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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꼬마별
“문 대표님도 협박을 당하는 거 싫어한다는 건 알아요. 그래도 나한테 다른 방법이 있었겠어요?”

영채가 고개를 들었다. 부드럽고 아름다운 얼굴에는 갈 곳을 잃은 사람 같은 슬픔이 가득 어려 있었다.

“화해그룹은 벼랑 끝인데, 문 대표님은 이 아이도 원하지 않잖아요...”

정호의 목젖이 가볍게 움직였다. 작은 변화였지만 영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엄마가 돼서 자기 아이를 쉽게 포기할 수 있겠어요?”

영채는 눈을 내리깔았다.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이 그림자처럼 내려앉았다.

그 말이 정호의 신경을 거칠게 긁었다.

정호가 가만히 눈을 감자, 목 옆의 핏줄이 희미하게 도드라졌다.

“됐어.”

목소리가 팽팽하게 굳어 있었다. 정호는 영채의 손을 떼어 냈다.

“연기 그만해.”

영채가 순간 흠칫하며 표정이 굳었다.

“내가 연기하는 것 같아요?”

정호가 냉담하게 바라봤다. 시선은 가혹할 만큼 차가웠다.

“나는 누구 때문에 결정을 바꾸는 사람이 아니야. 이 정도 수작으로 내가 흔들릴 것 같았어?”

‘이 방법은 안 먹히네.’

영채는 눈가에 얹었던 가련한 기색을 거두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그럼 뭘 해야 우리 문 대표님의 마음이 좀 약해질까요?”

영채가 다시 가까이 붙었다. 천천히 팔을 들어서 정호의 목에 감고 부드러운 허리를 단단한 몸에 밀착시켰다.

“이렇게?”

정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영채가 몸을 비벼도 아무 반응조차 없었다.

햇빛을 받은 얼굴은 너무나 반듯했고, 짙은 눈동자는 서늘했다.

욕망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영채가 어떤 방법을 써도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영채가 어깨 가까이 붙자, 목의 혈관이 미세하게 뛰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억누른 흥분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괜한 장난기가 생긴 영채가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댔다.

“문 대표님, 설렜어요?”

정호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영채를 몸에서 떼어 내 손목을 잡았다.

“할 줄 아는 게 몸을 비비는 것밖에 없어?”

“장소가 별로라서 그렇죠.”

영채는 잡힌 힘을 이용해서 다시 정호 쪽으로 기대며 유혹하듯 활짝 웃었다.

“더 재밌는 것도 많은데, 해볼래요?”

“수술실로 데려가서 묶어.”

“수술대에서 놀자고요?”

“진정제 가져와.”

“잠깐, 말로 하자고요...”

영채는 말을 끝내지도 못했다. 정호가 밀어내자 권민이 뒤에서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제서야 정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일부러 만들었던 유혹적인 표정은 깨끗이 사라지고 눈매가 싸늘해졌다.

“진짜 아이를 없앨 거예요?”

“내가 농담하는 줄 알았어?”

“그럼 아까는...”

“네가 남자를 꼬시는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본 것뿐이야.”

정호는 영채 때문에 구겨진 옷깃을 느긋하게 펴면서 얼굴을 훑었다. 흥미가 없다는 듯 입술 끝을 비틀었다.

“별것도 아니네.”

“문정호, 진짜 쓰레기야!”

영채가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놔!”

미친 듯이 몸을 비틀었지만 손목만 아프게 꺾였다.

정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사소한 일을 처리하듯 말했다.

“진정제 놔. 조용하게.”

간호사가 주사기를 들고 다가왔다.

경호원들이 양옆에서 붙잡고 있어서 영채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영채는 정호를 죽일 듯 노려봤다. 여우처럼 길고 예쁜 눈매가 분노로 붉어졌다.

눈꼬리에는 물기까지 맺혀서 고집스럽고도 처참해 보였다.

정호는 그 시선을 그대로 받아 냈다. 짙은 눈에는 흔들림이 전혀 없었다.

연민도, 망설임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주삿바늘이 영채의 팔에 점점 가까워졌다.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문태국 회장이었다.

정호는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 뒤, 핸드폰을 들고 창가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정호의 몸을 감쌌다.

금빛을 두른 조각상처럼 아름다워서 보는 사람의 눈길을 빼앗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뒷모습을 바라보는 영채에게는 그저 소름만 돋았다.

찾아오기 전부터 쉽지 않을 거라 각오했지만, 정호가 배 속 아이를 강제로 없애려 할 정도로 막 나갈 줄은 몰랐다. 지금은 어떻게든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부터 찾아야 했다.

“아... 배가 아파!”

영채가 배를 감싸 쥐면서 아프다고 호소하자, 마침 통화를 끝낸 정호가 돌아왔다.

정호는 바로 앞까지 다가온 정호가 큰 손으로 영채의 턱을 움켜쥐었다.

“뭐 하는 거예요, 아파요!”

턱이 눌리자 영채는 눈썹을 찌푸렸다.

정호가 영채를 벽에 밀어붙였다. 날카로운 눈은 영채의 잔꾀를 금세 꿰뚫었다.

“아이 살리고 싶어?”

영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바라봤다.

“낳고 싶으면 말 들어. 나랑 어디 좀 가.”

...

문씨 본가.

차가 웅장한 본채 앞에 멈췄다.

차에서 내린 영채가 넓은 마당과 오래된 대저택을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권민이 대답하려던 참에 평소 말이 없는 정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중에 그 늙은이가 묻힐 집.”

영채가 놀라 고개를 돌렸을 때, 정호는 이미 차문을 닫고 저택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는 남자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영채도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

본채 거실에는 은은한 향 냄새가 퍼져 있었다.

소파에는 백발의 노인이 고급 실크 재킷을 입고 앉아 있었다. 손에는 짙은 녹색 묵주를 쥐고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경문을 외고 있었다.

옆에는 몸에 꼭 맞는 고급 실크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자가 차를 따르고 있었다.

‘저분이 바로 문정호의 할아버지, 문태국 회장?’

문태국 역시 인정사정없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아들이 죽자마자 새로운 후계자를 키우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정호가 그룹의 실권을 틀어쥐었다고 했다.

집사가 문 앞에서 들어오라고 안내하자, 영채가 정호의 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나한테 뭘 하라는 거예요?”

“머리가 있다면 상황을 보고 알아서 움직여.”

정호가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설명까지 필요해?”

“설명은 필요 없는데, 내가 입이 좀 가벼워서요. 말실수해도 나중에 뭐라고 하지 마요.”

정호는 영채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다 담담하게 말했다.

“병원에서 나를 협박한 방식 그대로 저 사람한테도 협박해.”

영채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임신한 거 말하라는 거예요?”

“내 줄을 잡겠다고 했잖아.”

정호는 영채의 눈을 내려다보며 반응을 살폈다.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지.”

정호는 소매를 빼내고 안으로 들어가서 공손히 인사했다.

“할아버지.”

문태국은 눈도 뜨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왔냐, 정호야. 와서 앉아.”

정호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영채는 따로 자리가 없어 옆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던 여자가 찻잔을 내밀었다. 정호는 탁자에 내려놓기만 하고 마시지는 않았다.

“요즘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문태국이 코웃음을 쳤다.

“멀쩡하다.”

“그럼 제가 구해 온 그 좋은 홍삼은 다시 가져가겠습니다.”

문태국이 그제야 눈을 제대로 뜨며 노려봤다.

“내가 빨리 죽기라도 바라는 거냐?”

정호는 그저 웃기만 했다. 등받이에 기대서 긴 다리를 포개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 부른 건 소개할 사람이 있어서다.”

문태국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면서 옆에 선 여자를 가리켰다.

“최세림이다. 최 회장 딸이고, 어릴 때 몇 번 봤을 거다.”

“기억에 없습니다.”

문태국은 듣지 못한 척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최 회장 집안이 우리 집안만큼 큰 집안은 아니지만, 세림이는 내가 어릴 때부터 지켜봤어.”

“외모야 말할 것도 없고 학력이나 성품도 충분히 검증했다. 네 곁에서 그룹 일을 보조하기에도 손색이 없는 아이다.”

영채는 놀란 척하면서 최세림을 바라봤다. 문태국의 뒤에 얌전히 서 있는 모습이었다.

“회장님께서 문 대표님한테 골라 준 사람이 이분이에요? 전 회장님의 새 배우자인 줄 알았는데...”

정호는 말없이 영채를 바라봤다.

영채가 정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회장님이 정략결혼을 시키려고 하니까 나를 데려온 거죠? 내가 문 회장의 혈압을 올려 드리면 되는 거예요?”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살짝 숨결을 흘렸다.

“2천억 원이면 해드릴게요. 어때요?”

정호가 싸늘하게 쳐다봤다.

“입 닫아.”

영채는 문태국 쪽을 힐끗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문태국은 계속 말했다.

“정호야, 네가 별 이견이 없으면 세림이하고 결혼하는 걸로 하자. 다음 달 첫째 주 토요일이 날짜도 좋다. 최 회장하고도 얘기해 뒀으니 그날 식을 올리면 돼...”

“전 반대예요!”

큰 소리에 문태국이 흠칫했다. 그제야 정호 옆에 선 영채를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너는 누구냐? 여기서 네가 끼어들 자리가 있어?”

영채가 느긋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회장님, 전 한영채예요. 정호 씨랑 결혼할 사람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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