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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너를 위해 스스로를 가뒀다
한때 너를 위해 스스로를 가뒀다
Author: 초하

제1화

Author: 초하
오늘 꽃을 처음 받았을 때만 해도 나는 정말 기뻤다.

이희연이 드디어 눈치라는 게 생겨 결혼기념일 깜짝선물을 준비한 줄 알았다.

하지만 꽃 사이에 꽂힌 카드를 펼쳐 본 순간,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는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선배, 일부러 오셔서 저희 이모 수술 집도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저희 가족 모두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 꽃은 제가 선배를 위해 특별히 고른 거예요.]

[우리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선배도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유한천.]

그 카드를 보자 난 손이 떨렸고 꽃다발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3년 전 아버지가 위독하실 때, 의사는 최대한 빨리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고향의 의료 기술은 낙후되어 있었고, 아버지는 장거리 전원을 버텨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희연에게 고향으로 내려와서 아버지의 수술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근데 그때 이희연이 뭐라고 했더라?

“병원에서는 외부 출장 수술을 금지하고 있어. 일은 일이야. 사적인 관계 때문에 규칙을 어길 수는 없어.”

결국 아버지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가던 구급차 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은 평생 나에게 남은 가장 큰 한이 되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때, 나는 일부러 검은 만다라를 골랐다.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꽃말 때문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죽음과 사랑.

하지만 알고 보니 애초에 예측할 수 없는 일 같은 건 없었다.

수없이 많은 밤, 꿈에서 깨어나 임종을 앞둔 아버지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몇 번이나 자신에게 이희연을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되뇌었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지켜야 할 원칙이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규칙은 깰 수 있었고, 원칙도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단지 나, 고도겸은 이희연에게 있어서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최민환과의 통화를 끝낸 뒤, 나는 미리 꾸며 놓았던 리본과 풍선을 전부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그러고 검색창을 열고 단어를 몇 개 입력했다.

전국 자동차 여행 가이드.

푸른 바다와 해안도로,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길이 마치 하늘 끝까지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또한 예전에 아버지와 약속했었다.

살아 있는 동안 차를 몰고 카메라를 챙겨, 많은 곳을 누비는 긴 여행을 한 번 해 보자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이희연은 나를 위로하며 미처 이루지 못한 그 약속을 자신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함께 이루게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해 이희연은 막 전문의가 된 참이라 몹시 바빴고 밥조차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

자주 굶어서 위가 아픈데도 환자 차트를 보고 논문을 쓰는 이희연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파왔다.

그래서 나는 운영하던 사진 스튜디오를 접고, 사진작가에서 이희연의 남편이 되었다.

그해 나는 전국사진대회에서 대상을 받았고, 여러 유명 기업에서 들어온 제안서가 가득했다.

그만큼 앞날이 창창했지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부 포기했다.

이후 이희연은 최연소 흉부외과 교수가 되었고 업계에서 이름을 떨쳤다.

한때는 내 희생과 노력이 모두 가치 있는 일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저 지독한 아이러니였던 것이다.

현관문 잠금장치가 돌아가는 소리에 생각이 끊어졌다.

이희연이 돌아온 것이다.

외투를 벗은 이희연은 텅 빈 식탁을 한번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밥은?”

나는 노트북 화면만 바라본 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하기 싫어. 피곤해.”

그러자 이희연의 미간이 더욱 깊게 일그러졌다.

“밖에 나가서 일하는 나보다 피곤해?”

대답하기도 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이희연은 발신자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수화기 너머에서는 부드러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어 있던 이희연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리면서, 입꼬리에는 옅은 미소까지 번졌다.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갈게.”

수화기 너머로 병원 동료들이 장난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구, 수간호사님이 또 지원군을 부르셨네.]

[교수님, 빨리 오세요. 수간호사님 더는 못 버텨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분위기는 가벼웠고 두 사람을 한 쌍으로 엮으면서 즐거워하는 기색도 묻어났다.

정작 혼인신고까지 한 남편인 내가 오히려 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통화를 끝낸 이희연은 방금 벗었던 외투를 다시 걸쳤다.

“유한천 씨야?”

내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자 이희연은 잠시 멈칫했다.

“환자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한천이 찾을 사람은 나밖에 없어.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야. 괜한 생각 하지 마.”

말을 마친 이희연은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나는 그런 이희연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지난주에도 이희연은 이렇게 다급하게 집을 나섰고, 사흘 동안 출장을 간다고 했었다.

그러나 출장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그 날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까지 가서 유한천의 이모를 수술해 준 것이었다.

“여보.”

내가 불러 세우자 이희연이 뒤를 돌아봤다.

“왜?”

나는 이희연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물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기억해?”

이희연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대답했다.

“6월 1일?”

그러자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정말 잊었구나.’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고, 다섯 번째이자 다행히 마지막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일 잘하고 와.”

이희연은 나를 바라보며 뭔가를 눈치챘는지 잠시 침묵하다가, 건조한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일 끝나면 바로 올게. 야식 사 올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

이제는 정말 필요가 없었다.

이희연이 떠난 뒤, 나는 일주일 전에 예약해 둔 레스토랑으로 혼자 갔다.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주변에는 연인들이 둘씩 마주 앉아 있었다.

그 가운데 혼자인 사람은 나뿐이었다.

이때 직원이 물었다.

“손님, 다른 일행분은 언제 오시나요?”

그러자 나는 웃으며 화답했다.

“안 와요.”

‘앞으로도 오지 않을 거예요.’

나는 식사를 마친 뒤 자동차 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오프로드 차량 하나 계약하려고 합니다. 장거리 주행에도 문제없고, 어디든 여행할 수 있는 성능 좋은 차로요. 예산은 1억 6천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건에 맞는 차량이 한 대 있긴 한데, 워낙 인기가 많아서 지금은 재고가 없거든요. 물량을 가져오려면 일주일 정도 걸려요.]

일주일, 과거를 내려놓고 엉망으로 얽힌 이 결혼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걸로 하죠. 일주일 뒤에 매장으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뒤 인터넷 창을 켜고, ‘전국 자동차 여행 가이드’를 계속 검색했다.

사진이 한 장씩 화면 위로 지나갔고, 5년 동안 미뤄 두었던 꿈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최민환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이혼 합의서는 다 작성해서 이메일로 보냈어.]

“응.”

나는 낮게 대답했다.

그러자 잠시 침묵하던 최민환이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겸아, 너 희연 씨 정말 많이 사랑했잖아. 진짜 놓을 수 있겠어?]

그러자 내가 되물었다.

“희연이 누군가를 위해 원칙을 포기하고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가는 모습 본 적 있어?”

[나야 못 봤지.]

최민환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봤어.”

나는 창밖의 아득한 밤 풍경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만 그게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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