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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꼬마별
화면 너머의 진준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정말 대신 죽겠다는 사람이 나타난 건가?’

백미러로 문정호의 표정을 확인한 기사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

조수석에 앉은 권민이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잠깐 차 안에 계십시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정호는 날 선 기운을 거두고 발치의 묵주를 주워들었다. 다시 눈을 감고는 금욕적인 수행자처럼 고요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죄가 많은 사람일수록 향을 피우고 신을 찾는다는 말이 있다.

이 묵주도 집안의 어른이 월담사에서 직접 받아온 물건이었다.

스님에게 축원까지 받았으니, 몸에 지니고 성질을 죽이면서 선하게 살라는 뜻이었다.

정호는 애초에 그런 걸 믿지 않았다. 그저 보여 주기 위해서 차고 다녔을 뿐이었다.

화면 너머의 진준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였다. 이토록 자비로운 사람처럼 앉아 있는 정호가 오히려 더 무서웠지만, 먼저 연결을 끊을 수도 없어서 그대로 기다렸다.

그때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기사가 창문을 내렸다.

권민이 밖에서 공손히 보고했다.

“대표님, 차를 막은 사람은 한영채라는 아가씨입니다. 급히 뵐 일이 있다고 합니다.”

‘한영채?’

정호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무심하게 말했다.

“몰라. 안 만나.”

달콤한 향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더니 매혹적인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정말 모르는 사람 맞아요?”

영채는 권민을 밀어내면서 나긋나긋하게 차문에 기댔다.

“보아하니 몸에 남았던 이 키스마크가 다 없어졌나 봐요. 누가 만든 건지도 벌써 잊은 모양이네요.”

정호의 손이 멈추더니 서늘한 눈을 떴다. 머릿속에서 겁도 없이 떠들던 목소리가 되살아났다.

‘옥수수 알 같아. 탱탱하고 맛있겠다. 누나가 한입만 물어 볼게...’

두 달 전 태양그룹이 연 크루즈 파티에서 정호는 누군가의 함정에 빠졌다.

술에 취한 영채가 정호의 방에 들어오더니 온몸에 힘이 빠진 정호의 옷을 벗겨 버렸다. 그런 뒤, 품에 끌어안고 여기저기를 물어뜯다시피 했다.

그 일이 있은 뒤 정호는 격노했다. 크루즈를 통째로 통제한 뒤, 배후의 인물은 그 자리에서 붙잡혀서 바다에 던져졌다. 경비를 소홀히 한 직원과 경호원들도 모두 징계를 받았다.

정작 정호와 밤을 보낸 여자는 가면파티의 가면을 쓰고 있었던 탓에 결국 찾지 못했다.

정호는 어딘가 낯익은 영채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봤다.

“너였어?”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제 발로 찾아올 배짱도 있었네?”

“사정이 좀 있어서 왔죠...”

“잡아.”

“잠깐만요!”

권민은 문정호의 지시만 따랐다. 무표정하게 영채의 팔을 붙잡고 차문에서 떼어 냈다.

다급해진 영채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나 문정호 씨 아이를 가졌어요!”

주변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권민의 손이 굳어지면서 정문의 경비원들까지 눈을 크게 떴다.

‘진짜야? 대표님에게 아이가 생겼다고?’

화면 속에서 무릎 꿇고 있던 진준도 처음엔 멍해졌다가 금세 울 것처럼 기뻐했다.

‘살았어! 오늘 안 죽어도 되겠어!’

‘근데 우리 대표님을 상대로 저런 소문을 지어내면 명예훼손으로 바로 고소를 당할 텐데...’

정호는 기쁜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화상회의를 종료한 뒤, 영채에게 차에 타라는 눈짓을 보냈다.

주변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채 서로 바라보기만 했다.

코웃음을 치면서 권민의 손을 떼어낸 영채는,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문을 열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영채가 들어오자 달콤하고 진한 향이 차 안을 가득 채웠다.

정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원하는 게 뭐야?”

영채는 숨기지 않았다.

“나랑 결혼해요.”

“웃기는군.”

정호는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다.

“거울도 안 보고 다녀?”

“봤죠. 거울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대요.”

영채는 임신 테스트기를 꺼내서 가볍게 흔들었다.

“내 아이가 아니라고 잡아떼면 다 말하고 다닐 거예요. 문정호 씨는 책임도 못 질 짓 해 놓고 도망가는 남자라고.”

정호의 시선이 임신 테스트기로 옮겨갔다. 선명한 두 줄을 확인하자 눈매가 착 가라앉았다.

“사후피임약 안 먹었어?”

“약 먹으면 몸 상하잖아요.”

“애 낳는 건 몸 안 상하고?”

“둘 다 힘들죠. 그래도 이건 내가 선택한 거고.”

당당하기까지 한 대답에 정호는 싸늘하게 웃었다.

“내 침대에 올라온 것도 모자라서, 아이를 핑계로 문씨 가문의 며느리까지 되겠다는 건가?”

“어떻게 알았어요?”

영채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눈앞의 남자는 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만큼 눈치가 빨랐다.

너무 태연하게 인정해 버리자 오히려 문정호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보통이라면 변명부터 할 텐데 영채는 숨길 생각조차 없었다.

‘이 여자, 머리는 멀쩡한 건가?’

“네가 내 아이를 가졌다고 하면 내가 그대로 믿어야 해? 다른 남자와 잔 적이 없는지 누가 알아.”

“그건 미안하게 됐네요.”

영채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문정호 씨 말고는 잔 남자가 없어서요.”

앞자리의 기사가 놀라면서 룸미러를 힐끗 봤다.

정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권민이 조심스럽게 알렸다.

“대표님,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병원으로 가.”

...

차는 도심을 벗어나서 산자락 위로 올라갔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검은 철문이 나타났고, 문 위에는 ‘해담정신요양원’이라는 큰 글자가 붙어 있었다.

‘정신요양원?’

영채의 등이 바짝 굳어졌다.

“설마 나를 여기 가두려고요?”

정호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맺혔다.

“눈치는 빠르네.”

정호가 문을 열고 내린 뒤에도 영채가 좌석에 붙어 있자 차갑게 바라봤다.

“내려.”

“싫어요. 신고할 거예요!”

권민이 무표정한 채 덧붙였다.

“저기요, 여기는 경원시에서도 손꼽히는 개인병원입니다. 특히 환자의 사생활 보호에 각별한 곳이라 보안도 철저합니다. 건물 입구만 보고 판단하신 겁니다.”

영채는 움직임을 멈추고 권민과 정호를 번갈아 봤다.

권민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희 대표님을 먼저 덮친 쪽은 그쪽입니다. 신고하시면 경찰이 누구 말을 먼저 들을지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영채는 이미 꺼낸 핸드폰을 조용히 가방 안에 넣었다. 결국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정호가 앞장섰고, 혹시라도 영채가 달아날까 권민이 옆을 지켰다.

정작 영채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시선은 결국 앞서 걷는 정호에게 꽂혔다.

티 하나 없는 하얀 셔츠, 곧고 긴 다리, 선을 긋듯 차가운 분위기.

햇빛을 받은 머리카락까지 은은하게 빛났다.

밖에서 정호를 두고 속세에 관심이 없는 수행자 같다고 하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영채는 반듯한 뒷모습을 보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같이 잘 때는 이렇게 큰 줄 몰랐는데...”

권민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정말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여자였다.

“그냥 아무 병원이나 가서 검사하면 되잖아요. 왜 이렇게까지 해요?”

영채가 투덜거리자 권민이 딱딱하게 답했다.

“이 정도 일에 아무 병원이나 갈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대표님의 친자라는 결과가 나오면 관련 정보부터 바로 통제해야 합니다.”

영채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여긴 아는 사람이 있는 병원이라는 거네요.”

말을 끝내기도 전에 진료실 앞에 선 단정한 남자를 발견했다. 영채의 얼굴에 금세 환한 웃음이 번졌다.

“민재 오빠? 오빠가 왜 여기 있어?”

권민은 무표정한 얼굴로 영채를 바라봤다. 대체 누가 아는 사람이 있는 건지 몰랐다.

주민재는 문정호의 연락을 받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왔다. 도착하자마자 영채와 마주칠 줄은 몰랐다.

민재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영채야, 검사 받는 사람이 너였어?”

영채가 짧게 탄성을 내면서 더 환하게 웃었다.

“오빠가 해주는 거였구나.”

민재 앞으로 다가간 영채가 눈을 깜빡였다.

“나 기다리려고 일부러 온 거야?”

민재는 괜히 쑥스러워져 문정호를 한번 봤다.

“정호가 네 검사 좀 맡아 달라고 해서. 둘 다 기다리고 있었지.”

“그럼 고마워요, 민재 오빠.”

유난히 다정한 호칭을 듣자 정호가 고개를 돌렸다.

“애인이야?”

영채는 흰 가운을 입은 민재를 빤히 보면서 활짝 웃었다.

“내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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