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혼하자 국가가 나를 보호하고, 전남편이 집착하기 시작했다: Chapter 101 - Chapter 110

130 Chapters

101화. 다친 사람은 당신인데

연구동 자동문이 열리자 늦여름의 습한 공기가 서늘한 실내로 훅 밀려들었다.야근이 확정된 연구원 몇 명은 현관 앞 벤치에서 종이컵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주차장 너머에서는 장비 카트가 바닥을 긁으며 지나갔다.이현석이 휴대전화를 확인하며 앞장섰다.“근처에서 먹고 가죠. 구내식당은 끝났을 겁니다.”최민규가 기다렸다는 듯 따라붙었다. 점심도 제대로 못 먹었다며 투덜거리던 그는 서윤이 오늘 먹은 거라고는 아메리카노 한 잔뿐이었다는 말까지 보탰다.서윤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뒤를 걷던 도준은 어느새 서윤과 나란히 걷고 있었다. 테스트실을 나오며 가져간 그녀의 태블릿은 여전히 그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서윤은 태블릿을 한번 보았다가 반대편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오른손 손등이 아까보다 확연히 부어 있었다.금속 프레임이 서윤 쪽으로 기울었을 때 도준이 대신 받아낸 자리였다. 붉게 짓눌렸던 피부 아래로 검푸른 멍까지 번져 있었다.서윤은 걸음을 멈췄다.“손 좀 봐요.”도준이 오른손을 내밀자 서윤은 그의 손목을 잡으려다 잠깐 멈칫했다.조금 전 자신이 먼저 붙잡았던 손이었다. 손가락 아래에서 빠르게 뛰던 맥박이 불쑥 떠올랐지만, 서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손등만 살폈다.“더 부었잖아요.”도준이 손가락을 접었다 펴 보였지만 마지막 순간 입술이 미세하게 굳는 걸 서윤은 놓치지 않았다.“아프면서 왜 괜찮은 척해요?”도준은 대답 대신 그녀를 내려다봤고, 그 시선은 묘하게 오래 머물렀다.뒤따르던 최민규가 슬그머니 이현석을 잡아끌었다. 두 사람이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간 뒤에야 서윤은 도준의 손을 놓았다.연구단지 정문 맞은편 식당은 늦은 시간에도 북적였다. 야근을 마친 연구원들이 테이블을 채운 가운데, 열린 주방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와 뜨거운 국물 냄새가 밀려왔다.네 사람이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메뉴판을 보던 도준이 매운 음식 하나를 빼고 주문하자 서윤이 그를 쳐다봤다.“매운 거 잘 못 드시잖습니까.”도준은 자연스럽게 그녀 앞으로 물컵을 밀어놓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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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자꾸 가까워지는 남자

다음 날 오전, 서윤이 연구동 로비로 내려왔을 때 도준은 이미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검은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이현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제 다친 오른손에는 얇은 탄력 보호대가 감겨 있었다.서윤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하자 도준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살아 있습니다.”묻지도 않았는데 능청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서윤은 괜히 들킨 기분이 들어 시선을 거두며 이현석에게 서류를 내밀었다.“오전 일정 바뀌었다면서요?”“네. 국가과학전략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후 일정 전에 외부 연구센터부터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이현석이 서류를 받아 넘기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안에는 이미 연구원들이 빼곡했다. 몇 사람이 서윤을 알아보고 자리를 만들었지만 비좁기는 마찬가지였다. 서윤이 안쪽으로 들어서자 도준도 뒤따라 탔다.문이 닫히려는 순간 누군가 급하게 뛰어들면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안쪽으로 밀렸고, 서윤의 등이 도준의 가슴에 그대로 닿았다.순간 어깨가 굳었다.도준은 그녀를 잡는 대신 긴 팔을 뻗어 서윤의 머리 옆 벽을 짚었다. 뒤에서 밀려드는 사람들을 몸으로 막으면서도 정작 그녀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서윤이 고개를 조금 돌리자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도준의 얼굴이 있었다.고개를 들자 단정한 턱선과 살짝 열린 셔츠 깃 아래로 드러난 쇄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그때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리며 멈췄다. 반동으로 서윤의 몸이 뒤로 밀리면서 도준의 가슴에 등이 완전히 붙었고, 머리 위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서윤이 앞으로 몸을 떼려 하자 도준의 목소리가 귓가 가까이 떨어졌다.“가만히 있죠. 더 움직이면 제가 곤란해집니다.”서윤이 홱 고개를 들자 도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입가만 희미하게 올리고 있었다.서윤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다시 앞을 봤다.도준은 끝까지 그녀를 안지 않았다. 팔은 여전히 벽을 짚은 채였고 닿아 있는 건 등뿐이었지만, 잡을 수 있는데도 잡지 않는 태도가 오히려 더 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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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사라진 아내의 자리

저택의 현관문을 열었을 때, 유리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낯선 공간감이었다.늘 신발장 한쪽을 채우고 있던 서윤의 구두가 사라져 있었다. 거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파 옆에 놓여 있던 책도, 테이블 위에 흐트러져 있던 연구자료도 전부 흔적조차 없었다.유리는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다 입꼬리를 올렸다.주인을 잘못 찾아왔던 물건들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떠난 것처럼 집 안이 말끔했다. 비로소 이 집이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춘 것 같았다.“오빠는요?”가방을 받아 든 김 집사가 계단 쪽을 바라봤다.“서재에 계십니다.”유리는 오는 길에 사 온 쇼핑백을 고쳐 쥐었다. 며칠 전 재헌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 브랜드의 셔츠였다.계단을 올라서자 반쯤 열린 서재 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오빠.”유리가 문을 밀고 들어갔지만 재헌은 책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넓은 책상 위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펼쳐져 있었고, 그중 한 장을 유난히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유리는 쇼핑백을 내려놓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뭐 봐?”그제야 재헌이 서류를 덮었지만 한발 늦었다. 덮이기 직전 유리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들어왔다.한서윤.쇼핑백 손잡이를 만지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지만, 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재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잘됐잖아. 언니도 원하던 대로 나갔고, 오빠도 이제 신경 쓸 일 없고.”“뭐가 잘돼.”낮게 떨어진 목소리에 유리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재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몸에 가려져 있던 서류들이 드러났다. 도원에너지테크 연구센터 일정표와 회의자료 곳곳에 한서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권도준이라는 이름도 몇 번이나 함께 보였다.유리는 두 이름을 잠시 바라보다 무심한 척 서류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재헌이 먼저 가져갔다.“만지지 마.”허공에 남은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평소 그의 물건을 만질 때조차 좀처럼 보이지 않던 반응이었다. 유리는 재헌을 잠시 바라보다 더 묻지 않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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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하필 둘만 남았다

연구센터에 들어온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을 때, 복도에 붉은 경고등이 켜지면서 비상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천장의 출입 통제등까지 붉게 바뀌자 연구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뭐야, 갑자기?”최민규가 상황을 확인하려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둔탁한 소리와 함께 두꺼운 자동문이 먼저 내려앉았다.서윤은 태블릿을 내려놓은 채 유리창 너머를 살폈다. 반대편에서도 연구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곧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일부 구역의 안전장치가 작동하면서 출입이 잠시 제한된다는 내용이었다.“얼마나 걸린대요?”최민규는 담당자와 통화하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가 이내 다섯 개로 바꿨다.“삼십 분에서 오십 분이랍니다.”옆에 있던 이현석이 헛웃음을 흘렸다.“오늘 일정 다 밀리겠네.”문제는 점검 직전 장비실로 들어갔던 최민규와 이현석이 반대편 구역에 남으면서 관제실에는 서윤과 도준, 단둘만 남게 됐다는 것이었다.유리문 너머에서 최민규가 미안하다는 시늉을 하자 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오늘 정말 왜 이러지.”반면 도준은 조금도 불편하지 않은 얼굴이었다.“나는 좋은데.”“뭐가요?”도준은 대답하는 대신 관제실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책상 하나에 의자 두 개, 그리고 둘뿐이었다.그 뜻을 알아차린 서윤이 눈을 가늘게 뜨자 도준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표정이 다 했는데요.”“너무 좋아서 티가 났나 봅니다.”서윤은 그 시선을 피해 태블릿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렇게 몇 분쯤 지났을까. 조용한 관제실 안에서 배가 작게 울리자 화면을 넘기던 서윤의 손가락이 그대로 멈췄다.도준은 아무 말 없이 아침에 먹다 남긴 샌드위치 봉투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서윤이 다시 밀어내자 곧바로 돌아왔다.“지금 뭐 하세요?”“협상.”“싫어요.”“안 먹으면 계속 밀 겁니다.”도준이 태연하게 서류를 펼치자 서윤은 그를 한번 흘겨보다 결국 샌드위치를 집어 들었다.바로 그때 관제실 밖이 소란스러워졌다.보안요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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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임신한 여자

재헌의 시선이 오세진의 얼굴에 멈췄다.오세진은 차유리가 며칠 전부터 냄새에 유난히 예민했고, 오늘 아침에는 구역질까지 해 직접 산부인과를 찾았다고 보고했다.“차유리 씨는 임신 가능성을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순간 재헌의 눈빛이 흔들렸다.임신.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어에 손끝에서 힘이 빠졌다가 이내 주먹이 단단하게 말려 들어갔다.그런데도 시선은 본능처럼 유리문 안쪽을 향했다.서윤은 어느새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조금 전 자신과 눈을 마주치던 것도 잊은 듯 화면을 넘기다가, 옆에 앉은 도준이 자료 한쪽을 가리키자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였다.도준이 무언가를 말하자 서윤은 그의 팔을 가볍게 쳤고, 도준의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다.두 사람의 어깨가 닿을 듯 가까워졌다.재헌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차유리였다.전화를 받자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빠, 나 지금 여성병원이야.“무슨 일인데.”― 나…… 임신일 수도 있대.재헌의 턱이 굳었다.잠깐의 침묵 뒤 유리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검사받고 연락할게.전화가 끊긴 뒤에도 재헌은 휴대전화를 쥔 채 그대로 서 있었다.오세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병원으로 가시겠습니까?”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유리문 안쪽에서는 서윤과 도준이 여전히 나란히 앉아 있었다.잠시 후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검사 끝나면 보고해.”재헌은 병원으로 향하는 대신 다시 유리문 앞으로 걸어갔다.차유리는 병원 대기실에 앉아 휴대전화 달력 앱을 내려다봤다.아무리 계산해도 생리 예정일은 일주일 이상 지나 있었다.며칠 전부터 향수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혔고, 오늘 아침에는 커피 향 때문에 욕실로 뛰어가 한참 헛구역질까지 했다.임신일 거라고 확신했다.아니, 임신이어야 했다.한서윤은 집을 나갔고 이혼까지 요구했다. 그런데도 재헌은 여전히 그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이제는 권도준까지 서윤 곁에 있었다.유리는 천천히 아랫배에 손을 올렸다.정말 재헌의 아이라면 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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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아이가 생겼어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재헌은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검사결과지를 확대했다.임신 양성.선명한 네 글자가 눈에 박혔다.“확실해?”“의사 선생님이 임신이라고 했어. 나도 아직 믿기지 않아.”재헌은 대답 대신 유리문 너머를 바라봤다.붉었던 출입 통제등이 하나둘 꺼지는 가운데, 서윤은 도준과 나란히 서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오빠, 나 혼자 있기가 좀 그래. 와주면 안 돼?”재헌은 잠시 눈을 감았다.자신의 아이가 생겼는데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건 조금 전 도준의 손길을 피하지 않던 서윤이었다.“회사로 돌아가 있어. 내가 연락할게.”통화가 끊겼다.강재헌의 아이를 가졌다고 믿게 만들었는데도 오지 않았다.유리의 눈앞으로 한서윤의 얼굴이 떠올랐다.“그래. 그렇게까지 나온다 이거지.”그때 박정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어머니…….”― 유리야, 정말 재헌이 아이야? 재헌이는 어디 있어?유리는 잠시 침묵하다 힘없는 목소리를 만들었다.“오빠는 아직 연구센터에 있어요. 서윤 언니 일도 있고 하니까 제가 부담 주고 싶지는 않아요.”― 부담이라니. 강씨 집안 아이가 생겼는데 그게 무슨 부담이야!기다리던 말이었다.유리는 소리 없이 입꼬리를 올렸다.***출입 통제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자동문이 열렸다.재헌은 곧장 안으로 들어섰다.최민규와 이현석이 비켜섰지만 도준은 자리를 지켰다.자료를 살피던 서윤이 눈을 들었다.“아직 안 갔어요?”“얘기 좀 해.”“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세요.”재헌이 입을 다문 순간, 복도에서 빠른 구두 소리가 울렸다.“재헌아!”박정희가 연구센터로 들어왔다.“유리가 네 아이를 가졌다는데 여기서 뭐 하는 거니!”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어머니, 여기가 어디라고 오십니까.”“내 손주가 생겼다는데 장소가 문제야?”박정희는 서윤을 발견하자 성큼 다가섰다.“잘됐구나. 유리한테 아이까지 생겼으니 이제 재헌이 앞길 막지 말고 빨리 이혼해라.”서윤은 태블릿을 내려놓고 박정희를 바라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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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내 아내에게서 떨어져

서윤이 연구센터를 나선 건 저녁 일곱 시가 넘어서였다.건물 앞 주차장에는 검은 세단 두 대가 나란히 서 있었다.한 대는 도준의 차였고, 다른 한 대 옆에는 재헌이 기대 서 있었다.“아직도 안 갔어요?”재헌은 대답 대신 뒤쪽을 바라봤다. 도준이 이현석과 이야기를 나누며 건물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타.”뒷좌석 문이 열렸다.“안 타요.”서윤이 지나치려는 순간 재헌이 팔을 낚아챘다.몸이 휘청하며 뒤로 끌려갔다.“놔요.”“차에 타면 놔.”재헌은 그대로 열린 문 쪽으로 서윤을 끌었다. 버티자 이번에는 허리까지 감싸 붙들었다.“강재헌!”“가서 얘기해.”“싫다고 했어요.”“나는 안 끝났어.”재헌은 서윤을 차와 자신의 몸 사이에 가두듯 막아섰다.“네가 이혼 서류 한 장 보냈다고 갑자기 남이 되는 줄 알아?”가슴을 밀어냈지만 재헌은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팔을 움켜쥔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떨어졌다.“손 놓으시죠.”도준이었다.다가오던 그의 시선이 서윤의 팔에 멈췄다.손가락이 박힌 자리 주변은 벌써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도준의 눈빛이 서늘해졌다.화가 치밀었다.당장 저 손부터 떼어내고 싶었다.하지만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서윤은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이 또 다른 방식으로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도준은 딱 한 걸음만 다가섰다.“한 박사님이 놓으라고 했습니다.”재헌이 고개를 돌렸다.“권 대표가 끼어들 일 아닙니다.”“그건 한 박사님이 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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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누구 아이야

주차장을 빠져나온 재헌은 곧장 차유리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다.운전석의 오세진은 몇 번이나 룸미러를 살폈지만 말을 걸지 않았다. 뒷좌석에 앉은 재헌도 창밖만 바라봤다.서윤을 붙잡았던 손끝에는 아직 감각이 남아 있었다.그런데 머릿속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떠나지 않았다.양성입니다.차유리가 임신했다.재헌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기쁘지도, 놀랍지도 않았다.말이 되지 않았다.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 깊어 외래 쪽 불이 대부분 꺼져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병동에 멈추자 소독약 냄새가 밀려왔다.재헌은 병실 앞에서도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문을 열자 침대에 기대어 있던 유리가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침대 옆에는 마시다 만 물컵과 뜯지 않은 죽이 놓여 있었다. 휴대전화를 쥐고 있던 유리는 재헌을 보는 순간 굳어 있던 어깨를 조금 내렸다.“재헌아.”창백한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재헌은 대답하지 않은 채 침대 옆 탁자에 놓인 검사 결과지를 집어 들었다.이미 확인했던 두 글자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양성.“의사는 뭐래.”“아직 초기래. 피검사 수치도 그렇고…… 며칠 뒤에 다시 검사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대.”유리는 재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병원에 실려 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부터 걱정해줄 거라 생각했다. 재헌은 늘 그랬으니까.하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서는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나도 너무 놀랐어. 정말 생각도 못 했는데.”재헌의 시선이 결과지에서 떨어졌다.“왜?”“뭐?”“왜 생각도 못 했는데.”유리의 입술이 굳었다.재헌은 결과지를 내려놓았다.“너 알고 있었잖아.”복도에서 카트 바퀴가 지나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유리는 마른 입술을 한번 축였다.“뭘…….”“내가 수술한 거.”유리의 손이 멈추면서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결혼 전, 아이를 원하지 않았던 재헌은 정관수술을 받았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차유리는 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잠시 침묵하던 유리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재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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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너도 알고 있었잖아

유리는 한동안 입을 떼지 못했다.재헌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자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이 눈에 들어왔다. 바늘이 들어간 자리에서 번진 피가 투명한 관을 따라 조금씩 역류하고 있었다.“내가…… 다른 남자라도 만났다는 뜻이야?”겨우 쥐어짜 낸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재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냉정한 침묵이 이어지자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그럼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봐.”“뭘 더 설명하라는 건데? 나 임신했고, 오늘 처음 알았어. 그게 전부야!”눈가를 거칠게 훔친 유리가 침대에서 내려와 재헌에게 다가섰다.“정관수술 했다고 백 퍼센트 임신이 안 된다는 법 있어? 수술한 지 4년이나 지났고, 드물게 다시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누구한테.”유리의 걸음이 멈췄다.“누가 그렇게 말했냐고.”“의사한테 물어봤어.”재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임신한 걸 오늘 처음 알았다면서 수술 가능성까지 벌써 물어봤다고?”유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당연히 물어보지! 나도 네가 수술한 거 아니까 너무 놀라서 바로 물어본 거야.”모순되는 말은 아니었다.하지만 재헌은 이상하리만큼 차분했다. 예전 같았으면 유리가 눈물을 보이는 순간 오해했다며 다독였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씩 확인해야 했다.“재검사받을 거다.”“받아. 나도 다시 검사받을 테니까.”“수술 기록부터 확인하고 나도 다시 검사받아.”“그래, 그렇게 해. 가능성이 1퍼센트라도 있다고 나오면 그때는 나 의심하고 모욕한 거 똑똑히 사과해.”당당하게 쏘아붙였지만 유리가 움켜쥔 이불 자락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그 순간 재헌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는 오세진의 이름이 떠 있었다.재헌은 병실을 나와 전화를 받았다.“말해.”— 대표님, 병원 기록 확인했습니다. 수술은 4년 전이고, 이후 두 차례 검사를 받으셨습니다.“결과는.”— 두 번 모두 정자 미검출입니다.재헌은 닫힌 병실 문을 바라봤다.“기록 보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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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내가 모르는 남자

“호텔에서 누구 만났어.”유리는 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손등에 붙은 링거 테이프 끝만 만지작거렸다.“대학 때 알던 친구야. 한국에 들어왔다고 연락이 와서 오랜만에 잠깐 본 거야.”“남자야?”움직이던 손끝이 잠시 멈췄다.“……여자야.”재헌은 더 묻지 않았다. 거짓말이라고 몰아붙이지도, 누구냐고 캐묻지도 않는 그의 침묵에 오히려 유리의 얼굴이 굳었다.재헌은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었던 휴대전화를 챙겨 들었다.“오빠.”병실 문을 열려던 재헌이 걸음을 멈췄다.“나 못 믿어?”재헌은 돌아보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쉬어.”문이 닫히고 복도를 따라 구두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자 유리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어 친정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엄마, 오빠가 호텔 간 걸 알아.”수화기 너머에서 놀란 목소리가 쏟아지자 유리는 병실 문을 힐끔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아직 민석이 만난 것까지 아는 건 아니야. 그냥 내가 호텔에 갔다는 것만 알아.”친정엄마는 결국 이럴 줄 알았다며 이미 끝난 남자를 왜 다시 만나 이런 일을 만드느냐고 유리를 나무랐다. 유리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은 채 한동안 듣고만 있었다.“나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오빠가 4년 전 수술 기록까지 확인했고, 자기도 다시 검사받겠대.”친정엄마가 무언가를 묻자 유리의 표정이 굳었다. 한참 대답하지 못하던 그녀의 손이 천천히 배 위로 내려갔다.“……나도 모르겠어.”수화기 너머에서 목소리가 높아지자 유리는 화들짝 병실 문을 돌아봤다.“엄마, 좀 조용히 해! 오빠하고도 있었단 말이야. 지난달에 술 엄청 많이 마시고 우리 집에서 자고 간 날 있잖아.”그 시각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재헌은 주머니를 뒤지다가 차 키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병실 협탁에 두고 나온 게 떠올라 다시 발길을 돌렸다.병실 앞까지 돌아온 재헌은 문을 열려다가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들리자 손을 멈췄다.“오빠는 그날 일 제대로 기억도 못 해.”재헌의 미간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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