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하자 국가가 나를 보호하고, 전남편이 집착하기 시작했다: Chapter 111 - Chapter 120

130 Chapters

111화. 몇 년을 속였어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재헌은 더 이상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겁에 질린 얼굴로 입술만 달싹이는 유리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대로 병실을 나왔다.“오빠!”뒤에서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엘리베이터에 올라 문이 닫히자마자 재헌은 오세진에게 전화를 걸었다.“최민석이라는 사람 찾아.”― 최민석이요?“차유리가 해외에 있을 때 알던 놈이야.”재헌은 닫힌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리가 한국을 떠난 날부터 다시 돌아온 날까지 전부 확인해. 어디서 지냈는지, 누구랑 있었는지, 최민석하고 무슨 관계였는지도.”― 알겠습니다.“그리고 하나 더.”재헌이 잠시 말을 멈췄다.“유리가 기억을 잃었다고 했던 시기 있잖아.”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이제껏 아무렇지 않게 믿어왔던 것들이 하나둘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그것도 처음부터 다시 확인해.”전화를 끊은 뒤에도 재헌은 한동안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움직이지 않았다.몇 년 전 해외에서 돌아온 유리는 사고를 당한 뒤 기억이 온전하지 않았다고 했다.낯선 곳에서 혼자 지냈고,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버텼다고 했다.재헌은 그 말을 믿었다.유리가 울면서 털어놓는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문이 열리고 나서야 재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조금 전 병실에서 들었던 말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사진 가지고 나 협박할 생각 하지 마.우리 이미 끝났잖아.나도 누구 아이인지 모르는데.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유리의 과거 어디에도 최민석이라는 남자는 없었다.그런데 처음 듣는 남자가 유리와 호텔에 있었고, 두 사람의 사진까지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유리의 임신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단순히 오래전에 알던 남자일 리 없었다.***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오세진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표님, 생각보다 확인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재헌은 보고 있던 서류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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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화. 내가 알던 여자가 아니었다

다음 날 늦은 오후, 오세진이 두꺼운 서류봉투를 들고 대표실로 들어왔다.평소 같으면 들어오자마자 보고부터 시작했을 사람이 책상 앞에 선 채 잠시 머뭇거렸다.재헌이 고개를 들었다.“찾았나.”“……예. 그런데 대표님께서 알고 계셨던 내용과 많이 다릅니다.”오세진이 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재헌은 말없이 봉투를 열었다.가장 먼저 나온 건 현지 법인의 사업체 자료였다.**[대표자 : 최민석]**그 아래 적힌 주소를 확인하던 재헌의 손이 멈췄다.유리가 해외에서 기억을 잃은 뒤 혼자 지냈다고 했던 지역이었다.“차유리 씨가 실제로 거주했던 곳입니다. 최민석 씨는 당시 이 지역에서 사업체를 운영했고요.”재헌이 다음 장을 넘겼다.현지 거주 기록에는 같은 주소 아래 두 사람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차유리. 최민석.**오세진이 그 위에 다른 서류 한 장을 올려놓았다.“그리고 이게 현지 혼인 기록입니다.”재헌의 시선이 멈췄다.“혼인?”“두 사람, 법적인 부부였습니다.”재헌은 한동안 서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유리가 해외에 머물렀던 기간 대부분이 혼인 기간과 겹쳐 있었다.그 순간 자신의 품에 안겨 울던 유리의 얼굴이 떠올랐다.*‘갑자기 사고가 났어…….’**‘눈을 떴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났어.’**‘오빠를 찾아가고 싶은데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재헌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낯선 곳에서 혼자 얼마나 무서웠겠느냐며 유리를 안아주고 달래기까지 했다.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그 시간 동안 유리에게는 함께 살던 남편이 있었다.“기억상실은?”“사고 기록은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간 기억을 잃었다거나 신원을 확인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기록은 찾지 못했습니다.”재헌의 미간이 좁아졌다.유리가 돌아왔을 당시에도 사람을 시켜 해외에서의 행적을 알아봤었다. 하지만 제대로 확인된 건 거의 없었다.사고 이후 차유리 명의의 카드와 계좌 사용이 거의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그래서 믿었다.기억을 잃은 채 제대로 생활하지 못했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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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끝내자

유리는 퇴원한 뒤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현관문이 열리자 소파에 앉아 있던 유리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오빠!”며칠 사이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해져 있었다.“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에도 답이 없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말을 쏟아내던 유리가 멈칫했다.재헌의 손에 들린 서류봉투를 본 순간이었다.“그게…… 뭐야?”재헌은 대답하지 않고 거실로 들어와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앉아.”불안한 얼굴로 다가오던 유리의 걸음이 멈췄다.재헌은 봉투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그녀 앞으로 밀었다.**차유리. 최민석.**현지 혼인 기록이었다.서류를 확인한 유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졌다.“오빠, 이건…….”“결혼했더군.”“내가 설명할게. 그게 아니라…….”재헌은 사고 기록과 현지에서 확인한 자료를 차례로 꺼내놓았다.“기억을 잃은 적도 없었고.”“그건…….”“최민석하고 같은 집에서 살면서 그 사람 카드와 계좌로 생활했더군.”유리는 입을 다물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최민석이 누구냐고 묻자 대학 시절 알던 친구라고 했다. 호텔에서 만난 사람도 여자라고 잡아뗐다.그런데 친구가 아니었다.남편이었다.재헌이 유리를 바라봤다.“어디부터 거짓말이야?”유리의 눈가가 금세 붉어졌다.“오빠, 나도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민석이 사업이 망하면서 빚까지 생겼고, 나까지 같이 무너질 상황이었어.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그래서 나를 찾았어?”“아니야.”유리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나 오빠 잊은 적 없어.”“남편이 있는데도?”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그 사람하고 결혼해 있을 때도 계속 오빠 생각했어. 정말이야.”재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래서 기억을 잃었다고 했어?”“오빠가 알면 날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았어.”유리가 한 걸음 다가왔다.“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했다는 걸 알면 오빠가 나한테 다시는 기회도 안 줄 것 같아서…….”“그러니까 알고도 속였다는 거네.”“그렇게 말하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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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화. 그래서요?

재헌은 차유리의 집을 나온 뒤 곧장 연구센터로 차를 몰았다.밤 아홉 시가 가까웠지만 건물 곳곳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서윤이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 하나로 보안 게이트까지 들어갔지만 직원이 그를 막아섰다.“강 대표님, 오늘은 사전 방문 등록이 없습니다.”“한서윤 박사에게 연락해 주세요. 지금 당장.”얼마 지나지 않아 보안문 안쪽에서 서윤이 걸어 나왔다. 흰 가운 소매를 걷어 올린 채 한 손에는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잠깐 얘기 좀 해.”“지금 일하는 중이에요.”“……오래 안 걸려. 제발.”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재헌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서윤은 그를 잠깐 바라보다가 시계를 확인하고 보안문 밖으로 나왔다.“말해요.”막상 가까이 마주 서자 재헌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예전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서윤의 눈에 기대도 있었고, 서운함도 있었으며 감추지 못한 애정도 있었다.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유리하고 끝냈어.”태블릿을 들고 있던 서윤의 손끝이 잠시 멈췄지만 그뿐이었다.“오늘 완전히 정리했어. 다 끝났어, 서윤아.”“그래서요?”재헌의 얼굴이 굳었다.“뭐?”“저한테 그걸 왜 말해요?”“너 때문에 끝낸 건 아니야.”“제가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나요?”“유리가 마지막까지 네 얘기를 했어.”“그건 차유리 씨 문제고요.”서윤은 태블릿을 가슴 앞으로 당겨 들었다.“두 분이 만나든 헤어지든 이제 저한테 설명하지 않으셔도 돼요.”“한서윤.”“저는 당신 여자 문제에서 빠진 지 오래됐어요.”“여자 문제?”“제가 아파서 응급실에 혼자 누워 있을 때도 당신은 차유리 씨한테 갔고, 저하고 약속이 있어도 전화 한 통이면 나갔잖아요.”서윤의 목소리에는 원망조차 묻어나지 않았다.“그때마다 당신이 선택한 사람은 차유리 씨였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다 정리했다고 찾아오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하나요?”재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잘 헤어졌다고 손뼉이라도 쳐드려요?”“……그런 뜻으로 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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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한 박사님이 필요합니다

보안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서윤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방금 전 보안 게이트 밖에서 재헌과 나눈 대화까지 그대로 문밖에 두고 온 듯, 태블릿을 든 채 곧장 연구실로 향했다.나란히 걷던 도준이 서윤의 옆얼굴을 한 번 바라봤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연구실 문을 열자 이현석과 연구원들이 밤샘 작업을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박사님, 바로 시작할까요?”“네. 오늘 예정된 테스트까지만 끝내죠.”서윤이 흰 가운 소매를 걷어 올리려던 순간, 복도 끝에서 묵직한 구두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한두 사람이 아니었다.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지하 연구구역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연구원들의 손이 하나둘 멈추고 시선이 자연스럽게 출입문으로 향했다.잠시 후 보안팀 직원이 굳은 얼굴로 들어섰고, 그 뒤를 따라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다.귓가에 투명한 무전 케이블을 건 남자들은 안으로 들어선 뒤에도 연구실 곳곳을 빠르게 살폈다.순식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한서윤 박사님.”맨 앞에 선 남자는 서윤도 언론을 통해 몇 번 본 적 있는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기술조사국장, 차정혁이었다.그가 서윤 앞에 멈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국가정보원에서 나왔습니다. 한서윤 박사님을 긴급히 모시라는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도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국정원에서 직접 올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차정혁은 대답하지 않고 뒤에 서 있던 요원에게 손을 내밀었다.곧 검은색 특수 케이스가 그의 손에 건네졌다.지문에 이어 홍채 확인까지 끝나자 짧은 전자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다. 차정혁이 뚜껑을 열자 굵은 붉은 띠가 둘러진 서류철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Ⅰ급 국가기밀 / TOP SECRET ][ 열람등급 A-1 / 지정 인원 외 열람 금지 ]서윤의 눈빛이 달라졌다.차정혁은 서류를 바로 건네지 않고 그 위에 손을 올렸다.“지금부터 보시는 내용은 국가 최고등급 보안 사항입니다. 열람에 동의하시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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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국가가 다시 나를 데려간다

연구실 안이 조용해졌다.이현석의 표정이 굳었고, 도준도 말없이 서윤을 바라봤다.서윤은 손에 들린 7년 전 도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대체할 사람이 없습니까?”“있었다면 이 시간에 저희가 직접 움직이지 않았을 겁니다.”차정혁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서울과 대전의 해당 분야 최고 연구진이 모두 현장에 투입돼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최고등급 기밀이라 해외에 자문을 구할 수도 없습니다.”서윤의 시선이 다시 도면으로 내려갔다.“그 많은 사람이 있는데 왜 저예요?”“이 연구의 첫 번째 뼈대를 만든 사람이 한서윤 박사님이기 때문입니다.”차정혁이 도면 한쪽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지난 7년 동안 수많은 연구자가 이 설계를 발전시켰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연구는 결국 박사님이 만든 기초 논리 위에 세워졌습니다.”그의 손끝이 도면에서 떨어졌다.“지금 필요한 사람은 완성된 시스템을 고칠 기술자가 아닙니다.”잠시 말을 멈춘 차정혁이 서윤을 똑바로 바라봤다.“처음부터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차정혁은 검은 케이스 안에서 문서 한 장을 더 꺼내 서윤 앞에 내려놓았다.“오늘 밤 시스템이 멈추면서 관련 국가 안보 사업도 전부 정지됐습니다. 복구가 늦어지면 더 이상 연구소 안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문서 상단에는 붉은색 비상 승인 표시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국가안보 핵심과제 긴급 투입 승인 ]그 아래 적힌 이름을 확인한 순간 서윤의 시선이 멈췄다.[ 지정 연구자 : 한서윤 ]“정부가 한서윤 박사님의 현장 투입을 요청했습니다.”7년 전, 좁은 대학 연구실에서 밤을 새워 그렸던 도면이었다.아무도 알아주지 않았고 결국 미완성으로 접어두었던 연구였다.그런데 그 연구는 사라지지 않았다.수많은 연구자가 그 위에 기술을 쌓았고, 국가는 최고등급 기밀로 보호하며 7년 동안 발전시켜왔다.그리고 그 모든 것이 멈춘 오늘 밤, 국가는 최초의 설계자인 한서윤을 다시 찾아왔다.차정혁이 서윤을 향해 깊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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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국가가 숨긴 곳

차정혁이 내민 검은색 출입증에는 이름도 소속도 없었다. 붉은 선 하나와 숫자만 찍혀 있을 뿐이었다.서윤이 출입증을 뒤집어 보자 차정혁이 입을 열었다.“지금부터 휴대전화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외부 연락도 제한되고요.”“언제까지요?”“문제가 해결될 때까지입니다.”차창 밖으로 대전 외곽의 불빛이 빠르게 밀려났다.연구센터를 출발한 지 어느덧 두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전 국방과학연구소로 가는 줄 알았지만, 차량은 정문을 지나쳐 연구단지에서도 한참 떨어진 산길로 접어들었다.가로등마저 드문 길이었다. 검은 산자락이 끝없이 이어졌고, 간간이 나타나는 군사시설 경고 표지판도 헤드라이트 뒤로 금세 사라졌다.그때 서윤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강재헌이었다.서윤은 화면만 확인한 뒤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진동이 울렸다.또 강재헌이었다.세 번째 전화까지 이어지자 도준의 시선이 잠깐 휴대전화로 향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작은 생수병의 뚜껑을 열어 서윤의 손 가까이에 놓았다.“도착하면 한동안 정신없을 것 같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셔둬요.”서윤은 말없이 물병을 집어 들었다.그때 차가 크게 흔들렸다. 앞좌석 등받이에 부딪힐 뻔한 서윤의 어깨를 도준이 재빨리 받쳤다. 차가 다시 안정을 찾자 손도 자연스럽게 떨어졌다.서윤은 아무 말 없이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차가 산길로 더 깊이 접어들자 서윤이 창밖을 바라보며 물었다.“국방과학연구소 안으로 가는 건 아닌가 보네요.”차정혁이 태블릿에서 시선을 들었다.“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시설입니다.”도준이 고개를 돌렸다.“그런 말을 지금 우리한테 해도 되는 겁니까?”“이미 두 분 다 그 시설로 들어가고 계시니까요.”서윤은 그제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그런데 도준 씨는 어떻게 같이 들어갈 수 있는 거예요?”“도원에너지테크가 이번 사업의 민간 기술 협력사 중 하나입니다.”차정혁의 설명에 도준의 눈이 가늘어졌다.“우리 회사 장비가 들어갔습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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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아무도 못 고친 엔진

서윤의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도준이 물었다.“안보 공백까지 생길 수 있다는 뜻입니까?”“그 가능성 때문에 한 박사님을 여기까지 모셔온 겁니다.”차정혁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실험 자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엔진이 과부하를 일으켜 냉각계통이 파열되면 폭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곳은 지하 밀폐시설이라 사고가 나면 바로 빠져나갈 수도 없습니다.”도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사람이 죽을 수도 있습니까?”차정혁은 부정하지 않았다.도준의 시선이 곧바로 서윤에게 향했다.서윤은 이미 굳게 닫힌 보안문을 바라보고 있었다.“알겠습니다. 들어가죠.”보안문이 열렸다.낮고 일정한 기계음이 긴 복도를 울렸다.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과 군복 차림의 사람들이 빠르게 오갔다.또 하나의 보안문이 열리자 거대한 통제실이 나타났다.정면 벽을 가득 채운 모니터에서는 수십 개의 그래프가 움직이고 있었고, 투명 차폐벽 너머에는 사람 키의 두 배를 훌쩍 넘는 원통형 장비가 서 있었다.서윤의 걸음이 멈췄다.“알아보겠습니까?”도준의 물음에 서윤은 천천히 장비 앞으로 다가갔다.“완전히 같지는 않아요. 그런데 뼈대는 분명히 같아요.”차정혁이 뒤에서 말했다.“7년 전 박사님이 설계했던 초기 모델입니다.”서윤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그대로는 아니에요. 누군가 여러 번 손댔어요.”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수석연구원이 앞으로 나왔다.“그동안 일곱 차례 개량됐습니다.”“전체 변경 이력부터 볼게요.”“1급 보안 자료입니다.”수석연구원의 말에 차정혁이 곧바로 답했다.“한 박사에게 필요한 자료는 전부 개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몇 초 뒤 방대한 설계 이력이 화면에 떠올랐다.서윤이 의자를 끌어당겨 앉자 도준도 자연스럽게 옆 모니터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2019년 원본부터 볼게요.”도준은 곧바로 자료를 찾아 화면에 띄웠다.초기 설계도에서 첫 번째 개량안으로, 다시 두 번째와 세 번째 개량안으로 넘어갔다.빠르게 화면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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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처음부터 잘못된 기준

출력은 50에서 60, 다시 70까지 올라갔다.기계음이 점점 거칠어졌다.75, 76, 77.노란 경고등이 켜졌다.78에 도달하는 순간, 그래프 하나가 흔들리더니 곧이어 두 번째 그래프까지 튀었다.“중단하겠습니다.”“잠깐만요. 3초만 더 볼게요.”출력이 79까지 치솟자 경고음이 터졌다.도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냉각값이 떨어집니다. 전력부도 따라가고 있어요.”붉은 경고창이 연달아 떠오르자 수석연구원이 정지 버튼을 눌렀다.굉음이 뚝 끊겼다.통제실 여기저기에서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보셨겠지만 똑같습니다. 냉각계통부터 흔들리고 그다음 전력부가 무너집니다.”서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아니요. 냉각이 먼저가 아니에요.”그녀의 손가락이 화면 한쪽을 짚었다.냉각값이 흔들리기 직전, 특정 센서에서 아주 작은 진동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있었다.“이건 뭔데요?”“허용 오차 안의 노이즈입니다.”서윤이 수석연구원을 바라봤다.“그 허용 오차는 언제 정했죠?”잠시 침묵이 흘렀다.서윤은 과거 기록을 빠르게 불러왔다.2023년부터 2024년, 2025년까지 같은 진동이 반복되고 있었다.서윤이 화면을 가리켰다.“계속 있었네요.”수석연구원의 얼굴이 굳었다.“전부 정상 범위로 처리됐습니다.”“처음부터 정상이라고 정해놨으니까요.”통제실이 조용해졌다.몇몇 연구원이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윤이 띄워놓은 화면을 바라봤다. 지난 사흘 동안 수없이 들여다본 데이터였지만 누구도 저 작은 진동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모두가 냉각계통을 의심하는 동안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기준.서윤은 바로 그 기준부터 잘못됐다고 보고 있었다.한참 화면을 들여다보던 서윤이 무심코 마른 입술을 적셨다.그때 손 옆으로 종이컵 하나가 조용히 놓였다.미지근한 물이었다.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서윤이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기 전에 자연스럽게 컵을 손에 쥐여주었다.서윤이 물을 몇 모금 마시는 동안 도준은 그녀가 보고 있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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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화. 열여덟 번째는 다르게

서윤은 그의 눈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때 보안요원 한 명이 들어와 차정혁에게 보고했다.“지상 보안동에 강재헌 대표가 왔습니다.”서윤의 손이 잠깐 멈췄다.“출입 허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한 박사님의 남편이라고 합니다.”“남편이라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은 아니잖아요.”“물론 아닙니다.”“그럼 규정대로 처리해주세요. 저는 계속할게요.”차정혁이 요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도준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괜찮으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서윤 앞에 놓인 계산지를 끌어당겨 마지막 수치를 다시 확인했다.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처럼.***지상 보안동.재헌은 출입문 앞을 막아선 요원을 노려보고 있었다.“한서윤이 안에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전화만 열한 통을 했습니다.”“시설 내부 인원에 대해서는 확인해드릴 수 없습니다.”재헌의 턱이 굳었다.“나는 한서윤의 남편입니다.”“가족관계는 출입 자격과 관계없습니다.”강재헌이라는 이름도, 강성그룹 대표라는 직함도, 한서윤의 남편이라는 관계도 저 문 하나를 열지 못했다.그런데 권도준은 저 안에 있었다.“권도준은 무슨 자격으로 들어간 겁니까?”“본 사업에 등록된 민간 기술 협력사 책임자로 한시적 보안 승인을 받았습니다.”재헌의 표정이 굳었다.권도준에게는 저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기 자리가 있었다.자신에게만 없었다.서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하는지, 권도준과 지금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그 사실이 재헌을 더욱 거칠게 자극했다.재헌은 굳게 닫힌 철문을 노려봤다.“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한서윤이 나올 때까지.”재헌은 대기실로 가지 않았다.철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복도 끝에 그대로 자리를 잡았다. 오세진이 몇 번이나 다가와 차에서 기다리겠느냐고 물었지만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었다.저 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서윤을 봐야 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 권도준이 함께 나온다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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