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우리 계약 관계잖아요: Chapter 1 - Chapter 10

10 Chapters

제1화

“이 사람 복근이 왜 16개야?”폭이 넓은 새까만 침대 위에서 잔뜩 취한 한영채가 남자의 허리 위에 올라타 있었다.영채는 남자의 가운 끈을 풀었다. 눈앞의 복근이 잘 익은 옥수수 알처럼 도톰하게 줄지어 있었다.“하나, 둘...” 절반쯤 세던 영채는 금세 싫증을 냈다. “됐어. 가슴이나 보자.”영채는 손에 걸린 검은 실크 가운을 아예 활짝 젖혔다.“미쳤나 봐, 가슴이 나보다 더 크잖아!”괜히 심술이 난 영채가 남자의 뺨을 철썩 때렸다.잠에서 확 깬 남자가 서늘한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 뭐 하는 거지?”위험한 기색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영채는 양손으로 단단한 가슴을 짚더니 대놓고 주물렀다.남자의 몸이 굳어지면서 반듯하던 표정에도 금이 갔다.“더러운 손 치워. 안 그러면 손목을 부러뜨려...”짝!저렇게 차갑게 생긴 얼굴로 아직도 말대꾸를 하자, 영채는 한 번 더 뺨을 갈겼다. “얌전히 누워 있어! 오늘 밤 내가 돈 주고 고른 남자잖아. 날 제대로 모셔야지, 알겠어?”...“아가씨, 영채 아가씨!”꿈속에서 미남과 한창 좋은 시간을 보내던 영채는 집안일을 오래 맡아 온 박순희가 흔드는 바람에 눈을 떴다.“이모님, 우리 집 규칙 몰라요? 좋은 꿈 깨우면 벌금 백만 원! 돈 내기 싫으면 복근 멋진 남자 사진이라도 한 장 내놔요.”박순희는 한동안 말을 잃었다. “아가씨, 지금 남자 생각할 때가 아니에요! 아가씨 집안의 회사가 파산하게 생겼다고요!”영채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박순희를 바라봤다. “뭐라고요? 아빠가 출산한다고요?”박순희는 숨이 턱 막혔다.“영채 아가씨.” 박순희가 영채의 귀에 가까이 대고 또박또박 큰 소리로 말했다. “회장님이 투자한 사업이 실패해서 자금이 전부 묶였어요.”그제야 영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빠는요?”“옥상에 계세요. 얼른 가보세요!”옷을 갈아입을 틈도 없이 바로 이불을 걷어차고 옥상으로 달려갔다.옥상 난간 끝에 절망에 빠진 한재성이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아래로 몸을 던질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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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화면 너머의 진준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정말 대신 죽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건가?’백미러로 문정호의 표정을 확인한 기사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조수석에 앉은 권민이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잠깐 차 안에 계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정호는 날 선 기운을 거두고 발치의 묵주를 주워들었다. 다시 눈을 감고는 금욕적인 수행자처럼 고요한 모습으로 돌아갔다.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향을 피우고 신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이 묵주도 집안의 어른이 월담사에서 직접 받아온 물건이었다. 스님에게 축원까지 받았으니, 몸에 지니고 성질을 죽이면서 선하게 살라는 뜻이었다.정호는 애초에 그런 걸 믿지 않았다. 그저 보여 주기 위해서 차고 다녔을 뿐이었다.화면 너머의 진준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이토록 자비로운 사람처럼 앉아 있는 정호가 오히려 더 무서웠지만, 먼저 연결을 끊을 수도 없어서 그대로 기다렸다.그때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기사가 창문을 내렸다.권민이 밖에서 공손히 보고했다. “대표님, 차를 막은 사람은 한영채라는 아가씨입니다. 급히 뵐 일이 있다고 합니다.”‘한영채?’정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 “몰라. 안 만나.”달콤한 향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더니 매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정말 모르는 사람 맞아요?”영채는 권민을 밀어내면서 나긋나긋하게 차문에 기댔다. “보아하니 몸에 남았던 이 키스마크가 다 없어졌나 봐요. 누가 만든 건지도 벌써 잊은 모양이네요.”정호의 손이 멈추더니 서늘한 눈을 떴다. 머릿속에서 겁도 없이 떠들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옥수수 알 같아. 탱탱하고 맛있겠다. 누나가 한입만 물어 볼게...’두 달 전 태양그룹이 연 크루즈 파티에서 정호는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 술에 취한 영채가 정호의 방에 들어오더니 온몸에 힘이 빠진 정호의 옷을 벗겨 버렸다. 그런 뒤, 품에 끌어안고 여기저기를 물어뜯다시피 했다.그 일이 있은 뒤 정호는 격노했다. 크루즈를 통째로 통제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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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정호가 곧바로 비웃었다. “나 말고는 잔 남자가 없다며?”“누구나 과거는 있죠.”설명이 더 수상해지자 민재가 두 손을 들었다. “우리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야.”영채는 정호 옆으로 붙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둘이 친구예요?”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정호의 가슴을 스쳤다.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다시 코끝으로 밀려왔다.정호는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영채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냈다. “떨어져.”영채는 화를 내기는커녕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이 친구인 줄 알았으면 옛날에 민재 오빠 말고 문 대표님을 쫓아다녔을 텐데...”정호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민재가 웃으면서 분위기를 돌렸다. “일단 검사부터 하자.”그제야 영채는 이 개인병원이 민재 집안의 소유라는 걸 알았다.정호가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도 분명했다. 영채의 말도, 다른 의사의 결과도 쉽게 믿지 못하는 남자였다.‘의심도 참 많네.’간호사가 채혈 바늘을 준비하자 영채는 소매를 걷어서 팔을 내밀었다. 옆을 보니 정호도 셔츠 소매를 올리고 있었다.정호의 피부는 유난히 희었다. 팔 위로 푸른 혈관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오래전에 생긴 듯한 흉터도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뭔가에 맞아 찢겼다가 아문 흔적 같았다.‘좋은 것만 보고 자랐을 재벌가 아들이 몸에 왜 저런 흉터가 있어?’“윽.” 바늘이 혈관을 찌르자 영채가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다.정호는 영채를 한번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겁도 없는 여자가 주사는 무서워하는 모양이었다.정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뒀다.채혈이 끝나자 소매를 정리하며 물었다. “결과 언제 나와?”“한 시간 정도입니다.”정호는 복도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그때 영채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재성이었다.[영채야, 문정호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회사 자금은 아빠가 다시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얼른 돌아와...]영채는 벤치에 앉은 정호를 한번 본 뒤 옆으로 물러나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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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문 대표님도 협박을 당하는 거 싫어한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나한테 다른 방법이 있었겠어요?”영채가 고개를 들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갈 곳을 잃은 사람 같은 슬픔이 가득 어려 있었다.“화해그룹은 벼랑 끝인데, 문 대표님은 이 아이도 원하지 않잖아요...”정호의 목젖이 가볍게 움직였다. 작은 변화였지만 영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엄마가 돼서 자기 아이를 쉽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영채는 눈을 내리깔았다.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이 그림자처럼 내려앉았다.그 말이 정호의 신경을 거칠게 긁었다. 정호가 가만히 눈을 감자, 목 옆의 핏줄이 희미하게 도드라졌다.“됐어.”목소리가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정호는 영채의 손을 떼어 냈다. “연기 그만해.”영채가 순간 흠칫하며 표정이 굳었다. “내가 연기하는 것 같아요?”정호가 냉담하게 바라봤다. 시선은 가혹할 만큼 차가웠다. “나는 누구 때문에 결정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야. 이 정도 수작으로 내가 흔들릴 것 같았어?”‘이 방법은 안 먹히네.’영채는 눈가에 얹었던 가련한 기색을 거두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럼 뭘 해야 우리 문 대표님의 마음이 좀 약해질까요?”영채가 다시 가까이 붙었다. 천천히 팔을 들어서 정호의 목에 감고 부드러운 허리를 단단한 몸에 밀착시켰다.“이렇게?”정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영채가 몸을 비벼도 아무 반응조차 없었다. 햇빛을 받은 얼굴은 너무나 반듯했고, 짙은 눈동자는 서늘했다.욕망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영채가 어떤 방법을 써도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그런데 영채가 어깨 가까이 붙자, 목의 혈관이 미세하게 뛰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억누른 흥분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괜한 장난기가 생긴 영채가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문 대표님, 설렜어요?”정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영채를 몸에서 떼어 내 손목을 잡았다. “할 줄 아는 게 몸을 비비는 것밖에 없어?”“장소가 별로라서 그렇죠.” 영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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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문태국은 눈에 띄게 멈칫한 뒤 정호를 돌아봤다. “저 말이 사실이냐?”정호는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설명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문태국이 찻잔을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이놈이! 아무 여자나 집 안에 끌고 들어와?”영채는 눈썹을 움찔했다. 뭐라고 받아칠지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다.“할아버지도 그러시잖습니까?”정호는 문태국 옆의 세림을 바라봤다.세림은 움츠리면서 문태국의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문태국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영채가 얼른 달랬다. “회장님, 화내지 마세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회장님 손자를 먼저 덮쳤거든요.”문태국의 눈이 커졌고 정호도 차갑게 영채를 힐끗 쳐다봤다.영채가 제 입을 가볍게 두드리며 순진한 척했다. “죄송해요. 말이 잘못 나왔네요.”저 표정을 보면 잘못 나온 말이라기보다 일부러 긁은 말에 가까웠다.영채는 헛기침을 하고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저도 사실 정호 씨랑 만난 지 거의 반년 정도 됐어요. 그동안 회장님께 말씀을 못 드렸고요.”“그 정도는 큰일도 아니다.” 문태국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젊을 때야 분별없이 만날 수도 있지. 오늘 내 앞에서 정리하면 그만이다.”문태국은 정호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앞으로 저 버릇없는 아가씨와 만나지 않겠다고 여기서 약속해.”입만 열면 ‘버릇없는 아가씨’라고 하니 얼마나 마음에 안 드는지 알 만했다.영채는 별로 화도 내지 않고 웃었다. “회장님, 저희 요즘 결혼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정호 씨가 오늘 절 데려온 것도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려는 거고, 저희가 결혼한다고 알려 드리려는 거예요.”문태국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방금 내가 한 말 못 들었나?”“들었어요, 회장님.” 영채는 곱게 웃었다. “증손주 보고 싶지 않으세요?”문태국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뜻이지?”“저 임신했어요.”문태국의 눈이 눈에 띄게 커졌다. “뭐라고? 아이가 생겼어?”“검사 결과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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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거래?”정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나 나랑 거래할 수 있는 줄 알아?”지금까지 정호에게 대놓고 조건을 걸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영채의 웃음이 잠시 멎으면서 정호를 가볍게 바라봤다. “내가 안 되면, 당신 생각엔 누가 되는데요?”정호는 입술을 다문 채 생각했다. 정작 영채보다 적당한 사람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괜히 버티지 마요. 문 대표한테는 내가 제일 잘 맞아요.”저 자신만만한 태도가 못마땅해서 정호는 냉소했다. “그 자신감은 누가 준 거지?”“당신이 줬죠.”영채는 정호가 두 달 전 일을 아직도 불쾌해한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무릎 위에 올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날 일 아직도 따지고 싶은 거면 내가 사과할게요.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뭐... 원하면 한 번 더 해 줄 수도 있고.”앞자리 기사와 권민의 귀가 동시에 뜨거워졌다.‘저 여자는 정말 못 하는 말이 없네.’“혼자 똑똑한 척하네.”정호는 무릎 위의 손을 치워 버렸다. 목소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멍청한 사람이랑 거래 안 해.”영채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아까는 분명 내가 똑똑하다고...”“조용히 있게 하려고 한 말이야. 네가 너무 시끄러워서.” 정호는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차갑게 굳은 옆모습을 보면서 영채는 문득 알 것 같았다.정호에게 영채가 필요 없는 게 아니었다.다만 영채 뜻대로 흘러가는 게 싫었고, 자기가 흔들렸다는 사실도 인정하기 싫은 거였다.‘속 좁고 고집만 센 인간...!!’영채는 숨을 크게 내쉬면서 정호의 겹쳐 놓은 손을 봤다.왼손이 오른손 위에 얹혀 있었고 손끝은 손목의 묵주 팔찌를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영채는 정호가 묵주를 만지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저게 그렇게 소중해?’영채가 갑자기 손을 뻗어 묵주를 확 빼냈다.정호가 당황해 바로 손을 뻗었다.영채는 재빠르게 피했다. 마침 차가 집 앞에 멈추자, 곧바로 문을 열고 뛰어내린 뒤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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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이불을 걷어찬 영채는 슬리퍼만 신은 채 곧바로 아래층으로 뛰었다.“천천히 가세요, 아가씨! 겉옷이라도 걸치고요. 감기 들어요!” 박순희가 뒤에서 쫓아오며 겉옷을 둘러 줬다.계단 모퉁이까지 내려온 영채는 걸음을 멈췄다.정호가 아니라 법원의 집행관과 채권자 측 직원들이 와 있었다.“일주일 전에 이미 인도 명령을 통지했습니다. 오늘까지 퇴거하기로 돼 있습니다. 계속 버티시면 강제집행 절차로 들어갑니다.”한재성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딸이 아직 위에서 자고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말씀을 하시죠.”“더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한 회장님. 빚을 갚으시든지 지금 집을 비우시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한재성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앞장선 집행 담당자가 손짓했다. “더 지체하지 말고 집행 시작하세요.”“멈춰요!”영채가 잠옷 자락을 쥔 채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영채야?” 한재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딸을 봤다. “왜 벌써 일어났어? 우리가 깨웠니?”“괜찮아요. 원래 일어날 시간이었어요.”영채는 아빠를 지나서 집행 담당자 앞에 섰다. “집을 넘겨받으러 오셨으면 법원 서류부터 보여주세요.”“당연히 있습니다.” 담당자가 결정문과 집행 관련 서류를 꺼냈다. “법원 직인까지 찍힌 거 보이시죠?”영채는 날짜를 훑어봤다. “인도 집행 예정일은 오늘로 되어 있는데 오늘 하루가 끝난 것도 아니잖아요. 아침부터 이렇게 서두르는 건 웬일이래요?”영채가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자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최소한 오후까지는 기다려 주셔도 되는 거 아닌가요?”담당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을 끈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누가 안 달라진대요?” 영채가 그를 바라봤다. “오늘 안에 화해그룹 빚은 전부 갚을 거예요.”“무슨 근거로 그런 장담을 합니까? 한씨 집안이 갚아야 할 돈은 2천억 원입니다. 2천 원이 아니에요. 곱게 자란 아가씨가 어디서 그런 거액을 구하겠습니까?”화해그룹이 기울자 사람들의 태도도 예전 같지 않았다.영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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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남의 물건을 훔쳐 놓고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대단할 정도였다.정호는 단숨에 책상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내놔.”“2천억 원.” 영채는 묵주를 쥔 손을 정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준다고 하면 돌려줄게요.”“마지막으로 나를 이렇게 협박한 사람은 묘비에 이끼가 낄 만큼 오래전에 죽었어.”“그럼 협상 끝.” 영채는 손을 거뒀다.“한영채.” 정호가 차갑게 경고했다. “그건 내 물건이야.”“지금은 내 거예요.” 영채는 묵주를 검지에 걸어 돌리면서 장난스럽고 뻔뻔하게 웃었다.정호의 시선이 착 가라앉았다. “경찰을 불러서 절도 혐의로 넘겨 달라는 건가?”‘나를 협박하겠다고?’영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그럼 지금 부숴 버릴게요.”책상 위에 있던 묵직한 황동 문진을 집어 들고 묵주를 내리쳤다. 정호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을 만큼 빨랐다.쿵!문진이 묵주에 닿기 직전에, 정호의 손이 강제로 막아 냈다.영채는 의외라는 듯 올려다봤다.정호는 책상을 짚고 상체를 기울인 채 영채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관자놀이 옆 혈관이 도드라졌고, 길고 반듯한 손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서 관절마디마저 선명했다. 손톱 끝까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영채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재빨리 묵주를 빼냈다. “이제 생각이 정리됐어요?”정호가 무겁게 바라봤다. 가슴을 깊게 들썩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줄게.”영채가 눈썹을 들었다. ‘됐나?’정호는 갑자기 손을 놓고 책상을 돌아왔다. 자기 쪽으로 오는 걸 본 영채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곧바로 잡혀서 강제로 의자에 앉게 되었다.정호의 기세가 바로 코앞에서 영채를 짓눌렀다.영채는 코끝을 살짝 움직였다. 정호에게서 은은한 향 냄새가 났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도 뒤늦게 느껴졌다.묵주를 등 뒤로 숨기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돈을 주는 게 아까워서 몸으로 때우려고요?”정호를 이런 식으로 놀리는 여자도, 정호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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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영채는 이를 악물었다. “먼저 놔요... 아!”정호가 손목뼈를 정확히 눌러서 힘을 주자 통증에 손이 풀렸다. 묵주가 미끄러지면서 떨어지자, 정호는 손바닥을 펼쳐서 정확히 받아 냈다.“진짜 최악이야.” 영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냥 내 손목을 부러뜨리지 그랬어요!”정호는 묵주에서 시선을 떼고, 아직도 몸을 비틀고 있는 영채를 내려다봤다.화가 난 표정도, 꼼짝 못 한 채 버티는 모습도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그 손은 아직 쓸데가 있어.”영채는 왠지 귓불이 더 뜨거워졌다. “묵주 가져갔으면 이제 놓으라고요!”정호는 손을 놓고 몸을 바로 세운 뒤 묵주를 천천히 손목에 다시 감았다.“다음부터 사람 붙여서 내 뒤 캐지 마. 난 그런 거 싫어하니까.”영채는 멈칫했다. ‘다 알고 있었어?’붉어진 손목을 문지르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정호는 이미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문이 열렸다가 닫혔다.서재에는 영채 혼자 남았다.의자에 축 늘어진 영채는 속상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문정호가 묵주를 되찾아 갔으니, 이제 뭘로 화해그룹을 살려 달라고 몰아붙이지?’오늘 돈을 갚지 못하면 집까지 넘어간다.영채는 서재를 천천히 둘러봤다.20년 넘게 살아온 집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라고 하면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자기도 모르게 배에 손을 얹고 가볍게 쓸었다.‘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똑똑-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들어오세요.”박순희가 문가에 섰다. “아가씨, 문태국 회장님 쪽에서 사람이 왔어요.”‘문태국 회장이 나를 찾는다고?’영채의 눈이 가늘게 빛났다.정호에게 제대로 한 방 먹고 난 뒤 바로 문태국이 찾아왔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영채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묵주를 빼앗긴 짜증을 눌렀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빠르게 거실로 나갔다.찾아온 사람은 어제 본 본가의 집사 이상규였다.이상규는 영채를 보자 정중하게 웃었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본가로 한번 와 달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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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문씨 본가.영채는 집사 이상규의 안내를 받아 은은한 차향이 감도는 조용한 다실로 들어갔다. 문태국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앉거라.”영채는 티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문태국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아가씨에 대해서는 내가 좀 조사해 봤어. 두 달 전 태양그룹 유람선 행사에 숨어들어 정호 방에 들어갔고, 그날 밤 아이를 가진 거더군.”문태국 정도의 사람이면 그 정도 사실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들켰어도 영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장님, 밤새 생각해 보시니 결론이 났어요?”문태국은 대답 대신 영채를 훑어봤다. “처음엔 아이를 이용해서 정호와 결혼하려 했겠지만 한씨 무너질 줄은 몰랐지. 그래서 정호를 붙들고, 아이를 빌미로 돈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내가 아는 정호라면 너와 결혼하는 것도, 2천억 원을 내놓는 것도 거절했겠지. 맞나?”‘역시 늙은 여우네. 눈치도 빠르고.’영채는 한숨을 내쉬면서 아예 숨길 생각을 접었다. “회장님 손자분은 정말 다루기 힘든 사람이에요.”“흥. 정호와 결혼할 생각은 접어. 대신 2천억 원은 내가 줄 수 있어.”“조건은요?” 영채도 순진하지 않았다.“아이를 낳으면 우리 집에서 키우게 넘겨. 이후엔 면접교섭권도 없고, 정호에게 다시 접근해서도 안 돼.”영채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정호 씨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하고, 제 아이는 그 여자의 아이로 올리겠다는 뜻이에요?”“걱정 마. 세림이 걔가 자기 아이처럼 키울 거야.” 문태국이 찻잔을 들면서 찻잎을 가볍게 불었다. “그 아이는 친모가 누군지 모르고 자라게 될 거고. 너한테도, 아이한테도 그게 나아.”영채는 헛웃음을 흘렸다. ‘계산 한번 참 알뜰하게 하시네.’“아가씨, 지금 아가씨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않나? 이런 때 내가 손을 내미는 것만 해도 큰 호의야.”문태국은 영채의 속셈을 다 안다는 듯 느긋하게 시선을 보냈다. “내가 마음먹고 너희 집안을 치면, 너희 집안의 회사가 경원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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