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망나니가 플래그를 세운다: Chapter 41 - Chapter 50

66 Chapters

먼저 손을 쓰다 (1)

좋은 검을 쥐여 줬으면, 다음은 그 검 든 놈이 오래 살게 만드는 차례다.지금까지 강현우는 멀찍이서만 손봤다. 검 슬쩍 흘려 주고, 자책할 거리 미리 치워 주고, 설 무대 깔아 주고. 전부 얼굴 안 비치고 뒤에서 미는 일이었고, 그게 제일 안전한 거리라고 믿었다.근데 며칠 전에 열린 그 칸이 처음으로 나를 뒤에서 앞으로 툭 밀어냈다.━━━━━━━━━━━━━━[강현우 — 사망 플래그: 신규]━━━━━━━━━━━━━━밤새 안 꺼지더라. 신규, 딱 두 글자. 언제 죽는지도 왜 죽는지도 안 읽혔다.내 손에 쥔 정보는 하나뿐이었다. 저놈이 원작보다 빠르게 크고 있다는 거. 검이 일찍 들어갔고 자책할 거리도 없다. 아직 죽어 나간 동료가 없으니 당연한 얘기지.근데 빨리 크면 위험한 구간도 그만큼 빨리 온다. 막기만 해선 안 됐다. 이번엔 처음으로, 내가 먼저 손을 써야 했다.원작 한참 뒤에 강현우 목숨을 세 번이나 건진 물건이 하나 나온다. 충격 완충 코어. 한 방에 죽을 힘을 옆으로 흩어서 즉사를 부상으로 깎아 주는, 겉보기엔 아무것도 아닌 보조 장비다. 손바닥에 올리면 카드 한 장 무게밖에 안 나가는 물건이 그 셋을 살렸다.원작에서 저놈은 동료 둘 잃고 나서야 폐허 바닥에서 이걸 주웠다.나는 그걸 지금, 미리 저놈 가슴에 붙이고 싶었다.문제는 어떤 길로 보내느냐였다. 검 넘길 때처럼 또 성적순 장학을 쓸 순 없었다. 같은 손에서 같은 방식으로 두 번째 선물이 나가면 규칙이라는 위장이 홀랑 벗겨진다.마침 신입생 대상 외부 협력 실전 훈련이 잡혀 있었다. 아카데미가 바깥 길드랑 손잡고 얌전한 균열에서 현장 경험 쌓게 해 주는 프로그램. 딱 좋았다.그 훈련 장비를 주작이 대게 만들었다.전화기 너머로 용건만 넘겼다."이번 신입 훈련 장비, 주작이 맡아. 나눠 주는 목록에 이 코어 넣고. 전원 지급이라 티 안 나.""전원한테 이런 상위품을 뿌리라고요? 대표님, 이게 개당 얼마인지—""내가 대. 가온다인이 후원하는 걸로 하고. 신입 안전 강화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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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손을 쓰다 (2)

강현우를 원작보다 빨리 키운 만큼 세계도 원작에 없던 얼굴로 반응하기 시작한 거였다. 청구서란 게 원래 예상 못 한 방향에서 날아오지.강현우가 앞으로 나섰다. 신입 중에 저 개체 상대할 수 있는 건 저놈뿐이었으니까."교관님, 저 뒤에 애들 빼는 시간 벌겠습니다.""강현우, 대기—"말이 끝나기 전에 저놈은 벌써 뛰고 있었다.나는 후미에서 주먹을 쥐었다. 여기서 튀어나가면 3년 지운 얼굴이 한순간에 드러난다. 저놈 가슴에 붙은 코어 하나에 전부 걸고 입 다물고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다 깔아 놓고 정작 마지막엔 뒷줄에 묶여 있었다.손끝이 저릿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미 다 했다. 검을 넘겼고, 자리를 깔았고, 코어를 붙였고. 남은 건 그 겹들이 제 몫을 하느냐 마느냐, 내 손 떠난 데서 판가름 날 일이었다.검이 빨랐다. 그때 넘긴 검이 저놈 손에 완전히 붙어 있었다. 몇 합 만에 개체 급소를 노렸다.그 순간 개체 꼬리가 사각에서 날아들었다.성장이 빠른 만큼 아직 못 챙긴 사각도 딸려 있었고, 그 속도에 안 익은 몸이 반 박자 늦었다. 꼬리가 강현우 가슴팍을 정통으로 후려쳤다.즉사각이었다.퍽, 소리와 함께 저놈이 나가떨어졌다. 후미에서 비명이 터졌다.명치에서 열은 안 올라왔다. 반대였다. 심장이 얼어붙었다.저놈이 여기서 죽으면 세계도, 나도, 그 연결도, 전부 여기서 끝이었다.먼지 속에서, 강현우가 일어섰다.가슴팍 코어에 쩍 금이 가 있었다. 한 방에 죽일 힘을 통째로 받아서 옆으로 흩어 준 거다. 갈비뼈 몇 대는 나갔겠지만 심장은 뛰고 있었다. 즉사가 부상으로 깎였다. 정확히, 내가 심어 둔 대로.여태 뒤에서 밀기만 하던 손이 처음으로 사람 하나를 죽음 문턱에서 도로 끌어냈다. 종잇장 한 겹 차이로.숨 돌리기도 전에 또 뒤가 켕겼지만, 되긴 됐다. 먼저 둔 수가 처음으로 통했다.갈비뼈 나간 몸이었다. 정상이면 검도 못 들 부상인데, 저놈은 통증을 계산 밖으로 밀어 버리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코어가 목숨을 붙여 놓으니까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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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둘 (1)

원작에서 도진혁은 이번 달에 검을 놓는다.정확히는, 놓게 되는 사건이 있다.이번 주 정규 실습. 낡아빠진 보조 결계 발생기 하나가 오작동을 낸다. 균열 힘을 눌러 줘야 할 장치가 거꾸로 튀면서, 그 앞에 선 도진혁의 오른팔 신경을 태운다.원작의 도진혁은 재활에 실패한다. 검을 못 잡는 팔로 아카데미를 떠나고, 그래서 원작 강현우한텐 라이벌이란 게 애초에 없었다.그 발생기, 나는 벌써 갈아 뒀다.가온다인 정기 점검이라는 이름으로 지난달에. 낡은 기계 하나 바꾸는 데 무슨 대단한 핑계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사건은 터지기도 전에 지워졌다. 도진혁은 제 팔이 왜 멀쩡한지 평생 모를 거고.죽을 놈 줄이는 게 내 일이다.착해서는 아니고. 강현우 다음가는 검사가 멀쩡히 크는 편이 판이 덜 흔들린다. 그렇게 적어 두면 남 살리는 데 죄책감 같은 사치도 안 붙는다.물론 다 살리진 않는다. 강현우를 각성시킬 죽음까지 건드리면 세계선이 더 크게 뒤틀리니까.나는 신이 아니라 회계사다. 살릴 수 있고, 살려서 남고, 살려도 이야기가 안 무너지는 것만 고른다. 도진혁은 세 칸 다 통과했다. 팔 하나 값에 라이벌 하나면, 뭐. 남는 장사였다.여기까진 늘 하던 대로였다.문제는 어제 홍세라한테서 온 전화였다."대표님. 수석 걔, 요즘 이상한 걸 뒤져요. 낡은 장비 점검 기록이요. 실습동 결계 발생기 쪽으로."수화기 쥔 손이 잠깐 멎었다."누가 그래.""거기 행정실에 아는 사람 있어요. 지난주엔 급식 메뉴 알려 주더니 이번 주엔 이걸 알려 주네요.""급식 메뉴는 왜 받아.""밥을 안 드시니까요.""먹어.""뭘 드셨는데요.""기억 안 나.""그거 안 먹은 거예요.""끊어."달력에 그어 둔 표시를 손톱으로 한 번 긁었다."끊기 전에 하나만. 그 발생기, 지난달에 갈아 끼운 거 저희 쪽 기록에도 남아 있는데 지울까요?""놔둬. 갑자기 지운 기록이 제일 시끄러워.""안 지우면 걔가 볼 텐데요.""보라고 두는 거야.""……그런 건 언제 배우셨어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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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둘 (2)

도진혁은 목검 손잡이를 손바닥에 두어 번 치더니 뒷줄까지 들리게 중얼거렸다."쟤 원래 저래?""몰라.""너도 모르냐.""나한텐 저것보다 심하게 해."내 대답에 도진혁이 픽 웃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망나니가 뒷줄에서 심드렁하게 대꾸하니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너 말 통하네.""그 소리는 처음 듣네."그야 도진혁은 제가 오늘 팔을 잃을 뻔했다는 것도 모른다. 일어나지 않은 사고를 당사자한테 물을 순 없으니까.이 세계에서 그 사고를 아는 건 둘뿐이었다. 막은 나와, 막으려다 한발 늦은 강현우.우스운 그림이었다. 같은 사고를 막으려던 두 놈이 서로를 최악의 적으로 여기며 같은 실습장에 서 있었다. 목적은 겹치는데 등은 서로 돌린 채로.균열학 조 편성 때 윤이서를 두고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도진혁의 팔을 두고 한 번 더.강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실습장을 훑기 시작했다.누가 여기 먼저 손을 댔는지, 그 얼굴을 찾고 있었다.그 눈이 뒷줄의 나한테서 잠깐 멈췄다.시선이 부딪쳤다. 아무 표정도 안 지었다. 지루한 실습이나 기다리는 얼굴.강현우의 눈이 나를 훑고, 잠깐 머물고, 다시 지나갔다. 확신하기엔 근거가 아직 모자란다는 얼굴로.근데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저놈의 의심 목록에서 내 이름이 방금 한 칸 위로 올라갔다.위험한 건 눈빛이 예전이랑 달라졌다는 거였다.입학식 날에도, 내 뒤를 캐던 때도, 강현우는 나를 나쁜 놈으로 노려봤다. 오늘은 안 풀리는 방정식을 들여다보는 눈이었다.적의보다 그쪽이 훨씬 성가시다. 저런 눈은 좀처럼 실수를 안 하니까.실습이 시작되자 도진혁이 앞으로 나섰다.하위 개체 하나를 두 합에 끊었다. 검이 매끄러웠고, 오른팔이 그리는 궤적엔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원작대로면 이번 주에 저 팔은 타 버리고 저 궤적은 세상에서 사라졌을 거다. 아무도 그걸 모른 채, 관전석에선 낮은 감탄이 흘렀다."쟤 진짜 잘하네.""그러게. 팔 좋다, 팔.""수석이랑 붙으면 누가 이겨?""몰라. 근데 보고는 싶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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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에 못 적는 밤 (1)

홍세라가 다시 차를 보낸 건 정하람의 화살표가 허공을 파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었고, 문자는 이번에도 짧았다.—대표님. 마감 보고 하나 있어요. 오늘 밤, 지부로.마감이라.그날 이후로 이 여자는 '장부'라는 단어를 슬그머니 안 쓴다. 정리할 게 있다고 부르던 사람이 요즘은 마감이라고 부르니까, 단어 하나 바뀐 것뿐인데도 그게 자꾸 눈에 밟혔다.주작 도심 지부 최상층. 그날과 같은 시간, 같은 층이었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 조명이 절반만 켜져 있었고, 두꺼운 카펫이 발소리를 통째로 먹어 버려서 내가 다가가는 걸 알릴 방법이 없었다. 야간 당직 몇을 빼면 층 전체가 또 비었는지, 어디선가 정수기 물 내려가는 소리만 두 번쯤 났다.복도 끝 화분은 지난번에 본 그 조화였다. 나라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각성자가 앉은 층에서 살아 있는 화분 하나 챙길 사람은 없나 보다.홍세라는 이번에도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재킷은 의자 등받이에 걸쳐 두고 블라우스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였고, 야경을 등진 탓에 얼굴 절반이 그늘에 가려졌다.다른 게 하나 있었다. 위스키 두 잔이 처음부터 나란히, 그것도 서로 딱 붙어서 놓여 있었다. 그 밤엔 미는 척 반 발 물러서던 잔이 오늘은 물러설 자리도 없이."왔네요, 우리 대표님."그녀가 잔을 내 앞으로 밀면서 이번엔 끝까지 손을 안 거뒀고, 내 손이 잔에 닿을 때까지 그 손끝이 그대로 있었다.딱 내 손 안 닿는 자리에 잔을 세워 두고 나를 당겼으면서, 오늘은 거리를 미리 지우고 왔네. 당기는 방식이 바뀐 걸 나만 알아채도 되는 속도로."밤에 자꾸 부르네. 소문 또 커져." "어차피 그 소문은 내가 제일 잘 덮어 주잖아요. 부른 값은 내가 알아서 물게요." "저녁은 먹었고?" "먹었어요. 편의점에서." "국가급 각성자가." "국가급이라 더 그래요. 밥 먹을 시간에 남 뒤를 캐야 하니까." "뭐 먹었는데." "삼각김밥. 참치마요." "그건 밥이 아니라 간식이지." "편의점은 가 보긴 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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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에 못 적는 밤 (2)

"대표님 계산, 지금 안 서죠.""안 서.""3년 만에 처음이네."그 말끝을 키스가 삼켰다.처음엔 닿기만 했다. 입술만 맞댄 채 서로의 숨을 들었는데, 평소의 홍세라라면 이 짧은 틈에도 웃었을 거다. 사람 흔들어 놓고 반응 구경하는 게 이 여자 방식이니까.오늘은 안 웃었다.내 옷깃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그녀가 먼저 고개를 기울였고, 입술이 벌어지면서 위스키의 씁쓸한 향이 혀끝에 번졌다. 가볍게 던지던 말과 달리 키스는 서툴 만큼 급했다.이 몸이 먼저 알아들었다. 원래 주인이 여자 앞에서 한 번도 참아 본 적 없는 몸이라, 허리를 끌어당기는 손이 생각보다 반 박자 빨랐다. 얇은 블라우스 너머로 체온이 붙자 그녀의 숨이 짧게 끊겼고, 책상 끝에 닿은 허리가 반사적으로 물러났다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계속해도 돼?"입술을 안 뗀 채 묻자 홍세라가 가쁜 숨 사이로 웃었다."이 와중에도 확인은 하네요.""계산이 안 서는 거랑 확인을 안 하는 건 다른 얘기라서.""계속해요."그녀의 손이 넥타이를 잡아당겼다."오늘은 끝까지."그 뒤로는 길게 묻지 않았다. 대답은 넥타이를 쥔 그 손이 하고 있었다.다시 입을 맞추며 그녀를 책상 위에 걸터앉히자 잔 두 개가 팔꿈치에 밀려 옆으로 미끄러졌고, 녹은 얼음이 유리 안에서 부딪혔다. 서류에 물 한 방울 튀는 것도 그냥 안 두는 사람인데, 오늘은 돌아보지도 않았다.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세 번째에서 손이 한 번 멈췄다. 검은 레이스가 숨 쉴 때마다 하얀 피부 위에서 오르내렸고, 쇄골 아래에 위스키가 한 방울 떨어져 있었다. 회의석에서는 늘 단추 끝까지 채우고 앉아 있던 사람이 그 아래에 이걸 입고 있었다.목이 말랐다. 그 방울부터 입술로 지웠다. 혀끝에 위스키와 살냄새가 같이 묻어났고, 레이스 가장자리를 입술로 밀어 내리자 홍세라가 숨을 들이켰다."으음…… 거기서부터예요? 생각보다 능숙하네요.""세라 씨는 생각보다 말이 많고.""말 안 하면, 내가 너무 떨리는 것 같잖아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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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에 못 적는 밤 (3)

내가 일어서자 홍세라가 넥타이를 잡아 단숨에 끌어당겼다. 제 흔들린 얼굴을 감추려는 듯 입술부터 겹쳐 왔다.셔츠 단추를 푸는 손끝이 몇 번 미끄러졌는데도 끝까지 다른 손을 안 빌렸다. 그러다 그녀의 눈에 잠깐 여유가 돌아왔다."이건 계산이 아주 잘 서 있는 것 같은데.""세라 씨 때문에 망가진 계산이지.""그럼 책임져야겠네."그녀는 책상 옆에 둔 가방을 끌어당겨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포장을 꺼냈고, 내가 눈썹을 들자 이번엔 제대로 웃었다."준비한 게 아니라 보험이에요.""오늘 여기까지 올 줄 알았던 얼굴인데.""그걸 지금 따져요?""안 따져. 값도 안 매기고."포장을 내 손에 쥐여 준 뒤 그녀가 치마와 속옷을 함께 벗어 내렸다. 끝까지 계산 안 했다고 우기면서도 안전만큼은 안 놓치는 게, 뭐, 홍세라답고.마지막으로 눈을 맞추자 홍세라가 내 목 뒤로 팔을 둘렀다."와요."천천히 밀고 들어가자 홍세라의 숨이 한 번에 막혔다. 내 어깨에 박힌 손톱이 아까와 달랐다. 안은 뜨겁고 지나치게 좁았고, 반쯤 들어간 데서 그녀의 온몸이 굳었다. 농담으로 사람 흔들던 여자의 반응이 아니었다."……세라 씨, 혹시.""지금 그거 물으면, 진짜 물어요."목소리 끝이 떨렸다. 그거면 됐다. 그 자리에 멈춰서 그녀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는데, 기다리는 쪽이 더 힘들었다. 3년 동안 계산으로 눌러 둔 게 한꺼번에 허리 아래로 몰려서 이를 물어야 했다.먼저 허리를 당긴 건 그녀였다."이제 움직여요."홍세라가 다리로 내 허리를 감았다. 떨어질 때마다 다시 끌어당기는 힘이 붙었고, 나는 목선에 입술을 대고 아까부터 붉어진 자리를 천천히 빨았다."흔적 남아요.""남기려고.""내일 아침 회의, 이 책상에서 해요.""그럼 그때 생각나겠네. 이 책상."다리가 허리를 더 단단히 조였다. 떼라는 말은 끝까지 안 나왔다. 옷깃으로 가릴 수 있는 높이까지만 남겼다. 그 선은 내가 그었다.책상 다리가 바닥을 낮게 긁었고, 살이 맞부딪는 소리가 거기 섞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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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부에 못 적는 밤 (4)

그녀를 안아 소파로 옮겼다. 평소라면 남한테 제 무게를 안 맡길 사람이 순순히 안겨 오는 게 낯설었는데, 그건 거기까지였다.소파에 내려놓자마자 그녀가 내 손목을 끌었다. 기대 오는 줄 알았던 몸이 그대로 내 위로 올라왔다."아직 안 끝났어요.""뭐가 남았는데.""아까 그 말. 이제 대표님이 정한다던 거."그녀가 내 어깨를 소파 등받이에 눌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내 가슴에 쏟아졌다. 유리 앞에서 무릎이 꺾였던 사람이 그대로 다시 올라와 있었다."이번엔 내가 해요. 대표님은 가만히 있어요.""가만히 있을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그럼 참아요. 잘 참잖아요."그녀가 소파 옆 가방에서 포장을 하나 더 꺼냈다."보험이 하나가 아니었네.""보험은 원래 여러 개 드는 거예요."천천히 내려앉으면서 그녀가 눈을 감았다. "하아…… 응……" 끝까지 내려온 뒤에야 숨을 뱉었고, 내 가슴에 손을 짚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박자를 놓치지 않았다. 숨이 끊기기 직전에 멈췄다가 다시 시작하는 걸, 이 여자는 한 번 만에 배웠다."어때요…… 내가 정한 거.""……세라 씨가 이겼어.""응…… 대표님 얼굴, 또 계산 안 서는 얼굴이네."그 말에 참던 게 끊겼다. 허리를 붙잡고 아래에서 쳐올리자 그녀의 말이 "아, 앗, 잠깐……!"으로 부서졌다. 내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가 다시 들어갔고, 이번엔 둘 다 오래 못 버텼다.그 뒤에야 그녀가 내 품에 제 무게를 다 맡겨 왔다.야경이 다 식은 뒤였다.홍세라는 내 어깨에 관자놀이를 대고 있었다. 위스키 잔은 둘 다 비었고 얼음은 진작 녹아 있었다."내일 회의, 목 가리려면 스카프 매야겠네요.""세라 씨 스카프 하는 거 본 적 없는데.""그러니까 다들 쳐다보겠죠. 왜 오늘만 맸나.""그럼 매지 마.""……진짜 짐승이네.""대표님."그녀가 눈을 감은 채 불렀다."아까 물어보려다 삼킨 거요.""물어. 오늘은 대답할지도 몰라.""안 물어요."그녀가 옅게 웃었다."물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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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위험한 사람 (1)

여섯 시 반에 눈을 떴다.소파가 아니었다. 어느 틈에 침실로 옮겨졌고 옮긴 게 나인지 저쪽인지는 기억이 안 났다.옆자리가 비어 있었다.창가에 홍세라가 서 있었다. 어제 벗어 둔 셔츠를 다시 걸쳤는데 단추를 하나 밀려 채워서 옷깃이 한쪽으로 들려 있었고, 그걸 아직 안 고쳤다. 3년 동안 이 여자가 옷깃 밀린 채로 서 있는 걸 본 적이 없다.폰 화면 밝기를 제일 낮춰 놓고 뭘 보는 중이었다."깼어요?""몇 시야.""여섯 시 반. 대표님 여덟 시에 조회잖아요.""그건 어떻게 알아.""3년 동안 차 보낸 게 저예요."폰을 뒤집어 창틀에 내려놨다. 화면이 아래로 갔다.몸을 일으켜 앉았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빛이 카펫 위에 얇게 한 줄 깔려 있었고, 위스키 잔 두 개는 어제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대표님.""어.""어제 일은 장부에 안 올렸어요."어제보다 정확한 목소리였다. 3년 쓰던 그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안 올렸다고 말해 두는 것까지가 제 몫이고요.""그다음은.""안 물을 거예요. 그건 어제도 말했잖아요."하룻밤 만에 거리를 원래 자리에 돌려놓은 목소리였는데, 돌려놓은 그 자리에 옷깃이 밀려 있었다.숫자를 열었다.엿새가 그대로 있었다. 어젯밤에 붙은 그 엿새고, 아침엔 하나도 안 늘었다.당연한 건데 좀 오래 봤다.이 창은 어제 이 여자가 정한 걸 셌다. 오늘 아침엔 아무도 아무것도 안 정했으니까 셀 게 없어서 조용한 거고, 조용한 걸 안전으로 읽어 온 게 3년이었다.그녀가 코트를 걸치면서 탁자 위에서 뭘 하나 집었다.어제 굴러다니던 젤리 봉지였다. 아무도 안 치운 그거."이건 제가 가져갈게요.""그건 왜.""쓰레기니까요."문이 닫혔다.그 층 쓰레기는 원래 아침에 누가 와서 치운다.* * *서미란이 또 왔다.이번엔 아주 대놓고 왔다. 검은 세단에 선글라스에, 또각또각 구두 소리까지 다 챙겨서. 오늘은 점심시간 교정 한복판을 가로질러 걸었고, 그것도 보라는 듯이 천천히 걸었다.신입생 수백 명 눈앞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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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위험한 사람 (2)

차시현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접견실 문을 나서자마자였다. 창으로 들어온 오후 햇빛이 복도 절반을 하얗게 잘라 놨고, 서미란 향수를 아직 옷깃에 매단 채 그 빛 안에서 학생회장과 정면으로 마주 섰다. 어디선가 사물함 문이 닫혔다가 조용해졌다.하필 이 자리였다. 여자 냄새 풀풀 풍기며 나오는 전 약혼자 망나니라니, 각본을 짜도 이렇게는 못 짠다.차시현은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정장에 반듯하게 묶은 머리, 그리고 눌러 담은 눈. 파혼 서류에 도장 찍던 날에도 저 얼굴이었겠지. 이 몸 기억 어딘가에 저 표정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한도윤. 잠깐 시간 돼?"말투는 정중했는데 물어보는 건 아니었다.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녀가 서류철을 펼쳤고, 종이 냄새가 향수 사이로 끼어들었다."지난달 실습동 결계 발생기 교체 계약."계약서 첫 장을 손끝으로 짚었다."공사한 데는 가온다인. 금액도, 돈 나간 날짜도, 여기까진 정상이야."손끝이 다음 장의 빈 승인란으로 내려갔다."그런데 학생회 시설 담당 도장을 안 거쳤어. 나중에 받은 걸로 해 놨다는 건데, 누가 맡겼는지가 비어 있어. 규정 위반이야."정확했다. 그 종이를 반쯤 우회했고, 이 여자는 그 반쯤을 정확히 짚어 냈다.정하람이 공개된 숫자로 '이상함'을 잡아냈다면 이 여자는 아무나 못 보는 원본으로 '증거'를 확정한다. 둘이 다른 문으로 같은 나한테 걸어오는 중이었고, 근데 이 여자한텐 하나가 더 붙어 있었다. 나를 옛날부터 안다는 거."그리고."서류에서 눈을 떼고 나를 똑바로 봤다."이 건 주변에서 자꾸 네 이름이 나와. 가온다인, 후원, 익명의 손. 학내에서 순서 건너뛴 계약마다 그 끝에 흐릿하게 니가 있어."서류철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종이 모서리가 접혔다."증거는 아직 없어. 하지만 나는 너를 알아."그 대목에서 목소리가 반 톤 내려갔다."옛날부터 그랬으니까. 규칙 위에 돈을 얹는 거. 절차를 우습게 아는 거. 사람들이 만들어 둔 선을 멋대로 지우고 다니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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