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Chapter 81 - Chapter 90

178 Chapters

81화. 그날의 매듭

예령은 소매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어제 장호가 본 매듭을 옮겨 그린 겁니다.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무겸이 종이를 펼쳤다. 검은 끈 세 가닥 사이로 붉은 실 한 가닥이 꼬여 든 모양이었다.그의 턱선이 굳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예령은 놓치지 않았다.“오늘 밤 확인할 사람이 있소.”“북방에서 올라오신 분 말씀이군요.”무겸이 그녀를 보았다.“연화가 들은 이야기가 제 귀에도 들어왔습니다. 그렇다고 묻겠다는 건 아닙니다.”예령은 한 발 물러섰다.“다만 공자님도 조심하십시오. 그 원외랑이 공자님을 북방으로 보내려 한다면, 좋은 뜻은 아닐 테니까요.”“알고 있소.”무겸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돌아갈 때는 장호 말고 곽진도 붙일 거요.”어제 장호를 떼어 놓았다고 적어 보낸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탓하는 기색은 없었다. 예령은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사랑채를 나서며 그녀는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곁방에 홀로 남은 무겸은 지팡이를 짚은 채, 품에서 다시 꺼낸 매듭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그날 밤, 별채 뒤 작은 방에는 등잔 하나만 켜져 있었다.황도에 올라와 스스로를 노삼이라 소개한 사내는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골짜기에서 시신들 틈에 사흘을 엎드려 있다가 기어 나온 사람이었다.무겸이 탁자 위에 종이를 펼치자 사내가 몸을 앞으로 숙였다.사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빠져나갔다.“어디서 난 것이오?”“내 정혼자를 따라다닌 자의 허리에서.”사내가 붉은 실이 지나간 자리를 손끝으로 되짚었다.“틀림없소. 그날 골짜기로 쏟아져 내려온 놈들이 전부 이걸 차고 있었소. 울란 땅의 붉은 뿌리로 물들인 실이라, 우리도 처음엔 울란 놈들인 줄만 알았지.”무겸은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위량.”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노삼이 아닌 제 이름을 누군가 부른 것은 삼 년 만이었다. 무겸의 부대에서 척후를 맡았던 시절의 이름이었다.무겸도 기억하고 있었다. 말에서 떨어져 흙바닥에 쓰러지던 순간, 눈앞을 스쳐 간 허리춤의 붉은 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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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빈 책장

곽진이 전한 말은 짧았다.할 이야기가 있다고. 길어질 거라고.예령은 마차 안에서 그 두 마디를 몇 번이나 되뇌었다. 무겸이 할 이야기가 있다며 그녀를 따로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성 동쪽 집 대문은 열려 있었다. 곽진이 먼저 안을 한 번 살피고 나오자, 장호가 대문 곁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거기까지만 따라왔다.예령 혼자 회랑을 따라 들어갔다.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혼례를 치르면 날마다 걷게 될 길이었다.안채 옆 서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예령은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낡은 책장 하나뿐이던 서실 벽에 새 책장이 들어서 있었다. 한쪽 벽을 다 채울 만큼 높고 넓었다. 칸마다 아무것도 없었다.창가에 서 있던 무겸이 돌아보았다.“왔소.”“이건…….”“책장은 더 들여야겠다고 하지 않았소.”그날 그가 지나가듯 한 말이었다. 예령은 잊고 있었다.“비어 있네요.”“채울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무겸이 책장 한 칸을 손끝으로 두드렸다.“장부든 뭐든, 그대 것으로.”예령은 대답 대신 책장 가까이 다가갔다. 새로 깎은 나무 냄새가 났다. 가장 자주 쓸 칸은 그녀의 손이 닿기 좋은 높이였고, 맨 위 칸 옆에는 작은 발판까지 놓여 있었다.“발판까지 두셨네요.”“연화가 그러더군. 그대는 중요한 장부일수록 남의 손이 쉽게 닿지 않게 한 칸 높이 올려 둔다고.”예령은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연화한테 물어보셨어요?”“서실을 쓸 사람의 버릇을 아는 게 먼저 아니오.”연화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언제 둘이 그런 말을 나눴는지, 예령만 몰랐던 모양이었다.누가 쓸지 알고 짠 책장이었다.괜히 목이 메는 것 같아 예령은 먼저 탁자 앞에 앉았다.“이야기가 길어질 거라고 하셨지요.”무겸이 맞은편에 앉았다. 지팡이를 탁자 옆에 기대 세우고, 한동안 말을 고르는 듯했다.“삼 년 전, 북방에서 내 부대는 군량 수레를 호송하고 있었소.”그는 담담하게 시작했다. 골짜기, 울란의 호복을 입은 자들, 불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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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외상

서실 안이 조용해졌다. 뒤뜰의 나뭇가지를 흔든 바람 소리가 창틀을 넘어왔다.무겸은 곧바로 손을 빼지 않았다.“삼 년 전보다는 낫소.”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대답이라기엔 너무 짧았고, 그 말을 하는 동안 맞잡은 손가락은 끝내 풀리지 않았다.예령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방금 손가락이 굳으셨어요.”무겸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그대는 장부만 들여다보는 줄 알았는데.”“장부는 숫자가 어긋나면 티가 나거든요. 사람도 비슷하고요.”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겸은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 낮게 말했다.“그 이야기는 지금 다 할 수 없소. 그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오.”무겸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병부의 사자는 이미 그의 다리를 떠보고 갔다. 그 비밀을 캐내려는 자들이 다음에 손을 뻗을 곳은 그의 곁에 선 사람이었다. 모르는 사람에게서는 빼앗을 것도 없었다. 차라리 무언가 감추는 사내로 보이는 편이 나았다.예령은 그의 얼굴을 한참 보았다.북방의 골짜기, 모래 실린 수레, 그를 노린 병부. 오늘 그는 그 무거운 것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내놓았다. 그런 사람이 이것 하나만 남겨 둔다면, 아직 내놓을 수 없는 까닭이 있을 것이었다.“그럼 외상으로 달아 두겠습니다.”“외상?”“상인은 믿을 만한 상대에게만 외상을 줍니다. 대신 장부에는 꼭 적어 두지요. 언젠가 받을 거니까요.”말해 놓고 보니 우스웠다. 전생에는 무천의 외상을 말 한마디 없이 갚아 주던 자신이었다. 그때와 다른 것은, 이번에는 스스로 외상을 주겠다고 정했다는 것이었다.무겸이 짧게 웃음을 흘렸다. 소리 없이 어깨만 조금 흔들리는 웃음이었다.“이자는 얼마요.”“그건 받을 때 정하겠습니다.”“무서운 상인이군.”예령은 머릿속 장부 한 귀퉁이에 적었다. 한무겸, 외상 하나. 기한은 적지 않았다.그제야 맞잡은 손가락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그래도 손을 놓지는 않았다.예령은 헛기침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그 누수 말입니다. 폐사에서 제가 드린 장부, 기억하십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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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첩은 없소

송 시랑이 후부를 찾아온 것은 별원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서였다.예령이 후부 대문 앞에 마차를 세우자, 무겸이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도포 차림에 훤칠한 키, 햇빛 아래서 더 희게 보이는 얼굴. 대문을 지키던 하인들까지 괜히 자세를 고쳐 서는 사람이었다.“기다리셨어요?”“같이 하기로 하지 않았소.”별원에서 그가 했던 말이었다. 예령은 대답 대신 그의 곁에 나란히 섰다. 사랑채까지 가는 동안 지팡이 소리와 그녀의 발소리가 같은 박자로 이어졌다.진북후는 사랑채 대청에 무겸과 예령을 함께 앉혔다. 혼례를 치르지 않은 며느릿감을 이런 자리에 들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번 일만큼은 예령도 당사자라는 것을, 진북후도 더는 모른 척하지 않았다.송 시랑은 들어서자마자 깊이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시선이 예령에게 잠깐 머물렀다. 소문으로만 듣던 서씨 상단의 딸은 생각보다 훨씬 고왔다. 희고 갸름한 얼굴에 길고 맑은 눈매. 꾸민 데가 없는데도 대청 안이 환해 보였다.“여식의 일로 면목이 없습니다.”그 뒤를 여진이 따랐다. 며칠 사이에 얼굴이 몰라보게 야위어 있었다. 여진은 자리에 앉기 전에 예령 쪽으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사과라기엔 짧았고, 인사라기엔 무거운 몸짓이었다.예령은 같은 깊이로만 고개를 숙여 답했다. 용서를 말할 자리는 아니었다.진북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자리에 앉으시오. 사과는 들었으니, 이제 어떻게 매듭지을지를 이야기합시다.”송 시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관아에 넘기실 생각이십니까?”예령도 그 대답이 궁금했다. 사람을 가두고 약을 먹인 일이었다. 상단 일이었다면 진작 관아에 고했을 것이다.진북후가 천천히 말했다.“관아에 고하면 이 일은 문서로 남고, 문서는 반드시 밖으로 새어 나가오. 혼례를 앞둔 신랑이 다른 여인과 한방에 갇혔다는 이야기가 온 황도에 퍼지겠지.”그가 송 시랑을 보았다.“그게 바로 그날 밤 무천이 바란 것이오. 날이 밝으면 사람들을 불러 모아 소문을 내는 것. 관아에 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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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가법

무천은 부름을 받고도 한참 뒤에야 사랑채에 나타났다.송 시랑과 여진은 이미 물러간 뒤였다. 대청에 남은 것은 진북후와 무겸, 그리고 예령뿐이었다.무천은 예령을 보고 잠깐 멈칫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진북후 앞에 섰다.“부르셨습니까, 아버지.”진북후는 대답 대신 종이 한 장을 바닥에 던졌다. 여진의 진술서였다.무천이 그것을 주워 읽었다. 첫 줄을 넘기기도 전에 그의 손끝이 멈췄다.“송 낭자가 쓴 겁니까?”“네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디서 했는지, 누구를 문 앞에 세우기로 했는지까지 적혀 있다.”무천이 천천히 종이를 내렸다. 얼굴에는 곧 서운하다는 듯한 웃음이 떠올랐다.“송 낭자는 형님을 오래 마음에 두었습니다. 일이 틀어지니 제게 덮어씌우는 거겠지요. 여인의 원망만 듣고 아들을 의심하시는 겁니까?”진북후의 눈썹이 꿈틀했다.말은 매끄러웠다. 붙잡힌 자는 무천의 사람이라 했지만 무천이 직접 시켰다는 증거는 없었고, 여진은 무천을 원망할 이유가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 틈을 파고드는 솜씨가 여전했다.예령이 입을 열었다.“후작께 한 가지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진북후가 고개를 끄덕였다.“별원 일이 있던 다음 날, 무천 공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무천의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그때 공자는 제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혼례를 앞둔 남자가 자신을 오래 마음에 둔 여인과 단둘이 밤을 보낼 뻔했는데 아무렇지 않으냐고.”예령은 담담하게 이었다.“그날 별원 일은 아무 데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송가와 후부에 소식을 넣으려던 자들은 모두 붙잡혔으니까요. 그런데 공자는 두 사람이 밤을 보낼 뻔했다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대청 안이 조용해졌다.“일이 어떻게 흘러가도록 짜 두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지요.”무천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예령, 너…….”“그날 공자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옮겼을 뿐입니다.”무천이 다급히 진북후를 돌아보았다.“아버지, 예령은 파혼 뒤로 저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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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예물함

진북후부의 예물함이 서씨 집 대문을 넘은 것은 사흘 뒤였다.붉은 보자기로 싼 함이 하나둘 마당에 내려질 때마다 구경하던 이웃들이 수군거렸다. 함을 지고 온 행렬 맨 앞에 선 사람 때문이었다.“저분이 후부 큰공자님이래.”“다리를 다쳤다더니, 지팡이를 짚어도 풍채가 저리 좋을 수가.”검은 도포 자락이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햇빛 아래 드러난 옆얼굴은 희고 반듯했고, 곧게 선 어깨는 행렬의 누구보다 넓었다. 하녀들이 물동이를 든 채 멈춰 서서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서문백이 대청 앞까지 나와 그를 맞았다. 무겸이 허리를 숙이자 서문백은 한참 그를 바라보았다.딸의 입에서 이 사내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날, 서문백은 그것을 믿지 않으려 했다. 무천과의 혼담이 정리되기 전까지는 없는 말로 여기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내가 예물함을 앞세우고 제 집 마당에 서 있었다.“들어오게.”서문백의 목소리는 전보다 한결 부드러웠다.그 시각, 예령은 안채 깊숙한 방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침방에서 온 여인이 그녀의 허리에 마지막 매듭을 짓고 있었다.“숨 한 번만 참으세요, 아가씨.”짙은 붉은 비단이 몸을 감쌌다. 비단 가게에서 무겸이 그녀의 어깨에 대 보며 골라 준 빛깔이었다. 너무 어둡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는 아니라고,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내가 볼 것이잖소’라고. 소매 끝과 옷깃에는 금실로 수놓은 꽃이 이어져 있었다.연화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가 입을 막았다.“세상에…….”침방 여인도 바늘을 쥔 채 한참 말이 없었다. 희고 갸름한 얼굴이 붉은빛을 받아 한결 환해 보였고, 길고 맑은 눈매 끝이 비단 빛에 물들어 있었다.“이 옷을 입고 서시면, 신랑 되실 분이 걸음을 못 떼실 겁니다.”예령은 거울 속 자신을 오래 들여다보았다.전생에도 붉은 혼례복을 입었다. 그 옷을 입고 맞은 첫날밤, 무천은 내상을 핑계로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번 생에 무천이 몰래 지어 둔 혼례복은 지하의 신방에서 불길 속에 사라졌다.그리고 지금 입은 이 옷은, 처음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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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검은 매의 인장

서쪽 상단에 가기로 한 날 아침, 무겸이 상단에 들렀다.그는 예령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탁자 위에 두툼한 어음 묶음과 작은 비단 주머니 하나를 내려놓았다.“가져가시오.”예령이 주머니를 열었다. 손바닥만 한 인장이 굴러 나왔다. 검은 돌에 날개를 편 매가 새겨져 있었다. 그가 보낸 서신마다 봉인에 찍혀 있던 바로 그 문양이었다.예령의 손끝이 멈췄다.“이건 공자님 인장이잖아요.”“빚은 진북후부의 것이고, 나는 그 집의 장자요. 갚는 것도 내 이름으로 해야지.”무겸이 어음 묶음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 삼 년 동안 곽진을 통해 조용히 불려 온 그의 몫이었다.“폐사에서 막아 주겠다 한 건 제 쪽이었는데요.”“그래서 절반만 가져왔소. 나머지는 그대가 맡으시오.”예령은 어음을 셈해 보고 고개를 들었다.“나머지는 약속대로 제가 내겠습니다.”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말하시오.”“북쪽 농지에 창고 지을 땅을 조금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북방 거래를 하려면 물건 둘 곳이 필요해서요.”무겸의 입가가 희미하게 풀렸다.“빌려 달라니. 그대 돈이 반이나 들어간 땅이오. 필요한 만큼 쓰시오.”그제야 예령은 비단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인장을 쉽게 집어 들 수는 없었다.전생에 그녀는 무천에게 상단의 인장을 내주었다. 무천은 그 인장으로 금지된 물건을 거래했고, 모든 죄를 서씨 가문에 뒤집어씌웠다. 인장 하나가 아버지를 끌고 갔고, 상단을 통째로 삼켰다.사람의 이름을 대신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함부로 맡기지 않는 물건이었다.“이걸 제게 맡기셔도 됩니까?”“맡기는 게 아니오.”무겸이 그녀를 보았다.“같이 쓰는 거지.”예령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번 인장에 속아 모든 것을 잃은 사람에게, 그는 제 인장을 아무렇지 않게 내밀고 있었다.그녀는 인장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돌은 차가웠는데 손바닥은 이상하게 따뜻해졌다.“잃어버리면 어쩌시려고요.”“그대는 중요한 것일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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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주인 없는 거래소

서쪽 상단을 나서자마자 예령은 곽진의 사람 하나를 불렀다.“큰공자님께 전해 주세요. 증서는 태성상단에 있고, 지금 그리로 간다고요.”사내가 말을 달려 떠나는 것을 보고서야 그녀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혼자 움직이지 말라던 말을 어기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어디로 가는지는 알렸으니까.태성상단의 황도 거래소는 서문에서 멀지 않았다.며칠 전 장호가 매듭 찬 사내를 따라왔던 그 건물이었다. 앞문은 멀쩡한 상점처럼 번듯했다. 비단 휘장 너머로 저울과 장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예령이 안으로 들어서자 일하던 사람들의 손이 하나둘 멈췄다.“서씨 상단 아가씨라더니…….”“소문보다 훨씬 고우시네.”낮은 수군거림이 휘장 사이로 번졌다. 옅은 푸른빛 옷에 머리를 단정히 올린 차림이었다. 꾸민 데 없는 흰 얼굴에 길고 맑은 눈매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기에 충분했다.예령은 그 시선들을 개의치 않고 곧장 계산대로 향했다.“진북후부의 빚 증서를 이곳에서 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기한 몫을 갚으러 왔어요.”계산대의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이가 지긋한 서기였다. 그는 예령의 얼굴과 옷차림을 천천히 훑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아가씨께서 직접 빚 셈을 하러 오셨습니까. 혼례를 앞두신 분이 이런 험한 일까지.”“험한 일일수록 제가 직접 하는 게 확실하거든요. 남의 손을 거치면 숫자가 자꾸 틀어져서요.”서기의 입가가 씰룩였다. 유덕수의 일은 황도 상인들 사이에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증서라면 저희 상단주께서 직접 보관하고 계십니다.”“그럼 상단주를 뵙지요.”“공교롭게도 어제 북방으로 떠나셨습니다. 나흘 뒤에나 돌아오실 겁니다.”“북방 어디로 가셨는지는요?”“그것까지는 저도…….”서기가 말끝을 흐리며 슬그머니 장부를 덮었다.나흘 뒤. 빚 기한은 사흘 뒤였다.예령은 웃음이 날 뻔했다. 너무 뻔해서였다.그리고 그제야 황기문이 노리는 게 무엇인지 보였다. 북쪽 농지와 병기 창고. 북방으로 가는 길목에 거점을 박아 두려는 것이다. 오늘 아침 그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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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회관의 장부

상단 연합의 회관은 늦은 오후에도 사람이 붐볐다.예령이 들어서자 몇몇 상단주가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금원상단의 인장이 가짜로 쓰였다는 것이 이 자리에서 밝혀진 뒤로, 황도 상인들 사이에서 서씨 상단의 딸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그날 예령은 목에 상처를 드러낸 채 이 회관 앞에 섰다. 밀회라는 소문을 스스로 뒤집으러 온 날이었다. 오늘은 빚 증서 한 장을 뒤집으러 왔다.예령은 곧장 회관의 장부를 맡은 서기와 감정인을 찾았다.“빚을 갚으러 왔습니다. 그런데 받을 사람이 몸을 숨겨서요.”그녀는 소매에서 접어 둔 종이를 꺼냈다. 태성상단 거래소에서 적어 온 확인서였다. 날짜와 시각, 갚으러 간 액수, 그리고 이름 밝히기를 마다한 서기까지.감정인이 종이를 읽어 내려가다가 헛웃음을 흘렸다.“기한 사흘 전에 주인이 북방으로 떠났다라. 오래된 수법이군요.”“그래서 이곳에 돈을 맡기려 합니다. 기한 안에 갚으려 했고, 받을 쪽이 받지 않았다는 것을 회관 장부에 남겨 주세요.”회관에 돈을 맡겨 두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빚쟁이가 몸을 숨기거나 트집을 잡을 때, 상인들은 이곳 장부에 갚은 날을 적어 두었다. 한 번 적힌 날짜는 누구도 뒤집지 못했다.다만 회관의 서기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빚진 쪽은 진북후부로군요. 아가씨께서 대신 갚으시는 거라면, 진북후부 사람의 확인이 있어야 합니다.”예령은 품에서 인장을 꺼냈다. 검은 매가 날개를 편 문양을 보고 서기가 멈칫했다.“장자의 인장이군요. 하지만 이만한 액수에 태성상단까지 걸린 일이면, 인장만으로는…….”감정인이 인장을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진북후부 장자의 문양은 맞습니다. 다만 이 인장이 거래 장부에 찍힌 적은 한 번도 없어서요.”그래도 서기는 선뜻 붓을 들지 않았다. 말끝을 흐리는 뜻을 예령은 알았다. 인장은 훔칠 수도 있는 물건이었다. 이 황도에서 그것을 가장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 그녀였다.그때 회관 입구 쪽이 웅성거렸다.사람들이 양쪽으로 길을 텄다. 지팡이 끝이 바닥을 짚는 소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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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나란히 놓인 서신

혼례를 닷새 앞두고, 서씨 집의 혼수가 성 동쪽 집으로 옮겨졌다.수레 여섯 대가 대문 앞에 줄지어 섰다. 일꾼들이 궤짝을 하나씩 내릴 때마다 연화가 목록을 들고 쫓아다녔다.전생에도 혼수 수레가 있었다. 그 수레는 진북후부 안채로 들어갔고, 조씨는 궤짝을 열 때마다 제 것인 양 물건을 골라 갔다. 이번 혼수는 누구의 곳간도 아닌, 그녀가 살 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그건 안채가 아니라 서실로 가야 합니다! 장부 궤짝이라 적혀 있지 않습니까.”장호가 말없이 궤짝을 들어 서실 쪽으로 옮겼다. 연화가 그 뒤를 따라가며 한마디를 보탰다.“모서리 조심하셔요. 아가씨께서 가장 아끼시는 것이랍니다.”“알고 있습니다.”“아시면서 어찌 그리 성큼성큼 걸으십니까.”장호가 걸음을 늦췄다. 연화가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했다.“이제는 또 너무 느리지 않습니까.”장호가 잠시 멈춰 서서 연화를 돌아보았다. 대꾸할 말을 찾는 얼굴이었다. 결국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예령은 회랑에 서서 그 모습을 보다가 웃음을 삼켰다. 둘이 저렇게 말을 많이 섞는 것은 처음 보았다.안채 마당에는 무겸이 먼저 와 있었다.소매를 걷어 올린 채 일꾼들에게 자리를 일러 주는 중이었다. 늘 단정히 여미던 옷깃이 오늘은 조금 풀어져 있었고,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단단한 팔이 드러났다. 햇빛이 곧은 콧날과 매끈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렸다.짐을 나르던 일꾼 하나가 옆 사람에게 속삭였다.“저분이 큰공자님이라고? 다리가 불편하시다더니 저리 훤칠하실 줄이야.”“쉿, 들리겠네.”예령도 모르게 그의 걸음을 눈으로 좇았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데도, 오늘따라 그 걸음이 유난히 곧아 보였다.무겸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다만 예령과 눈이 마주치자, 지팡이를 짚은 채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공자님의 짐은 언제 들어옵니까?”“내 짐은 적소. 책 몇 권에 옷 몇 벌이면 되지.”“그러면 방이 너무 쓸쓸하겠습니다.”“회랑 건너편이 이렇게 가득 차면, 내 방이 좀 비어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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