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안에 오래 보관되어 조금은 누렇게 색이 바랜 이 종이 쪼가리처럼 리하르트와 바이올렛의 사이는 그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미 바래고 삭아가는, 잊힌 사이.그럼에도 그가 바이올렛을 떠올리며 그리운 이름이라 칭하는 것에 잠시나마 욱하는 기분이 들다니. 그를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겠다 마음 먹었으면서 쓸데없는 감정을 품는 것도, 그 감정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도 모두 나답지 않았다.나는 손안에 종이를 꽉 구겨 쥐고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하아……. 집중해, 분노해, 에스텔! 칼을 갈고 독을 품어야지.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혼잣말이 제멋대로 삐져 나간 감정의 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냈다. 내게 감정이란 쓸모없는 변수일 뿐이니까.* * *비음 섞인 웃음소리와 높은 음정의 호객하는 소리, 끈적한 음악이 온 거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어머, 언니! 호위 기사가 이렇게 귀여우면 이런데 데려오는 게 아닌데—. 아하하핫!”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화려한 조명에 농을 걸어오는 여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로소피어텔(Rosso-Viertel)은 아노리스의 가장 더럽고 화려한, 온갖 꽃들이 넘치는 거리였다.
Última actualización : 2026-10-14 Leer má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