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Chapter 51 - Chapter 60

66 Chapters

소문이랑 다르네 (1)

강현우의 사망 플래그를 확인하고 엿새, 잠을 제대로 못 잤다.시야는 딱 거기까지만 열어 줬다. 죽는다는 것, 원작에 없다는 것, 거기까지였고 그 뒤가 캄캄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정작 제일 알아야 할 셋이 통째로 안 읽혔다.해상도를 올리려면 링크를 더 쌓아야 하고, 링크를 쌓으려면 저놈을 키워야 하고, 키워야 죽을 자리가 보인다. 살리겠다고 죽음 쪽으로 더 밀어 넣는 꼴이었다. 짜 놓고도 좀 어이가 없었다.그 엿새 중 하루는 장부에 안 달렸다.그 밤에 붙은 것도 엿새였다. 세는 쪽이랑 붙는 쪽이 같은 숫자라 며칠은 헷갈렸다.다음 날 아침에 저쪽이 거리를 원래 자리에 돌려놨고, 그 뒤로 연락이 없다.3년 동안 이 여자는 하루에 두 번씩 뭘 보내는 사람이었다. 차를 보내거나 장부를 보내거나, 보낼 게 없는 날엔 사무실 형광등이 또 나갔다는 얘기를 보냈다. 그날부터 그게 하나도 안 왔다.편해졌어야 한다. 원래 자리로 돌아간 거니까.시야를 옆으로 밀면 저 사람 칸이 있다. 엿새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하는 건 어렵지도 않다.안 밀었다.그런 머리로 조 과제 실전 평가에 들어갔으니, 뭐, 사고가 안 나면 그게 이상하지.조는 첫 모임 그대로였다. 재능 둘, 조율 하나, 그리고 뒷줄의 나. 이번 과제는 위험도가 낮은 균열에서 민간인 구출 시나리오를 도는, 나름 규모 있는 평가였다. 훈련장 스피커에서 시작 신호가 세 번 울렸고, 발밑에서는 젖은 콘크리트 냄새가 올라왔다.문제는 내 머리 절반이 강현우한테 가 있었다는 거다.평소 같으면 들어가자마자 천장 하중이랑 균열 출력, 조원 동선부터 훑었을 텐데 그날은 엿새째 안 풀리는 그 칸만 보고 있었다.시나리오 중반, 설정에 없던 2차 붕괴가 터졌다.훈련용이라도 변수는 있다. 천장 구조물이 예정에 없던 각도로 기울면서 콘크리트 가루가 먼저 쏟아졌고, 하필 그 밑에 유채원이 있었다. 재능 둘은 반대쪽에서 민간인 역할을 빼내는 중이었고, 정작 조율하던 본인은 제 머리 위를 못 봤다.그 반 초, 그 자리를 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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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이랑 다르네 (2)

평가가 중단되고 우리는 훈련장 옆 처치실로 보내졌다.유채원은 팔꿈치가 까졌고 이쪽은 구르다 손등이 쓸렸다. 둘 다 대단한 건 아니라 간호 담당은 다른 조 쪽으로 가 버렸고, 소독약 냄새만 남은 좁은 방에 우리 둘뿐이었다."고마워."들어서자마자 그 애가 불쑥 말했다. 인사도 뜸도 없이."아까, 진짜 죽을 뻔했는데. 니가 아니었으면 큰일 났어."말을 마치고 시선이 잠깐 흔들렸다. 내 얼굴이랑 다친 손등을 번갈아 보더니 소독약 뚜껑을 필요 이상으로 세게 비틀었고, 그러고는 소독약을 든 채 내 손등 쪽으로 손을 뻗었다."됐어. 내가 해.""가만있어 봐. 나 구하다 이렇게 된 거잖아.""이 정도는 침 바르면 낫는데.""그거 진짜로 하면 감염돼."그 애가 굳이 내 손을 잡아 제 무릎 쪽으로 끌어왔고, 거리가 다시 좁아졌다.소독솜이 손등에 닿는 감각보다 남의 손을 감싸 쥔 그 애 체온이 먼저 왔다. 처치실은 좁았고, 그 애가 내 손을 제 무릎에 올리고 고개를 숙이자 소독약 냄새 사이로 옅은 샴푸 향이 올라왔다. 상처를 닦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소독솜이 까진 살을 스치자 유채원이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아파?""그 정도는 아닌데.""그럼 움직이지 마."상처를 고정하려는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들어오면서 체온이 맞물렸다. 그 애가 상태를 확인하려 고개를 든 순간, 생각보다 가까운 데서 눈이 마주쳤고 숨이 한 번 엇갈렸다.먼저 눈을 내린 건 유채원이었다. 근데 잡은 손은 안 놨고, 나도 굳이 안 뺐다. 굳이 셈에 넣을 것도 없는 몇 초가 이상하게 길었다."손 커."침묵을 못 견딘 쪽이 먼저 아무 말이나 꺼냈다."그런 말 하려고 잡고 있었어?""아니, 그냥. 소독할 데가 넓다고.""칭찬은 아니네.""칭찬 아니야."그 애가 솜을 새로 뜯었다. 처치실 형광등 하나가 아까부터 미세하게 깜빡였고, 둘 다 그걸 못 본 척했다."점심 먹었어? 나 평가 전에 먹으면 토한대서 안 먹었거든.""누가 그래.""작년 선배들이.""선배들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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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지 밖 (1)

원작에는, 아카데미가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날이 있다.여태 지운 사건들은 죄다 손안에 들어오는 크기였다. 실습 사고, 구시가 폭주, 도진혁의 팔. 감지기 갈아 끼우고 남은 찌꺼기 미리 치우고 그럴싸한 명분 한 겹만 덮어 두면 사건은 터지기도 전에 스윽 지워졌고, 세 번쯤 하고 나니 그 순서가 아주 손에 익더라.남들보다 먼저 내일에 도장 하나 찍는 일. 딱 그 정도였다.이건 결이 달랐다.그 사건은 그냥 균열 사고가 아니라 밖에서 온 누군가가 아카데미 근처의 제일 큰 균열을 억지로 열어젖히는 판이었다. 재난 위에 침입까지 얹힌 거다. 규모는 지금껏 지운 걸 전부 합쳐도 모자랐고, 원인의 절반쯤에는 사람 손이 끼어 있었다.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자연은 돈을 얹으면 앞당기든 늦추든 어떻게든 만져진다. 사람 마음은 그게 안 된다. 감지기 한 대, 대피로 한 줄, 치우는 인부 하루치. 값이 붙은 건 얼마든지 사는데 '누가 왜 이 균열을 여느냐'에는 붙일 가격표가 없었다.지갑이 처음으로 아무 쓸모가 없었다.며칠 전부터 시야 한구석이 묵직하더니, 자습실 형광등이 지직거리던 그 저녁에 기어이 형태를 잡았다. 마지막 남은 애가 의자를 드르륵 끌고 나가고 그 소리가 복도 끝에서 사라지자마자, 눈앞이 한 번 출렁였다.━━━━━━━━━━━━대형 균열 — 외부 개방 연계플래그■ 개방 (불가피)■ 아카데미 방면 확산□ 사상자 최소화예상 결과사망 다수 — 학생·교직원 포함남은 시간7일 02:11개입 가능제한적━━━━━━━━━━━━'개입 가능: 제한적.'처음 보는 세 글자였다.여태 시야는 늘 된다고 했다. 판을 깔면 빈칸이 채워지고 채워지면 숫자가 늘고. 그게 규칙이었다. 그런데 이번 창은 사건 자체를 ■로, 이미 정해진 걸로 못 박아 놨고 만질 수 있는 건 맨 아래 한 줄뿐이었다. 사상자 최소화. 그게 다였다.균열을 미리 비운다? 이 규모는 주작 전 병력을 밤새 갈아 넣어도 안 빠진다. 여는 걸 막는다? 여는 게 사람인데 그 사람이 누군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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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지 밖 (2)

"이번 분기 야외 훈련, 동부 구릉지 외곽으로 잡아.""동부요? 거긴 볼 것도 없어요. 물도 멀고, 바닥이 자갈이라 텐트 말뚝도 안 박히고.""그러니까 좋아. 아무도 안 쳐다보거든.""몇 명이나요.""백 명. 텐트 치고 장비 풀고 밥차까지 붙여. 훈련도 진짜로 시키고. 진짜여야 안 들키니까."잠깐 조용해지더니 볼펜 끝으로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여자는 머리가 복잡해지면 꼭 저런다."기간은요?""일주일.""일주일 뒤에 뭐 있어요?""아직 없어.""……아직.""응.""그 아직이 제일 무서운 거 아세요?""알아.""알면서 그러시는 게 더 무섭고요."복도 끝 자판기가 웅웅대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 소리랑 겹쳤다."그건 그렇고, 물건 들어갈 땅 세 군데 정리해 둬. 어디인지는 새벽에 보낼게.""새벽에 보내지 마시고 지금 주무세요.""장부에 잠 얘기가 어디 붙어 있냐.""거래처 걱정도 요즘은 챙길 항목이거든요.""그런 항목 만든 적 없는데.""제가 만들었어요. 허락은 안 받을게요.""없던 항목을 누구 마음대로.""제 마음대로요. 라면 다 불었으니까 이제 끊을게요.""세라 씨.""네.""다음엔 얼굴 보고 얘기하자.""일 얘기하러요?""그건 지금 다 했잖아."수화기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그럼 장부는 두고 갈게요.""응. 몸만 와.""……나중에 딴소리하지 마세요.""안 해."전화를 끊고 커피를 마저 마셨다. 다 식어서 종잇물 맛이 났다.그날 밤, 시야를 아주 정밀하게 열었다. 불을 다 끄고 눈을 감으면 그나마 선명해진다. 방에 남은 소리라곤 자판기 웅웅대는 것뿐이었다.링크가 쌓일수록 시야가 촘촘해진다. 링크에 이름을 붙인 뒤로도 강현우는 몇 번 더 내 판 위에서 벽을 넘었고, 그럴 때마다 세상 읽는 눈금이 한 칸씩 잘아졌다. 두 달 전이면 흐릿해서 못 봤을 칸까지 지금은 들여다보인다.링크에 이름 붙이던 그 밤, 윤곽만 잡히다 만 칸이 하나 있었다. 강현우 관련인데 잠겨서 안 열리다가 링크 세 번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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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지 밖 (3)

공포는 반나절쯤 갔다.그 반나절 동안 처음 보는 벽을 노려봤다. 못 지우는 판. 설계자한테 이보다 거슬리는 문장도 없다.손이 잠깐 멈추긴 했다. 겁먹은 건 아니고 처음 쥐어 보는 패라 다시 따져 보는 데 시간이 좀 걸린 거였다.점심이 한참 지나서 폰이 울렸다. 서미란이었다. 받자마자 얼음 굴러가는 소리부터 넘어왔다."대표님, 요즘 우리 인기 떨어졌어요. 이번 주 소문 순위에서 밀렸다니까? 이래서야 방패 값을 못 받죠.""낮술이야?""어떻게 아셨어요.""얼음 소리 나잖아.""이거 물이에요, 물.""물에 얼음은 왜 넣어.""우아하잖아요.""낮 두 시에?""두 시라서 우아한 거예요. 밤에 마시면 그냥 술이고.""말은 잘하네.""그게 제 직업이에요."이 여자는 낮술도 우아하게 마신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다."그럼 하나 더 깔아.""어떤 걸로요? 도박, 여자, 유흥. 세 개 중에 고르세요. 서비스로 하나 더 얹어 드릴 수도 있고.""세 개 다.""……어머.""이번 주에 내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든, 그게 다 놀러 다닌 걸로 보이면 돼.""놀러 다니는 사람 목소리는 아닌데.""연기 지도까지 받을 생각은 없어.""그럼 얼마 주실 건데요?""평소보다 세 배.""어머, 그럼 저는 아무것도 안 궁금해요.""궁금한 적은 있었고?""있었죠. 세 배 듣기 전까지만."끊었다. 유흥으로 한 겹 덮어 두면 엿새 동안 내가 동부로 사람을 밀어 넣어도 아무도 그걸 준비라고 안 부른다. 소문은 원래 제일 싸고 제일 두꺼운 담벼락이다.저녁쯤 스스로한테 물었다. 그래서, 접을 거냐.접긴 뭘 접어.구시가 준비하던 새벽에도 똑같이 답했었다. 정답지가 흐려질수록 준비는 두꺼워져야 한다고. 할 일은 그때랑 똑같았다.정리했다. 이 사건은 못 지운다. 시야가 ■로 못 박았고, 원인 절반이 사람 마음이라 미리 사 둘 수도 없다. 여태 내 방식은 사건을 아예 없던 일로 만드는 거였고, 이번엔 그게 안 통한다.그럼 방식을 바꾼다.사건은 일어난다. 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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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의 도착 (1)

어제부터, 동부 전선에 조각들이 하나씩 도착했다.누구도 그게 한 그림의 부품인 줄은 몰랐다. 다들 저마다 딴 이유로 그 자리에 왔으니까.주작 길드가 동부 구릉지 외곽을 이번 분기 야외 훈련지로 잡은 건 어제였다. 하필 이번 분기에, 하필 그 자리에.길드원 백여 명이 자갈 위에 텐트를 치는 중이었다. 말뚝이 안 박힌다고 욕을 하면서도 이틀이면 야영지 하나가 선다는데, 거기서 아카데미 방어전이 벌어질 지점까지가 걸어서 십 분이었다.명분은 훈련이고 서류도 깨끗했고, 실제로 훈련도 할 거다.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다음으로 가온다인이 '개교 기념 2차 무상 안전점검'이란 걸 발표했다. 1차가 아카데미 안이었으니 이번 차례는 자연스럽게 근처 균열 관리 구역 전체가 됐다.작업복 입은 사람들이 외곽 철망에 매달려 감지기를 갈고 관측 장비를 세우는 동안, 그게 점검이 아니라 경보망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균열 숨소리를 한 시간이라도 먼저 들으려고 깐 그물이었다. 그건 나만 아는 얘기였고.구청이랑 상인회는 봄철 재난 대비 훈련에 돈을 풀어서, 대피 방송 설비를 손보고 유도등을 갈고 안전 요원을 배치했다. 구시가에서 한 번 먹혔던 그림 그대로에 규모만 다섯 배로 뻥튀기한 거였다.서부의 어느 연구소는 학술 관측 협조라는 명목으로 사람을 동부에 보냈다. 3년 전 문 닫기 직전에 내가 주워 살린 그 연구소, 균열 전조를 세상에서 제일 먼저 읽는 물건이다. 공식 관측소가 못 잡는 숨소리를 그들은 몇 시간 먼저 듣는다.구시가 때 하루를 벌어 준 그 눈이 이번엔 동부 전선에 붙었다.그리고 균열 지대 외곽의 땅 몇 조각. 그동안 투자용이라고 우기면서 사 모은, 아무도 쓸모를 못 알아본 땅들.그 위로 짐이 실려 들어갔다. 임시 방벽 세울 자리, 다친 사람 실어 나갈 길, 예비 인력이 대기할 거점. 지도 위에서 그 땅들을 이으면 방어선 하나가 그어졌다.그 방벽 자리를 나는 3년 전 겨울에 샀다. 길도 안 붙어서 아무도 안 사던 맹지였다. 중개인이 손을 비비면서도 자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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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의 도착 (2)

밤에 시야를 열어 밑그림이 잘 먹히는지 확인했다.━━━━━━━━━━━━대형 균열 — 외부 개방 연계■ 개방 (불가피)■ 아카데미 방면 확산□ 사상자 최소화 ……켜지는 중남은 시간4일 23:11━━━━━━━━━━━━맨 아래 칸이 옅게 차오르고 있었다.방어선, 대피로, 경보망. 3년치 조각이 제자리를 찾을수록 '사상자 최소화'의 빈칸이 안쪽부터 밝아져서, 창이 '사망 다수'로 뭉개 놨던 숫자가 판 한 겹 깔릴 때마다 한 칸씩 줄어드는 게 눈에 다 보였다.여기까진 예상대로였고.문제는 그 옆에 따로 뜬 칸이었다.━━━━━━━━━━━━━━[강현우 — 사망: 대형 균열 방어전 / D-5]━━━━━━━━━━━━━━이건 눈곱만큼도 안 밝아졌다.오히려 다른 칸이 밝아질수록 그 검은색만 더 진해 보였는데, 착시였겠지. 아니, 착시이길 빌었다. 방어선을 세 겹 깔아도 후송로를 다섯 개 뚫어도 그 칸은 처음 열렸을 때 그대로 새까맣게 못 박혀 있었다. 다른 칸은 다 밝아지는데 딱 그 하나만 꿈쩍을 안 했다.이유는 뻔했다. 인정하기 싫어서 그렇지.내가 짜는 건 환경이다. 어디서 균열이 열리는지, 사람들이 어디로 도망치는지. 죄다 돈이랑 배치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다. 근데 강현우의 죽음은 환경 문제가 아니라, 저 자식이 제 발로, 틀린 대본을 철석같이 믿고, 죽을 자리에 걸어가 서는 문제였다.그 자리 앞에 방어선을 세운다? 저놈은 대본대로 방어선 없는 딴 각도로 파고들 거다. 그럼 대피 유도를 그쪽으로 몰아? 강현우가 대피를 할 리가 없잖아. 막아서는 쪽인데, 그 자식은.판으로 사람은 살려도 영웅이 영웅짓 하겠다는 건 못 막는다. 원래 그 인간들은 남들 도망치는 쪽으로 기어이 걸어가니까. 도망 안 치고 막아서는 그 성질, 원작에선 그걸로 세계를 구했는데 여기선 그게 저놈을 죽을 각도로 밀어 넣는다.그렇다고 성질을 꺾을 수도 없고. 꺾는 순간 저놈은 세계를 구할 강현우가 아니게 되니까.저놈이 영웅이라서 살리고 싶은데, 저놈은 영웅이라서 죽는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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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참는 날 (1)

사건 하루 전의 아카데미는 좀 지나칠 정도로 평화로웠다.내일 잡힌 대규모 합동 실습. 표면상으론 그게 이번 주 제일 큰 일이었다. 학년 전체가 동부 구릉지에 나가서 실전 대응 겸 대비 훈련을 하는, 규모만 컸지 이름은 얌전한 행사라 애들은 소풍 반 시험 반의 기분으로 들떠 있었다.그 실습이 내일 무엇으로 변할지 아는 사람은, 이 학교에 둘뿐이었다.봄볕은 좋았다. 강의동 앞 잔디에 애들이 둘러앉아 내일 도시락 메뉴를 정하고 있었고, 훈련장 쪽에선 조 편성을 두고 웃음 섞인 실랑이가 오갔고, 매점 앞 줄은 길었고, 게시판엔 동아리 전단이 새로 붙어서 바람에 한 귀퉁이가 팔락거렸다."야, 김밥은 무조건 두 줄이야.""두 줄을 누가 다 먹어.""내가 먹어.""니가 어제 한 줄도 남겼잖아.""어제는 어제고.""그럼 오늘은 뭐가 달라.""오늘은 두 줄이니까 다르지.""논리가 이상한데 반박이 안 되네."신입생 하나가 처음 배운 술식을 자랑하다가 실패해서 웃음을 샀고, 매점 앞에선 두 애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두고 조가 갈렸다며 투덜댔다. 잔디에 누워 눈만 감고 있는 놈도 있었는데, 저러다 내일 아침에 목 아프다고 할 거다.다들 내일이 오늘 같을 거라고 믿는 얼굴이었다.그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오늘따라 밟는 자리마다 바닥이 얇게 느껴졌다. 하루 뒤면 이 잔디에 도시락 대신 부상자가 눕고 저 웃음소리가 비명으로 바뀌는데, 그걸 아는 채로 평화를 걷는 건 축복치고는 좀 형벌 같았다.원작에서 이 하루는 딱 한 문장이었다.「그날은, 유난히 맑은 날이었다.」읽을 땐 그냥 넘겼다. 다음 페이지의 재난이 빨리 보고 싶었으니까. 그 한 문장 안에 도시락 고르고 조 편성으로 다투고 전단 붙이는 얼굴들이 이렇게 잔뜩 들어 있을 줄은 몰랐지.이번엔 안 사라지게 할 거다. 그러려고 3년을 부었고.잔디밭 한쪽에선 유채원이 웃고 있었다. 조원들 사이에서, 도시락에 뭘 싸 올지를 두고 제일 시끄럽게. 내일 저 애도 저 구릉지에 나간다. 3년 전 내가 회사를 살려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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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참는 날 (2)

"경고하는 거야."차시현이 서류철을 도로 집었다."내일 뭔가 터지면, 나는 제일 먼저 네 이름을 떠올릴 거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둘 중 하나는 맞히겠네.""너 진짜."돌아서는 등이 곧았다. 저 여자는 아직 모른다. 내일이 지나면 그 저울이 한쪽으로 확 기울어 버린다는 걸. 규칙을 어긴 내 손이 사람을 무더기로 살리는 광경을 곧 제 눈으로 보게 되리라는 걸.그 장면을 본 뒤에 어떤 판정을 내릴지는 나도 모른다. 오늘은 거기까지 따질 여유도 없었고.세 사람이었다. 나를 사냥하려는 강현우, 나를 미워하다 어긋난 윤이서, 나를 의심하는 차시현. 결이 다 다른 세 시선이 하필 같은 하루를 앞두고 각자의 방식으로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어른들도 재벌 가문도 나를 제대로 못 봤는데, 이 교복 입은 애들은 두 달 만에 각자 자기 각도에서 나를 절반씩 읽어냈다. 강현우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봤고 차시현은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봤다.윤이서는 그 둘하곤 좀 달랐다. 내가 옛날의 그놈과 어긋난다는 것만 저 혼자 알아챘으니까.내일이면 그 셋 앞에 전체 그림 한복판을 내 손으로 펼쳐 보인다. 그럼 그 셋 다 지금과는 다른 눈으로 나를 보게 될 거고.내가 원하든 말든.밤이 됐다.기숙사 창밖이 층마다 차례로 어두워졌다. 내일 실습을 앞두고 다들 일찍 잠들었는데, 소풍 전날의 설렘 같은 게 복도 공기에까지 남아 있었다. 그 설렘이 몇 시간 뒤 뭘로 바뀔지는 모른 채.바로 눕지는 않았다.불을 끄고 마지막으로 판을 점검했다. 방어선은 섰고 후송로는 뚫렸고, 경보망이랑 예비 인력은 대기 중이고 서부 쪽 관측도 밤새 돌아가는 중이라, 3년 걸린 조각들이 전부 제자리에 앉아 있었다.더 완벽할 수가 없었다.자정 무렵, 홍세라한테서 마지막 전화가 왔다."우리 애들, 내일 아침 여섯 시부터 전부 대기예요. 언제든 움직이게.""밥차는?""다섯 시부터 국 끓여요. 우리 애들 빈속엔 안 움직이거든요.""국이 뭔데.""그걸 왜 물어봐요.""궁금해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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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무대 (1)

D-day.아침은 원작에 적힌 그대로 유난히 맑았다. 밤새 내린 이슬에 구릉지 풀이 푹 젖어서, 걷다 보면 신발 코가 금세 축축해지고 바짓단까지 물이 올라왔다. 하늘은 얄미울 만큼 파랬다.학년 전체가 동부 구릉지에 늘어섰다. 소풍 반 시험 반인 얼굴들이 줄을 서다 말고 도시락 얘기로 떠드는 통에 인솔 교사가 세 번쯤 목청을 높였고, 그때마다 잠깐 조용해졌다가 곧 원래대로 돌아갔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뒷줄에서 느릿느릿 걸었다.판은 깔고, 판 위엔 안 선다. 여태 그 규칙 하나로 버텼다. 오늘은 좀 어기게 생겼지만.주머니에서 폰이 두 번 울렸다. 하나는 홍세라였고, 확인 안 해도 내용은 알았다. 전 병력 대기. 어젯밤에 이미 들은 얘기다.문제는 다른 하나였다.3년 전 문 닫기 직전이던 걸 헐값에 주워 온 서부 연구소가, 오늘 아침 여섯 시부터 균열 전조를 실시간으로 물어다 주고 있었다.—전조 파형 급상승. 예측치보다 이릅니다. 최대 두 시간.두 시간. 시야가 준 숫자랑 안 맞았다. 이럴 때는 시야보다 사람을 믿는 편이다. 저 박사는 밤새 파형만 들여다봤을 테고, 나는 침대에서 여덟 시간 잤으니까.대열에서 반 발짝 물러나며 답을 보냈다.—경보 지금 올리세요. 명목은 아무거나. 훈련 지연이든 장비 점검이든.몇 분 뒤 확성기가 지직 소리를 내며 켜지더니, 안전 점검 관계로 3구역 인원은 능선 아래로 이동하라는 안내가 두 번 반복됐다. 애들이 툴툴대며 돗자리를 걷었다."야, 김밥은 먹고 가면 안 되냐?""먹으면서 걸어.""흘리면 어떡해.""흘려. 새 모이 주는 셈 치고.""뭐래, 진짜.""안전 점검이 뭔데 아침부터 사람을 옮겨.""점검이니까 옮기지.""점검할 거면 어제 하지.""어제 했으면 어제 옮겼겠지.""……너 오늘 왜 이렇게 말이 되냐."김밥을 입에 문 얼굴들이 줄줄이 자리를 옮겼다. 소풍 기분에 김이 샜다는 표정이 하나같이 똑같아서 잠깐 웃겼다. 저 투덜거림 값이 얼만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거다.자, 그럼 데뷔라도 해 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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