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Chapter 31 - Chapter 40

66 Chapters

등 뒤에 선 사람 (2)

"살린 손이랑 깔아 둔 손은 달라."그 애가 봉투 모서리로 제 손바닥을 툭 치면서 말을 이었다."강현우는 그날 그냥 뛰어들었어. 계획한 게 아니라. 근데 그 골목이 하필 그날 그 시각에 그렇게 무너지도록 미리 손봐 둔 놈은 따로 있어. 살린 게 아니라 짠 놈. 나는 그걸 찾는 거야."정확했다. 반쯤은. 골목을 짠 손이 따로 있는 것도 맞고 그게 강현우가 아닌 것도 맞았고, 다만 그 손이 지금 제 눈앞에서 딴청 피우며 서 있다는 것까진 아직 몰랐다. 아주 고맙게도."똑똑하네. 근데 그 똑똑한 머리로 왜 하필 나야.""직감.""그거 학교에서 안 가르치는 과목인데.""그래서 시험도 안 봐. 틀려도 아무도 안 알려 주고.""채점도 안 해 주는 걸 왜 믿어.""내가 여태 틀린 적이 없어서."그 애가 나를 똑바로 봤다."논리는 아직 못 따라왔어. 근데 냄새가 자꾸 너한테서 나."논리는 서류로 막으면 된다. 문제는 이 애가 서류를 읽기 전에 냄새부터 맡는 종자라는 거였다.윤이서가 봉투를 열었다. 나온 건 요즘 자료가 아니었다. 빛바랜 사진 몇 장에 낡은 생활기록부 사본, 접힌 자국이 깊게 팬 종이 한 장.봉투 안에서 오래 묵은 종이 냄새가 훅 올라왔다. 구시가 얘기로 운을 뗐지만 진짜 꺼내고 싶었던 건 이쪽이라는 게, 종이를 고르는 그 손끝에서 먼저 티가 났다."이건 3년 전."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사진을 봤다. 교복 입은 여자애 하나, 비 오는 날, 흩어진 교과서, 물웅덩이. 배경은 체육관 뒤편이었고, 찍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를 그냥 지나가다 걸린 각도였다. 이 몸 원래 주인이 남기고 간 청구서다. 내가 그은 적 없는데 내 얼굴 앞으로 날아온."기억해?"윤이서가 물었다. 몰아세우는 목소리가 아니라 그냥 확인이었다."니가 뭘 했는지."여기서 발뺌하는 게 제일 쉬웠다. 그거 내가 아니야. 이거 사실이거든. 진짜로 내가 한 짓이 아니고, 나는 저 일이 다 터지고 난 뒤에 이 몸에 세 들어 온 딴 놈이고, 비 오는 날 저 짓 한 놈이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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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 선 사람 (3)

비 오는 날 체육관 뒤, 물웅덩이에 흩어진 교과서. 복도 끝에서 눈이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다들 고개를 돌렸다. 우산 속으로, 발끝으로, 누구는 아예 폰만 들여다봤다. 그날 알았다. 다들 그놈보다 그놈 이름이 무서웠던 거다. 그래서 아무도 안 왔다. 단 한 명도.그때 안 온 사람들의 자리를, 방금 하필 그놈이 채웠다. 말이 안 됐고, 순서가 통째로 틀렸다.미워하려면 상대가 발뺌을 해 줘야 한다. 그거 오해야, 니가 예민한 거야, 그중 하나만 해 줬어도 더 미워할 수 있었다. 미움에도 연료가 필요하니까.그런데 저놈은 연료를 안 줬고, 반성한 사람이 으레 바라는 용서조차 안 바랐고, 그냥 갚을 게 있으면 치르겠다는 얼굴로 서 있었다.내가 아는 그놈이라면.그 문장이 3년 만에 처음으로 끝을 못 맺었다. 내가 아는 그놈이라면 그 뒤에 뭐가 와야 하는데. 발뺌을 했어야 하고, 비웃었어야 하고, 최소한 한 번쯤은 더 짓밟았어야 하는데, 그놈은 하나도 안 했다.그럼 저건 내가 아는 그놈이 아닌가. 아니면 내가 그놈을 몰랐던 건가. 둘 다 무서웠다. 지난 3년이 통째로 흔들리는 쪽이든, 그날 체육관 뒤까지 다시 끌려가는 쪽이든.윤이서는 봉투를 도로 챙겼다. 사진 모서리가 손가락 사이에서 한 번 접혔고, 그걸 펴는 손이 조금 떨렸다.한도윤은 여전히 등을 보인 채 통로 밖 아무것도 아닌 데를 보고 있었다. 굳이 돌아보지 않는 게 이쪽에 시간을 주는 거라는 걸 이젠 알 것 같아서, 그게 더 싫었다.돌아섰다. 걸었다. 세 걸음.거기서 발이 멈췄다.이대로 가면 진다. 검객은 어중간한 걸 등에 지고 살지 않는다. 맞는지 틀렸는지 끝까지 봐야 검을 넣으니까.윤이서는 뒤돌지 않은 채 어깨 너머로 말했다."이걸로 끝난 거 아니야."목소리가 젖어 있었지만, 매워서라고 쳐 주기로 했으니 그냥 뒀다."니가 뭔지, 내가 반드시 알아낼 거야. 그러니까."말이 늦게 나왔다."도망가지 마."3년 전 그 자리엔 아무도 안 왔고, 그래서 윤이서는 그날 자긴 그냥 지나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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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에 없는 값 (1)

그 뒤로 며칠, 복도에서 한 번 마주쳤다.저 애가 저쪽 끝에서 걸어오는 걸 봤을 때 내 손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시야를 열려던 손이었다.멈췄다.실습 끝난 날 밤에 정해 놓은 걸 벌써 어길 뻔했다.윤이서가 가까워졌다. 세검은 안 들고 있었고 팔에 교과서를 세 권 안고 있었는데 제일 위에 얹힌 게 자꾸 미끄러졌다. 여태 이 애 눈에 걸리면 피하는 쪽은 나였다.지나가면서 그 애가 나를 봤다."그거.""어.""아직 안 물어봤어."그러고는 갔다.교실 창가에 서서 그 세 마디를 다시 들었다.그날 저 애는 도망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걸 곧 뭔가 올 신호로 읽고 있었는데, 방금 온 건 아직 안 물어봤다는 통보였다.시계를 건 거였다. 언제 물을지는 저쪽이 정한다.시야는 안 열었다.열지 않았는데도 그 밤에 읽은 숫자가 그대로 떠올랐다. 저 애가 3년 만에 정면으로 걸어온 날에도 한 칸이 안 붙었던 숫자.그때는 저 애 쪽이 무거워서 그렇다고 정리했다.오늘 다시 보니 답이 하나 더 있었다.계산에서 뺀다고 내 입으로 정했다. 정한 다음부터 저 애 칸이 안 움직였다.어느 쪽인지는 열어 보면 알고, 안 열기로 한 게 나였다.정하람이 잠잠해지나 싶더니 이번엔 주작 길드 바깥으로 안 나오는 숫자에까지 코를 들이민 밤, 홍세라가 차를 보냈다.문자는 짧았다.—대표님. 오늘 밤 얼굴 좀 봅시다. 장부에 정리할 게 생겼어요.장부라니.이 여자는 뭐든 그 단어로 시작해서 그 단어로 끝낸다. 호의든 위험이든 목숨 건 부탁이든 일단 숫자로 바꿔 달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고, 거리 재는 게 무기인 사람이기도 하다. 뭐, 싫진 않았다. 그런 상대는 거리 정하는 권한만 뺏어 오면 되니까.주작 도심 지부 최상층, 밤 열한 시. 당직 몇을 빼면 층 전체가 비어서 엘리베이터 문 열리는 소리가 복도 끝까지 갔다.바닥에 깔린 카펫이 새것인지 발소리가 하나도 안 났고, 어디선가 정수기가 한 번 꾸룩거렸다.복도 끝 화분은 잎이 너무 반듯해서 한참 보고서야 조화라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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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에 없는 값 (2)

그 말에, 늘 답이 딱딱 떨어지던 얼굴이 처음으로 어긋났다."대표님?"목소리 끝이 아주 살짝 흔들렸고, 그 흔들림 위로 시야가 글줄을 갱신했다.━━━━━━━━━━━━━━[홍세라 — 시야 밖]━━━━━━━━━━━━━━3년 내내 이 여자만 안 떴다. 다른 사람은 다 뜨는데 딱 이 여자 하나만. 시야가 고장 난 건 아닐 거고, 세상을 전부 눈금으로 읽어 온 놈이 여태 이 여자 하나를 못 읽고 있다."이건 장부에 안 달아."나는 서류 뭉치를 그녀 손에서 도로 빼냈다."그럼 대표님이 드러나요.""안 드러나. 그 머리는 내가 다시 돌려. 세라 씨 이름은 정거장이라 재미없어. 국가급이 학교에 눈 심었다, 그 애 상식으로도 앞뒤 맞는 얘기잖아. 맞는 얘기는 답이 나오는 순간 시시해지거든."나는 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돈 오간 자리 딱 한 군데, 세라 씨도 몰랐던 데에 앞뒤 안 맞는 숫자 하나를 흘려 둘 거야. 국가급 길드장 혼자선 못 짤 그림으로. 그럼 그 애는 세라 씨한테서 멈추는 대신, 세라 씨 뒤에 다른 손이 있다는 쪽으로 다시 뛰어.""그 다른 손이 본인이잖아요.""열아홉짜리가 판을 짰다? 그 애 상식이 먼저 걷어차. 화살표는 내 근처를 돌다 제풀에 허공을 파고, 세라 씨한테서는 완전히 떨어지고.""그 애가 그 상식을 안 믿으면요?""그때는 세라 씨가 나 대신 놀라 주면 돼. 잘하잖아, 그런 거.""제가요?"홍세라가 나를 빤히 봤다. 위험한 걸 재밌어하는 눈이었는데, 그러면 안 된다는 것쯤은 아는 사람의 눈이기도 했다."세라 씨는 이번 판에서 빠져."나는 서류 뭉치를 반으로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3년 만에 처음이네요. 나한테 뭘 안 시키고, 빼 주는 거.""시키는 것보다 빼는 게 비싸서.""그건 무슨 뜻이에요?""세라 씨가 알아서 재미없게 해석해."일어서면서, 아직 그녀 손등에 남은 온도를 손바닥으로 한 번 더 눌렀다 뗐다."갈게. 위스키는 잘 마셨어. 다음엔 안주도 좀 놓든가.""입맛이 언제부터 그렇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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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 이유 (1)

세 번째는, 예고편이 있었다.그 주 합동 모의전은 2학년 상급 조가 신입 조를 잡는 형식이었고 명분은 신입생 단련이었다. 누가 누구랑 붙는지 적힌 종이를 만든 건 학교였지만, 강현우 상대로 누굴 앉힐지 흘린 건 두 다리 건너 나였다.원작에서 저놈을 한 단계 밀어 올린 바로 그 상급생을 딱 그 자리에 꽂아 뒀고, 그 종이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다. 늘 그렇듯 지문은 안 남긴다.원작에서 강현우가 이 벽을 넘는 데 두 달이 걸렸다. 상급생 속임 동작에 세 번 당하고, 세 번째 밤에 그걸 되짚다가 제 검의 버릇 하나를 버리면서. 그 두 달을 며칠로 접어 줄 생각이었다.이유야 뻔하지. 저놈이 빨리 세지면 세계가 안전해지고—요즘은 그게 세계만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하나 붙긴 했는데, 그 얘긴 좀 있다 하고.모의전이 시작됐다. 훈련장은 신발 밑창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랑 파스 냄새로 꽉 차 있었고, 조명이 높아서 검이 돌 때마다 천장 근처에서 그림자가 같이 돌았다.관전석 맨 끝줄에서 하품을 씹으며 구경했는데 앉고 나서야 이 줄 의자만 등받이가 없다는 걸 알았다. 학교란 데는 늘 딱 한 줄씩 이런 게 있다.강현우는 예상대로 초반에 밀렸다. 속임 동작에 검끝이 두 번 헛나갔고, 관전석에선 신입 에이스가 별거 없다는 웅성거림이 돌았다.두 줄 앞에서 누가 친구 옆구리를 찔렀다."쟤 신입이지? 강현우.""어. 근데 지금 밀리는데?""밀리지. 저 선배 작년에 3위였잖아.""에이. 소문만 요란했네.""야, 아직 안 끝났어.""끝난 거 같은데."모르는 소리. 저건 맞는 중이 아니라 읽는 중이었고, 매 맞는 표정 속에서 저 눈만 조용히 숫자를 세고 있었다. 두 달 걸린 걸 저놈은 실전 한복판에서 압축하는 중이었다.세 번째. 같은 속임 동작이 들어왔다.강현우가 아주 잠깐 멈췄다.두 달 걸렸던 그 깨달음이 지금 저 눈 속을 지나가는 게 보였고, 검 쥔 손이 미묘하게 각을 틀었다. 몸에 붙어 있던 버릇 하나를 실전 한복판에서 도려내는 손이었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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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 이유 (2)

그날 밤, 세 개를 한 장에 나란히 놓았다.첫 번째. 훈련장. 익명으로 쥐여 준 검을 강현우가 처음 손에 익히고, 뒤에서 지워 준 자책을 딛고 한 합을 넘던 순간. 열기 1회.두 번째. 구시가 균열. 깔아 둔 무대 위에서 저놈이 착지와 동시에 셋을 가르며 제 한계를 넘던 순간. 열기 2회.세 번째. 오늘. 붙여 준 상대 앞에서, 앞당겨 준 벽을 저놈이 넘던 순간. 열기 3회."강해졌지. 그건 아는데."볼펜 끝으로 종이를 두 번 두드렸다.그것만으론 부족했다. 세 번 다 그 강해짐이 내가 깔아 둔 자리 위에서 일어났으니, 이대론 우연이랑 구분이 안 된다. 어긋나는 경우가 하나 필요했다. 맞는 거 백 개보다 안 맞는 거 하나가 낫다.지난주에 저놈이 새벽 훈련장에서 혼자 기초 체력을 끌어올리는 걸 우연히 봤다. 분명한 성장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 몸은 아무 말도 없었다. 조용했다."……아, 그거였네."저놈이 그냥 강해질 땐 이쪽은 안 울리고, 내가 만든 자리 위에서 저놈이 뭔가를 완성할 때만 그 결과 일부가 이쪽으로 돌아온다. 뺏은 것도 베낀 것도 아니고, 저놈 몫의 일부가 조용히 넘어오는 거다.좋은 자리 먼저 잡고, 뛰는 건 남한테 맡기고, 성과만 조용히 챙긴다. 눈 감고도 아는 구조였다. 다만 이번엔 들어오는 게 통장이 아니라 몸 쪽이었고."이름이 필요한데."방에 대고 혼자 중얼거려 봤지만 시야는 이번에도 아무것도 안 줬다. 남의 미래는 그렇게 잘 펴 보이면서 이쪽으로만 늘 입을 다물었다. 이름조차 네 손으로 붙이라는 듯이.수첩 맨 위에 두 글자를 적었다.링크.연결. 저놈과 나를 잇는 선. 저놈이 내가 깔아 둔 자리에서 뭘 완성할 때마다 굵어지는 선.거기까지 적고 시야를 살폈다. 낮에 눈금이 촘촘해진 게 착각이 아니라면 확인할 데가 하나 있었다.시야 한구석, 강현우 관련인데 내내 [▒▒▒]로만 잠겨 있던 칸. 세 번이 쌓이는 동안 그 칸을 열 눈이 없었다.지금 다시 봤다.잠겨 있던 칸이 안쪽부터 천천히 형태를 잡았다. 잉크 번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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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릴 이유 (3)

웃음이 가시고 나니 아까 하다 만 계산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강현우를 살려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둘이었다.하나. 저놈은 세계를 구할 영웅이고, 저놈 없으면 이 세계는 망한다. 안 좋아해도 사실은 사실이고.둘. 저놈이 죽으면 나도 그 무너지는 세계에 같이 깔려 죽는다. 대의라기보단 살 집 기둥 붙잡는 일에 가까웠다.늘 두 번째가 더 정직하다고 생각했다. 영웅을 살린다느니 세계를 구한다느니, 이런 놈한텐 안 어울리는 명분이었으니까.그런데 오늘, 세 번째가 붙었다.저놈이 내 자리 위에서 강해지면, 나도 강해진다."영업 비밀 맞네."그러다 웃음이 좀 식었다. 이 이기심엔 역방향이 있었으니까.내가 커지려면 저놈이 커져야 하고, 저놈이 꺾이면 나도 멈춘다.3년 전엔 저놈을 최대한 멀리서, 이름도 얼굴도 안 내밀고 관리하려 했다. 그게 제일 안전한 거리라 믿어서. 근데 이제 와 보니 저놈 등에 내 미래를 통째로 실어 놓은 몸이 돼 있었다. 거리 두려던 놈이 제일 깊이 묶인 셈이지.그리고 하나 더, 낮에 확인한 것도 있고. 저놈한테서 넘어오는 건 검술이나 근육 쪽이 아니었다. 더 큰 자리, 더 큰 위기를 버티는 그릇이 넓어졌다.이 몸엔 퇴장 날짜가 찍혀 있다. 시야는 남 죽음은 원인이며 장소며 다 펴 보이면서 내 것만은 남은 날 수 하나로 끝이고, 그날이 어떻게 오는지는 안 알려 준다. 근데 저놈이 크는 만큼 그릇이 깊어진다면, 지금은 못 넘길 그 죽음도 언젠가 넘길 크기가 될지 몰랐다.살길이, 처음으로 계산에 잡힌 거다.명분은 흔들리면 멈추지만 사욕은 안 멈추니까, 강현우는 세상에서 제일 안전할 거다. 저를 제일 미워하는 척하는 놈의, 제일 지독한 사욕 덕분에.창밖으로 아카데미 불빛이 하나둘 꺼졌다. 저놈은 모른다. 제가 강해질 때마다 반대편 누군가도 같이 큰다는 걸. 가장 큰 적으로 의심하는 놈이 실은 저를 가장 간절히 살리고 싶어 한다는 걸.창에 비친 얼굴을 봤다."이제 진짜로 못 죽게 됐네. 너."저놈한테 하는 말인지 나한테 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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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네, 너 (1)

밤을 꼬박 새웠다. 창밖이 검정에서 회색으로, 회색에서 흐린 흰색으로 바뀌는 동안 의자에 붙어 있었고, 책상 위 커피는 잔 바닥에 검은 테만 남긴 채 말라 버렸다.아래층에서 누가 물 내리는 소리가 나자 그걸 신호로 삼은 것처럼 창틀 틈으로 새벽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책상엔 어젯밤 못 덮은 수첩이 펼쳐진 그대로였다. 세 번 뽑은 숫자, 그 아래 내가 눌러쓴 두 글자. 볼펜을 어지간히 눌렀는지 뒷장까지 자국이 배어서, 손가락으로 문질러 보면 글자가 만져질 정도였다.그리고 그 옆에, 종이엔 못 옮기는 한 칸이 시야에 떠 있었다.━━━━━━━━━━━━━━[강현우 — 사망 플래그: 신규]━━━━━━━━━━━━━━신규. 두 글자가 밤새 나를 붙들었다. 언제 터지는지, 어떻게 터지는지, 왜 생겼는지, 하나도 안 읽혔다.확실한 건 딱 하나. 원작 어디에도 없던 죽음을 이 모양으로 비틀어 놓은 손이 하필 내 손이라는 거.풀고야 싶었다. 문제를 풀려면 조건이란 게 있어야 하고, 터지는 날도 모르고 생긴 이유도 모르고 손쓸 방법은 셀 것도 없는 판에서 나한테 주어진 조건은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가진 것도 없이 억지로 붙잡으면 오답만 쌓인다는 건 그동안 숱하게 해 봐서 안다.그래서 오늘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링크를 더 키우고, 판을 더 깔아 둔다. 눈이 밝아지면 저 칸도 언젠간 형태를 잡겠지. 지금 답이 없으면 답 볼 눈이라도 키워 두면 되고.접었다.못 푸는 문제 접는 거야 여태 제일 많이 해 본 짓이다. 수첩을 덮고 스탠드를 끄자 손끝에 남은 스위치의 미지근한 온기가 밤새 켜 둔 시간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칸은 살려 둔 채, 오늘 깔 수 있는 판부터 깔기로 했다. 하필 그날 시간표가 나를 그 판 위로 슬쩍 밀어 넣을 참이라는 건 그때는 몰랐고.실전 응용 과목, 장기 조별 과제가 시작되는 날이었다.실습실은 아침부터 시끄러웠다. 새로 들어온 균열 대응 시뮬레이터가 테이블마다 한 대씩 놓여 있었고, 포장 뜯은 지 얼마 안 된 기계 특유의 새 플라스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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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네, 너 (2)

나를 두고 그 단어 쓴 사람은 홍세라 말고 이 애가 처음이었다. 다만 홍세라는 내 밑바닥이 재밌어서 그랬고, 이 애는 아무것도 모른 채 눈앞의 내가 궁금해서 그랬다. 후자가 훨씬 골치 아프다. 아무것도 모르고 들이대는 호기심은 이상하게 깊이 파고들거든.과제는 협동 시뮬레이션이었다. 가상 균열을 조원 넷이 역할 나눠 클리어하는 방식에 성적은 조 단위로 매겨지니까, 하나가 삐끗하면 넷이 같이 깎인다는 소리다.우리 조엔 재능이 뚜렷한 애가 둘 있었다. 원거리 술식이 날카로운 남학생 하나에 근접이 좋은 여학생 하나. 둘 다 자기 방식이 옳다고 믿는 부류라 시작하자마자 동선으로 부딪쳤다."방어막 먼저 세우고 들어가야지.""그러다 타이밍 놓치면. 선제로 끊는 게 맞아.""한 번이라도 내 말대로 해 보고 얘기해.""저번 합동 수업 때 그렇게 했다가 어떻게 됐는데."전형적인 충돌이었다. 재능 있는 애들끼리 모이면 늘 이런다. 각자 옳아서 아무도 안 굽힌다.그때 근접 여학생이 나를 힐끗 보더니 들으라는 듯 뱉었다."됐고, 우리 조 성적 이미 망한 거 아냐? 한도윤이랑 같은 조인데."실습실 공기가 순간 식었고, 옆 테이블에서 유닛 만지던 손들까지 멈추는 게 시야 끝에 걸렸다.나는 안 끼어들었다. 나서서 정리하는 순간 '망나니가 나섰다'는 그림이 남는다. 눈에 띄는 자리는 여태 내가 제일 피해 온 곳이고. 대신 그 애가 아까 채우다 만 손목 유닛을 턱으로 가리켰다."그거 잠금 안 풀고 들어가면 네 근접 3초 만에 열 받아서 멈춰. 네 방식이 옳으려면 그것부터 풀어.""어떻게 알았어?""설명서 뒤에 적혀 있어. 소문 들을 시간에 그거나 읽지."몇 초 정적이 흐르다가 누가 픽 웃었고, 방금 나를 깎던 애는 제 유닛을 내려다보며 귀 끝까지 붉어진 채 손가락을 슬그머니 설정 버튼 쪽으로 옮겼다.유채원이 옆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뭐야, 너 은근 챙겨 주는 스타일이야?""아니. 조 성적이 내 성적이라 그래.""그런 걸 챙긴다고 하는 거야.""용어 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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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네, 너 (3)

강의동을 나서는데 유채원이 굳이 옆에 붙어 걸었다. 같은 방향이라나.해가 기울면서 은행나무 그림자가 길게 누웠고 그 위로 우리 둘 그림자가 나란히 밟혔다. 그 애는 보도블록 금을 안 밟겠다고 혼자 폴짝거리다가 두 번쯤 삐끗했다."그거 밟으면 어떻게 되는데.""몰라. 그냥 어릴 때부터 그랬어.""이유도 모르고 어릴 때부터 피해 다녔다고.""세상에 이유 아는 일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그 논리면 나도 소문 피해 다녀야 되는데.""넌 안 피하잖아.""그러네."그러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제 손목을 흔들어 보였다."아까 그 유닛 말이야. 성능 좋지? 우리 아빠 회사 거야."속으로 잠깐 멈칫했지만 걸음 속도만은 그대로 뒀다."가온다인. 들어 봤어? 요즘 균열 장비 쪽에서 좀 뜬대. 나도 회사 이름 달고 다니는 게 좀 그런데, 아빠가 하도 자랑스러워하니까 어쩔 수 없이 차고 다녀."들어 봤다. 그 이름이 지금 전국 훈련장 절반에 붙어 있다는 것도, 그 이름 뒤에 누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라는 것도, 전부."원래는 망할 뻔했었대, 그 회사."유채원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어두워진 건 아니고, 소중한 걸 꺼내는 톤이었다."나 고등학교 막 들어갔을 때. 아빠가 밤마다 서류 붙잡고 한숨 쉬던 거 아직도 기억나. 거실 불 혼자 켜 놓고 앉아서. 근데 어느 날 갑자기 다 해결됐어. 어떤 투자자분이 통째로 살려 줬다더라고.""운이 좋았네.""운 아니야."그 애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빠가 그러는데, 그분은 우리 회사가 뭘로 돈 벌지를 우리보다 먼저 알고 있었대. 딱 한 번 만났는데 그 뒤로는 얼굴도 안 보인대. 감사 인사 한 번 하려고 몇 번을 연락했는데, 매번 정중하게 거절당했다고."그 '몇 번'을 나는 안다. 내 쪽 책상에서 세 번 거절한 연락이니까. 얼굴이야 있었지, 안 보인 거고. 돈 대는 사람은 얼굴 없을 때가 제일 편하거든."아빠 소원이 그거야. 그 대표님 얼굴 한 번 뵙고 밥 한 끼 대접하는 거. 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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