어. 이렇게 금방 돌아올 줄은 몰랐네. 너 보면 정말 기뻐하실 거야, 그리고…" 언니는 내 뒤를 힐끔 보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네 동행분도."그가 누구인지 물어보고 싶어 죽겠다는 게 눈에 보였지만, 언니는 가십거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꾹 참아냈다. 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언니." 주머니에서 200페소를 꺼내 언니에게 건넸다. "가서 간식이라도 좀 사 먹어. 할머니는 이제 내가 볼 테니까 언니는 좀 쉬어."언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내 제안대로 빠르게 자리를 비워주었다. 할머니의 병실 밖에는 나와 딜런 단 둘만 남게 되었다."들어올 거야, 아니면…"그가 미소를 지었다. "밖에서 뭐 좀 사 가지고 뒤따라 들어갈게. 할머니 첫 접견인데 빈손으로 들어가면 실례잖아." 그가 말했다.나는 고개를 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나 버리고 도망치지 마, 나 진심이야. 차 안 끌고 왔단 말이야." 그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는 그저 웃으며 장난스럽게 경례를 해 보였다.그가 떠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병실 안으로 쑥 들어갔다. 할머니는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물을 홀짝이고 계셨기에 내가 들어온 것을 바로 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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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나는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고 가슴 앞에 팔장을 굳게 낀 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딜런과 할머니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지막하게 소곤거리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는지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아까 딜런은 할머니에게 자신과 내가 나중에 '결혼'해도 괜찮겠냐고 진짜로 물어보았었다. 솔직히 나는 할머니가 단칼에 거절하실 줄 알았다—어찌 됐든 내가 하나뿐인 손녀딸이 아닌가—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기회를 넙죽 잡으셨다! 어찌나 빠르게 승낙하시는지, 마치 나를 제일 높은 값을 부르는 입찰자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기는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할머니는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되풀이하시며, 내가 그놈의 "성깔" 때문에 평생 남편감을 못 찾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며 수다를 늘어놓으셨다. 저기요? 나 정도면 착한 편 아닌가? 왜 나를 무슨 답도 안 나오는 골칫덩어리처럼 표현하시는 건데?두 사람의 대화 도중 딜런이 이쪽을 힐끔 바라보았을 때, 나는 나지막하게 코웃음을 쳤다. 할머니는 계속해서 수다를 떠셨고, 딜런은 도넛을 연신 입으로 쑤셔 넣고 있었다. 그 많은 도넛 상자를 순전히 자기 혼자 먹으려고 산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할머니는 반 조각밖에 안 드셨고, 나는 부스러기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사실상 그가 남은 걸 싹 다 박살 내고 있는 셈이었다.이 사람이 도넛을 좋아한다고? 참 뜻밖이네. 단것을 달고 살게 생긴 얼굴은 전혀 아닌데 말이다. 생김새만 보면 엄청 터프해 보인다—명색이 중위 아닌가—그런데 설탕 범벅이 된 디저트에 사족을 못 쓸 줄이야. 그리고 할머니를 대하는 태도는 또 어떤가… 마치 어린아이 같다. 솔직히 참 기이한 사람이다. 그의 성격이 이럴 줄은 꿈에도 몰랐다.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막 눈을 감으려던 참이었다. 내가 직접 운전한 것도 아닌데 몸이 쑤시고 피곤했다. 반면 마닐라에서 여기까지 내내 운전대를 잡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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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차 좀 마실래?”딜런이 자신이 마시던 음료를 내밀자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할머니의 병실 정리를 돕느라 분주한 사이, 간병인 중 한 분이 그를 위해 준비해 준 차였다. 나는 고개를 저은 뒤 소파 위에서 몸을 뒤척이며 편한 자세를 잡으려 했다. 그동안 그는 주방 쪽에 서서 서성거리고 있었다.“서둘러.” 내가 그를 촉구했다. “이제 출발해야 해.”그가 코웃음을 쳤다. “진정해, 난 지금 이 상황을 즐기는 중이거든. 그나저나 너 할머니한테 작별 인사부터 다시 하고 와야 하는 거 아니냐—”“벌써 했어.” 내가 그의 말을 잘라버리자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저 한쪽 눈썹만 쓱 올려 보였다. “우리 할머니는 작별 인사에 익숙하신 분이야, 딜런. 날 믿어.”“그냥 너랑 같이 도시로 모시고 가지 그래?”그 말에 나는 길고 날카로운 숨을 들이쉬었다. “모시고 올 수 있었으면 진작에 안 모셔 왔겠어? 그럴 수가 없어. 할머니 주치의 선생님이 몇 년째 여기 계시거든. 게다가 오로라 고모가 내가 할머니를 도시로 모셔 간 걸 알게 되면 엄청난 난리가 날 거야. 그 고모 성격 잘 알아—그걸 덜미 삼아 나를 집으로 강제로 끌어들이려고 하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할머니를 또 여기 혼자 두고 가겠다는 거야?”“내가 할머니를 두고 가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내가 쏘아붙였다. 그가 즉시 고개를 저었기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쿠션에 몸을 기대었다. “바로 그거야. 나도 할머니 두고 가기 정말 싫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가능한 자주 찾아뵈니까, 우리 둘 다 이런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뿐이야.”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이내 그가 다가와 내 옆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몸을 조금 멀찍이 떨어뜨렸다. 그가 우리 사이의 틈새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고, 순간 그 틈을 좁히려나 싶었지만 다행히 그는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물며 나를 압박하지 않았다.“너 정말 여기서 자랐어?” 잠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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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너 향수 바꿨지?” 옆에 앉아 있는 딜런의 어깨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여 향을 맡으며 내가 물었다. 그에게서 나던 예전의 그 냄새가 아니었다… 확실히 달랐다.그는 꽤나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직하게 킥킥거렸다. “네가 언젠가 나한테 냄새난다고 했잖아. 나도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나 악취 안 나거든,” 그가 핀잔을 주었다.나는 그 대답의 의미를 되새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는 데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고,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때야 당연히 냄새가 났지! 술에 취해 떡이 되어 있었잖아. 그걸 진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을 줄이야,” 나는 그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찰싹 때리며 말했다.“지금은 향이 좀 나아졌어?”나는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향을 한 번 더 큼큼 맡았다. “어쩐지 아까 그 여자들이 너를 훑어보더라니. 이제야 이해가 가네,” 생각 없이 말이 툭 튀어나왔다.딜런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너도 나 다시 돌아봤어?”“당연하지, 계속 나만 바라보고 있던 건 너였잖아.” 나는 코웃음을 치며 눈을 굴렸고, 그는 다시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마침내 그는 맞은편 내 자리 건너편으로 몸을 옮겼다. 처음에 그가 왜 내 옆자리로 옮겨 앉았었는지 모르겠다… 그냥 자기 향수 냄새를 내가 알아채 주길 간절히 바랐던 걸까?“뭐 먹고 싶어?” 그가 메뉴판을 건네며 물었다. 그의 점심시간이었고, 약속대로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나는 그가 도시락을 싸 오고 나는 배달을 시켜 먹을 줄 알았는데, 그는 굳이 레스토랑에 가자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내가 아까 말했듯, 그가 쏘는 자리여야 했으니… 결국 우리는 여기 와 있었다.나는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막 입을 열어 주문하려던 참에 누군가 내 말을 잘라먹었다.“딜런!”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낯익은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낯익은.“내가 저 사람 맞다고 했잖아, 모리스. 아이버슨, 서둘러! 딜런한테 우리 점심값 내게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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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생각이라는 걸 하고 말한 거야? 대체 왜 사촌들한테 그런 말을 해?”딜런의 친척들과 마침내 떨어지자마자 나는 그를 따라 걸어가며 발을 쿵쿵 굴렀다. “미리 나한테 언띔이라도 해줘서 마음의 준비를 하게 하든가—최소한 그럴듯한 핑계거리라도 만들 수 있게 해줬어야지. 넌 진짜 너무 불공평해, 딜런. 솔직히 말해서 네가 지금 펄럭이고 있는 레드 플래그만 모아도 국기봉 하나는 족히 세우겠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말을 덧붙였다.딜런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나를 힐끔 바라보았다. “난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그래? 카이아, 내 사촌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내가 안 말했어도 어차피 조만간 눈치챘을 거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자 나는 답답해서 신음을 내뱉었다.“그래도! 나한테 먼저 물어봤어야지. 나한테 공유도 안 하고 네 마음대로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면 어떡해. 처음에는 시골에 계신 우리 할머니한테 그러더니, 이제는 네 사촌들한테까지? 다음은 뭔데? 전 세계를 대상으로 기자회견이라도 열 작정이야?”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섰다. 나는 한쪽 눈썹을 올리고 가슴 앞에 팔짱을 꼈다. 혹시라도 내가 자기 말에 수줍어서 할 말도 못 하는 다른 여자애들과 같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잘못한 건 그쪽이었고, 그는 그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었다. 내가 뭐라고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나를 우습게 보고 함부로 대하는 걸 가만히 참아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심지어 내 가장 가까운 친구인 아지엘한테도 개수작을 부리면 봐주지 않는데, 하물며 별로 알지도 못하는 남자한테 내가 왜 봐줘야 하는데?뭐, 따지고 보면 그가 내 공식적인 남친이긴 하지만, 그래도…“내가 말한 게 무슨 상관인데?” 그가 물었다. “우리 사이에 거래가 있었던 거 아니었어? 내가 브리엘이랑 그 멍청이 녀석한테 내가 훌훌 털어버리고 새출발했다는 걸 똑똑히 보여주려면 당연히—”“너 아직 못 털어냈거든.” 나는 그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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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그래서, 너희 두 사람 정확히 만난 지 얼마나 된 거야?” 나는 입술을 다물고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다니엘이 가방을 보러 들르겠다고 메시지를 보냈을 때만 해도 혼자 올 줄 알았다. 구원투수까지 데리고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맞아. 딜런 오빠 진짜로 다 잊은 거 맞아? 아까 전엔 서로 알지도 못하던 사이였다며?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다니엘이 밀어붙였다. 다른 두 사촌까지 들이닥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맙소사. 나는 길게 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노코멘트요,” 그들의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딜런은 이 사람들이 여기 와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알았다면 진작 나한테 경고를 해줬겠지. 우리는 이미 계획에 없던 갑작스러운 깜짝 방문은 질색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었다—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시나리오를 미리 짜두지도 못했다. 자칫 방심했다가 내뱉지 말아야 할 말까지 흘려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까부터 계속 '노코멘트'만 하고 있잖아—” “내가 너보다 나이 많아,” 아이버슨의 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그는 지난 5분 동안이나 마치 자기가 신이 세상에 내린 선물이라도 되는 양 내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 “예의를 좀 갖추지. 나 호칭에 좀 민감하거든.” 솔직히 말해서 호칭 따위는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았지만, 시간을 좀 벌기 위해 서열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딜런이라는 지원군도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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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우리 대체 어디 가는 거야? 점심만 먹으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나는 딜런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그는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입꼬리에 걸린 장난기 어린 미소를 내 눈 피할 수는 없었다. 한참 동안 참다못해 터뜨린 말이었다; 그는 분명 나에게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고, 보통 쉬는 날마다 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해왔던 터라 별의심 없이 알겠다고 했다.하지만 이번은 느낌이... 달랐다."가보면 알아, 카이아." 그가 던진 대답은 그게 전부였다.나는 눈알이 빠져라 세게 굴렸다. 짜증을 숨길 생각도 없이 가슴 앞에 팔짱을 꼈다. "내가 계획 없는 거 딱 질색이라고 말 안 했어? 우리가 어디 가는지 알아야 마음의 준비라도 할 거 아냐, 그냥 똑바로 말해," 나는 쏘아붙였다.딜런은 날카로운 숨을 내쉬었다. "진정해, 카이아, 진정하라고. 이번 한 번쯤은 그냥 편하게 릴랙스하면 안 돼?""너 진짜 이해 못 해? 내가 무슨 계획이라도 알고 있어야 네가 돌발 행동을 할 때마다 매번 뒤통수 맞은 기분이 안 들 거 아냐—""거봐. 세상 모든 일에 도면이 필요한 건 아니야. 그냥 흐름에 맡겨봐, 카이아," 그가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너는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 계산적이야... 그냥 숨 좀 편하게 쉬고 싶지 않아?"나는 힉 소리를 내며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이 사람은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다."난 그냥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는 게 싫은 것뿐이야," 나는 시선을 돌린 채 목소리를 애써 평정심 있게 유지하며 말했다. "내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면 어쩌려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내뱉으면 어쩔 건데? 내가 왜 이러는지 이제 좀 이해가 가?"나는 입술을 깨물며, 얼마 전 그의 사촌들에게 실수로 비밀을 털어놓았던 일을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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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우리 진짜…” 나는 창밖을 내다보며 길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는 거야?” 우리는 폰타니야 가문의 대저택 바로 앞에 차를 세워두고 있었다. 저택은 무지막지하게 크고, 솔직히 말해서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딜런은 10분째 나를 차에서 내리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나는 마치 시트에 붙어버린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눈치채기 전까지 우리가 얼마나 더 이러고 앉아있을 수 있을지는 몰랐지만, 우리 둘 다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대답해 줘야 해?” 딜런이 받아쳤다. 나는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가자, 카이아. 나 농담하는 거 아니야.” “내가 너 농담한대?” “들어가자. 엄마랑 아빠가 우리 어디 있나 궁금해하고 계실 거야—” “나 어때 보여?”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홱 돌리며 그의 말을 잘라버렸다. “머리 괜찮아? 나 피곤해 보여? 이 드레스는 어때—너무 과한가? 깔끔해 보여? 진심으로 말해줘. 네가 미리 언띔이라도 해줬어야 내가 준비라도 했을 거 아냐. 세상에, 나 어젯밤에 술 마셨단 말이야! 오늘 네 부모님 만날 줄 알았으면, 내가 술을 마시지—” 말을 하다 말고 딱 멈추었다. 딜런의 표정이 싹 바뀌어 있었다. 장난스러웠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진심으로 짜증이 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눈치채고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문제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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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아, 딜런 드디어 왔네!" 우리가 웅장한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늘 생일 파티의 주인공인 다니엘이 우리를 맞이하며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시 정신을 놓고 집 전체를 눈으로 훑어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봤던 그 어떤 저택과도 달랐다. 마치 몇 대에 걸쳐 이 자리를 지켜온 것 같은… 고택 특유의 품격이 느껴졌다. 현대적인 사치스러움은 감히 비비지도 못할 만큼 시대를 초월한 아우라가 감돌고 있었다. 나는 자신감을 풍기기 위해 인위적으로 자세를 곧게 바르게 펴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속에서는 긴장감에 나비가 날아다니듯 울렁거렸지만, 내 진짜 속마음을 들킬 수는 없었다. 내가 불안해하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내비친다면, 그들은 나를 쉬운 상대나 약자로 볼 것이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이 공간에서, 그건 내가 가장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같이 온 사람이 있는데—" 딜런이 나를 소개하려 입을 뗐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그의 말은 공중에서 굳어버렸다. "저 애 카이아 아니니?" 나는 목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거기에 모니카 고모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맞다. 고모도 폰타니야 가문 사람이었지. 내가 그걸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모리스의 엄마인데 당연한 소리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옅고 정중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모는 약간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하지만 입꼬리에는 재미있어하는 기색을 살짝 띤 채 차분하게 미소로 답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고모와 함께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 나와 딜런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시선이 오랫동안 머무는 바람에 내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고모 역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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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장 "어린 사촌들 잘 있는지 보고 올게. 같이 갈래, 아니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딜런을 따라서려고 했지만, 눈길 끝으로 이모들과 삼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마치 우두머리가 자리를 비워 먹잇감을 덮칠 기회만 노리는 포식자들 같았다. 생존 본능이 즉각 발동한 나는 마음을 싹 바꾸었다. "다녀와. 난 그냥 여기 있을게," 나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딜런은 내가 이 "사자굴"에 남는 것을 선택한 것에 놀란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 눈빛을 보더니 내가 고집을 꺾지 않을 것임을 알아챘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알았어. 금방 올게," 그는 무심한 척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딜런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나는 아이스티로 손을 뻗었다. 다니엘, 모리스, 아이버슨이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눈썹은 머리톱에 닿을 정도로 바짝 올라가 있었다. 식탁에는 우리만 남아 있었지만, 어른들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거실에 있었고 그들의 무거운 시선이 내 등 뒤를 찌르고 있었다. "왜 그래?" 나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물었다. 다니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키스 끝내주는데. 너네... 되게 숙련되어 보여," 그녀가 놀렸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왜? 커플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여자친구한테 키스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나한테 묻지 마. 난 남자친구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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