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나는 눈썰미가 썩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치가 없는 머저리도 아니었다.
“하!”
나란히 선 레이야와 바이올렛을 보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었다. 둘은 아무리 봐도 혈연관계임이 분명했다.
“소공작과는 가족 같은 사이였겠군요. 그런 사람에게 차인 셈이니 목숨을 걸 만큼 힘들어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후—, 이 아가씨가 머리만 좋으면 뭐 하나, 완전 헛똑똑이야!”
바이올렛이 질색했다. 솔직히 자세한 내막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둘의 서사가 사춘기 시절 읽었던 연애소설처럼 풋풋하고 아름답다면 둘 사이에 낀 내가 너
황실 조사단의 파견은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시기보다 빠른 행보였다.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쇼어의 행동 개시 시점을 백작위의 승계가 확정되고 난 후로 점치고 있었다. 하트먼 백작이자 아노리스의 방패, 라이오넬 하트먼이 백작위 승계를 공표했다는 것은 곧 그의 건강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쇼어 남작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 “하트먼 백작님은 안중에 없는 듯했습니다. 꼭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처럼요.”아버지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때에 싸움을 걸어왔다는 것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건강이 틀림없이 나빠질 것이라는 철통같은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내가 하트먼에 숨어든 쇼어의 수족을 모두 처단한다 하더라도 절대 끊어낼 수 없는 벨머쉬필 공급망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레이 경, 아무래도 나는 돌아가 봐야겠어.” “소백작님, 반드시 소공작님을 대동하십시오. 벨머쉬필이 연관되어 있는 이상 그것의 성분과 제조 방법을 알리고 반입 루트에서 하트먼이 결백하다는 것을 밝혀줄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뿐이니까요.” “훗.”내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모르는 레이 경 덕분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한시라도 빨리 백작저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 연회에서 하트먼의 화려한 귀환을 공표했다고 하더라도 황실 조사단을 맞이했을 백작저는 혼란할 것이 분명했다.나는 이미 이 연회에서 얻고자 했던 것들을 모두 쟁취했다. 그러니 당장 떠난다 하더라도 조
부와 권력은 그 무엇보다 정의에 가까운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두를 손에 쥔 자에게 세상은 참으로 관대했다.과거의 하트먼이 그랬다. 아무리 지독한 추문이라도 한겨울 소리 없이 뱉어내는 입김처럼 잔상만을 남긴 채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오늘, 하트먼은 다시금 권력의 중심에 섰다. 끔찍했던 내 과거 언행들이 그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았던 것처럼 나와 리하르트의 부정한 관계는 그렇게 덮일 것이다.내게 바른 도리나 정의 같은 이념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권력을 잃는 순간 정의라 믿었던 것들조차 누군가의 견해에 의해 절대 악으로 매도당했었으니까.황제 앞에서 내게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거에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이념을 짊어지고 왜 그리 고통스러워했었는지.나는 엷은 미소로 리하르트를 끌어당겨 짧은 포옹을 했다. 그의 맹세를 이 에스텔 하트먼이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취하였음을, 그가 나의 소유임을 모두에게 선언하듯이 말이다.쿵쿵쿵.귓가에 세차게 뛰는 리하르트의 심장 소리가 스쳐 갔다.이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은 이곳에 있지 않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연극이었다. 제 형을 향한 비뚤어진 질투로 나의 날개를 꺾고 심연에 처박아 두려 한 우매하고 비겁한 자를 위한 연극.
나는 눈썰미가 썩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치가 없는 머저리도 아니었다.“하!”나란히 선 레이야와 바이올렛을 보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었다. 둘은 아무리 봐도 혈연관계임이 분명했다.“소공작과는 가족 같은 사이였겠군요. 그런 사람에게 차인 셈이니 목숨을 걸 만큼 힘들어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후—, 이 아가씨가 머리만 좋으면 뭐 하나, 완전 헛똑똑이야!”바이올렛이 질색했다. 솔직히 자세한 내막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둘의 서사가 사춘기 시절 읽었던 연애소설처럼 풋풋하고 아름답다면 둘 사이에 낀 내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악역에 불과할 것 같아서다.그러나 바이올렛은 심드렁한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이야기를 풀어냈다.“리키에겐 나도 내 어머니도 다 짐일 뿐이야. 넌 내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잘 알잖아. 내겐 이 질긴 목숨이 너무나 소중하거든.”“……리키?”애칭을 부르는구나 하는 생각보다 귀에 익은 ‘리키’라는 애칭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그 애칭이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바이올렛의 다음 말이 온 신경을 휩쓸어간 탓이다.“리하르트 말이야. 오라버니에게 짐이 되지 않
“리라 물 좀. 목말라.”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바이올렛의 담배 향이 남아 있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끙.”술이 얼마나 독한지 근육통이라도 생긴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술에 취해 기억이 사라졌다. 어떻게 공작저까지 되돌아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눈을 떴을 때는 아비스의 침실이었다.기억 나는 것이라곤 술을 털어 넣고 난 뒤 속이 타는 것 같은 기분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것, 자욱했던 담배 연기, 창 너머로 들리던 꽃 같은 여인들의 웃음소리 같은 희미한 분위기뿐이었다.베개에 머리를 그대로 처박고 엎드린 채 팔만 이불 밖에 꺼내 물을 청했다. 손에 차가운 잔이 와닿았다. 잔 안에 얼음이 부딪혀 짤랑, 하는 소리를 냈다. 나를 위해 얼음물을 준비해 준 리라의 배려가 고마웠다.물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남아 있는 얼음을 손에 덜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취기가 남아 얼음을 가져다 대는 순간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기화해 버릴 것 같았다.얼음이 녹아 손목을 타고 팔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물은 곧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 리라의 잔소리가 쏟아지기 전에 옷을 벗어낼 참이었다.하나, 둘 단추를 풀고 한쪽 어깨로 옷자락이 흘러내렸을 때였다.“제 취향은 벗기는 거지만 직접 벗
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안에 오래 보관되어 조금은 누렇게 색이 바랜 이 종이 쪼가리처럼 리하르트와 바이올렛의 사이는 그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미 바래고 삭아가는, 잊힌 사이.그럼에도 그가 바이올렛을 떠올리며 그리운 이름이라 칭하는 것에 잠시나마 욱하는 기분이 들다니. 그를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겠다 마음 먹었으면서 쓸데없는 감정을 품는 것도, 그 감정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도 모두 나답지 않았다.나는 손안에 종이를 꽉 구겨 쥐고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하아……. 집중해, 분노해, 에스텔! 칼을 갈고 독을 품어야지.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혼잣말이 제멋대로 삐져 나간 감정의 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냈다. 내게 감정이란 쓸모없는 변수일 뿐이니까.* * *비음 섞인 웃음소리와 높은 음정의 호객하는 소리, 끈적한 음악이 온 거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어머, 언니! 호위 기사가 이렇게 귀여우면 이런데 데려오는 게 아닌데—. 아하하핫!”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화려한 조명에 농을 걸어오는 여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로소피어텔(Rosso-Viertel)은 아노리스의 가장 더럽고 화려한, 온갖 꽃들이 넘치는 거리였다.
쨍그랑!“에스텔 하트먼! 그 계집년만 아니었어도!”술잔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며 유리 조각이 바짓단에 튀었다. 안 그래도 최악이었던 기분이 바짓단에 튄 잔해물에 엉망으로 변했다.“재수가 없으니, 잔이 깨져도 이 지랄이야!”새 잔을 집어 들자 브론딘이 얼른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남작님, 모두 예상대로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예상대로? 이 멍청한 놈! 예상대로 된 것이면 빚더미에 앉을 일 따위 없었겠지!”분명히 곡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뛸 것이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노리스는 극심한 기아에 허덕일 것이고 하트먼은 손가락질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충성심 높은 하트먼의 부관들을 매수하는 것부터 남작가 재정은 이미 바닥이었다. 그것을 만회해 보고자 급하게 곡식을 사들여 더 비싼 값에 팔아보고자 한 것이 오히려 남작가 재정을 파탄내 버렸다.반대로 처참한 몰골로 불행을 탓하고 망가져야 했을 에스텔은 날이 갈수록 본래의 위엄을 되찾아갔다. 내게 자비를 구하고 결국 내 소유물이 될 깜찍한 년이 그 똑똑한 머리와 재주로 어떻게든 이 고비를 넘겨보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결국 내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