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hat ng Kabanata ng 이번 생은 그의 형을 선택했다: Kabanata 121 - Kabanata 130

178 Kabanata

121화. 눈이 길을 닫다

군영에 닿은 것은 해가 높아졌을 때였다.무겸은 연무장에 상자를 내려놓게 했다. 뚜껑을 열자 화살촉이 겨울 햇빛을 되쏘았다. 창날 묶음이 그 옆에 세워졌다.배승이 끌려 나왔다.무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상자 하나를 밑면이 보이게 돌려 세웠다.나무에 찍힌 관의 인이 배승의 눈높이에 왔다.배승의 무릎이 먼저 꺾였다.“……저는 소금만 알았습니다.”연무장을 메운 병사들이 그 말을 들었다.“소금은 창고에서 새는 것이라, 눈감아 주면 겨울 한철 넘어가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허나 병장기는 제 손을 거치지 않았습니다.”“그럼 누구를 거쳤느냐.”“모릅니다. 상자는 사람이 따로 왔습니다. 저는 길만 열어 주었습니다.”“그 사람이 무엇을 보이더냐.”배승이 입술을 물었다. 한참 뒤에 나온 말은 낮았다.“병부 문서였습니다.”무겸은 그 말을 되묻지 않았다. 삼 년을 기다려 온 말이었다.“네가 사흘을 달라 했을 때, 나는 네 장부를 기다렸다.”배승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장부보다 이것이 먼저 왔다. 네 손으로 내놓을 기회는 그것으로 끝났다.”곽진이 배승을 끌어냈다.“뇌옥[(牢獄)군영 안에 죄인을 가두어 두는 옥]에 넣겠습니다. 우영 장수였으니 칸은 따로 쓰게 하지요.”“따로가 아니라 멀리 떨어뜨려라. 굴에서 잡아 온 우두머리와 말을 섞게 하면 내일 두 사람의 말이 같아진다.”그날 무겸은 장계[(狀啓)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 문서]를 썼다. 굴에서 나온 상자가 몇인지, 낙인이 어떤 모양인지, 생포한 스물넷의 이름, 그리고 배승이 한 말을 그대로 적었다. 예령이 옆에서 소금 자루 수를 세어 주었다.해 질 녘에 위량이 말에 올랐다.“고갯길이 닫히기 전에 넘어야 합니다.”“상자 하나를 수레에 실어 같이 가져가라.”“문서만으로는 부족합니까?”“종이에 그린 낙인은 꾸며 낸 것이라 우길 수 있다. 상자를 눈앞에 놓아야 그 말을 못 한다.”위량이 떠난 뒤, 밤부터 눈이 쏟아졌다.이튿날 아침 초소에서 사람이 왔다. 남쪽 고갯길이 사람 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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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예령

예령의 손이 멎었다.혼례를 치른 뒤로 두 사람은 같은 방에서 잔 적이 없었다. 황도 집에서는 서실을 사이에 두고 방이 나뉘어 있었고, 북행 길에 역참 방이 하나뿐이었던 밤에도 무겸은 문 앞에 앉아 밤을 보냈다.여기에는 방이 둘이었으나, 하나는 군무를 보는 방이었다.“……한 채만 깔아.”연화의 눈이 커졌다.“한 채요?”“두 채를 깔면 장군이 군무 보는 방에서 자겠다 하실 거야. 이 추위에.”말해 놓고 예령은 제 귀가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문 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무겸이 문턱 앞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연화가 이부자리를 내려놓고 재빨리 물러났다.“……들으셨습니까?”“추위 이야기만 들었소.”거짓말이었다. 귀 끝이 붉었다.무겸이 방 안으로 들어와 화로에 손을 쬐었다. 그러고는 마당 쪽 창을 한 번 보았다. 눈이 담장 높이까지 쌓여 있었다.“봄까지는 싸울 일이 없소.”“예.”“쫓을 사람도, 열 굴도 없소. 장계는 이미 떠났고, 답이 오려면 눈이 녹아야 하오.”무겸이 화로에서 손을 내렸다.“그러니 겨우내 내가 이 방에 있는 시간이 길 거요.”“……예.”“불편하면 말하시오. 군무 보는 방으로 자리를 옮기겠소.”“불편하지 않습니다.”대답이 너무 빨랐다. 예령은 괜히 등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화로에서 숯이 한 번 내려앉았다. 주판이 놓인 탁자, 두 칸 선반, 한 채만 깔린 이부자리.겨울은 길 것이었다.저녁상은 연화가 관사 부엌에서 차려 왔다. 군영 취사장에서 얻어 온 국과 밥, 상단 수레에서 꺼낸 마른 대추 한 접시였다.마주 앉아 먹는 것도 처음이었다. 황도 집에서는 무겸이 늘 늦게 돌아왔고, 북행 길에서는 각자 마차와 말 위에서 끼니를 넘겼다.무겸이 제 그릇의 고기를 덜어 예령의 밥 위에 올렸다.“저는 많습니다.”“너무 말랐소.”예령은 젓가락을 멈췄다.“나는 낮에 취사장에서 먹었소. 그러니 드시오.”병사들 줄 끝에 서 있던 모습이 떠올라 예령은 더 사양하지 못했다.상을 물린 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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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긴 밤

손등이 닿은 자리가 뜨거웠다.예령은 그 손을 치우지도, 더 움직이지도 못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알아챌 것이고, 빼면 그것도 알아챌 것이었다.숨을 고르게 쉬려고 애썼다. 애쓰는 동안 숨이 더 얕아졌다.잠이 오지 않아 수를 세기로 했다. 며칠 전 능선에서 그가 세라고 한 것처럼 하나부터 세었다. 그런데 스물을 넘기면서 세고 있는 것이 제 숨이 아니라 옆 사람의 숨이라는 것을 알았다.예령은 세는 것을 그만두었다.옆에서도 소리가 없었다. 잠이 들면 숨이 깊고 느려진다. 무겸의 숨은 그렇지 않았다.한 번은 무겸이 몸을 돌리려다 그만두는 것이 이불의 움직임으로 전해졌다. 예령도 마찬가지였다. 다리를 조금 펴려다가, 그 작은 움직임조차 옆으로 건너갈 것 같아 그대로 두었다.둘 다 자는 척을 하고 있었고, 둘 다 상대가 자는 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얼마나 지났는지 모를 때쯤 화로에서 숯이 식는 소리가 났다. 방 안의 온기가 천천히 빠져나갔다. 예령은 발끝을 이불 안쪽으로 당겼다.옆에서 이불이 움직였다.무겸이 일어나 화로 앞으로 갔다. 숯을 집어 넣고 부챗살로 바람을 넣었다. 붉은 빛이 한 번 일었다가 낮게 가라앉았다.예령은 눈을 조금 떴다.불빛을 등진 어깨가 넓었다. 속옷 한 겹 위로 등의 선이 드러났고, 팔을 움직일 때마다 어깨뼈가 따라 움직였다. 그 팔에 조금 전 그녀가 감아 준 천이 흰 띠처럼 남아 있었다.예령은 다시 눈을 감았다.무겸이 돌아와 누웠다. 이불이 들리는 잠깐 사이에 찬 공기가 들어왔다가 다시 닫혔다.“깨어 있었소?”예령은 거짓말할 자리를 찾지 못했다.“……예.”“잠이 안 오오?”“예.”“나도 그렇소.”천장은 여전히 어두웠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서까래 하나가 희미하게 보였다.“별당에서 삼 년을 지냈소.”무겸이 말했다.“그 방은 밤이 되면 아무 소리도 나지 않소. 사람 숨소리가 들리는 게 오랜만이오.”“저도 그런 방을 압니다.”예령은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밤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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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지나가는 길

날이 밝고 얼마 되지 않아 마당에서 발소리가 났다. 연화가 문밖에서 조심스레 불렀다.“부인. 손님이 왔습니다.”예령이 눈을 떴다. 무겸의 자리는 이미 비어 있었다.“이 눈에 누가 와?”“북쪽에서 왔답니다.”막힌 것은 남쪽 고갯길이었다. 북쪽에서 오는 길까지 닫힌 것은 아니었다.예령은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어느 상단이야?”“진가상회라 하는데요. 그 댁 상단주가 직접 왔습니다.”예령의 손이 옷깃에서 멈췄다. 황도의 아가씨가 북방 바람을 견디실지는 제 눈으로 보고 판단하겠다던 그 글씨가 떠올랐다.진서헌이었다.예령은 일어나 앉았다. 옆자리는 이미 식어 있었고, 이불은 그녀 쪽으로만 덮여 있었다.밤새 쥐고 있던 손을 폈다 오므려 보았다. 손끝이 따뜻했다. 언제 놓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거울 앞에 앉으니 눈 밑이 조금 부어 있었다. 연화가 못 본 척하며 머리를 매만졌다.관사 마당에 선 사내는 생각보다 젊었다.스물예닐곱쯤 되었을까. 털을 댄 겉옷이 눈밭에서도 값나 보였고, 목에 두른 것은 북방에서 나지 않는 남쪽 비단이었다.키가 크고 어깨가 곧았다. 북방 사내치고는 살결이 희어 눈빛이 유난히 검게 보였고, 웃으면 눈꼬리가 먼저 휘어 사람을 편하게 만들었다. 마당 끝에서 그를 보던 하녀 둘이 물동이를 든 채 걸음을 늦췄다.무겸이 서 있는 자리의 공기를 사람들이 비켜 간다면, 이 사내는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다가서게 만드는 쪽이었다.“진가상회 진서헌입니다.”그가 예를 갖췄다. 깊지도 얕지도 않은 예였다.“서씨 상단의 서예령입니다.”진서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잠깐 말을 잊은 사람처럼 예령을 보았다.들은 것과 달랐다. 황도에서 밀려 온 계집이라고들 했다. 눈앞의 여인은 밤을 새운 얼굴인데도 눈매가 또렷했고, 찬 바람에 뺨이 붉었을 뿐 물러선 기색이 없었다.“서신을 보내고 답을 못 받았습니다.”“보름이라 하셨지요. 그 보름 동안 저는 소금 창고와 굴을 보고 있었습니다.”“소문은 들었습니다.”진서헌이 웃었다.“그래서 왔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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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두 번째 밤

진서헌이 돌아간 날 오후, 무겸은 연무장에 병사들을 세웠다.겨울에는 하지 않는 창 훈련이었다. 해가 기울 때까지 줄을 세 번 바꿔 가며 굴렸고, 마지막에는 제가 창을 들고 앞줄에 섰다.곽진이 곁에서 조심스레 물었다.“오늘은 어인 일이십니까? 겨울에는 창 훈련을 하지 않는 것이 이 군영의 법도였습니다.”“겨울에 손을 놓으면 봄에 쓸 수가 없다. 눈이 녹으면 저쪽에서 먼저 움직일 것이고, 그때 창을 처음 잡는 자는 죽는다.”“……지당하신 말씀입니다.”곽진은 더 묻지 않았다.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말이 옳다면 열흘 전에도, 보름 전에도 병사들을 연무장에 세웠어야 했다. 하필 오늘 세운 이유는 거기 없었다.장군은 창대를 쥔 손에 자꾸 힘을 주고 있었다.그날 저녁상은 조용했다.무겸이 국그릇을 내려놓으며 물었다.“낮에 온 자는 몇을 데리고 왔소?”“행수 하나와 짐꾼 둘입니다.”“그 먼 길을 넷이서 왔군.”“북방 상인은 겨울에 사람을 많이 데리고 다니지 않습니다. 사람이 많으면 먹일 것도 많아지니까요.”“그렇군.”무겸은 더 묻지 않았다. 다만 그 물음을 꺼내기까지 국이 다 식도록 기다렸다는 것을 예령은 알았다.상을 물린 뒤가 문제였다.어제는 할 일이 있었다. 장부를 선반에 올리고, 팔을 봐 주고, 그러다 보니 등잔을 낮출 때가 되었다. 오늘은 그런 것이 없었다.예령은 주판을 꺼냈다가 도로 넣었다. 무겸은 지도를 폈다가 반쯤 접었다.화로에서 숯이 내려앉는 소리만 두어 번 났다.“오늘 백운상회 쪽에 사람을 보냈습니다.”예령이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만나 주겠답니까?”“내일 직접 가 보려 합니다.”“곽진의 사람을 붙이겠소.”“상회 마당에 군사가 서 있으면 문은 더 닫힙니다.”무겸이 잠시 그녀를 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장호만 데려가시오.”“그리하겠습니다.”할 말이 또 떨어졌다.“머리를 풀겠습니다.”예령이 먼저 말했다. 말해 놓고 보니 굳이 알릴 일이 아니었다. 어제는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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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문이 닫힌 곳

진가상회의 첫 수레가 군영에 닿은 것은 이튿날 아침이었다.곡식 여섯 수레와 마른 콩 두 수레. 값은 황도 시세, 운반은 진가상회 몫. 문서에 인을 찍은 것은 진서헌이 아니라 그가 보낸 늙은 행수였다.“상단주께서는 눈이 그치면 다시 오신답니다.”행수가 물러가자 곽진이 낮게 말했다.“저쪽 상단주가 부인 이야기를 하고 다닌답니다.”“무슨 이야기를요?”“황도에서 온 여자 상인이 값을 깎은 게 아니라 이름을 팔았다고요. 흉은 아닙니다. 웃으면서 하는 말이랍니다.”예령은 문서를 접었다. 소문이 도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이 겨울에 셈이 돌아가려면 이름이 먼저 걸어 다녀야 했다.그 이름으로 다음 문을 두드리기로 했다.백운상회는 군영에서 반나절 거리였다. 북방 세 상회 가운데 가장 먼저 서씨 상단의 거래를 끊은 곳이자, 황도에 있을 때부터 예령이 되찾아야 할 첫 번째로 꼽아 둔 곳이었다.눈이 얕은 길을 골라 갔다. 장호가 앞서고 연화가 따랐다.상회 마당에는 짐꾼들이 나와 있었다. 예령이 이름을 대자 안으로 들어간 사내가 한참 뒤에 나왔다.“상단주께서 오늘은 뵙기 어렵다 하십니다.”“언제 오면 됩니까?”“……그건 모르겠습니다.”예령은 물러나지 않았다.“그럼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마당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반 시진이 지나고 한 시진이 지났다.짐꾼들이 힐끔거리며 저희끼리 수군댔다. 바람이 그쪽 말을 실어 왔다.“정북장군 부인이라며.”“부인이면 뭐 해. 장사는 따로지.”“봄에 황도로 돌아갈 사람한테 겨울 물건을 맡겨?”연화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예령은 연화의 소매를 가볍게 눌렀다.연화가 참다 못해 입을 열었다.“부인, 이러다 밤길이 됩니다.”“상단주가 지금 저 안에 있어.”예령은 처마 밑 발자국을 보고 있었다. 들어간 자국은 있는데 나온 자국이 없었다.해가 기울 무렵에야 문이 열렸다.백운상회의 상단주 양석이 나왔다. 머리가 반쯤 센 사내였다. 그는 예령을 마당에 세워 둔 채 섬돌 위에서 말했다.“서씨 상단이라 하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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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겨울 인사

황기문이 백운상회에 들었다는 말을 들은 뒤로도 예령은 그쪽으로 사람을 보내지 않았다.대신 곽진에게 사람을 풀어 겨울 동안 북방에 남아 있는 상인들을 적어 오게 했다. 큰 상회는 셋, 그 아래에 이름조차 걸지 못한 작은 상인이 스물이 넘었다. 비단 두 필, 소금 반 섬을 지고 다니는 이들이었다. 큰 상회가 값을 쳐 주지 않아 겨울이면 물건을 쌓아 두고 굶는다고 했다.예령은 그 이름들을 장부 한쪽에 옮겨 적었다.이튿날, 군영 문에 사람이 왔다.태성상단에서 온 자였다. 상단주가 읍내 객점에서 뵙고자 한다는 전갈이었다.“잡아 가둘 수는 없습니까?”연화가 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예령은 고개를 저었다.관 염창에서 빠져나온 소금은 태성상단의 북방 창고를 거쳤다. 위량이 그 창고에서 빼 온 소금 한 줌이 염창 것과 같았고, 장군의 장계에는 황기문의 이름이 그대로 올라가 있었다. 봄에 황도에서 사람이 오면 그가 먼저 불려 갈 사람이라는 뜻이었다.그런데도 지금 잡을 수는 없었다. 창고 마당의 알갱이가 같다는 것은 정황일 뿐이고, 굴에서 나온 상자의 낙인도 관의 것이지 태성상단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 손을 대면 일꾼이 훔쳤다는 말 한마디로 꼬리가 끊긴다.그래서 무겸은 그를 두고 보는 쪽을 골랐다.“가겠다고 전하세요.”객점 이층 방에서 황기문이 기다리고 있었다.“앉으시지요.”“서서 듣겠습니다. 길지 않게 하시면 됩니다.”황기문이 웃으며 탁자 위에 종이 한 장을 밀어 놓았다.곡식 이백 섬. 한 섬에 두 냥.황도 시세의 반이었다. 겨울에 나올 수 없는 값이었다.“겨울 인사로 아십시오.”“인사는 값이 없을 때 하는 말이지요.”예령은 종이를 들여다본 채 말했다.“이 값에 겨울을 나면, 봄에는 어찌 됩니까?”“봄이야 봄에 셈하면 되지요.”“봄이면 황도에서 사람이 옵니다.”예령은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그 사람들이 군영 장부를 펼치면 이 종이가 나오겠지요. 소금 일로 조사를 받아야 할 상단이 정북장군의 군량을 댔다고요. 값이 시세의 반이면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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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관아의 차

곽진이 관문에 다녀온 것은 그날 낮이었다.“문서에 흠이 있다는데, 어느 줄이 어떻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냥 돌려보냈답니다.”“관문 아전이 그럴 수 있습니까?”“아전 혼자서는 못 합니다. 관문 문서는 관아에서 뗍니다.”예령은 그 말을 듣고 외투를 챙겼다.관아는 군영에서 십 리 떨어진 읍내에 있었다.예령이 이름을 대자 곧 안으로 들였다. 마루에 세워 두는 일도, 오래 기다리게 하는 일도 없었으니 백운상회와는 다른 대접이었다.북방 자사[(刺史)한 주의 민정과 창고, 관문을 맡아 다스리는 관리] 하정근은 쉰 줄로 보였다. 방에는 화로가 둘이나 놓여 있었고, 그는 털옷 없이 편한 차림이었다.“정북장군 부인께서 여기까지 오시다니요.”말이 느리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차부터 드시지요. 관아 것이라 좋은 건 아닙니다만.”“어제 관문에서 돌려보낸 진가상회 수레 일로 왔습니다.”“아, 그 일이요.”하정근은 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문서에 흠이 있었답니다.”“어느 줄입니까?”“글쎄요. 아랫것들이 워낙 꼼꼼해서요.”“그 문서는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 수레가 몇 대인지도 맞았고, 실린 물목도 적힌 그대로였습니다. 진가상회 인도 제자리에 찍혀 있었습니다.”“그럼 아랫것들이 잘못 보았겠지요. 다시 떼어 오시면 됩니다.”“그 문서를 떼어 주시는 곳이 여기 아닙니까.”“그러니 다시 오시라는 말씀입니다.”“얼마나 걸립니까?”“겨울이라 사람이 없어서요. 보름은 잡으셔야 할 겁니다.”보름. 군영의 곡식으로 버틸 수 있는 날과 거의 같았다.예령은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하나만 여쭙겠습니다. 문서를 떼는 데 보름이 걸린다면, 어제 관문을 넘은 태성상단 수레는 그 문서를 언제 뗀 것입니까?”방 안이 조용해졌다.화로에서 숯이 타는 소리만 났다. 하정근이 들고 있던 잔이 입에 닿지 않고 멈춰 있었다.“……그건 제가 알아보겠습니다.”“예. 알아봐 주십시오.”“부인.”하정근이 잔을 내려놓았다. 웃음은 그대로였다.“이런 일은 장군께 말씀드리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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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스무 사람

이튿날 아침, 예령은 곽진에게 명단을 다시 가져오게 했다.겨울 동안 북방에 남은 작은 상인 스물세 명. 비단 두어 필을 지고 다니는 자, 소금 반 섬을 나르는 자, 약재를 말려 파는 자.“이 사람들을 관사로 부르면 오겠습니까?”“오기야 오겠지요. 다만 부인께서 무엇을 시키시든 겁부터 낼 겁니다.”“겁낼 만한 일을 시킬 참입니다.”그날 오후, 관사 마당에 스물세 명 가운데 열일곱이 왔다.솜이 비어 가는 옷을 입은 이들이었다. 등이 굽은 노인도 있었고, 아이를 업고 온 여인도 있었다. 마당에 들어서면서 모자를 벗고, 누구도 먼저 앉으려 하지 않았다.마당에 멍석을 깔고 앉힌 뒤, 예령은 먼저 물었다.“여러분은 관문을 넘을 때 문서를 뗍니까?”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등짐 장수 노 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수레에 실으면 뗍니다. 등에 지고 넘으면 묻지 않습니다.”“한 사람이 얼마나 집니까?”“쌀로 치면 두 말쯤 됩니다. 젊은 사람은 서 말도 집니다. 그 이상은 등이 먼저 상합니다.”“관문에서는 무엇을 봅니까?”“수레와 짐칸을 봅니다. 등짐은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걸 다 세자면 관문이 하루 종일 막히니까요.”예령은 머릿속으로 셈을 했다. 두 말씩 열일곱이면 서른 말이 넘는다. 진가상회 수레 한 대에 실리는 양에는 못 미치지만, 하루에 한 번이 아니라 사흘에 두 번씩 오간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그 짐을 서씨 상단이 사겠습니다.”마당이 술렁였다.“진가상회 곡식이 관문 저쪽에 쌓여 있습니다. 수레로는 못 넘습니다. 그러니 등으로 넘기겠습니다.”“값은 관문 이쪽에서 받는 값으로 치겠습니다. 물건이 상하거나 눈에 묻혀도 값은 드립니다.”소금 반 섬을 지고 다닌다는 만씨가 손을 들었다. 나이가 마흔은 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부인. 저희가 그 짐을 못 져서 안 지는 게 아닙니다.”“압니다.”“관아에서 알면 저희부터 잡아갑니다. 큰 상회야 문을 닫고 겨울을 나면 그만이지만, 저희는 등짐 한 번이 식구들 사나흘 식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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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등짐

언제 잠이 들었는지 예령은 알지 못했다.눈을 떴을 때 손은 비어 있었고, 옆자리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마루 쪽에서 무겸이 갑옷 끈을 조이는 소리가 났다.“장군.”“깨웠소?”“아닙니다. 저도 일어나려던 참이었습니다.”예령이 몸을 일으켰다.“오늘 첫 등짐이 나갑니다.”“몇이오?”“넷입니다. 한꺼번에 열넷이 관문에 몰리면 눈에 띈다고 해서요.”“곽진의 사람은 붙였소?”“둘을 붙였습니다. 군복은 벗기고 칼도 두고 가라 했습니다.”“잘하셨소.”문이 닫혔다. 예령은 그 자리에 잠깐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났다.넷을 한 번에 보내지도 않았다. 아침에 둘, 해가 기울 무렵에 둘. 지고 갈 짐도 쌀 두 말씩으로만 맞췄다. 모두 노 씨가 일러 준 대로였다.붙잡혔다면 저녁 전에 소식이 올 것이고, 소식이 없으면 넘은 것이었다. 예령은 장부를 펴 놓고 앉았다가 같은 줄만 세 번 읽고 덮었다.넷이 돌아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쌀 여덟 말. 진가상회 수레 한 대에 실리는 양의 십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멍석 위에 내려놓은 자루를 보는 동안 예령은 숨을 한 번 길게 쉬었다.“아전이 뭐라 하지 않았습니까?”“묻긴 물었습니다.”노 씨가 손을 비비며 답했다.“겨울에 웬 등짐이냐고요.”“뭐라 하셨습니까?”“읍내에 장이 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루를 한 번 만져 보고는 가라 하더군요.”만씨가 옆에서 덧붙였다.“아전이 쌀자루를 못 알아봤겠습니까. 등짐까지 붙잡기 시작하면 그날로 장이 안 섭니다. 읍내 사람들이 먼저 들고일어나지요.”이튿날은 여덟을 보냈고, 사흘째는 열넷을 다 보냈다.사흘 동안 쌀 예순두 말이 관문을 넘었다. 예령은 장부에 이름과 날짜와 양을 한 줄씩 적었다. 만씨, 쌀 두 말. 노 씨, 쌀 두 말. 그 아래로 열두 줄.값은 지기 전에 치렀다. 관사 마당에서 돈을 받아 든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세어 보고, 세 번 세는 이도 있었다.곽진이 곁에서 낮게 말했다.“이 사람들이 부인 이름을 대고 다닙니다.”“대라고 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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