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안에 오래 보관되어 조금은 누렇게 색이 바랜 이 종이 쪼가리처럼 리하르트와 바이올렛의 사이는 그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미 바래고 삭아가는, 잊힌 사이.
그럼에도 그가 바이올렛을 떠올리며 그리운 이름이라 칭하는 것에 잠시나마 욱하는 기분이 들다니. 그를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겠다 마음 먹었으면서 쓸데없는 감정을 품는 것도, 그 감정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도 모두 나답지 않았다.
나는 손안에 종이를 꽉 구겨 쥐고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하아……. 집중해, 분노해, 에스텔! 칼을 갈고 독을 품어야지.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
황실 조사단의 파견은 당연한 수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시기보다 빠른 행보였다.나를 포함한 대부분은 쇼어의 행동 개시 시점을 백작위의 승계가 확정되고 난 후로 점치고 있었다. 하트먼 백작이자 아노리스의 방패, 라이오넬 하트먼이 백작위 승계를 공표했다는 것은 곧 그의 건강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쇼어 남작이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지?” “하트먼 백작님은 안중에 없는 듯했습니다. 꼭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처럼요.”아버지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때에 싸움을 걸어왔다는 것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건강이 틀림없이 나빠질 것이라는 철통같은 믿음이 있는 것이다. 이는 곧 내가 하트먼에 숨어든 쇼어의 수족을 모두 처단한다 하더라도 절대 끊어낼 수 없는 벨머쉬필 공급망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레이 경, 아무래도 나는 돌아가 봐야겠어.” “소백작님, 반드시 소공작님을 대동하십시오. 벨머쉬필이 연관되어 있는 이상 그것의 성분과 제조 방법을 알리고 반입 루트에서 하트먼이 결백하다는 것을 밝혀줄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분뿐이니까요.” “훗.”내가 무엇을 준비했는지 모르는 레이 경 덕분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한시라도 빨리 백작저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 연회에서 하트먼의 화려한 귀환을 공표했다고 하더라도 황실 조사단을 맞이했을 백작저는 혼란할 것이 분명했다.나는 이미 이 연회에서 얻고자 했던 것들을 모두 쟁취했다. 그러니 당장 떠난다 하더라도 조
부와 권력은 그 무엇보다 정의에 가까운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두를 손에 쥔 자에게 세상은 참으로 관대했다.과거의 하트먼이 그랬다. 아무리 지독한 추문이라도 한겨울 소리 없이 뱉어내는 입김처럼 잔상만을 남긴 채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사라졌다.오늘, 하트먼은 다시금 권력의 중심에 섰다. 끔찍했던 내 과거 언행들이 그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았던 것처럼 나와 리하르트의 부정한 관계는 그렇게 덮일 것이다.내게 바른 도리나 정의 같은 이념은 더 이상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권력을 잃는 순간 정의라 믿었던 것들조차 누군가의 견해에 의해 절대 악으로 매도당했었으니까.황제 앞에서 내게 손가락질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과거에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한 이념을 짊어지고 왜 그리 고통스러워했었는지.나는 엷은 미소로 리하르트를 끌어당겨 짧은 포옹을 했다. 그의 맹세를 이 에스텔 하트먼이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취하였음을, 그가 나의 소유임을 모두에게 선언하듯이 말이다.쿵쿵쿵.귓가에 세차게 뛰는 리하르트의 심장 소리가 스쳐 갔다.이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은 이곳에 있지 않은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한 연극이었다. 제 형을 향한 비뚤어진 질투로 나의 날개를 꺾고 심연에 처박아 두려 한 우매하고 비겁한 자를 위한 연극.
나는 눈썰미가 썩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눈치가 없는 머저리도 아니었다.“하!”나란히 선 레이야와 바이올렛을 보고 있으니 부정할 수 없었다. 둘은 아무리 봐도 혈연관계임이 분명했다.“소공작과는 가족 같은 사이였겠군요. 그런 사람에게 차인 셈이니 목숨을 걸 만큼 힘들어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후—, 이 아가씨가 머리만 좋으면 뭐 하나, 완전 헛똑똑이야!”바이올렛이 질색했다. 솔직히 자세한 내막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둘의 서사가 사춘기 시절 읽었던 연애소설처럼 풋풋하고 아름답다면 둘 사이에 낀 내가 너무나도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악역에 불과할 것 같아서다.그러나 바이올렛은 심드렁한 내 반응에도 불구하고 지나간 이야기를 풀어냈다.“리키에겐 나도 내 어머니도 다 짐일 뿐이야. 넌 내 목숨이 얼마나 질긴지 잘 알잖아. 내겐 이 질긴 목숨이 너무나 소중하거든.”“……리키?”애칭을 부르는구나 하는 생각보다 귀에 익은 ‘리키’라는 애칭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그 애칭이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바이올렛의 다음 말이 온 신경을 휩쓸어간 탓이다.“리하르트 말이야. 오라버니에게 짐이 되지 않
“리라 물 좀. 목말라.”머리카락 사이사이에 바이올렛의 담배 향이 남아 있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끙.”술이 얼마나 독한지 근육통이라도 생긴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술에 취해 기억이 사라졌다. 어떻게 공작저까지 되돌아왔는지 알지 못했지만 눈을 떴을 때는 아비스의 침실이었다.기억 나는 것이라곤 술을 털어 넣고 난 뒤 속이 타는 것 같은 기분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던 것, 자욱했던 담배 연기, 창 너머로 들리던 꽃 같은 여인들의 웃음소리 같은 희미한 분위기뿐이었다.베개에 머리를 그대로 처박고 엎드린 채 팔만 이불 밖에 꺼내 물을 청했다. 손에 차가운 잔이 와닿았다. 잔 안에 얼음이 부딪혀 짤랑, 하는 소리를 냈다. 나를 위해 얼음물을 준비해 준 리라의 배려가 고마웠다.물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남아 있는 얼음을 손에 덜어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취기가 남아 얼음을 가져다 대는 순간 치익, 하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기화해 버릴 것 같았다.얼음이 녹아 손목을 타고 팔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볼을 타고 흘러내린 물은 곧 옷깃을 적시기 시작했다. 리라의 잔소리가 쏟아지기 전에 옷을 벗어낼 참이었다.하나, 둘 단추를 풀고 한쪽 어깨로 옷자락이 흘러내렸을 때였다.“제 취향은 벗기는 거지만 직접 벗
조금은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안에 오래 보관되어 조금은 누렇게 색이 바랜 이 종이 쪼가리처럼 리하르트와 바이올렛의 사이는 그 정도밖에는 안 되었다. 이미 바래고 삭아가는, 잊힌 사이.그럼에도 그가 바이올렛을 떠올리며 그리운 이름이라 칭하는 것에 잠시나마 욱하는 기분이 들다니. 그를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겠다 마음 먹었으면서 쓸데없는 감정을 품는 것도, 그 감정이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종류라는 것도 모두 나답지 않았다.나는 손안에 종이를 꽉 구겨 쥐고는 지하실을 빠져나왔다.“하아……. 집중해, 분노해, 에스텔! 칼을 갈고 독을 품어야지. 쓸데없는 일로 시간 낭비하지 마.”혼잣말이 제멋대로 삐져 나간 감정의 가지를 가차 없이 잘라냈다. 내게 감정이란 쓸모없는 변수일 뿐이니까.* * *비음 섞인 웃음소리와 높은 음정의 호객하는 소리, 끈적한 음악이 온 거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어머, 언니! 호위 기사가 이렇게 귀여우면 이런데 데려오는 게 아닌데—. 아하하핫!”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유령처럼 나타났다 소음 속으로 사라졌다. 화려한 조명에 농을 걸어오는 여인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로소피어텔(Rosso-Viertel)은 아노리스의 가장 더럽고 화려한, 온갖 꽃들이 넘치는 거리였다.
쨍그랑!“에스텔 하트먼! 그 계집년만 아니었어도!”술잔이 바닥에 부딪혀 깨지며 유리 조각이 바짓단에 튀었다. 안 그래도 최악이었던 기분이 바짓단에 튄 잔해물에 엉망으로 변했다.“재수가 없으니, 잔이 깨져도 이 지랄이야!”새 잔을 집어 들자 브론딘이 얼른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남작님, 모두 예상대로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예상대로? 이 멍청한 놈! 예상대로 된 것이면 빚더미에 앉을 일 따위 없었겠지!”분명히 곡물의 가격이 천정부지로 뛸 것이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노리스는 극심한 기아에 허덕일 것이고 하트먼은 손가락질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충성심 높은 하트먼의 부관들을 매수하는 것부터 남작가 재정은 이미 바닥이었다. 그것을 만회해 보고자 급하게 곡식을 사들여 더 비싼 값에 팔아보고자 한 것이 오히려 남작가 재정을 파탄내 버렸다.반대로 처참한 몰골로 불행을 탓하고 망가져야 했을 에스텔은 날이 갈수록 본래의 위엄을 되찾아갔다. 내게 자비를 구하고 결국 내 소유물이 될 깜찍한 년이 그 똑똑한 머리와 재주로 어떻게든 이 고비를 넘겨보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결국 내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