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Kabanata 101 - Kabanata 110

178 Kabanata

101화. 지팡이 없는 걸음

새벽, 예령이 회랑으로 나섰을 때 무겸은 이미 채비를 마치고 서 있었다.검은 관복에 허리띠를 단단히 맨 차림이었다. 곧게 편 어깨 아래로 옷자락이 흔들림 없이 떨어졌다. 늘 곁에 있던 것이 보이지 않았다. 지팡이는 그의 손에 들려 있지 않고, 품에 안긴 채였다.그가 그것을 그녀에게 내밀었다.“맡아 주시오.”예령은 지팡이를 받아 들었다. 보기보다 묵직했다. 오래 쥐어 온 손잡이는 반들반들 닳아 있었고, 그 위에 검은 매가 날개를 펴고 있었다.삼 년 동안 그는 이 지팡이에 기대는 척하며 세상의 눈을 속여 왔다. 오늘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돌려받으실 날이 있습니까?”“없기를 바라오.”그는 그 말만 남기고 대문 쪽으로 걸어갔다. 지팡이 소리 없이. 마당을 쓸던 하인이 빗자루를 떨어뜨렸고, 물동이를 이고 가던 하녀가 그 자리에 굳었다. 예령은 그 등을 대문이 닫힐 때까지 보았다.전생의 그는 끝내 조정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었다. 다리를 다쳐 밀려난 장남. 그녀가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도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오늘, 그 기억이 처음으로 어긋나고 있었다.어젯밤 장부에 적은 한 줄이 떠올랐다.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싶다던 걸음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따라갈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였다. 조정은 여인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예령은 지팡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가, 곧 장호를 불렀다.“북방으로 갈 수레를 알아봐 주세요. 스무 대요. 곡식은 서씨 상단 창고에서 내고, 역참마다 말 먹일 여물까지 셈해 두세요. 진가상회에는 오늘 안으로 서신을 보내 주시고요. 열흘 뒤 황도를 떠나 보름 안에 닿겠다고요.”장호가 고개를 숙였다. 예령은 서실로 가 장부를 펼쳤다. 굶는 병사들에게 곡식을 대는 일이라면, 태성상단보다 한 걸음 먼저 움직여야 했다.그가 제 싸움을 하러 갔다면, 그녀도 제 일을 해야 했다.같은 시각, 황궁.아침 조회를 앞두고 대전 앞뜰에는 관리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진북후부 장남이 정북장군의 교지를 받았다는 소문이 벌써 돌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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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한 칸 위

무겸이 지팡이 없이 조정에 들었다는 소문은 반나절 만에 황도를 한 바퀴 돌았다.이튿날 아침, 예령이 서씨 상단에 들어서자 행수들의 얼굴이 전과 달랐다. 다리를 저는 큰공자에게 아가씨를 보냈다며 뒤에서 안타까워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 큰공자가 두 발로 걸어 대전에 들었고, 폐하께서 내리려던 병부의 자리까지 물렸다는 이야기가 돌자, 저마다 예령에게 허리를 한 번 더 굽혔다.예령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곧장 장부부터 펼쳤다. 급한 일이 따로 있었다.“황도 곡물 시세가 밤사이 두 할이나 올랐습니다.”늙은 행수 하나가 난감한 얼굴로 아뢰었다.“정북장군께서 북방으로 가신다는 소문이 돌자, 곡물상들이 일제로 값을 올렸습니다. 그중 가장 많이 사들인 곳이…….”“태성상단이겠지요.”행수가 고개를 숙였다. 예령은 장부를 넘겼다. 짐작한 일이었다. 황기문은 북방에서 곡식값을 세 배로 올렸다. 황도에서 곡식을 싣고 올라가려는 길목까지 막으려 드는 것은 당연했다.그때 곡물상 하나가 상단에 들어섰다. 서씨 상단과 오래 거래해 온 자였다. 황도 곡식 값이 어디까지 오르는지 보려고, 예령이 어제 행수를 시켜 값을 물어 두었던 곳이었다.“물으신 곡식 값 말입니다. 한 섬에 은자 두 냥 반은 받아야겠습니다. 요즘 같은 때에 이만하면 싼 편이지요.”예령은 그자를 올려다보았다. 엊그제까지 한 냥 반이던 곡식이었다.“고맙지만 황도 곡식은 필요 없습니다.”“예?”“서씨 상단의 남쪽 창고에서 곡식을 내어 운하로 올려 보내라 일러 두었습니다. 황도를 거치지 않고, 곧장 북쪽 나루로요. 어제 오후에 이미 배가 떠났습니다.”곡물상의 얼굴이 굳었다. 행수들 사이에서 누군가 헛웃음을 삼켰다.“그리고 이제부터 서씨 상단은 황도에서 곡식을 사지 않습니다. 파실 때 참고하시지요.”곡물상이 허둥지둥 물러갔다. 늙은 행수가 예령을 다시 보았다. 아버지가 북방 거래의 전권을 딸에게 넘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반신반의하던 얼굴이, 그제야 조금 풀렸다.예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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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화. 전별

열흘은 금방 지나갔다.떠나는 날 새벽, 황도 북문 밖 너른 공터에는 수레 스무 대가 두 줄로 늘어섰다. 곡식 포대와 약재 궤짝, 겨울옷을 실은 수레들 사이로 연화가 목록을 들고 바삐 오갔다. 그 곁에서 장호가 수레 바퀴 하나하나를 발로 차 보며 살폈다.“바퀴는 괜찮습니까?”“셋째 수레 축이 조금 헐거웠습니다. 방금 갈아 끼웠습니다.”장호의 대답은 늘 그렇듯 짧았다. 예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 살폈다면 믿어도 되었다.예령은 마지막 수레 앞에서 방 행수에게 받은 장부를 덮었다. 서문백 대부터 상단을 지켜 온 늙은 행수로, 유덕수가 쫓겨난 뒤로는 부행수의 일을 대신 맡고 있었다. 그녀가 북방에 가 있는 동안 황도의 상단은 그가 맡기로 했다.“북쪽 나루에서 운하 곡식과 만나는 날짜는 틀림없지요?”“예, 부인. 닷새 뒤 저녁입니다.”“하루라도 늦으면 곧바로 사람을 보내 주세요. 역참마다 말을 바꿔 두었습니다.”방 행수가 고개를 숙였다. 공터 건너편에서는 군사 삼백이 열을 맞추고 있었다. 맨 앞에 흉터 난 얼굴의 위량이 말 위에 올라 있었다.무겸이 그 앞에 섰다.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의 다리로 향했다가, 곧 얼굴로 올라갔다.“북방에서 굶고 있는 자들은 너희의 형제다. 곡식을 싣고 가는 길이니, 한 섬도 흘리지 마라.”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삼백의 등이 일제히 곧게 펴졌다.“예령아.”돌아보니 서문백이 서 있었다. 새벽바람이 찬데도 북문까지 직접 나온 차림이었다. 손에는 두툼한 털 망토가 들려 있었다.“아버지, 이 새벽에 어떻게…….”“북방 바람은 황도와 다르다. 내가 젊을 적 북방 장사 길에 두르던 것이다. 손봐 두었다.”서문백이 망토를 딸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오래된 여우 털에서 햇볕 냄새가 났다. 예령은 목이 메어 대답 대신 망토 깃을 여몄다. 아버지의 손등에 새로 돋은 검버섯이 눈에 들어왔다.“봄이 오기 전에 돌아오겠습니다. 거래처도, 사람들도 찾아서요.”“서두르지 마라. 사람부터 얻으라 하지 않았느냐.”서문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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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젖은 포대

황도를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밤, 뒤를 살피러 되짚어 갔던 위량이 돌아왔다.“따라오는 자가 있소.”그가 지나온 길 쪽을 가리켰다. 행렬이 지난 뒤에 찍힌 말발굽 자국 넷이, 길가 마른 풀밭을 따라 이어지다가 능선 아래로 꺾여 있었다고 했다. 흙이 아직 무르고 자국이 선명한 새것이었다.“어제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간격이었소. 우리 속도에 맞춰 뒤를 밟고 있다는 뜻이오.”무겸은 오래 보지 않았다.“잡으려 들면 흩어진다. 그냥 둬라. 대신 보초를 두 배로 세워라.”“쫓아내면 다음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라붙는다. 지금은 저들이 어디쯤 있는지 아는 편이 낫다.”무겸이 덧붙였다. 위량이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그날 밤 막사 밖에는 횃불이 두 배로 늘었다.까닭을 묻는 예령에게 장호가 사실대로 전했다. 뒤를 밟는 기마가 넷이고, 이틀째라고.예령은 장부를 펼친 채 막사 천장에 어른거리는 불빛을 오래 보았다. 황도에서는 상단 앞 찻집에도, 저를 따르는 골목에도 낯선 눈이 있었다. 성문을 나서면 그만일 줄 알았는데, 그 눈은 길 위까지 따라와 있었다.일은 이튿날 새벽에 터졌다.“부인! 곡식 수레가…….”연화의 목소리에 예령은 신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뛰어나갔다. 행렬 뒤쪽, 여덟째와 아홉째 수레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포대가 젖어 있었다. 한 수레에 실린 것 전부였다.예령은 포대 하나를 풀어 곡식을 한 움큼 쥐었다. 축축했다. 손가락 사이에서 알이 뭉개졌다. 하루만 더 두면 열이 오르고, 사흘이면 전부 썩어 버릴 것이었다.“밤새 비는 오지 않았습니다.”장호가 낮게 말했다. 예령도 알고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옆 수레의 포대는 멀쩡했다.예령은 수레 덮개를 묶은 끈부터 살폈다. 서씨 상단의 인부들은 덮개 끈을 두 번 감아 안쪽으로 밀어 넣는다. 아버지 대부터 지켜 온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수레의 끈은 겉으로 한 번 묶여 있었다.그녀는 젖은 자리를 손끝으로 훑었다. 물은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스며들어 있었다. 누군가 수레 밑으로 물을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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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관문

이튿날 새벽, 예령은 말에 올랐다. 마차로는 반나절이 더 걸렸다.“말은 탈 줄 아시오?”“아버지를 따라 강남 창고를 돌 때 배웠습니다. 잘 타지는 못합니다.”“잘 탈 것까지는 없소. 떨어지지만 마시오.”무겸은 그렇게만 말하고 제 말의 걸음을 그녀에게 맞췄다. 행렬은 나루에 두고, 군사 백만 데리고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는 길에 예령은 한 가지를 청했다. 관문에서 곡식을 군량으로 사 달라는 것이었다. 값은 원가로 치면 된다고 했다.무겸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곧 그 뜻을 알아들었다. 교지에는 변경의 군을 수습하고 군량의 흐름을 바로잡으라 적혀 있었다. 군량을 사들이는 것은 정북장군의 직분 안에 있었다.“인수증은 내가 쓰겠소.”반나절 만에 관문이 나타났다.물길 양쪽에 말뚝을 박고 쇠사슬을 걸어 둔 곳이었다. 사슬 너머 강 한쪽에 곡식 배 열두 척이 발이 묶인 채 떠 있었다. 뱃전마다 서씨 상단의 물표가 붙어 있었다.예령은 말에서 내리며 강물을 보았다. 가장자리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닷새, 길어야 이레. 그 안에 풀지 못하면 배는 봄까지 못 움직인다고 사공이 말했다.관문 초소에서 수문장이 나왔다. 병부 소속의 무관이었다. 그는 무겸을 보고 멈칫하더니 곧 허리를 숙였다.“정북장군께서 어인 일이십니까.”“저 배들을 풀어라.”“……고발이 들어온 배들입니다. 밀수 곡식이 섞였다기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황도 병부에 서찰을 올렸으니 회신이 오면…….”“그게 스무 날 아닙니까.”예령이 말을 잘랐다. 수문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스무 날이면 강은 얼어붙는다. 그 스무 날을 벌려고 고발한 것이었다.초소 안에서 사내 하나가 어슬렁 걸어 나왔다. 황도의 태성상단 거래소에서 이름 밝히기를 마다하던 그 서기였다.“부인, 또 뵙습니다. 저희는 상인 된 도리로 사실을 고했을 뿐입니다. 고생스러우실 테니 곡식은 저희에게 넘기시지요. 한 섬에 한 냥이면 지금 셈해 드리겠습니다.”엊그제까지 황도에서 두 냥 반을 부르던 자들이었다.예령은 웃지 않았다.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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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소금 자루

서기의 손이 멈춘 것은 잠깐이었다.“……여기까지 하지요. 열한 척이 깨끗했으니 나머지도 뻔할 겁니다.”“마저 하십시오.”예령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러나 강둑에 선 병사들까지 들릴 만큼 또렷했다.“장부에 열두 척이라 적었습니다. 한 척이라도 남기면 검사는 끝난 것이 아니지요.”서기의 턱이 굳었다. 그는 다시 갈고리를 들었다. 포대 두 개를 헤집던 손이 곧 멈췄고,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무언가를 끌어올렸다.거친 삼베로 싼 자루였다. 자루 입구가 풀리자 굵은 소금 알갱이가 갑판 위로 쏟아졌다.“보십시오!”서기가 소리쳤다. 목소리에 안도가 묻어 있었다.“밀수입니다. 서씨 상단의 배에서 나왔습니다. 관문의 판단이 옳았습니다.”수문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병사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림이 일었다.예령은 놀라지 않았다.관문에 닿자마자 장호를 시켜 사공들에게 물어 두었다. 배가 묶여 있던 사흘 동안 누가 배에 올랐는지. 곡식을 지키는 일에서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유덕수의 일로 배운 것이었다.예령은 갑판으로 내려섰다. 그리고 쏟아진 소금이 아니라, 소금을 싸고 있던 삼베부터 집어 들었다.“수문장께서도 보시지요.”그녀가 삼베 자락을 펼쳐 불빛에 비췄다. 천 귀퉁이에 먹으로 찍힌 표식이 반쯤 남아 있었다.“이건 관문 창고의 삼베입니다. 관인 자국이 남아 있군요.”수문장의 눈이 커졌다.“그리고 자루 입구를 묶은 매듭을 보십시오. 겉으로 한 번 감아 매듭을 지었습니다. 서씨 상단은 포대든 자루든 두 번 감아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아버지 대부터 지켜 온 방식입니다. 황도 나루에서 배에 싣는 짐치고, 이 매듭으로 묶인 것은 한 자루도 없습니다.”예령은 갑판 아래 사공들을 돌아보았다.“배가 붙잡혀 있던 사흘 동안, 이 배에 오른 사람이 있었습니까?”늙은 사공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둘째 날 밤에…… 관문 병졸 둘이 짐을 살핀다며 올랐습니다. 그때 낯선 사내 하나가 같이 있었습니다.”강바람만 지나갔다.“관문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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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방 하나

배는 이튿날 아침 북쪽 나루에 닿았다.곡식 포대가 수레로 옮겨지는 동안 병사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젖어서 버린 절반을 메우고도 남는 양이었다. 군량을 맡은 병사가 포대 수를 세다 말고 예령에게 허리를 숙였다.“장군께서 사들이셨다 들었습니다. 그래도…… 고맙습니다, 부인.”값은 원가로 받았고 장부에도 그렇게 적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인사가 은자보다 무겁게 남았다.예령은 인수 문서를 두 장 만들어 한 장은 곽진에게, 한 장은 제 장부에 끼웠다.행렬은 그날 오후에 다시 북으로 움직였다.저녁 무렵, 위량이 지도를 들고 무겸의 막사로 들어왔다. 예령도 불려 갔다.“여기서 길이 둘로 갈리오.”위량이 굵은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었다.“서쪽으로 돌면 안전하오. 다만 닷새가 더 걸리오. 동쪽 고갯길로 들면 이틀이 줄고.”동쪽 고갯길. 예령의 시선이 그 자리에 멈췄다. 서씨 상단의 수레만 남고 사람 셋이 사라진 곳이었다.“닷새를 더 쓰면 어찌 되지.”무겸이 물었다.“변경 초소들은 열흘 치 양식도 남지 않았다 하오. 닷새를 더 쓰면 그 안에 바닥이 나오. 그 사이 울란이 내려오면, 굶은 병사들로는 막지 못하오.”막사 안이 조용해졌다.“고갯길로 간다.”무겸이 말했다. 위량은 놀라지 않았다. 예령도 마찬가지였다. 관문에서 따라붙던 기마 넷이 북쪽으로 먼저 갔다는 것을 셋 다 알고 있었다.“저들도 우리가 고갯길로 들 거라고 볼 겁니다.”예령이 말했다.“그래서 드는 거요.”무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피해 가면 다음 고갯길에서 또 만나야 하오. 저들이 고른 자리에서 또. 그럴 바에는 이쪽이 고른 날에 마주하는 편이 낫소.”그는 지도 위의 골짜기를 짚었다.“위량, 오늘 밤 안으로 길 양쪽 능선을 훑어라. 숨을 만한 자리부터.”“알겠소.”예령은 지도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수레는 제가 맡겠습니다. 곡식 수레를 뒤로 물리고, 앞쪽에는 빈 수레에 덮개만 씌워 보내지요. 저들이 노리는 것이 곡식이라면, 먼저 덮치는 쪽이 빈 수레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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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고갯길

동이 트기 전, 무겸은 군사 삼백을 셋으로 나눴다.백은 위량을 따라 어둠 속에서 서쪽 능선을 타고 올라갔다. 또 백은 반대쪽 동쪽 능선으로. 남은 백만 길 위에 남았다. 수레와 함께 고갯길로 들어갈 인원이었다.“두 갈래는 골짜기 안쪽까지 올라가 능선 꼭대기에 엎드려라.”무겸이 낮게 말했다.“놈들은 중턱에 자리를 잡고 길만 내려다볼 것이다. 너희는 그보다 위에 있다가, 뿔피리가 울리면 등 뒤에서 덮쳐라.”병사들이 흩어졌다. 예령은 수레 행렬 가운데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앞쪽에는 짚단과 돌을 채운 빈 수레 여섯 대가 덮개를 덮은 채 서 있었다. 진짜 곡식 수레는 뒤쪽, 병사들 사이에 끼워 두었다.“부인께서는 여기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마십시오.”장호가 말했다. 예령은 고개를 끄덕였다.출발 직전, 무겸이 수레 곁으로 말을 몰아 왔다.“싸움이 시작되면 수레 사이로 몸을 낮추시오. 오늘은 내가 불러도 오지 마시오.”“혼례날에는 오라 하셨는데요.”“그날은 마당이었고, 오늘은 골짜기요.”해가 능선 위로 반쯤 올라올 무렵, 행렬이 고갯길로 들어섰다.골짜기는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새소리가 없었다. 예령의 등줄기로 서늘한 것이 지나갔다. 그 순간이었다.“막아라!”앞쪽에서 고함이 터졌다. 능선 위에서 바위 두 개가 굴러떨어졌다. 뒤이어 화살이 쏟아졌다. 빈 수레의 덮개가 찢어지며 짚단이 흩어졌다.“곡식이 없다!”능선 위에서 누군가 외쳤다. 당황한 목소리였다. 바로 그 소리가 신호가 되었다.화살 하나가 예령의 머리 위를 지나 수레 덮개에 박혔다. 장호가 그녀를 수레 사이로 밀어 넣으며 팔을 들었다. 소매가 찢어지고 붉은 것이 번졌다.“장호!”“스친 겁니다. 고개 숙이십시오.”그 순간, 무겸의 손이 올라갔다. 뿔피리가 길게 울렸다.골짜기 양쪽 능선 위쪽에서 함성이 터졌다. 밤새 올라가 숨어 있던 이백이 위에서 아래로 쏟아져 내려왔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활을 겨누던 자들이 뒤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그리고 무겸이 말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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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화. 소금에 튼 손

부상자를 싣고 수레 바퀴를 손보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그래도 무겸은 행렬을 세워 두지 않았다. 닷새를 아끼려고 고른 길이었으니, 반나절도 그냥 흘릴 수 없었다.포로 열하나는 손을 묶어 빈 수레에 태웠다. 행렬은 그날 오후에 다시 북으로 움직였다.심문은 저녁 야영지에서 이뤄졌다. 포로들은 수레를 둥글게 세운 안쪽, 천막 하나에 몰아넣고 병사 넷이 지켰다.무겸이 먼저 물었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매듭을 찬 사내는 이름조차 대지 않았고, 나머지도 입을 맞춘 듯 같은 말만 했다. 지나가던 도적이라고.“고문할까요.”곽진이 물었다. 무겸은 고개를 저었다.“입을 열 자였으면 벌써 열었다. 저자는 제 목숨보다 무서운 것이 있는 자다.”해가 다 지도록 천막의 횃불은 꺼지지 않았다.“부인께서는 먼저 쉬시오.”천막 앞을 지나던 예령에게 무겸이 말했다. 예령은 대답 대신 병사들이 솥을 걸어 둔 화덕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국이 남았습니까?”“예? 아, 예. 한 솥 남았습니다만…….”취사병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국을 떴다.“포로에게 주실 겁니까?”“열한 그릇은 아니고, 한 그릇만요.”예령은 천막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횃불 아래 포로들의 얼굴이 하나씩 드러났다.그녀가 보는 것은 얼굴이 아니었다. 손이었다.곡식을 만지는 손과 소금을 만지는 손은 다르다. 곡식 먼지는 손등을 거칠게만 하지만, 소금은 살갗을 파고들어 허옇게 튼 자국을 남긴다. 아버지를 따라 창고를 돌던 시절에 배운 것이었다.열한 쌍의 손 가운데 여섯이 같았다. 손등이 허옇게 트고, 손톱 밑이 갈라져 있었다. 소금기에 오래 절인 손이었다.관문에서 잡힌 병졸의 팔뚝에서 본 것과 같은 자국이었다. 관문 창고의 소금 자루를 꺼내 쓰던 손과, 이 골짜기에서 곡식 수레를 덮친 손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예령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무겸이 뒤따랐다.그녀는 열한 명을 지나 끝자리에 앉은 사내 앞에 멈췄다. 고갯길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던 젊은 자였다. 아직 스물이나 되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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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언덕 위의 창고

그 밤, 예령은 잠들지 못했다. 천막 밖으로 나가자 화롯불 앞에 무겸이 앉아 있었다. 무릎에 칼을 올려놓고 날을 고르는 중이었다. 잠든 병사들 사이에서 그 혼자 깨어 있었다.“무섭지 않소?”무겸이 물었다.“무섭습니다.”예령은 숨기지 않았다. 무겸이 칼을 내려놓고 그녀를 보았다.“그럼 되었소. 무섭지 않다는 자가 더 위험하오.”“장군께서도 무서우셨던 적이 있습니까.”“매번.”무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골짜기에 들어설 때마다 무서웠소. 무섭지 않았던 날은 삼 년 전 그날뿐이었지. 그날은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까.”예령은 화로의 불을 보았다. 그 골짜기에서 그는 다리를 잃을 뻔했다.그가 화로 옆자리를 눈짓했다. 예령은 잠시 망설이다 앉았다. 불빛이 두 사람 사이에서 조용히 흔들렸다. 멀리 초소 쪽에서 보초의 발소리가 규칙적으로 오갔다.무겸이 겉옷을 벗어 그녀의 무릎에 덮어 주었다.“공자님은요?”“불 곁이라 춥지 않소.”“그럼 제가 불 곁에 앉겠습니다. 겉옷은 도로 가져가시지요.”무겸이 잠깐 말이 없었다.“……그대가 잠들면 가져가겠소.”예령은 대꾸하지 못했다. 잠들 때까지는 돌려받지 않겠다는 말이었다.한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화로 안에서 숯이 삭는 소리만 났다.“내일 그자가 문을 열지 않으면 어찌합니까.”“열 거요. 저쪽도 그대가 무엇을 아는지 알고 싶을 테니.”“그럼 저도 알고 싶은 것을 묻겠습니다.”무겸이 그녀를 보았다. 말리려다 그만두는 얼굴이었다.예령이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데, 하늘이 이미 희어져 있었다.그리고 뺨 아래가 단단했다.예령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겸의 어깨였다. 겉옷은 도로 가져가지 않은 채 무릎에 덮여 있었고, 화로에는 밤새 누군가 넣어 준 숯이 붉었다.무겸은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굳어 있는 한쪽 어깨가, 밤새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뜻이었다.“깨우시지 그러셨습니까.”“깨울 까닭이 없었소.”예령은 무릎의 겉옷을 접어 그에게 돌려주었다. 그가 받아 드는 동안, 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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