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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내가 떠난 후, 망한 그녀: Chapter 1 - Chapter 10

12 Chapters

제1화

회의실에서 내가 명패를 지찬우에게 건네자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동안, 이 프로젝트를 위해 나는 밤낮 가리지 않고 심혈을 쏟아부었다. 그 탓에 몇 번이나 저혈당으로 쓰러질 뻔한 적도 있었다.곁에 있던 동료들이 하나둘 박수를 치고 환호하기 시작하자 회의실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모두들 나를 보고 대인배라고 칭찬하며 대표 곁을 오래 지켜온 충신답다고 했다.그런데 무대 위에 서 있는 정은서만은 표정이 애매모호했다. 입술을 꽉 다문 채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당혹스러워하는 정은서의 눈빛을 보니 조금 우스꽝스러웠다.정은서는 사내 커플이라는 타이틀을 정말 싫어했다. 그래서 지난 7년 동안 우리는 비밀결혼을 유지해 왔다. 그동안 내가 끊임없이 공개하자고 졸랐지만 극구 꺼렸다.드디어 이번 기회를 빌려 정은서가 마침내 공개하는 줄 알았지만 지찬우에게 이렇게 쉽게 빼앗길 줄은 몰랐다.이제 정은서가 공식 발표를 하든 말든, 나는 관심이 없었다.“그럼 특별한 일 없으면 먼저 가볼게요. 다들 즐겁게 놀아요.”나는 정은서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회의실을 나왔다.이번 자금 조달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맡은 이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이 좋고, 잠재력이 뛰어나 협력사가 추가 투자를 결정했기 때문이었다.프로젝트의 핵심 특허는 내 명의로 되어 있었다. 내가 매일같이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 뛰어다녔기에 지금의 성과가 나온 것이었다.그런데 정은서가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 그녀를 도와주는 어리석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먼저 실망하게 한 것은 정은서니까.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차에 올라타니 조수석에 99송이의 빨간 장미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오늘 정은서가 나와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다고 해서 정말 기뻤다. 그래서 장미도 사고 촛불 디너 장소도 예약해 두었다.하지만 그토록 기다렸던 순간이 결국에는 지찬우에 대한 정은서의 지나친 애정만 과시하는 자리가 되어버렸다. 너무 우스워 말이 안 나올 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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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비굴한 어조로 한마디 한 지찬우는 마치 나에게 혼쭐이 난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내 쪽으로 명패를 살짝 내밀었다.정은서가 다급히 내 앞으로 몇 걸음 다가오더니 손에 든 가방으로 앞 유리를 내리쳤다.쿵 하는 굉음과 함께 날카로운 목소리로 나를 꾸짖었다.“정훈아, 찬우가 이렇게 애원하는데 차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어떡해? 안 내리고 뭐 해? 그러다가 만약 찬우가 차에 치이면 어쩔 건데? 이게 직장 내 괴롭힘인 거 몰라?”나는 비웃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차 창문을 내린 뒤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 따위 필요없다고 말하려고 했다.지찬우는 내가 정말로 명패를 되찾아 갈까 봐 당황한 듯 손가락으로 리본을 꽉 움켜쥐며 명패를 뒤로 빼냈다.그러더니 갑자기 배를 움켜쥐며 허리를 굽혔다.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숨이 끊어질 듯 배가 아프다고 외쳤다.연기인 게 뻔히 보일 정도로 오버스러웠지만 이런 연기에 정은서는 당연히 속아 넘어갔다.나와 따지는 것도 잊은 듯 급히 지찬우를 부축하더니 가방에서 위장약을 꺼내 지찬우에게 먹였다.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당황한 기색으로 나에게 소리쳤다.“정훈아, 안 도와주고 뭐 해? 찬우 병원 좀 데려가야 할 것 같아. 네가 차 좀 운전해.”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그냥 차를 몰고 가버리려 했다.하지만 정은서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내 차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본인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차에 치이더라도 내 앞길을 막겠다는 태도였다.정말 우스웠다.예전에 내가 고객 접대로 술을 하도 많이 마셔 위출혈이 나서 변기에 피를 토해도 정은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위장약이나 좀 챙겨 먹으라는 말뿐이었다.그런데 지금은 지찬우가 그저 꾀병을 좀 부렸을 뿐인데 늘 냉철하고 침착하던 정은서가 목숨까지 내던질 기세로 허둥지둥 달려들었다.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지만 두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병원으로 데려갔다.병원에서 의사가 지찬우에게 이상이 없다고 하자 정은서는 그제야 안도한 듯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눈에는 지찬우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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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하지만 정은서 곁에 있기 위해, 그리고 그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줄곧 정중히 거절해 왔다.전화기 너머로 인사 담당자는 회사 복지가 얼마나 좋은지, 연봉은 얼마인지, 그리고 나 같은 인재를 얼마나 환영하는지 쉴 새 없이 말했다.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차를 회사 입구까지 몰고 와 있었다.한 시간에 달하는 통화 기록을 보자 휴대폰을 쥔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한때 나는 정은서를 위해 당장이라도 입사할 수 있었던 회사 임원 직위를 포기하고 그녀와 함께 완전히 백지상태인 처음부터 시작했다.그동안 몸을 혹사해 가며 회사를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며 정신적으로도 늘 긴장한 탓에 몸과 마음 모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정은서와 겨우 뭔가 해냈다고 생각했을 때, 정은서의 마음은 어느새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이제는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고 싶었다.잠시 생각한 후, 프로젝트 협력사에도 메시지를 보내 프로젝트 책임자가 교체되었음을 알렸다.협력사는 나에 대한 신뢰 때문에 이 프로젝트에 흔쾌히 투자하기로 했다.그러니 이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결정한 이상, 당연히 그들에게도 알릴 의무가 있었다.메시지를 보낸 후 다음 날 비행기표를 끊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옷장 맨 아래에서 코트를 꺼내다가 맨 밑에 눌려 있던 사진첩이 덩달아 펼쳐지면서 나와 정은서의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그것은 바로 8년 전, 나와 정은서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풋풋했던 우리 두 사람은 서로 기대기만 해도 부끄러워했다.사진첩을 집어 들고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생각해 보면 이 모든 사진은 정은서가 먼저 찍자고 한 것이었다.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함께 겪었던 고생을 이렇게 남겨두었다가 나중에 나한테 제대로 보상하겠다고 했다.정은서와 나는 고난을 함께 겪으며 힘든 시절을 같이 보냈다.좁은 월세방에 웅크리고 앉아 불법으로 다운받은 영화를 보기도 했고 섣달그믐날에는 고기 한 점을 두고 서로 양보하기도 했다.하지만 허리를 졸라매던 순간들조차 나에게는 행복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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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전화를 끊자마자 정은서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저녁에 고객사 접대가 있어서 같이 밥 못 먹을 것 같아.]이 짧은 한마디가 오히려 신기하게 느껴졌다.정은서는 예전에 나에게 연락하는 것에 대해 일절 신경 쓰지 않았다. 여태껏 말 한마디 없이 그냥 바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하지만 오늘 왜 갑작스럽게 이런 행동을 했는지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바로 조금 전 지찬우가 갑자기 SNS에 올린 글 때문이었다.사진 속 정은서는 고개를 숙인 채 진지하게 스테이크를 자르고 있었다. 배경은 바로 내가 예약했던 그 5성급 레스토랑이었다.사진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있었다.[대표님은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착한 데다 직접 스테이크까지 잘라줘요. 대표님이 잘라준 거라 유난히 더 맛있어요.]정말 우연이었다. 지배인이 말한 다른 손님이 바로 이 두 사람일 줄이야...나는 지찬우와의 데이트를 정은서가 왜 고객사 접대라고 거짓말했는지 따지지 않았다. 더 이상 슬프지도 않았다.마음을 완전히 접은 나는 그저 푹 자고 싶을 뿐이었다.씻고 난 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한 잠을 잤다.그런데 한밤중에 침실 불이 갑자기 켜져 잠에서 깼다.눈을 깜빡이며 간신히 밝은 빛에 적응하니 정은서가 내 침대 옆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정은서는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진 채 소리쳤다.“정훈아, 너 설마 잠든 거야?”나는 잠이 덜 깬 눈으로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시간은 새벽 3시,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 정은서가 밤을 새우지 않고 돌아온 게 조금 의아했다.예전에 지찬우가 위장병이 날 때마다 정은서는 밤새 지찬우 곁에서 간호했다. 혹시라도 재발할까 봐 밤새 마음을 졸이던 정은서가 내 앞에 서서 매우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댔다.“정훈아, 내가 이렇게 늦게 돌아왔는데 연락 한 번 안 해? 집에서 기다리지도 않고? 너무한 거 아니야?”‘내가 너무하다고?’나는 어이가 없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예전에 걱정돼서 전화를 하면 정은서는 오히려 내가 본인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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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정은서가 내 손목을 들여다보며 매우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괜찮네, 사이즈도 딱 맞고 분위기도 차분하면서 내추럴하고.”고개를 숙이니 잡지에서 본 적이 있는 시계가 내 손목에 있었다. 올해 나온 신제품으로 가격이 몇십억은 족히 됐다.그런데 내가 손을 빼기도 전에 정은서는 내 손목의 시계를 서슴없이 벗겨내더니 손수건으로 정성스럽게 닦기 시작했다.상자에 다시 넣으며 한마디 중얼거렸다.“다행이다. 너랑 찬우 손목 굵기가 비슷하잖아, 너한테 맞으면 찬우한테도 맞을 거야. 찬우도 분명 좋아하겠지.”머리를 굴리는 정은서의 모습에 나는 그저 코웃음을 쳤다.하긴, 지찬우가 명품 시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정은서가 이런 명품 시계를 나한테 선물할 리는 없었다.외투를 걸친 정은서는 선물 상자를 들고 가벼운 걸음으로 현관 밖으로 나갔다.그때 내가 팔을 뻗어 그녀 앞을 막았다. 그러고는 어제 미리 출력해 둔 서류를 꺼내 들었다.“정은서, 이 서류에 서명해.”미간을 살짝 찡그린 정은서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다소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회사 가서 할게.”나는 다시 그녀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회사 업무 서류가 아니야. 꽤 중요한 거야, 시간 많이 안 걸려.”깊게 숨을 들이마신 정은서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내 손에서 서류를 뺏어 들더니 한마디 중얼거렸다.“정말 아침부터 귀찮게 하네.”시선이 서류로 향한 순간, 서류를 넘기던 손가락이 굳어졌다.이 서류는 다름 아닌 이혼 합의서였다.잠시 멈칫하던 정은서는 이내 이혼 합의서를 신발장 위에 힘껏 내리쳤다.그러고는 비웃으며 말했다.“한정훈, 뭐 새로운 게 있는 줄 알았더니 이번에는 이혼하자고 소동이야? 그래, 네가 큰 프로젝트 하나 해냈다고 어깨가 좀 올라갔나 본데, 나 바빠. 네 짜증과 투정 상대할 시간 없어.”나는 계속해서 이혼 합의서를 그녀 앞에 내밀며 냉정하게 말했다.“투정 부리는 게 아니야, 정은서. 이제 너를 놓아줄게, 너한테 자유를 주겠다고. 그럼 지찬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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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인턴부터 다시 시작해서 회사 규정 제대로 배워!”지찬우는 일부러 놀란 척하며 정은서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서 선배, 그건 좀 너무 심한 거 아닐까요...? 프로젝트 거의 다 끝나가는데... 정훈 선배도 고생은 했잖아요.”정은서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허리를 꼿꼿이 폈다. 그러고는 목을 곧게 세우고 콧방귀를 뀌었다.“직원들이 이렇게 속 좁은 사람을 리더로 두고 있으면 회사 분위기만 망쳐, 차라리 찬우 네가 혼자 하는 것보다 못해. 찬우야, 앞으로 한정훈이 하던 프로젝트는 네가 맡아. 이제부터 진짜 프로젝트 책임자는 너야.”지찬우는 탐이 나는 표정이었지만 겉으로는 사양했다.“은서 선배, 그건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아직 나이도 젊고 경력도 별로 없는데...”정은서가 나에게 불만이 있음을 알아챈 회사 임직원들은 앞다투어 맞장구를 쳤다.“정 대표님 말씀이 맞아요. 한 전무님이 너무 자만한 것 같아요. 어제는 야근도 안 하더니 오늘은 지각까지 하고, 엄격히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저는 줄곧 지 부장님이 재능 있는 인재라고 생각했어요. 한 전무님은 경력이 좀 있긴 하지만 지 부장님만 못하죠.”정은서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일부러 마지못해 은혜를 베푸는 척하며 말했다.“일 잘하면 내가 못 이기는 척 너를...”더 이상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떠드는 걸 듣기 싫었던 나는 정은서의 말을 바로 잘라버렸다.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하게 말했다.“미안. 정 대표, 오해한 것 같네? 회사에 온 건 퇴사 신청서 접수하려고 온 거야.”멍해진 정은서는 이내 깜짝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뭐?”인사팀 직원이 다가와 그녀 귀에 무언가 조용히 속삭였다.그러자 정은서의 얼굴이 확 어두워지더니 눈썹 사이의 주름이 깊어졌다.“한정훈, 너 보자 보자 하니까 이제 막 나가겠다, 이거야? 갑자기 이혼... 또 갑자기 퇴사하겠다고 비아냥거리기나 하고. 잊었어? 우리 회사, 자금 조달도 성공했고 곧 상장도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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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이 말이 나오자 현장의 모든 직원들이 숨을 들이켜며 일제히 정은서를 바라보았다.지찬우가 정은서의 팔을 붙잡으며 걱정스럽게 말했다.“은서 선배, 우리가 계약 위반했다고요? 그럼 이제 어떡해요? 이틀 전에 다른 회사와 계약 체결한 것도 몇 개 있는데 지금 투자가 철수되면 자금 흐름이...”정은서는 눈살을 찌푸리며 지찬우의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러고는 걱정하지 말라고 달랬다.회사 대표이사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상대방을 향해 물었다.“우리가 무슨 계약을 위반했다는 거죠?”그러자 상대방이 계약서 한 부를 꺼내며 아주 공식적인 어조로 한 조항을 지적했다.“정 대표님, 계약 체결 당시 저희 측에서는 프로젝트 책임자가 반드시 한 전무님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무님이 프로젝트에서 발을 빼려고 하니 조항에 따라 위약금 10억 원을 배상해야 합니다. 저희 대표님께서 매우 화가 난 상태라 투자를 회수하겠다고 하셨습니다.”정은서는 겨우 펴고 있던 허리가 어느새 살짝 굽어졌다. 일부러 나를 몇 번 쳐다본 뒤 상대방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모두 오해예요. 한 전무가 왜 갑자기 퇴사하겠어요? 걱정 마세요. 제가 바로 한 전무한테 정확하게 말하라고 할게요.”그러면서 티가 날 정도로 나를 향해 계속 눈짓을 했다.나는 그저 냉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정 대표, 나 방금 비행기표 끊었어. 퇴사 절차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갈 거야.”쿵!내 말에 휘청한 정은서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물러서다가 옆에 있는 동료의 컵을 손으로 건드렸다. 컵이 바닥에 떨어지며 물이 흥건히 튀었다.정은서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말도 안 돼! 네가 가긴 어딜 가!”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정은서의 손을 자연스럽게 떼어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정 대표, 설마 일개 직원이 어디로 이직하는지까지 캐묻는 건가? 정 대표가 이렇게 속 좁은 인간이었나?”가슴을 몇 번 들썩이던 정은서는 갑자기 내 팔을 꽉 움켜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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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지 부장, 지 부장 능력도 만만치 않잖아. 협력사랑 한번 얘기해 봐. 혹시 알아? 지 부장 능력을 보고 기회를 줄지도 모르잖아?”내 말에 지찬우는 안색이 붉으락푸르락 몇 번이나 변했다. 하지만 화를 꾹 눌러 담으며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정훈 선배, 오늘 은서 선배가 저한테 인사이동 얘기하신 건 그냥 농담이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 회사는 선배님 없이는 안 돼요.”“찬우야, 이런 인간한테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어.”정은서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재빨리 서명을 하고 퇴사 신청서를 내 가슴팍에 툭 내리쳤다. 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한정훈, 가. 오늘 회사 문을 나서면 영원히 돌아올 생각 마!”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정 대표, 협조해 줘서 고마워.”협력사 대표가 드디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정 대표님, 위약금 문제는...”“물어줘! 재무팀, 지금 당장 가서 송금해!”정은서는 오늘따라 유난히도 초조하고 짜증이 나 있었다.지찬우는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정은서를 붙잡았다.“은서 선배, 우리 프로젝트... 이렇게 물거품이 되는 건가요?”정은서는 일부러 나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투자 하나쯤 뭐가 대단하다고. 우리 프로젝트에는 핵심 특허가 있어. 제품이 출시되면 어차피 수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투자할 거야. 그때가 되면 네가 일등 공신이야! 그때 다시 받아달라고 와서 무릎 꿇고 빌어도 소용없을 거야.”나는 정은서의 도발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지금은 그저 빨리 이 회사를 떠나고 싶을 뿐이었다.그런데 정은서는 마치 나와 계속 겨루려는 듯했다.내가 사무실에 들어가 서류 몇 개를 챙기려 하자 문 앞을 막고 비아냥거렸다.“한정훈, 잘 들어. 이건 모두 회사의 핵심 기밀이야, 네가 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야.”그렇게 말하며 달려와 내 손에 든 서류들을 바닥에 쏟아버렸다.서류들이 내 발밑에 흩어졌지만 나는 담담한 시선으로 정은서를 바라보며 말했다.“이건 모두 내 특허야.”정은서가 비웃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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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서류를 다시 주워 올린 나는 정은서를 밀치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정 대표, 길 막지 마. 비행기 시간 다 됐으니까. 할 말이 정말 있으면 변호사와 얘기해.”정은서는 온몸을 점점 더 심하게 떨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다시 고개를 들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한정훈, 너 가면 정말 이혼이야.”“뭐? 한 전무님이 정 대표님의 남편이라고? 그럼 지 부장님은?”“와, 정말 복잡하네. 한 전무님과 지 부장님이 아는 사이인 줄 전혀 몰랐어. 두 사람 평소에 말 한마디도 안 하잖아!”“아, 그랬구나... 어제 한 전무님 반응이 이상한 이유를 이제 알겠네. 프로젝트 책임자 자리를 내놓겠다고 한 이유가...”충격에 휩싸였던 직원들은 이내 우리 둘 사이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찬우는 다소 난처해했지만 멘탈이 워낙 강한 녀석이라 그런지 오히려 박수를 치며 말했다.“정훈 선배, 사실 저도 두 분이 부부라는 걸 진작 얘기하고 싶었어요. 저도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거든요. 사실대로 얘기하니 이제야 속이 시원하네요.”표정이 잔뜩 어두워진 정은서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이제 만족해? 나 직원들 앞에서 우리 둘 사이 공식적으로 얘기했어. 그러니까 물건 내려놓고 비행기표 취소해!”나는 정은서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이 여자는 한 번이라도 내가 떠날 거라는 걸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회사 규모가 커진 후, 사내 연애가 회사 분위기를 망친다며 나보고 기다리라고 했다.회사가 안정되면 반드시 직원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겠다며 나더러 조금만 더 힘내라고 했다.회사 자금 조달에 성공했는데도 정은서는 여전히 무관심하게 행동하며 지찬우와 알콩달콩 깨를 볶았다.그럼에도 여전히 자신감이 넘쳤다. 본인의 한마디에 내가 돌아설 거라고 확신하는 듯했다.나는 코웃음을 치며 가져온 이혼 합의서를 꺼냈다.“이혼할 거면 빨리 서명해.”이번에야말로 진짜로 멍해진 정은서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여태껏 살면서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완전히 넋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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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내 얼굴에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것을 본 정은서는 눈에 실망감이 스쳤다.다소 힘이 빠진 듯 이혼 합의서에 서명했다.나는 내 물건을 챙긴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를 나섰다.이번에는 정은서도 더 이상 따라오지 않았다.제때 비행기를 타고 천 킬로미터 떨어진 테크 회사에 도착했다.입사 후, 내 특허 기술이 회사의 핵심이 되면서 나는 빠른 속도로 승진하고 연봉도 껑충 올랐다.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미녀 상사 배민영과 계약 서명 자리에 함께하고 있을 때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진동했다.잠깐 얘기하고 자리에서 나와 화장실로 가서 휴대폰을 확인했다.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바로 정은서였다.정은서와의 마지막 대화는 그녀가 저녁을 같이 못 먹겠다고 문자를 보낸 것에 멈춰 있었다.그런데 지금 갑자기 사진을 잔뜩 보내왔다.다양한 명품 시계 사진들이었다.잠시 후, 메시지까지 왔다.[잘못 보냈네, 취소도 못 하고.][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말해, 이왕 산 김에 덤으로 하나 사줄게.]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답장을 보냈다.[시계 안 좋아해.]정은서는 뭔가 계속 입력하는 듯했으나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 찰나 다시 메시지를 보내왔다.[웃겨 정말. 나도 사주고 싶어서 이러는 거 아니야.]‘도대체 뭘 하려고 이러는 건지...’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정은서를 ‘방해 금지’ 모드로 설정했다. 이러면 문자가 와도 휴대폰에 계속 알람이 뜨는 일은 없을 것이다.마음 같아서는 차단하고 싶었지만 같은 업계에 있는 이상, 앞으로 업무상 교류가 있을지도 모르기에 굳이 차단까지는 하지 않았다.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배민영과 마주쳤다.손에 계약서를 들고 있는 걸 보니 일이 잘 끝난 모양이었다.나는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 갑자기 볼일이 좀 생겨서요.”배민영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괜찮아요. 여자친구한테서 전화라도 왔나 봐요?”처음에는 적당히 얼버무리려 했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솔직하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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