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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꼬마별
정호가 곧바로 비웃었다.

“나 말고는 잔 남자가 없다며?”

“누구나 과거는 있죠.”

설명이 더 수상해지자 민재가 두 손을 들었다.

“우리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야.”

영채는 정호 옆으로 붙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둘이 친구예요?”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정호의 가슴을 스쳤다. 달콤하고 진한 향기가 다시 코끝으로 밀려왔다.

정호는 고개를 옆으로 피하며 영채의 머리를 손으로 밀어냈다.

“떨어져.”

영채는 화를 내기는커녕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둘이 친구인 줄 알았으면 옛날에 민재 오빠 말고 문 대표님을 쫓아다녔을 텐데...”

정호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민재가 웃으면서 분위기를 돌렸다.

“일단 검사부터 하자.”

그제야 영채는 이 개인병원이 민재 집안의 소유라는 걸 알았다.

정호가 여기까지 데려온 이유도 분명했다. 영채의 말도, 다른 의사의 결과도 쉽게 믿지 못하는 남자였다.

‘의심도 참 많네.’

간호사가 채혈 바늘을 준비하자 영채는 소매를 걷어서 팔을 내밀었다. 옆을 보니 정호도 셔츠 소매를 올리고 있었다.

정호의 피부는 유난히 희었다. 팔 위로 푸른 혈관이 선명하게 드러났고, 오래전에 생긴 듯한 흉터도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뭔가에 맞아 찢겼다가 아문 흔적 같았다.

‘좋은 것만 보고 자랐을 재벌가 아들이 몸에 왜 저런 흉터가 있어?’

“윽.”

바늘이 혈관을 찌르자 영채가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다.

정호는 영채를 한번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겁도 없는 여자가 주사는 무서워하는 모양이었다.

정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거뒀다.

채혈이 끝나자 소매를 정리하며 물었다.

“결과 언제 나와?”

“한 시간 정도입니다.”

정호는 복도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때 영채의 핸드폰이 울렸다. 한재성이었다.

[영채야, 문정호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야. 회사 자금은 아빠가 다시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얼른 돌아와...]

영채는 벤치에 앉은 정호를 한번 본 뒤 옆으로 물러나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아빠, 저 괜찮아요. 일이 끝나면 바로 갈게요.”

영채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박순희, 장수명 집사, 어머니 윤미정까지 차례로 전화를 걸어왔다. 하나같이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는 말뿐이었다.

계속 울리는 전화 소리에 정호도 눈을 떠서 영채의 등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민재가 검사지를 들고 빠르게 걸어 나왔다.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축하한다, 문 대표. 이제 아빠가 되겠네.”

통화하던 영채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정호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정호는 바로 일어나서 민재의 손에서 검사지를 낚아챘다.

“어때요?”

영채가 핸드폰을 넣으며 다가갔다.

“이제 내가 거짓말한 거 아니란 걸 믿겠죠?”

믿기 어려운 결과였다.

정호의 숨결이 검사지를 스쳤다. 손에 들린 종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언제나 감정 기복이 없던 정호의 얼굴에 이토록 분명한 동요가 드러난 건 보기 드문 일이었다.

영채는 정호도 기쁜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손을 잡아끌었다.

“가요. 구청 가족관계등록 창구 문 닫기 전에.”

갑자기 끌려가게 되자, 정호는 비틀거리다 정신을 차렸다.

영채가 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혼인신고하러 가야죠. 아이가 태어나는데 아빠가 없는 아이로 놔둘 거예요?”

“내가 낳게 둔다고 했나?”

영채의 발이 멈췄다.

“임신한 김에 병원에 왔으니 정리해.”

정호의 말투는 담담했다.

“민재야, 수술 잡아.”

민재조차 어처구니가 없어서 얼굴이 굳었다.

‘미친 건가?’

영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돌아섰다.

“문 대표, 이 아이는 당신 친자예요. 정말 없애겠다고요?”

“그럼 내가 널 병원에 왜 데려왔다고 생각했어?”

영채는 정호를 잠시 똑바로 바라보다 차갑게 웃었다.

“잘됐네요. 나도 낳기 싫었어요.”

“너도 싫다고?”

민재가 급해졌다.

“영채야, 잘 생각해. 화가 난다고 결정할 일이 아니야.”

“괜찮아, 민재 오빠.”

영채는 정호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자기 친자식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없애겠다는 인간인데, 그런 피를 물려받은 아이가 뭐가 다르겠어?”

‘정호를 저렇게 욕한다고?’

민재는 본능적으로 정호의 표정을 살폈다.

예상대로 좋을 리가 없었다.

정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영채도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손부터 내밀었다.

“아이를 없애길 원하면 2천억 원 줘요.”

민재가 기겁하며 돌아봤다.

“영채야, 아무리 그래도 금액이 너무 크잖아.”

“좋은 유전자를 고르는 데도 수십억 원씩 들어가는데, 문정호 대표의 유전자를 가진 아이가 2천억 원 값어치도 없어요?”

민재는 아예 할 말을 잃었다.

정호가 영채를 바라보다 조용히 비웃었다.

“이제 연기는 끝났나?”

영채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2천억 원 받아서 화해그룹 살리려고 온 거지?”

영채는 잠깐 멈칫했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문 대표님, 소식이 빠르시네요.”

“화해그룹이 무너질 판인데 바로 지금 네가 나를 찾아왔어. 어려운 추리는 아니지.”

“서로 원하는 걸 알았으니 돌려서 말하지 말죠.”

영채가 태연하게 말했다.

“나랑 결혼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나도 꼭 문 대표랑 결혼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대신 아이를 없애라면 2천억 원 줘요.”

민재가 정호의 팔을 툭 쳤다.

“이건 뭘 선택해도 손해 아니야?”

정호는 민재를 무시하고 영채에게 물었다.

“내가 너랑 결혼하면?”

“결혼 조건으로 2천억 원.”

정호가 비꼬듯 웃었다.

“그쪽이 더 손해인데?”

민재는 괜히 코끝을 긁었다.

영채는 속이 부글거렸다.

‘이 인간이 지금 나를 가지고 노나?’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결혼까지 해 주고 2천억 원도 내야 하다니, 정호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손해였다.

“2천억 정도는 문 대표한테 큰돈도 아니잖아요.”

“정호가 돈이 없어서 이러는 건 아닌데, 영채야...”

민재가 눈짓을 계속 보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잖아.”

영채는 민재 쪽은 보지도 않았다.

“당연하게 요구할 만한 ‘카드’가 있으니까요.”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전화 한 통이면 임신한 사실이 바로 문태국 회장님 귀에 들어가요. 그때는 문 대표가 나랑 결혼 안 해도 2천억 원쯤은 받을 수 있겠죠.”

민재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럼 처음부터 회장님을 찾아가지 그랬어?”

“어느 쪽 손을 잡든 돈은 받을 수 있겠죠. 그래도 문 대표님과 회장님이 다정한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인 척하는 게 전부 연기라는 정도는 알아요.”

영채가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먼저 문 대표를 찾아온 건 내가 누구 편인지 보여주려는 거예요.”

민재는 정호를 힐끗 보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정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영채를 살폈다.

영채도 피하지 않았다. 환하게 웃는 얼굴은 창밖의 여름 햇살보다 더 선명했다.

정호가 영채에게 다가왔다.

영채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정호는 멈추지 않고 거리를 좁히면서 영채를 벽 앞까지 몰고갔다.

“또 뭘 알고 있지?”

“문씨 집안 이야기는 그 정도만 알아요.”

영채가 고개를 들어 차가운 눈을 마주 봤다.

“문 대표 말고는 문씨 집안 사람들하고 따로 엮인 적도 없어요. 조사해 보면 다 나올 텐데요.”

정호는 잠시 영채를 응시했다. 영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호가 고개를 조금 숙이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안 무서워?”

영채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가운 벽에 등을 붙인 채 배를 가볍게 쓸었다.

“이 아이를 ‘카드’로 써서라도 문 대표가 화해그룹을 살리게 만들고 싶은 것뿐이에요.”

화해그룹은 무너질 수 없었다. 아버지 한재성이 평생을 바쳐 키운 회사였다.

정호는 영채의 배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봤다.

“살려달라고 할 거면 부탁하는 태도부터 보여.”

정호는 누구를 올려다보는 걸 싫어한다는 말이 있었다. 아마도 고개를 빳빳이 든 영채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채는 평생 누구에게 간절하게 부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기분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아버지 회사를 위해서라면 한 번쯤은 할 수 있었다.

영채가 손을 뻗어 정호 셔츠 자락을 손끝으로 조금씩 움켜쥐었다.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물기가 고이면서, 애원하는 표정만 남았다.

“부탁해요... 문 대표님...”

옆에서 보던 민재가 입을 벌렸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권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저 여자는 정말 필요하면 자존심도 바로 접을 줄 알네...’

영채도 이게 통할지는 몰랐다.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눈앞의 정호가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기다렸다.

머리 위에서 차갑고 매정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이를 가지고 나를 협박하지 말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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