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빛바랜 맹세의 끝에서 / Chapter 11 -الفص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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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강태준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힌 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입을 열었다.“서은채, 이제 그만해. 지금 나오면 내가 며칠 더 같이 있어 줄게.”여전히 대답은 없었다.“내가 말했잖아. 소희는 그냥 잠깐 만나는 거라고. 벌써 슬슬 질리기 시작했어. 내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너고, 네 자리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강태준은 텅 빈 저택을 향해 계속 변명을 쏟아 냈다.“조금만 더 기다려. 금방 정리하고 돌아올 테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계속 이러면 나도 지쳐.”잠시 후 강태준이 으름장을 놓듯 덧붙였다.“그러다 내가 정말 이혼하자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하지만 아무리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강태준은 저택 안의 방을 하나도 빠짐없이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서은채는 없었다.그러다 뒤늦게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서은채가 평소 사용하던 물건들이 사라진 상태였고 집 안은 텅 비어 있었다.‘정말... 떠난 거야?’그제야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리를 스쳤다.강태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온몸에서 날카로운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사라진 것은 서은채의 짐뿐만이 아니었다.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추억이 담긴 물건도 보이지 않았다.지난 6년 동안 사랑했다는 흔적 자체가 저택에서 모조리 지워졌다.불길한 예감에 강태준은 곧장 뒤뜰로 향했다.그리고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한때 뒤뜰을 가득 채우고 있던 소나무가 단 한 그루도 남아 있지 않았다.무성했던 나무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볼품없는 밑동만 덩그러니 늘어서 있었다.그제야 강태준의 얼굴에서 여유가 완전히 사라졌다.지난 6년 동안 서은채가 화를 낸 적은 수도 없이 많았다.그럴 때마다 강태준이 조금만 달래고 비위를 맞춰 주면 결국 마음이 풀렸다.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다.그런데 이번에는 강태준이 직접 심어 준 어린 소나무마저 전부 베어 버렸다.두 사람의 지난 6년이 고스란히 담긴 모든 것을 미련 없이 없애 버렸다.강태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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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그제야 강태준의 마음속에 뒤늦은 후회가 조금씩 밀려들었다.‘처음부터 새로운 자극을 찾겠다고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지 않았더라면... 우리 사이도 이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겠지.’하지만 후회도 잠시, 곧 억울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다들 그렇게 살잖아. 아내는 아내대로 두고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는 사람도 흔하고, 대놓고 두 집 살림하는 사람도 있는데.’강태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소희도 착하고 말도 잘 듣는데... 은채는 왜 그 정도도 이해해 주지 못하는 거야?’후회와 억울함이 뒤엉켜 머릿속이 복잡했다.결국 강태준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과 불안감이 끊임없이 가슴을 짓눌렀다.서은채를 찾아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했다.이대로 놓쳐 버리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강태준은 사람을 풀어 서은채의 행방을 샅샅이 추적했다.그리고 마침내 소식이 들어왔다.장현호는 두툼한 서류 뭉치와 USB 하나를 들고 강태준의 집무실로 들어와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대표님, 확인됐습니다.”장현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사모님께서... 결혼 당시 작성한 혼전 계약서를 근거로 이혼 소송을 제기하셨습니다.”강태준의 표정이 굳었다.“뭐?”“대표님 측에서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아 궐석으로 재판이 진행됐고... 이미 이혼 판결까지 확정됐습니다.”장현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그리고 사모님과 부모님 모두 신분 말소 절차를 마치고 출국하셨습니다. 레쿤국으로 가는 항공편을 이용하신 것까지는 확인했지만, 이후 행적은 찾지 못했습니다.”장현호는 차마 강태준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였다.말이 끝나자, 집무실 안에 숨 막힐 듯한 정적이 내려앉았다.그 순간 강태준의 머릿속에 오래전 일이 불현듯 떠올랐다.결혼을 앞두고 서동만과 윤정희를 안심시키기 위해 서은채 몰래 혼전 계약서에 서명했던 일이었다.당시에는 그 계약서가 실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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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화

강태준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깊이 가라앉은 눈빛에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이소희, 당장 데려와!”강태준이 버럭 소리쳤다.꽉 움켜쥔 주먹에서는 뼈마디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날 만큼 손에 힘이 들어갔다.장현호는 곧바로 이소희를 데리러 나갔다.그런데 이소희는 아직도 엘리베이터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장현호가 다가가자, 이소희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역시나 강태준이 자신을 붙잡으러 보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장현호는 그런 이소희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그는 예전부터 강태준이 이소희의 어디에 반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서은채와 비교하면 어느 면으로 보나 한참 부족해 보였지만, 정작 강태준은 곁에 있는 서은채의 소중함도 모른 채 이소희에게 빠져 있었다.아무리 소중한 것도 손에 넣고 나면 싫증이 나는 법인가 싶었지만, 장현호가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었다.이소희는 장현호가 가까이 다가오자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감추고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태준 씨가 저 데려오라고 했죠?”이소희는 금세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가서 전하세요. 이제 태준 씨한테 돌아가기 싫다고요. 나도 더는 내연녀로 살기 싫다고요.”이소희는 토라진 듯 입술을 삐죽이며 다시 돌아서는 시늉을 했다.하지만 장현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죄송하지만, 대표님께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그냥 가실 수 없습니다.”장현호의 태도에는 거절할 여지가 없었다.결국 이소희는 반강제로 장현호를 따라 다시 집무실로 향했다.그제야 이소희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강태준이 자신을 붙잡으려는 것이라면 장현호가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나올 이유가 없었다.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무엇 때문인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이소희가 들어서자, 집무실 문이 닫혔다. 곧이어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이소희가 놀라 뒤를 돌아보는 순간, 강태준이 성큼성큼 다가왔다.다음 순간, 강태준이 손을 뻗어 이소희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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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화

강태준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내가 은채한테 정떨어졌다고?”그는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난 은채를 사랑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은채였어. 넌 그저 잠깐 즐기려고 만난 여자일 뿐이고.”강태준의 눈빛이 더욱 사나워졌다.“그런 주제에 감히 은채한테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그는 움직이지 않고 있는 장현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장 비서, 뭐 해? 내가 직접 가르쳐 줘야 움직일 거야?”장현호는 속으로 의문을 삼켰다.‘정말 사모님을 사랑했다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장현호는 강태준의 지시대로 이소희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뺨을 후려쳤다.남자의 힘이 실린 손찌검 한 번에 이소희의 뺨이 눈에 띄게 부어올랐다.이소희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조금 전까지 강태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흘리던 눈물과는 달랐다. 이번에는 정말 두려움에 질린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기세등등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태준 씨, 내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이소희는 다급하게 두 손을 모으고 애원했다.“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 응? 내가 언니한테 직접 사과할게. 다시는 안 그럴게.”이소희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잔뜩 웅크렸다.“이제 그만하라고 해 줘. 이러다 진짜 죽을 수도 있어! 얼굴도 다 망가질 거야... 제발!”하지만 강태준은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장현호는 이소희가 얼굴을 가린 손을 억지로 떼어 낸 뒤,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몇 차례 손찌검이 이어진 끝에 이소희는 바닥에 쓰러진 채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했다. 얼굴은 본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심하게 부어올라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이소희의 머릿속에는 오직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강태준, 완전히 미쳤어!’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소희가 원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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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강태준은 어느 순간부터 서은채에게 싫증을 느끼며 마음을 접었다.그럼에도 서은채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게다가 가진 것 하나 없는 그녀가 결국 평생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할 거라 확신했다.하지만 현실은 강태준의 오만한 확신을 처참하게 깨뜨렸다.‘모든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더라면...’강태준은 과거의 선택을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될 터였다.한때는 분명 진심으로 서은채를 사랑했다. 다만 그 사랑이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졌을 뿐이었다.강태준은 창밖으로 끊임없이 오가는 차량과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봤다.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듯 공허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무기력했다.갑자기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그때 책상 위에 놓인 휴대전화 화면이 밝아졌다.친구 차은석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강태준이 전화를 받자 시끌벅적한 음악과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왔다.“태준아, 오늘 애들 다 모이는데 너도 올 거지? 오는 김에 요즘 만난다는 여자도 데려와. 와이프는 됐고. 워낙 낯도 많이 가리고 이런 분위기도 불편해하잖아. 우리도 괜히 신경 쓰이고.”순간 강태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이소희랑은 끝났어.”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리고 앞으로 은채 험담 한 번만 더 해 봐. 네 회사가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다면.”“뭐라고?”차은석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주변에서 떠들던 친구들도 강태준의 말을 들었는지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차은석이 헛웃음을 흘렸다.“태준아, 농담하는 거지? 너 이소희한테 완전히 빠져 있었잖아. 갑자기 왜 끝내? 그러면 은채 씨는?”“이혼했어.”강태준이 낮게 대답했다. 짧은 한마디가 유난히 허탈하게 흘러나왔다.전화기 너머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누군가 시끄럽게 울리던 음악마저 중단했다.“잠깐만. 진짜야? 너희 진짜 이혼했다고?”강태준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차은석을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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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화

“그때는 내가 한발 늦어서 은채 씨한테 고백조차 못 했지만,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전화기 너머로 차은호의 단호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그 말을 듣는 순간, 강태준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그제야 차은석을 비롯한 친구들이 왜 그토록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 보라고 부추겼는지 알 것 같았다.자신과 서은채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어 차은호에게 기회를 주려 했다는 생각이 들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다.강태준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차은석의 손에서 휴대전화를 낚아챘다.“은호 형!”이를 악문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은채는 나만 사랑해. 내가 찾아가서 제대로 사과하면 다시 돌아올 거야.”말을 이어 갈수록 목소리가 거칠어졌다.“예전에도 은채는 형한테 마음 없었어. 이제 와서 형이 끼어들 틈이라도 생긴 줄 알아? 착각하지 마. 절대 그런 일 없으니까.”하지만 차은호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지금 당장 은채 씨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나랑 만나 주지 않아도 괜찮아.”잠시 후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그래도 너보다는 내가 나아.”강태준의 표정이 굳었다.“네가 은채 씨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생각해 봐. 은채 씨가 나를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한테 돌아갈 일은 없어.”순간 강태준은 숨이 턱 막혔다.애써 외면해 온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됐다.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지만 강태준은 아무렇지 않은 척 이를 악물었다.“형이 뭘 안다고 떠들어?”억눌러 왔던 분노가 차은호에게 쏟아졌다.“형이랑 은석이가 뒤에서 비겁하게 수작만 안 부렸어도 이렇게까지 안 됐어. 밖에서 여자 좀 만나는 게 뭐 어떠냐고 계속 부추기지만 않았어도 내가 은채한테 그렇게 상처를 줄 일 없었다고!”전화기 너머에서 차은호의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렸다.“강태준, 남 탓하지 마.”곧이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네가 정말 은채 씨만 사랑했다면 은석이랑 친구들이 몇 마디 했다고 흔들렸겠어?”강태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걔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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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화

“미안해... 정말 미안해...”강태준은 목이 잠긴 채 몇 번이고 사과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정작 이 말을 들어야 할 서은채는 이제 곁에 없었다.눈물로 시야가 흐려지자 문득 서은채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평범하기 그지없던 어느 여름날 오후였다.맑게 갰던 하늘에서 갑자기 여우비가 쏟아졌다.우산도 없던 서은채는 하필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순식간에 비에 흠뻑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으며 속이 비칠 정도로 얇아졌다.뒤늦게 난처한 상황을 알아차린 서은채는 당황한 얼굴로 몸을 가리려 애썼다. 하지만 굵은 빗줄기는 사정없이 쏟아졌고 어느새 온몸이 흠뻑 젖어 버렸다.마침 근처를 지나던 강태준은 차창 너머로 서은채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심장마저 제멋대로 요동치기 시작했다.그 순간, 강태준은 서은채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강태준은 곧바로 차를 세우고 문을 열어 서은채에게 말을 걸었다.“괜찮으시면 차 안에서 좀 정리하실래요? 지금 그대로 계시기에는 곤란하실 것 같은데요.”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든 서은채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강태준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뛰었다.머릿속은 새하얘졌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귓가에는 오직 심장 뛰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하지만 서은채는 상대가 젊은 남자라는 사실을 확인하자 금세 경계하는 기색을 보이며 단호하게 거절했다.“마음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서은채가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 하자 강태준은 다급해졌다.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평소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 충동적으로 서은채의 손을 붙잡아 차에 태운 뒤, 입고 있던 재킷까지 벗어 어깨에 둘러 주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안 탈 거니까요. 소나기라 오래 내리지는 않을 테니까 비가 그칠 때까지만 안에서 기다리세요.”정작 강태준은 트렁크에 우산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은 채 차 밖에 멀뚱히 서서 그대로 비를 맞았다.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온 감정에 정신을 빼앗긴 탓인지 다른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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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어차피 차은호의 말대로라면 서은채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했다.하지만 아무리 자포자기한 상태라고 해도 목숨까지 함부로 버릴 수는 없었다.다시 눈을 떴을 때, 강태준은 병원에 누워 있었다.쓰러진 강태준을 발견한 차은석 일행이 급히 병원으로 옮긴 것이었다.강태준이 깨어난 것을 확인한 차은석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그는 곧바로 쉴 새 없이 잔소리를 쏟아 냈다.“태준아, 네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는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목숨을 걸고 이러면 안 되지. 네가 정말 죽어 버리면 은채 씨는 네가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영영 모를 거 아니야?”차은석은 잠시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우리 형도 은채 씨를 좋아하지만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 너한테도 기회는 있어.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은채 씨한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제대로 설명하고,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말은 해야 할 거 아니야.”그는 강태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설마 은채 씨 기억 속에 평생 나쁜 놈으로 남고 싶어? 은채 씨가 평생 너를 미워하게 내버려둘 거야?”차은석의 말을 듣던 강태준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강태준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말이 맞아. 은채를 찾아야겠어. 가족들한테도 직접 사과하고, 지금까지 있었던 일도 전부 설명할 거야. 그러면... 어쩌면 나를 용서해 줄지도 모르잖아.”차은석과 친구들은 차마 그 헛된 기대를 꺾지 못했다.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살아갈 희망을 붙잡는 편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으려는 것보다는 나았다.아무리 그래도 친구가 죽는 꼴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전날 강태준이 있던 룸에 들어갔을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철렁했다.발견 당시 강태준은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위태로운 상태였다.차은석은 친구들과 함께 혼비백산해 강태준을 병원으로 옮겼다.강태준은 위세척까지 받고 나서야 겨우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조금만 늦었어도 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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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화

그러던 어느 날, 강태준의 시야에 문득 서은채와 꼭 닮은 뒷모습이 스쳐 지나갔다.여자는 외국인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순간 가슴이 시큰하게 저렸다.강태준은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빠르게 달려가 외국인 남자의 얼굴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쳤다.“내 아내한테서 손 떼!”“아내라고? 미친 거 아니야? 이 여자가 당신 아내면 나는 뭔데?”외국인 남자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며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곧이어 화를 참지 못하고 강태준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강태준은 날아오는 주먹을 손으로 막아 냈다.옆에 있던 동양인 여자가 황급히 외국인 남자 앞을 가로막았다.“누구신데 이러세요? 난 당신 같은 사람 몰라요! 자기야, 우리 그냥 가자.”여자는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강태준을 노려봤다.그제야 강태준은 사람을 잘못 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작 뒷모습이 조금 닮았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서은채라고 생각한 순간 눈앞이 뒤집힐 만큼 이성을 잃고 말았다.“미안합니다...”강태준은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그리고 합의금까지 건넨 뒤에는 다시 기약 없는 수색을 이어 갔다.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몰랐을지도 몰랐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서은채를 닮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누군가는 헤어스타일이 비슷했고, 누군가는 눈매가 닮았으며, 또 누군가는 목소리가 비슷했다.하지만 아무리 닮았어도 그저 비슷한 사람일 뿐, 서은채는 아니었다.강태준이 찾는 사람은 오직 서은채뿐이었다.그렇게 마지막 희망마저 희미해져 가던 어느 날, 갑자기 장현호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대표님, 사모님을 찾았습니다! 지금 부모님과 함께 음식점에 계십니다. 음식점 위치 보내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가 보십시오!]메시지에는 식당 위치와 함께 서은채의 옆모습이 찍힌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사진을 확인하는 순간 강태준의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울컥 치미는 눈물을 가까스로 삼키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힐 틈도, 행색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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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화

서동만과 윤정희도 강태준을 보자 울분이 치밀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자네와 우리는 애초에 사는 세상이 달라. 그러니 이제 그만 돌아가서 자네가 살던 대로 부잣집 도련님으로 살아.”“여자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날 수 있을 테고 싫증 나면 버리고 또 만나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우리 은채는 자네 장난감도 아니고 자네 화풀이를 받아 주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야!”“우리가 애지중지 키운 딸이 자네한테 시집간 뒤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정말 몰라서 이러는 건가! 어떻게 자기 아내를 감옥에 가둘 생각을 해?”“그것도 모자라 몇 번이나 그렇게 못살게 굴었잖아! 우리 은채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자네 같은 사람을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해야 해!”말할수록 두 사람의 울분은 더욱 치밀어 올랐다.서동만과 윤정희는 쏟아지는 눈물을 훔치며 연신 강태준을 밀쳤다.강태준은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두 사람의 질타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그러다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러면 은호 형은요? 은호 형도 저와 똑같이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잖아요. 언젠가 형도 저처럼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서동만과 윤정희, 서은채가 대답하기도 전에 차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내가 너와 같은 사람이 될지 아닐지는 앞으로 시간을 두고 증명하면 돼. 하지만 적어도 나는 너와 다를 거라고 확신해.”차은호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은채 씨와 만나기로 한 날, 계약서 하나를 작성했어. 언젠가 내가 은채 씨를 배신하면 내 명의로 된 모든 재산을 은채 씨에게 넘기겠다는 내용이야. 거기서 끝이 아니야. 헤어진 뒤에도 내가 새로 벌어들이는 재산의 절반이 계속 은채 씨에게 돌아가도록 공증까지 해 뒀어.”차은호는 조금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은채 씨에게 충분한 돈이 있어야 언제든 나와 맞설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잘못했을 때 은채 씨가 참고 견딜 필요 없이 곧바로 내게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차은호는 잠시 서은채를 바라보다 나지막이 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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