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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맹세의 끝에서

빛바랜 맹세의 끝에서

By:  새벽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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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채는 강태준 몰래, 그의 내연녀를 해외로 빼돌렸다. 그날 밤 강태준은 서은채의 부모를 납치했다. 두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내연녀의 행방을 캐내려는 속셈이었다. 강태준이 휴대전화 화면을 서은채 앞으로 들이밀었다. 화면 속, 서은채의 부모는 의자에 꽁꽁 묶여 있었다. 가슴팍에는 시한폭탄이 매달려 있었고 카운트다운 숫자가 쉴 새 없이 줄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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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Chapters
제1화
00:59:5900:59:58강태준은 서은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정장을 차려입고, 긴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모습은 마치 별것 아닌 계약서에 서명받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태연했다.“서은채, 이제 59분 남았어.”목소리는 차분했다. 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말해. 소희를 어디로 보냈어?”서은채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누군가 목을 틀어쥔 듯 숨이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같은 질문을 들은 건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처음 이소희의 행방을 물었을 때는 침묵했다.그러자 강태준은 턱을 붙잡고 엄지로 입술을 천천히 쓸어내리며 달래듯 물었다.“서은채, 이제 그만 고집부려.”그리고 세 번째로 그 이름을 들은 지금, 강태준은 장모님과 장인어른의 목숨을 담보로 아내에게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강태준...”서은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당신한테는 장모님, 장인어른이고 나한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야...”강태준의 입에서 서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서은채를 향한 눈빛은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그래? 나 몰래 빼돌리기 전에 소희도 나한테 그만큼 소중한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어?”강태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서은채는 헛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소중한 사람?’강태준은 분명 밖에서 만나는 여자들은 그저 잠깐 즐기는 상대일 뿐, 싫증 나면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말했었다.‘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는 오직 나뿐이라고도 했었지.’그런데 지금 강태준은 고작 이소희 때문에 서은채 부모님의 목숨을 담보로 그녀를 협박하고 있었다.“강태준, 내가 끝까지 말하지 않으면 어떡할 건데... 정말 우리 부모님을 죽이기라도 할 거야?”서은채는 잠긴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직접 확인해 봐.”상체를 살짝 기울인 강태준은 핏기 없이 창백해진 서은채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봤다.서은채는 온몸을 떨며 끝내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졌다.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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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신분 말소 절차를 마치려면 보름이 걸린다는 말을 들은 서은채는 서동만, 윤정희와 상의한 끝에 일단 강씨 가문으로 돌아가기로 했다.앞으로 보름 동안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강태준의 곁에 머물며 조금의 낌새도 내비쳐서는 안 됐다.강태준이 눈치채는 순간, 서은채 가족 세 사람 중 누구도 무사히 떠날 수 없었다. 강태준은 그럴 만한 능력과 수단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강씨 가문 저택으로 돌아온 서은채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한때 보물처럼 아꼈던 두 사람의 사진부터 강태준이 써 준 연애편지, 함께 여행을 다니며 하나씩 사 모았던 기념품까지, 서은채는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모조리 벽난로 속으로 던졌다.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지난날의 흔적을 하나씩 집어삼켰다.마치 한때 진짜라고 굳게 믿었던 우스운 꿈에서 이제야 깨어난 것만 같았다.다음 날, 서은채는 저택 뒤뜰로 향했다.뒤뜰에는 소나무가 빼곡했다. 그중에는 강태준이 서은채를 위해 직접 심은 어린 소나무도 있었다.강태준은 소나무가 변치 않는 절개를 상징한다며, 자신의 사랑도 이 나무처럼 영원히 시들지 않을 거라고 말했었다.서은채는 도끼를 집어 들고 강태준이 직접 심었던 그 나무 앞에 멈춰 섰다.그녀는 도끼를 들어 나무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팔이 저려 와도 멈추지 않았다.도우미들은 멀찍이 떨어져 바라볼 뿐 감히 다가와 말리지 못했다.도끼날이 나무를 파고들 때마다 둔탁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뒤뜰에 울려 퍼졌다.서은채는 오랫동안 놓지 못했던 미련마저 한 조각씩 잘려 나가는 것 같다고 느꼈다.셋째 날, 서은채는 산 정상에 있는 사랑바위를 찾아갔다.그곳에는 서은채와 강태준의 이름이 새겨진 자물쇠 하나가 걸려 있었다.예전에 강태준은 서은채를 품에 안은 채 열쇠를 절벽 아래로 던지며, 이제 두 사람은 평생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말했다.서은채는 펜치를 꺼내 자물쇠를 망설임 없이 잘라 버렸다.끊어진 자물쇠가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서은채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리고 단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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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다음 날, 서은채가 추위에 시달리다가 거의 정신을 잃어 갈 무렵에야 지하실 문이 열렸다.경호원이 무표정한 얼굴로 문 앞에 서서 말했다.“대표님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요.”서은채는 벽을 짚은 채 비틀거리며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이가 딱딱 맞부딪칠 정도로 추위가 가시지 않았다.‘다음은 없어. 이제 조금만 더 버티면 강태준을 내 인생에서 영원히 지워 버릴 수 있을 테니까.’그날 저녁, 강태준의 비서 장현호가 드레스와 보석을 가져왔다.그리고 자선 경매 만찬에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라는 강태준의 뜻도 함께 전했다.서은채는 예정대로 만찬에 참석했다.그런데 연회장 입구에 도착하자 이소희가 눈에 들어왔다.이소희는 유명 디자이너의 최신 컬렉션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강태준이 지난달 경매에서 10억 원이 넘는 금액에 낙찰받은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서은채는 걸음을 멈추고 강태준을 바라보았다.“소희 씨도 왔는데 굳이 나까지 부른 이유가 뭐야?”강태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원래 소희를 데려올 생각은 없었어. 이런 자리에 와 본 적이 없다며 구경하고 싶다기에 데려온 거야.”강태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은채야, 너무 속 좁게 굴지 마.”서은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속이 좁아서가 아니었다.강태준은 법적인 아내와 내연녀를 한자리에 데려오고도, 서은채가 어떤 시선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오를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강태준은 그대로 이소희와 함께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이소희는 강태준의 팔에 다정하게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강 대표 부부는 금슬이 정말 좋은가 봐. 두 사람 잘 어울린다.”“사람 잘못 봤어. 저쪽에 있는 분이 강 대표 부인이야. 옆에 붙어 있는 여자는... 내연녀고.”처음 말을 꺼낸 사람이 당황한 얼굴로 서은채를 흘끗 바라보더니 머쓱하게 중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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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서은채는 떨리는 손으로 강태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이 잠겨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사진... 당신이 공개한 거야?”전화기 너머로 강태준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경매에는 꽤 소질이 있던데? 상한선도 없이 가격을 올려 대는 게 그렇게 재미있었어? 그 사진들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는 꼴을 보기 싫으면...”강태준의 목소리가 잔인하게 가라앉았다.“지금 당장 경매장으로 가. 한 장도 빠짐없이 네 손으로 직접 낙찰받아.”그때 전화기 너머로 이소희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렸다.“태준 씨... 언니한테서 전화 온 거야? 그냥 내가 떠날게. 내가 괜히 곁에 있어서...”“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이소희에게 대답하는 순간, 강태준의 목소리가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졌다.곧이어 전화기 너머로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떠난다고 하기만 해 봐!”어느 순간 전화는 끊겨 있었다.서은채는 차가운 호수에 빠진 듯 온몸이 싸늘하게 식었다.하지만 지체할 수 없었다.서은채는 곧바로 경매장으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객석은 남자들로 가득했고, 정면의 대형 스크린에는 서은채의 지극히 사적인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었다.곤히 잠든 서은채의 민낯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당시 강태준은 자는 모습이 귀엽다며 굳이 사진으로 남겨 두었다.샤워를 마친 뒤, 수건 하나만 두른 채 돌아선 뒷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었다. 강태준은 보고 싶을 때마다 꺼내 보고 싶다며 서은채를 달래 사진을 찍었다.침대 위에서 찍은 은밀한 사진도 있었다. 그때 강태준은 관계를 한 뒤 서은채의 몸에 남은 흔적들을 사랑의 증거라고 말했다.이제 그 모든 사진이 수많은 낯선 사람 앞에 전시되어 있었다.경매장에 모인 남자들의 시선이 서은채의 몸을 훑었다.사방에서 들려오는 말들이 귓가를 파고들었다.“몸매가 저 정도였어? 강 대표는 복도 많네.”“예전에 강 대표가 아내를 그렇게 끔찍이 아꼈다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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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생일 파티 당일, 강태준은 직접 차를 몰고 서은채를 데리러 왔다.차 안에는 강태준 혼자였다.“오늘은 소희 씨 안 데려왔네?”서은채가 무심하게 묻자, 강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앞으로는 웬만하면 둘이 마주칠 일 없게 할 거야. 그래야 괜히 네 심기를 건드리는 일도 없겠지.”서은채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내 심기를 건드릴까 봐서가 아니라, 내가 또 이소희를 괴롭힐까 봐 걱정되는 거겠지.’어느새 강태준에게 서은채는 이소희를 못살게 구는 악독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생일 파티는 성대하게 열렸다.강태준은 파티 내내 서은채의 손을 잡고 다니며 값비싼 보석은 물론 유명 화가의 작품까지 선물했다. 그러고는 서은채의 눈치를 살피며 나지막이 물었다.“이 정도면 이제 화 풀렸지?”서은채는 강태준을 바라보다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예전에도 강태준은 서은채를 화나게 할 때마다 자존심을 굽히고 이렇게 달래 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은채는 결국 마음이 약해져 강태준을 용서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강태준은 장인과 장모의 목숨을 빌미로 서은채를 협박했다.게다가 서은채의 자존심을 짓밟고, 가장 은밀한 사진까지 수많은 사람 앞에 경매로 내놓았다.이제 강태준이 세상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다고 해도 되돌릴 수 없었다.서은채가 입을 열려던 순간, 갑자기 연회장 문이 열렸다.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이소희가 문 앞에 잔뜩 주눅 든 얼굴로 서 있었다.순간, 강태준의 표정이 굳었다.“내가 집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이소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눈시울을 붉혔다.“나도... 언니 생일 축하해 주고 싶어서 왔어. 선물도 준비했어...”“난 소희 씨가 보고 싶지 않은데.”서은채가 싸늘하게 잘라 말했다.하지만 강태준은 이미 직원을 불러 이소희의 자리를 따로 마련하게 한 뒤, 서은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축하해 주겠다고 여기까지 왔잖아. 지난번 일은 이쯤에서 풀어.”정작 서은채의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였지만, 강태준의 시선은 온종일 이소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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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서은채는 비틀거리며 연회장을 빠져나왔다.뺨은 불에 덴 듯 화끈거렸고 터진 입가에 묻은 피는 어느새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기사를 부르지 않고 직접 운전해 병원으로 향했다.의사가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발라 주는 동안, 서은채는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한쪽 뺨은 퉁퉁 부어 시뻘겋게 달아올랐고 입가는 찢어져 있었다.두 눈에는 핏발까지 가득 서 있었다.‘꼴이 말이 아니네.’서은채는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가 상처가 당기는 통증에 짧게 숨을 들이켰다.한편, 뜻밖의 두 사람이 주차장에서 치료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서은채의 앞을 가로막았다.이소희의 부모인 이기철과 고연경이었다.두 사람은 서은채가 차에 타지 못하도록 양쪽에서 차 문을 막아선 채 애원했다.“은채 씨, 제발 강씨 가문 안주인 자리에 미련 좀 버려 주시면 안 되겠어요? 우리 소희 좀 불쌍하게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 자리 좀 양보해 주세요...”서은채는 싸늘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비키세요.”“우리 소희는 강 대표님을 진심으로 사랑해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데... 이제 그만 보내 주세요...”“비키시라고요!”더는 상대할 가치조차 없었다.서은채는 앞을 막아선 두 사람을 밀어내고 차 문을 열어 운전석에 올라탔다.그런데 막 출발하려던 순간, 이기철이 갑자기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퍽!둔탁한 충격음이 울렸다.서은채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이기철은 바닥에 쓰러져 다리를 움켜쥔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여보!”고연경이 비명을 지르며 이기철에게 달려갔다.서은채는 운전대를 꽉 움켜쥔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일부러 뛰어든 거야.’분명했다.‘일부러 차 앞으로 뛰어들었어!’하지만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서은채는 곧바로 차에서 내려 이기철을 응급실로 데려갔다.얼마 지나지 않아 이소희가 다급하게 병원 복도를 뛰어왔다.서은채를 발견한 이소희는 다짜고짜 손을 들어 뺨을 후려쳤다.찰싹!서은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귓속에서는 날카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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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다시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서은채는 아직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병상에서 내려왔다.병원을 나서던 중 어느 병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안에서 이소희의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아빠, 엄마. 인사해요. 제 남자 친구 태준 씨예요.”반쯤 열린 문틈 너머로 강태준이 이소희의 허리를 감싸안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두 분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제가 소희 곁에서 힘든 일 없도록 잘 지켜주겠습니다.”고연경은 입을 다물지 못할 만큼 환하게 웃었다.“그래요, 그래. 우리 소희가 강 대표님 같은 사람을 만난 게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르겠어요...”병실 밖에 서 있던 서은채는 문득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그때도 강태준은 지금처럼 서은채의 허리를 감싸안은 채 서동만과 윤정희 앞에서 진지하게 약속했다.“두 분 걱정하지 마세요. 은채는 제가 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한때 서은채에게 했던 약속을 이제는 다른 여자에게 똑같이 하고 있었다.‘강태준, 네 약속은 참 쉽게도 바뀌는구나.’서은채는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세게 깨물다가 조용히 돌아섰다.병원을 나온 뒤 날짜를 확인해 보니 신분 말소 절차가 끝나기까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다.사흘만 지나면 부모님을 모시고 이곳을 완전히 떠날 수 있었다.그렇게 되면 강태준이 아무리 찾아 헤매도 세상 어디에서도 ‘서은채’라는 사람을 찾지 못할 터였다.저택으로 돌아온 서은채는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갈아입을 옷 몇 벌과 신분증, 여권처럼 꼭 필요한 물건만 가방에 챙겼다.나머지는 아무것도 가져가고 싶지 않았다.서은채가 막 여권을 가방에 넣으려던 순간, 방문이 갑자기 열렸다.문 앞에는 강태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소희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따라왔다.“아빠가 위험한 고비는 넘겼지만... 연세도 있으신데 이번에 너무 크게 다치셨어.”이소희는 흐느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강태준은 손을 들어 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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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렇게 이어진 사흘은 서은채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끔찍한 시간이었다.서은채는 시도 때도 없이 욕설을 들어야 했고, 누군가 일부러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무릎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되기도 했다.하지만 상처를 치료해 주는 사람도, 깨끗한 물 한 모금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서은채는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이를 악물고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사흘만 지나면 자유였다.마침내 사흘째 저녁,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렸다.문 앞에는 강태준이 서 있었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빛에 가려져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강태준은 서은채가 가까이 다가오고 나서야 처참한 몰골을 확인하고 순간 표정이 굳었다.“꼴이 이게 뭐야?”서은채가 입고 있던 옷은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고, 팔과 무릎에는 멍과 상처가 가득했다.입가에도 말라붙은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러자 이소희가 곧바로 강태준의 팔짱을 끼며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언니가 일부러 다친 척하는 거 아닐까? 불쌍해 보이려고.”이소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며칠 유치장에 있었을 뿐인데 무슨 일이 있었겠어?”강태준은 몇 초 동안 서은채의 상처를 바라봤다.그러나 이내 표정을 차갑게 굳히며 말했다.“서은채, 이제 적당히 좀 해. 언제까지 이럴 건데?”서은채는 힘없이 입꼬리만 비틀어 올렸다.이제는 해명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저택으로 돌아온 뒤, 강태준은 웬일인지 곧바로 이소희에게 돌아가지 않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그리고 마치 정해진 일정을 통보하듯 태연하게 말했다.“앞으로 월요일이랑 화요일은 너랑 여기서 지낼게. 나머지 날은 소희랑 있고.”계단 앞에 서 있던 서은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오늘은 수요일이니까 소희한테 가야 해.”강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어 들었다.“며칠 동안은 연락하지 마.”현관까지 걸어간 강태준은 문을 열기 전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다음 주 월요일에 올게.”서은채는 강태준을 바라보다 담담하게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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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비행기는 제경을 뒤로한 채 하늘을 가로질러 먼 타국으로 향했다.거대한 제경에서 평범한 가족 세 식구가 사라진다고 해서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터였다.같은 시각, 강태준은 이소희를 품에 안은 채 함께 영화를 보고 있었다.그런데 문득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마치 아주 소중한 무언가를 이 순간 영영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강태준이 넋을 놓고 있자, 이소희가 고개를 들어 물었다.“왜 그래?”“아니야. 그냥 기분 탓인가 봐.”강태준은 고개를 저으며 옅게 웃고는 이소희를 품에 더욱 깊이 끌어안았다.“흥! 나랑 같이 있으면서 딴생각이나 하고. 혼나야겠네!”이소희는 장난스럽게 강태준의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혔다. 한참을 혼자 신나게 장난치던 이소희는 결국 제풀에 지쳐 멈췄다.“뭐야? 왜 간지럼을 하나도 안 타?”강태준이 어색하게 웃었다.“이걸로는 안 되겠는데? 다른 방법으로 혼내줘.”강태준은 그대로 이소희를 번쩍 안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고 한동안 장난을 치며 웃었다.그러다 어느 순간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자연스럽게 가까워진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고 방 안에는 금세 뜨거운 열기가 감돌았다.그렇게 두 사람은 사흘 내내 붙어 지냈다.하지만 처음에는 이소희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던 강태준도 시간이 지나자 차츰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이소희는 강태준의 관심을 붙잡기 위해 온갖 새로운 시도를 했지만, 강태준의 시선은 자꾸만 다른 곳을 향했다.문제는 함께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었다.강태준은 이소희라는 사람 자체에 조금씩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계속 곁에 붙어 지내다 보니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무엇보다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서은채가 신경 쓰였다.서은채는 꽤 오랫동안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강태준이 곁에 없는 동안 방해하지 말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지키기라도 하듯, 전화 한 통은커녕 메시지 하나조차 보내지 않았다.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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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강태준은 눈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듣고 보니 이소희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어쩌면 정말 내가 안달 나서 먼저 찾아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강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불안한 마음을 인정하기 싫어서인지 오히려 짜증만 더욱 치밀었다.‘대체 언제까지 이럴 생각이야? 사람 애태우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얌전히 강태준의 말을 따르는 이소희와 달리 서은채는 언제나 제멋대로였다.‘그래, 나도 신경 안 써. 언제까지 버티나 두고 보지.’강태준은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불안과 분노를 억누르며 다시 이소희를 품에 끌어안았다.이소희는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얇은 레이스 잠옷을 입은 채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소희는 강태준의 어깨에 두 팔을 두르고 입을 맞췄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지만 강태준은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강태준은 건성으로 입을 맞추다 이소희를 밀어냈다.곧바로 옷을 챙겨 입고 거울 앞에서 흐트러진 옷매무새까지 정돈한 뒤 무심하게 말했다.“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 나 먼저 갈 테니까 푹 쉬어.”강태준은 이소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그대로 방을 나섰다.잠시 후 차가 저택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이소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쿠션을 몇 번이나 세게 내리쳤다.“서은채, 진짜 지독하네! 어떻게든 신경 쓰이게 하겠다는 거지?”이소희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그래도 태준 씨는 절대 너한테 안 뺏겨.”강태준은 정말 회사로 향했다.그 뒤로도 서은채가 있는 저택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이틀 동안 줄곧 회사에 틀어박혀 밀린 업무를 처리했지만, 강태준의 시선은 틈만 나면 책상 한쪽에 놓인 휴대전화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강태준은 곧바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지만,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은 이소희였다.순간 짜증이 치밀어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이소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전화를 걸었다.휴대전화 화면이 몇 번이고 울렸지만 강태준이 기다리는 이름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서은채는 메시지 한 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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