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를 사흘 앞둔 밤, 서문백이 예령의 방을 찾았다.혼수가 모두 빠져나간 방은 낯설 만큼 넓었다. 벽에 걸려 있던 족자도, 창가의 서안도 성 동쪽 집으로 옮겨진 뒤였다. 남은 것은 이부자리와 작은 등잔 하나뿐이었다.서문백은 문턱에 선 채 한동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뒤따라온 연화가 찻상을 내려놓고 조용히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방 안에는 부녀 둘만 남았다.“이렇게 휑한 줄 몰랐구나.”“내일이면 더 휑해질 겁니다. 이부자리도 마저 보내야 하니까요.”예령이 웃으며 방석을 내밀었다. 서문백은 앉지 않고, 품에서 두툼한 문서 한 묶음을 꺼냈다.“받거라.”예령은 문서를 펼쳤다. 첫 장에 적힌 글자를 읽는 순간, 손끝이 멈췄다.북방 거래에 관한 모든 결정을 서예령에게 맡긴다. 거래처를 고르고, 값을 정하고, 사람을 부리는 일까지.맨 아래에는 서씨 상단주의 인장이 붉게 찍혀 있었다.전생의 그녀는 상단의 장부를 무천에게 넘겼다. 아버지가 평생 일군 것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남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런 딸에게 아버지가 이번에는 그것을 제 손으로 건네고 있었다.“아버지, 이건…….”“유덕수가 팔아넘긴 거래처를 다시 찾겠다고 한 게 너였다. 태성상단이 협박해 왔을 때 물러서지 않은 것도 너였고.”서문백이 짧게 헛기침을 했다.“회관에서 소문이 파다하더구나. 진북후부 큰공자가 네 손을 잡고 인장을 찍었다고.”예령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그건 그런 게 아니라…….”“됐다.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게 아니다.”서문백이 그제야 방석에 앉았다. 등잔 불빛이 그의 얼굴에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언제 이렇게 주름이 늘었는지, 예령은 새삼스레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전생에 이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역모의 누명을 쓰고 끌려가던 날이었다. 딸이 무천에게 건넨 장부와 인장 때문에, 아버지는 변명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이번에는 그렇게 두지 않는다. 예령은 몇 번이고 삼켰던 다짐을 다시 삼켰다.“나는 한 번 네 말을 믿지 않았다.”
Last Updated : 2026-09-28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