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남자는 여자를 품 안에 가둔 채 거칠게 몰아붙이며, 밤새도록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했다. 그토록 서로에게 무관심하기로 했던 계약이었다. ... 혼인신고를 마친 날, 문정호는 냉정하게 선을 그었다. “서로 필요한 것만 얻는 관계야.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연락하지 마.” 한영채는 별다른 감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사랑도 없는 계약결혼이었다. 그래서일까... 결혼 후에도 영채는 틈만 나면 정호의 단단한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건드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늦은 회식을 마치고 돌아온 정호는 불 하나 켜지지 않은 집 안에서 홀로 잠든 영채를 발견했다. 자신이 돌아온 줄도 모르는 듯, 침대에 편안히 누워 있는 모습. 이상하게도 그 모습이 눈에 거슬렸다. 이유도 모를 불쾌함에 정호는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영채를 품 안에 가뒀다. 그리고 밤새 그녀를 몰아붙이며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부르게 했다. 숨을 고르던 영채가 달아오른 얼굴로 남자를 노려봤다. “문 대표님, 우리는 계약 관계잖아요.” 정호는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움켜쥔 채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계약이면 몸도 마음도 포함이지.” 서로에게 필요한 것만 취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계약으로 시작한 결혼에서 먼저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정호였다.
View More문씨 본가.영채는 집사 이상규의 안내를 받아 은은한 차향이 감도는 조용한 다실로 들어갔다. 문태국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앉거라.”영채는 티테이블 맞은편에 앉았다.문태국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차를 따르며 말했다. “아가씨에 대해서는 내가 좀 조사해 봤어. 두 달 전 태양그룹 유람선 행사에 숨어들어 정호 방에 들어갔고, 그날 밤 아이를 가진 거더군.”문태국 정도의 사람이면 그 정도 사실을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들켰어도 영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장님, 밤새 생각해 보시니 결론이 났어요?”문태국은 대답 대신 영채를 훑어봤다. “처음엔 아이를 이용해서 정호와 결혼하려 했겠지만 한씨 무너질 줄은 몰랐지. 그래서 정호를 붙들고, 아이를 빌미로 돈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내가 아는 정호라면 너와 결혼하는 것도, 2천억 원을 내놓는 것도 거절했겠지. 맞나?”‘역시 늙은 여우네. 눈치도 빠르고.’영채는 한숨을 내쉬면서 아예 숨길 생각을 접었다. “회장님 손자분은 정말 다루기 힘든 사람이에요.”“흥. 정호와 결혼할 생각은 접어. 대신 2천억 원은 내가 줄 수 있어.”“조건은요?” 영채도 순진하지 않았다.“아이를 낳으면 우리 집에서 키우게 넘겨. 이후엔 면접교섭권도 없고, 정호에게 다시 접근해서도 안 돼.”영채의 눈이 싸늘하게 식었다. “정호 씨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하고, 제 아이는 그 여자의 아이로 올리겠다는 뜻이에요?”“걱정 마. 세림이 걔가 자기 아이처럼 키울 거야.” 문태국이 찻잔을 들면서 찻잎을 가볍게 불었다. “그 아이는 친모가 누군지 모르고 자라게 될 거고. 너한테도, 아이한테도 그게 나아.”영채는 헛웃음을 흘렸다. ‘계산 한번 참 알뜰하게 하시네.’“아가씨, 지금 아가씨 집안이 어떤 상황인지 알지 않나? 이런 때 내가 손을 내미는 것만 해도 큰 호의야.”문태국은 영채의 속셈을 다 안다는 듯 느긋하게 시선을 보냈다. “내가 마음먹고 너희 집안을 치면, 너희 집안의 회사가 경원시에서
영채는 이를 악물었다. “먼저 놔요... 아!”정호가 손목뼈를 정확히 눌러서 힘을 주자 통증에 손이 풀렸다. 묵주가 미끄러지면서 떨어지자, 정호는 손바닥을 펼쳐서 정확히 받아 냈다.“진짜 최악이야.” 영채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그냥 내 손목을 부러뜨리지 그랬어요!”정호는 묵주에서 시선을 떼고, 아직도 몸을 비틀고 있는 영채를 내려다봤다.화가 난 표정도, 꼼짝 못 한 채 버티는 모습도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입가에 옅은 웃음이 스쳤다. “그 손은 아직 쓸데가 있어.”영채는 왠지 귓불이 더 뜨거워졌다. “묵주 가져갔으면 이제 놓으라고요!”정호는 손을 놓고 몸을 바로 세운 뒤 묵주를 천천히 손목에 다시 감았다.“다음부터 사람 붙여서 내 뒤 캐지 마. 난 그런 거 싫어하니까.”영채는 멈칫했다. ‘다 알고 있었어?’붉어진 손목을 문지르면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정호는 이미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문이 열렸다가 닫혔다.서재에는 영채 혼자 남았다.의자에 축 늘어진 영채는 속상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다.‘문정호가 묵주를 되찾아 갔으니, 이제 뭘로 화해그룹을 살려 달라고 몰아붙이지?’오늘 돈을 갚지 못하면 집까지 넘어간다.영채는 서재를 천천히 둘러봤다.20년 넘게 살아온 집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떠나라고 하면 아무렇지 않을 수가 없었다.자기도 모르게 배에 손을 얹고 가볍게 쓸었다.‘정말 방법이 없는 걸까?’똑똑-서재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들어오세요.”박순희가 문가에 섰다. “아가씨, 문태국 회장님 쪽에서 사람이 왔어요.”‘문태국 회장이 나를 찾는다고?’영채의 눈이 가늘게 빛났다.정호에게 제대로 한 방 먹고 난 뒤 바로 문태국이 찾아왔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영채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 묵주를 빼앗긴 짜증을 눌렀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빠르게 거실로 나갔다.찾아온 사람은 어제 본 본가의 집사 이상규였다.이상규는 영채를 보자 정중하게 웃었다. “아가씨, 회장님께서 본가로 한번 와 달라고 하십니다.”
남의 물건을 훔쳐 놓고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대단할 정도였다.정호는 단숨에 책상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내놔.”“2천억 원.” 영채는 묵주를 쥔 손을 정호의 손바닥 위에 올렸다. “준다고 하면 돌려줄게요.”“마지막으로 나를 이렇게 협박한 사람은 묘비에 이끼가 낄 만큼 오래전에 죽었어.”“그럼 협상 끝.” 영채는 손을 거뒀다.“한영채.” 정호가 차갑게 경고했다. “그건 내 물건이야.”“지금은 내 거예요.” 영채는 묵주를 검지에 걸어 돌리면서 장난스럽고 뻔뻔하게 웃었다.정호의 시선이 착 가라앉았다. “경찰을 불러서 절도 혐의로 넘겨 달라는 건가?”‘나를 협박하겠다고?’영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요. 그럼 지금 부숴 버릴게요.”책상 위에 있던 묵직한 황동 문진을 집어 들고 묵주를 내리쳤다. 정호가 뭐라고 할 틈도 없을 만큼 빨랐다.쿵!문진이 묵주에 닿기 직전에, 정호의 손이 강제로 막아 냈다.영채는 의외라는 듯 올려다봤다.정호는 책상을 짚고 상체를 기울인 채 영채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눈빛은 깊고 어두웠다. 관자놀이 옆 혈관이 도드라졌고, 길고 반듯한 손가락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서 관절마디마저 선명했다. 손톱 끝까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영채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재빨리 묵주를 빼냈다. “이제 생각이 정리됐어요?”정호가 무겁게 바라봤다. 가슴을 깊게 들썩이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줄게.”영채가 눈썹을 들었다. ‘됐나?’정호는 갑자기 손을 놓고 책상을 돌아왔다. 자기 쪽으로 오는 걸 본 영채가 당황해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곧바로 잡혀서 강제로 의자에 앉게 되었다.정호의 기세가 바로 코앞에서 영채를 짓눌렀다.영채는 코끝을 살짝 움직였다. 정호에게서 은은한 향 냄새가 났다.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사실도 뒤늦게 느껴졌다.묵주를 등 뒤로 숨기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돈을 주는 게 아까워서 몸으로 때우려고요?”정호를 이런 식으로 놀리는 여자도, 정호가 가
이불을 걷어찬 영채는 슬리퍼만 신은 채 곧바로 아래층으로 뛰었다.“천천히 가세요, 아가씨! 겉옷이라도 걸치고요. 감기 들어요!” 박순희가 뒤에서 쫓아오며 겉옷을 둘러 줬다.계단 모퉁이까지 내려온 영채는 걸음을 멈췄다.정호가 아니라 법원의 집행관과 채권자 측 직원들이 와 있었다.“일주일 전에 이미 인도 명령을 통지했습니다. 오늘까지 퇴거하기로 돼 있습니다. 계속 버티시면 강제집행 절차로 들어갑니다.”한재성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딸이 아직 위에서 자고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말씀을 하시죠.”“더 이야기할 게 없습니다, 한 회장님. 빚을 갚으시든지 지금 집을 비우시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한재성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앞장선 집행 담당자가 손짓했다. “더 지체하지 말고 집행 시작하세요.”“멈춰요!”영채가 잠옷 자락을 쥔 채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다.“영채야?” 한재성이 미안한 표정으로 딸을 봤다. “왜 벌써 일어났어? 우리가 깨웠니?”“괜찮아요. 원래 일어날 시간이었어요.”영채는 아빠를 지나서 집행 담당자 앞에 섰다. “집을 넘겨받으러 오셨으면 법원 서류부터 보여주세요.”“당연히 있습니다.” 담당자가 결정문과 집행 관련 서류를 꺼냈다. “법원 직인까지 찍힌 거 보이시죠?”영채는 날짜를 훑어봤다. “인도 집행 예정일은 오늘로 되어 있는데 오늘 하루가 끝난 것도 아니잖아요. 아침부터 이렇게 서두르는 건 웬일이래요?”영채가 사람들을 한 바퀴 둘러보자 누구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최소한 오후까지는 기다려 주셔도 되는 거 아닌가요?”담당자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시간을 끈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누가 안 달라진대요?” 영채가 그를 바라봤다. “오늘 안에 화해그룹 빚은 전부 갚을 거예요.”“무슨 근거로 그런 장담을 합니까? 한씨 집안이 갚아야 할 돈은 2천억 원입니다. 2천 원이 아니에요. 곱게 자란 아가씨가 어디서 그런 거액을 구하겠습니까?”화해그룹이 기울자 사람들의 태도도 예전 같지 않았다.영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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