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의 현관문을 열었을 때, 유리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낯선 공간감이었다.늘 신발장 한쪽을 채우고 있던 서윤의 구두가 사라져 있었다. 거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파 옆에 놓여 있던 책도, 테이블 위에 흐트러져 있던 연구자료도 전부 흔적조차 없었다.유리는 거실을 천천히 둘러보다 입꼬리를 올렸다.주인을 잘못 찾아왔던 물건들이 마침내 제자리를 찾아 떠난 것처럼 집 안이 말끔했다. 비로소 이 집이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춘 것 같았다.“오빠는요?”가방을 받아 든 김 집사가 계단 쪽을 바라봤다.“서재에 계십니다.”유리는 오는 길에 사 온 쇼핑백을 고쳐 쥐었다. 며칠 전 재헌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 브랜드의 셔츠였다.계단을 올라서자 반쯤 열린 서재 문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오빠.”유리가 문을 밀고 들어갔지만 재헌은 책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넓은 책상 위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펼쳐져 있었고, 그중 한 장을 유난히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다.유리는 쇼핑백을 내려놓으며 그의 옆으로 다가섰다.“뭐 봐?”그제야 재헌이 서류를 덮었지만 한발 늦었다. 덮이기 직전 유리의 눈에 익숙한 이름이 들어왔다.한서윤.쇼핑백 손잡이를 만지던 손가락이 잠시 멈췄지만, 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재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잘됐잖아. 언니도 원하던 대로 나갔고, 오빠도 이제 신경 쓸 일 없고.”“뭐가 잘돼.”낮게 떨어진 목소리에 유리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재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몸에 가려져 있던 서류들이 드러났다. 도원에너지테크 연구센터 일정표와 회의자료 곳곳에 한서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옆에는 권도준이라는 이름도 몇 번이나 함께 보였다.유리는 두 이름을 잠시 바라보다 무심한 척 서류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재헌이 먼저 가져갔다.“만지지 마.”허공에 남은 손이 천천히 내려왔다.평소 그의 물건을 만질 때조차 좀처럼 보이지 않던 반응이었다. 유리는 재헌을 잠시 바라보다 더 묻지 않고 소파로 가서 앉았다.
Last Updated : 2026-09-25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