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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hor: 꼬마별
이불을 걷어찬 영채는 슬리퍼만 신은 채 곧바로 아래층으로 뛰었다.

“천천히 가세요, 아가씨! 겉옷이라도 걸치고요. 감기 들어요!”

박순희가 뒤에서 쫓아오며 겉옷을 둘러 줬다.

계단 모퉁이까지 내려온 영채는 걸음을 멈췄다.

정호가 아니라 법원의 집행관과 채권자 측 직원들이 와 있었다.

“일주일 전에 이미 인도 명령을 통지했습니다. 오늘까지 퇴거하기로 돼 있습니다. 계속 버티시면 강제집행 절차로 들어갑니다.”

한재성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딸이 아직 위에서 자고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말씀을 하시죠.”

“더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한 회장님. 빚을 갚으시든지 지금 집을 비우시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한재성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앞장선 집행 담당자가 손짓했다.

“더 지체하지 말고 집행 시작하세요.”

“멈춰요!”

영채가 잠옷 자락을 쥔 채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

“영채야?”

한재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딸을 봤다.

“왜 벌써 일어났어? 우리가 깨웠니?”

“괜찮아요. 원래 일어날 시간이었어요.”

영채는 아빠를 지나서 집행 담당자 앞에 섰다.

“집을 넘겨받으러 오셨으면 법원 서류부터 보여주세요.”

“당연히 있습니다.”

담당자가 결정문과 집행 관련 서류를 꺼냈다.

“법원 직인까지 찍힌 거 보이시죠?”

영채는 날짜를 훑어봤다.

“인도 집행 예정일은 오늘로 되어 있는데 오늘 하루가 끝난 것도 아니잖아요. 아침부터 이렇게 서두르는 건 웬일이래요?”

영채가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자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최소한 오후까지는 기다려 주셔도 되는 거 아닌가요?”

담당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을 끈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누가 안 달라진대요?”

영채가 그를 바라봤다.

“오늘 안에 화해그룹 빚은 전부 갚을 거예요.”

“무슨 근거로 그런 장담을 합니까? 한씨 집안이 갚아야 할 돈은 2천억 원입니다. 2천 원이 아니에요. 곱게 자란 아가씨가 어디서 그런 거액을 구하겠습니까?”

화해그룹이 기울자 사람들의 태도도 예전 같지 않았다.

영채가 코웃음을 쳤다.

“나는 없어도 문정호 대표는 있잖아요.”

사람들이 동시에 멈칫했다.

‘방금 누구 이름을 말한 거지? 문정호 대표?’

“문정호 대표가 아가씨 빚을 대신 갚아 준다고요?”

“못 믿겠어요?”

영채가 곁눈질했다.

“조금 있으면 직접 올 거예요.”

“농담하지 마십시오. 문 대표가 어떤 사람인데 한 아가씨 때문에 여기까지 직접 오겠습니까? 빚까지 대신 갚아 준다고요? 우리를 놀리는 겁니까?”

“전화를 한번 해 보면 알겠죠.”

영채는 핸드폰을 꺼내서 김세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아는 영채와 오래 붙어 다닌 단짝친구였다.

정호가 마음을 바꿀까 걱정된 영채가 일부러 동선을 지켜봐 달라고 부탁해 둔 상태였다.

전화가 연결되자 영채는 스피커를 켰다.

“어때? 문정호는 왔어?”

세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정호는 아침 일찍 회사에 갔다가 방금 나왔는데 공항 쪽으로 가고 있어. 출장 가려나 봐.]

영채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문정호 이 인간, 묵주도 필요 없다는 거야?’

주변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가씨, 자기 자신을 너무 대단하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얼굴이 예쁜 건 알겠는데, 문 대표가 어떤 사람인데 아가씨를 보고 여기까지 오겠어요?”

비웃음을 무시한 영채는 스피커를 끈 뒤 핸드폰을 귀에 댔다.

“계속 봐. 이동 경로 바뀌면 바로 알려줘...”

핸드폰이 갑자기 손에서 빠져나갔다.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비웃었다.

“헛수고하지 마십시오. 문 대표는 안 옵니다.”

영채의 눈이 차갑게 싸늘해졌다.

“핸드폰 돌려주세요.”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끊어 버리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건 그냥 억지 부리는 겁니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집 안 물건부터 밖으로 빼세요.”

사람들이 강제집행을 시작했고, 영채가 아끼는 피아노까지 들어 옮기려 했다.

영채의 눈매가 착 가라앉았다.

“그거 내려놔요!”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바로 막아서려 했지만 거칠게 밀려났다. 집행을 방해하지 말라는 경고도 이어졌다.

법원 집행을 몸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영채가 아끼는 피아노라 평소 닦을 때도 조심하던 물건이었다. ‘상처’라도 나면 큰일이라서 결국 이를 악물고 다시 다가갔다.

양쪽이 밀고 당기며 금방이라도 몸싸움이 벌어질 듯했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운 거지?”

차갑고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가 현관 쪽에서 들렸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영채는 숨을 잠깐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정호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피곤한 듯 냉담한 표정과 가까이하기 어려운 분위기는 주변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정호를 알아본 사람이 목소리를 떨었다.

“문... 문 대표님...”

나머지 사람들도 멍하니 굳었다.

‘문 대표가 정말 왔다고? 공항으로 갔다던 사람이?’

집행관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낮게 속삭였다.

“어떻게 된 거지?”

“네 상사한테 빨리 확인해 봐.”

담당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급히 핸드폰을 꺼내면서 한쪽으로 물러났다.

영채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뭐랬어요?”

사람들의 놀란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정호에게 다가가서 팔짱을 꼈다. 그러면서 서운한 척 투정을 부렸다.

“왜 이제 와요? 조금만 늦었으면 나 진짜 집에서 쫓겨날 뻔했잖아요.”

옆에 있던 법원의 집행 관계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문 대표와 무슨 사이길래 앞에서 저렇게 투정을 부릴 수 있는 거지?’

영채는 속으로 신이 났다. 하지만 웃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손목이 붙잡혔다.

영채의 눈이 커졌다.

정호는 눈을 내리깔더니 영채 손목의 묵주를 매끄럽게 빼냈다.

영채는 기가 막혀서 눈을 크게 떴다.

‘이 인간이 기습을 해?’

곧바로 손을 뻗었다. 정호가 팔을 거두려고 하는데, 검지로 묵주 끈을 재빨리 꽉 잡았다.

정호의 움직임이 곧바로 멎었다. 묵주가 끊어질까 봐 세게 당기지도 못했다.

영채는 웃는 것도 아닌 표정으로 정호를 올려다봤다.

“지금 뭐 하세요?”

정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놔.”

두 사람은 묵주 양끝을 잡은 채 팽팽하게 버텼다.

영채는 차가운 시선을 그대로 받아 냈다.

“어제 내가 한 말, 제대로 못 들었어요?”

정호의 눈동자 깊은 곳에 사나운 기색이 비쳤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그래요?”

영채는 묵주를 자기 쪽으로 세게 잡아당겼다.

정호가 미처 대비하지 못한 채 끈이 끝까지 팽팽해졌다. 표정이 달라진 정호가 낮게 소리쳤다.

“그만.”

평소답지 않게 흔들린 모습을 본 영채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자격이 생겼어요?”

정호의 눈빛은 무섭도록 어두웠다. 감출 생각도 없이 살벌한 기색이 그대로 드러났다.

영채는 고개를 기울여 정호를 살폈다.

화를 낸 정호는 평소보다 오히려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눈가가 붉어지고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문 모습은 마치 금방이라도 먹이를 덮칠 맹수와도 같았다.

영채는 그게 재미있었다. 지나치게 깨끗하고 단정한 겉모습 아래 사나운 맹수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영채가 매혹적으로 웃었다.

“우리 다른 데서 얘기할까요?”

정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순순히 따라오지 않을 걸 아는 영채는 묵주를 흔들었다.

“안 오면 이거 끊어 버릴 거예요.”

정호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지만 결국 손을 놓았다.

영채는 만족스럽게 묵주를 손에 쥐고 집행관 쪽을 힐끗 봤다.

“다들 봤죠? 나 지금 문 대표랑 할 얘기가 있어요. 우리 집 물건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나 진짜 화나면 무슨 짓을 할지 몰라요.”

정호까지 협박하는 여자였다. 더 몰아붙였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누구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상부와 통화하던 담당자들도 전화를 끊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책임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기다리죠. 상황을 좀 봅시다.”

영채는 정호를 1층 서재로 데려갔다.

“문 닫아요.”

들어서자마자 한마디 던졌다.

정호는 등을 차갑게 바라보다 잠시 말이 없었다. 결국 손을 뻗어서 문을 닫았다.

돌아보니 영채는 이미 가죽 의자에 앉아서, 팔걸이에 팔꿈치를 괴고 묵주를 느긋하게 만지고 있었다.

“말해 봐요. 이 묵주랑 화해그룹, 둘 중 하나만 고르면 뭐 고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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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래?”정호가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나 나랑 거래할 수 있는 줄 알아?”지금까지 정호에게 대놓고 조건을 걸 수 있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영채의 웃음이 잠시 멎으면서 정호를 가볍게 바라봤다. “내가 안 되면, 당신 생각엔 누가 되는데요?”정호는 입술을 다문 채 생각했다. 정작 영채보다 적당한 사람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괜히 버티지 마요. 문 대표한테는 내가 제일 잘 맞아요.”저 자신만만한 태도가 못마땅해서 정호는 냉소했다. “그 자신감은 누가 준 거지?”“당신이 줬죠.”영채는 정호가 두 달 전 일을 아직도 불쾌해한다는 걸 깨달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무릎 위에 올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날 일 아직도 따지고 싶은 거면 내가 사과할게요. 이미 지난 일이잖아요. 뭐... 원하면 한 번 더 해 줄 수도 있고.”앞자리 기사와 권민의 귀가 동시에 뜨거워졌다.‘저 여자는 정말 못 하는 말이 없네.’“혼자 똑똑한 척하네.”정호는 무릎 위의 손을 치워 버렸다. 목소리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멍청한 사람이랑 거래 안 해.”영채의 표정이 굳었다. “뭐라고요? 아까는 분명 내가 똑똑하다고...”“조용히 있게 하려고 한 말이야. 네가 너무 시끄러워서.” 정호는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차갑게 굳은 옆모습을 보면서 영채는 문득 알 것 같았다.정호에게 영채가 필요 없는 게 아니었다.다만 영채 뜻대로 흘러가는 게 싫었고, 자기가 흔들렸다는 사실도 인정하기 싫은 거였다.‘속 좁고 고집만 센 인간...!!’영채는 숨을 크게 내쉬면서 정호의 겹쳐 놓은 손을 봤다.왼손이 오른손 위에 얹혀 있었고 손끝은 손목의 묵주 팔찌를 천천히 문지르고 있었다.영채는 정호가 묵주를 만지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저게 그렇게 소중해?’영채가 갑자기 손을 뻗어 묵주를 확 빼냈다.정호가 당황해 바로 손을 뻗었다.영채는 재빠르게 피했다. 마침 차가 집 앞에 멈추자, 곧바로 문을 열고 뛰어내린 뒤 쾅 소리가 나게 닫았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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