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시아주버니를 정부로 두기로 했다.: Chapter 11 - Chapter 20

51 Chapters

10.

번화가에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벌레가 기는 듯한 시선이 온몸을 훑는 것 같았다. ​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반응이 꽤 익숙했으니까. 어디를 가나 따라붙는 노골적인 시선과 질투 어린 말은 내가 제국의 가장 화려한 꽃임을 증명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만은 달랐다. 평판이 며칠 사이에 처참한 상태로 변해 있었다. 사람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내 모습은 황실을 속이려 한 천하의 악녀였으며 몰염치하고 간악한 마녀였다. ​ 나를 과녁으로 삼은 듯 날카로운 말들이 거침없이 날아와 꽂혔다. “재수 없으려니까, 낯짝 한번 두껍네.” ​ 무례한 말의 끝에는 악랄한 행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 나를 욕하던 사람들은 못 볼 꼴을 본 것처럼 가래침을 모아 퉤 바닥에 뱉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 황제의 앞에서 그간의 악행을 지탄받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분노가 치미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참을성이 바닥났다. 결국 레이스 부채를 펴 입을 가리고 혼잣말을 뱉었다. ​ “이젠 하다 하다 개 짖는 소리까지 신경이 쓰이네.” ​ 속닥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발가벗겨진 채로 길거리에 내던져진 것 같은 치욕을 느꼈다. 그 참담한 기분을 얼굴에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그럴수록 형체없는 악의에 먹잇감만 될 뿐이니까.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입을 나불거리는 한심한 작자들의 앞으로 나아가 결투라도 신청하고 싶었다. 내가 이를 악물고 도도한 품위를 그대로 유지하자 사람들은 다시 ‘독한 년, 자존심이라곤 없는 년’ 등의 막말을 뱉었다. ​ 나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도도한 걸음으로 라 반틸로 주얼리숍 문을 열었다. ​자그락— ​ 잘그락거리는 비즈발 소리에 주얼리숍 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 소리를 기점으로 ‘어머, 어쩜! 와아.’등의 감탄사가 주얼리숍 안을 술렁이게 했다. 한쪽 구석에 약혼반지를 맞추러 온 여인이 약혼자의 발등을 구둣발로 꾹 눌러 밟았다. “야, 침 닦아라. 아주 앞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Read more

11.

프레데릭과 설전이 있었음에도 결혼 준비는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내 의사따위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말이다. 물론, 결혼을 신경 쓰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그럴 시간도 없었다. ​ 아버지가 쓰러졌다.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보름간의 옥 생활을 견뎠으니 탈이 날 만도 했다. 아버지의 빈자리는 가주 대리인 내 몫이었다. 가뜩이나 경계가 발생해 혼란에 빠진 영지민들을 그냥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 “베딘, 지금 상황이 어떻다고?” “경계 근방의 농지를 일구는 농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황실 기사단이 팻말을 걸고 출입을 금하고 있어서라고 합니다. 파종 시기가 도래하면서부터는 시위로 변질되었습니다. ​ 지난 이틀간 기사단을 파견해 중재를 했으나 농민 대표가 이번 주말에 백작저 앞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보좌관 하르펜 경은 농수축산물과 농지를 관리했다. 그가 나서서 조율해야 했을 일이 여전히 처리되지 않았다니. 업무 태만의 정도가 도를 넘었다. ​ “하—! 하르펜 경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지?” “그, 그것이 하르펜 경은 쇼어 남작과 손을 잡아서…….” ​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르펜이 쇼어 남작에게 넘어갔다. 겉으로 드러난 인물이 많지 않다 뿐이지 보좌관 대부분이 쇼어에게 넘어갔을 것이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하트먼이 정말 무너져 내릴 게 분명했다. ​ “베딘, 쇼어 남작과 연관 있는 보좌관 전부 직위해제하고 가신 회의 소집해. 내가 믿을 만한 보좌관을 다시 들여야겠으니까. 그리고…….” ​ 나는 서류에 적힌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 쇼어를 거치지 않고 경계 근방의 토질 연구를 하려면 하트먼 환경연구원의 인력이 필수였다. 하트먼 환경연구원은 리하르트와의 약혼을 기점으로 벨테레브의 생태환경 연구를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약혼이 파기되며 그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사업, 연구들이 모조리 멈췄다. 하트먼 환경연구원도 마찬가지였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강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Read more

12.

악몽. ​ 끔찍한 악몽임이 틀림없었다. ​ 어째서 내 모든 것을 앗아간 그 빌어먹을 경계가 프레드의 손바닥 위에 떠오른 것인지. 내가 완전히 미쳐버렸거나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환각을 보는 것이 아니고서야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 나는 반사적으로 프레드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어냈다. ​ “너…… 뭐야!” ​쿵!! ​ 무방비 상태였던 프레드가 침대 밑 낡은 마룻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는 고통을 삼키며 다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차마 내 곁으로 다가서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꿇어앉았다. ​ “꼭 가야만 합니다. 제가 아니면 경계를 닫을 수 없을 테니까요.” ​ 어째서 경계가 프레드의 손 위에 모습을 드러냈는지,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그의 손 위에 있던 경계가 다시금 모습을 감춘 것까지.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 “경계를 닫아?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너 대체 뭐야.” ​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방금까지 나와 입을 맞추고 살을 맞댄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 그가 벨테레브의 사주를 받아 경계를 열었다면, 그리고 그 경계가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것이라면, 당장 눈앞에 있는 자가 나를 기만하고 속였다면……. 온갖 추측들이 머릿속을 혼란하게 했다. ​ 나는 더듬더듬 손으로 침대 옆을 더듬었다. 허벅지 상처를 치료할 때 사용했던 가위가 손에 잡혔다. ​ 그를 신뢰했다. ​ 손발이 다 묶여버린 상태에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나다운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하트먼을 노리는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지금 이 상황에 냉정할 수 없었다. 나는 가위를 그에게 겨누고 말했다. ​ “제대로 설명해. 너 대체 뭐야. 나를 속였어?” ​ * * * ​ 프레드를 의심한 건 4년 전 벨테레브 공작가에서 주최한 사냥 유희에 참여했을 때였다. 가을걷이가 끝난 상황에 열린 사냥 유희라니. ​ 잘못도 없는 생명을 그저 유흥을 위해 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Read more

13.

“백작령에 나타난 경계는 제가 연 게 아닙니다. 누군가 경계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당신의 모든 것을 반드시 되돌려드리겠습니다.” ​ 프레드의 목소리가 비장하게 느껴졌다. ​ 경계를 다룬다는 말 자체가 생소했다. 그러나 프레드가 거짓을 일삼는 이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경계의 주인을 찾아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 “하—.” ​ 끝 모를 혼란스러움과 끔찍한 피로감이 뒤섞인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찰캉 ​ 손아귀에 힘이 빠져서 들고 있던 가위가 나무 바닥 위에 요란한 소리로 떨어졌다. ​ 프레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내 손을 붙잡았다. ​ “믿어주세요. 저만이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 ​ 그의 손이 어쩔 줄 몰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 그를 믿어도 되는 걸까. ​ 나는 거미줄처럼 뒤엉킨 혼란한 마음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었다. 내 가문을 박살 낸 그 끔찍한 경계를, 고작 주먹만 한 크기로 만들어 손에 쥐고 있던 그 서늘한 광경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해. 네가 경계를 닫지 않아도 하트먼은 충분히 일어설 수 있어. 그러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네 그 복잡한 사정에 내 상황을 변명처럼 들이밀지 마. 원치 않으니까.” ​ 오두막을 나오며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 다짐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를 만나는 것 자체가 오히려 고문이 될 테니. ​ 그때의 나는 경계의 주인과 새롭게 알게된 법칙, 프레드를 향한 연민으로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와 벨테레브와의 관계를……. ​ * * * ​ 복잡한 마음을 안고 백작저로 도착하자 베딘이 서신을 들고 찾아왔다. ​ “소백작님, 벨테레브 소공작께서 요청을 수락하셨습니다.” “이리 주세요.” ​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던 리하르트의 자필 서신이었다. 정갈한 글씨는 꼭 그의 외모만큼이나 수려한 모양새였고 문장 또한 그를 닮은 참 매끄럽게 적어 내려간 명문이었다. ​ 신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Read more

14.

리하르트의 몸을 감싸고 있던 두꺼운 망토 자락의 가운데서 열 살이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아이 하나가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아이는 성난 내 얼굴을 보자 울음을 터뜨렸다. ​ “흐아아앙!” ​ 흉흉했던 기세가 멎었다. 아이는 그의 단단한 팔 안쪽에 바들바들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 폭동의 한가운데, 리하르트는 제 말과 몸을 던져 그 아수라장 속에서 아이를 구출해 낸 것이다. ​ 당혹스러움에 눈을 끔뻑거렸다. 내게 우는 아이를 달래는 재주는 없으니까. 오히려 리하르트가 능숙하게 아이를 달랬다. ​ “꼬마야, 이제 괜찮아. 울지 마.” ​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의 엄마가 뛰쳐나왔다. 아이는 제 어미를 보자 더 큰 울음을 터트렸다. ​ 아이 엄마는 리하르트에게 연신 고개를 숙여가며 감사 인사를 했다. 무기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 아이를 구한 것이었나. ​ “아…….” ​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화를 냈던 것이 무안해졌다. 리하르트가 달라졌다. 기억 속의 리하르트는 남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거만한 태도로 남을 내려다보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심지어는 무릎이 까진 아이의 다리에 제 손수건을 묶어주는 모습이라니. ​ 리하르트는 대체 왜 달라진 것일까. 파혼했기 때문일까. 그의 진실한 모습을 약혼이라는 족쇄가 가리고 있었던 것일까. ​ ‘리하르트, 당신은 내가 그렇게 싫었습니까?’ ​ 물을 수 없는 질문이 가슴에 흉터처럼 남았다. 원치 않는 사람과의 약혼을 깨트리고 싶어서 태도를 바꾸고 교만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도 불사했던 것일까 생각하니 비참했다. ​ 그러나 지금은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더 급했다. 나는 사람들의 앞에 섰다. 농민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다시 농사를 시작하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바였다. ​ 나는 그 순간에 진정으로 마녀도, 악녀도, 악마도 되리라 마음먹었다. 감히, 나의 영지민들이 적법하게 제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것을 막고 있는 기사단에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Read more

15.

그는 마치 고장 난 사람처럼 굴었다. 찻잔을 제대로 들지도 못해 찻물을 흘리질 않나, 혼자 공상에 빠져 묻는 말에 답하지 못하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다 별안간 그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지기도 했다. ​ 변화무쌍한 표정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약혼이 내 결정이었다는 것이 이렇게 감정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동요할 만한 일이었을까. ​ ‘기분이 이상해.’ ​ 가슴이 답답한 것도 같고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와의 약혼이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일찍 알렸다면 그와의 관계가 조금은 달랐을까. ​ ‘허튼 생각!’ ​ 이미 끝나버린 사이에 새로이 감정을 덧입혀서는 안 된다. 그에게 남은 감정 따위는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 머릿속으로 그가 동요할 만한 이유를 억지로 끄집어내고 보탰다. ​ 마침내 폭동을 잠재우던 때를 떠올렸다. 검제라 불리는 그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곡예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성난 군중들 사이에서 조그마한 아이를 끄집어 올렸다는 것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거기에 그의 오만함을 덧대어 자존심을 지키려고 다친 것을 숨긴 건 아닐까, 하는 억지스러운 이유를 만들어냈다. ​ “소공작, 어디 다친 것은…….” ​ 무심코 뻗어낸 손에 화들짝 놀란 리하르트가 작게 억눌린 신음을 뱉어냈다. 순식간에 터질 듯이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얼버무렸다. ​ “읏…… 저는, 그…… 괜찮습니다. 저는 먼저 자리를…….” ​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뚝딱대는 모습이라니.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얹은 손등마저 붉어진 채 황급히 도망치듯 자리를 뜨던 그 낯선 등짝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 그 밤, 그와 처음 대면했던 날의 꿈을 꾸었다.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부서지는 금빛 머리칼, 부드럽게 휘어진 새파란 눈동자. ​ 아직은 소년의 풋풋함이 남아 있는 이목구비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 그가 손등 위에 입을 맞추던 순간이 빛바랜 삽화처럼 아련했다. ​ 결국 잠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Read more

16.

끼이익—​조심히 열리는 오두막 문 사이로 프레드의 얼굴이 나타났다.​“에스텔?”겨우 도망쳐 온 곳이 프레드의 오두막이라니. 그럼에도 프레드의 얼굴을 보는 순간 숨쉬기 힘들 만큼 쌓여있던 공포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스스로가 너무나 한심했다. 프레드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물었다.“이 늦은 시간에…… 얼굴은 왜 이렇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자존심이 발길을 다시 공작저로 돌아가도록 채찍질했다. 공작저로 되돌아가려 뒤돌아서자, 프레드가 다급히 내 허리를 당겨 등 뒤에서 나를 꽉 껴안았다.“에스텔! 가지 마십시오.”목덜미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청량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미친 듯이 요동치던 괴롭고 끔찍했던 마음이 속절없이 허물어졌다.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공작저의 그 숨 막히는 괴란함도, 끈적하게 따라붙던 불쾌한 시선들도, 벼랑 끝에 몰린 하트먼의 현실도. 지금 당장 뇌를 마비시킬 만큼 강렬하게 몰두할 무언가가 절실했다. 머릿속을 헤집는 이 지독한 불안감을 모조리 불태워버릴, 가장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도피처가 필요했다. 나는 프레드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과감하게 그의 입술을 빨아들였다. 뜨거운 숨이 얽힌 뒤, 소란하게 일던 불안의 불길은 더 이상 타오르지 못했다. 그저 그 뜨거운 잔열에 짐승처럼 본능에만 충실할 수 있었다.부드럽고 투박한 손길이 자연스럽게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거칠게 젖힌 치맛자락 위로 이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Read more

17.

어스름이 시간의 경계를 흩트리고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밤이 종말을 맞았다. 검에 기대어 그녀를 기다렸다. 자리를 뜨지 않은 것은 순전히 지난날의 과오를 회개코자 함이었다. ​ 그녀가 자의로 약혼을 택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더러운 치정 문제로 그녀를 괴롭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혼은 공작의 뜻대로 놀아나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하지 않겠다 다짐한 자충수. 그것이 어떤 형태로 되돌아올지 몰랐던 어리석은 만행이었다. 오두막에서 마침내 기척이 느껴졌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가 배웅받으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씨발.’ 한 손에 꽉 쥔 검 끝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5년을 꿈꿨던 일이다. 모두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어울리는 자리에 서 있는 것. 지금 이 상황은 분명 내가 원했던 일이었을 터. 마침내 소원했던 것처럼 에스텔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의 옆에, ‘고귀한 프레드’와 ‘불결한 리키’가 각기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당장이라도 오두막으로 뛰어가 에스텔의 몸을 탐한 프레드의 목을 끊어내 버리고 싶어지는 것일까. “후우……” 심란한 마음을 한숨과 함께 길게 뱉어냈다. 한숨이 끝나가도록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기사들의 시신을 덤불 속에 남겨두고 몸을 일으켰다. 새벽이슬에 소매마저 젖은 것인지 몸이 무거웠다. 에스텔은 공허한 눈빛으로 하염없이 바닥만을 응시하며 걷고 있었다. 바닥으로 내리깐 그녀의 속눈썹이 떠오르는 햇빛에 한 올 한 올 그 수까지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헉!” 마침내 그녀가 온통 피를 뒤집어쓴 나를 발견했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헛구역질을 참듯 입을 틀어막고 주춤 뒷걸음질 쳤다.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핏물조차 닦지 않아 끈적하게 말라붙은 모습이니 놀라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지옥에서 올라온 악귀가 따로 없겠군.’ 피 묻은 손을 아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Read more

18.

하트먼 환경 연구원에서 1차 토양 분석 보고서를 보내왔다.​아이러니하게도 토질은 그 전보다 더 좋아졌다. 경계가 생기며 고사한 식물들이 비료의 역할을 했고 경계 근처에서 흩날리는 정체불명의 잿빛 눈은 지력을 높이는데 탁월한 효능이 있었다.​“잿빛 눈을 사용하는 건 우선 보류해. 인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베딘이 놀란 듯 답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기사단의 횡포를 처리하지 못했다면 많은 농지를 포기했을 것이다. “베딘, 세르게이 경을 불러줄래? 보좌관이 없으니 불편하네. 빨리 보좌관을 들여야겠어.”​쇼어 남작의 입김이 닿은 보좌관이 전체 수의 반이 넘어갔다. 언제 이렇게 깊게 침투해 있었던 것인지. 집무가 제대로 이루어지긴 했을지 의문이 드는 순간이었다.​“다른 영지랑 황성에도 구인 공고 올려줘. 보좌관 가족들에게 지급했던 주택과 토지 경작권까지 전부 몰수할 거니까.”​본래라면 보좌관이 은퇴하게 되면 주택과 경작권은 모두 그의 자산이 되었다. 쇼어와 손을 잡은 보좌관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은 오로지 하나. 쇼어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이다.​“당분간 업무 과다로 시달릴 텐데, 남은 보좌관들 포상도 잊지 말고.”“예. 한데, 소백작님 세르게이 경은 왜 다시 부르시는 건가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Read more

19.

나는 프레드를 힐끔 돌아봤다. 굳게 다물린 턱관절에 이는 경련이 눈에 훤히 보였다.​프레드를 호위 삼아 함께 다니다 보면 사람들이 종종 그를 프레데릭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뻔히 하트먼의 기사정복을 입고 있는데도 그의 흑발과 자안을 보며 공작의 핏줄이 틀림없다며 멋대로 소설을 쓰는 것이다.​그 한심한 추리 실력에 폭소가 터질 것 같았다.​“아쉽게도, 제 호위랍니다.”​프레데릭이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일까. 공작 부인의 피를 쏟아놓은 듯한 적갈색 머리카락을 봤다면 결코 저런 소리는 입에 내지 않았을 것이다.​르네드남작부인은 프레드를 힐끔 바라보곤 곧바로 사과를 건넸다.​“어머나, 죄송합니다. 흑발에 자안이라니, 흔히 볼 수 있는 색이 아니다보니 저도 모르게……. 불쾌하셨다면 부디 마음 푸시길.”​프레드는 짧게 묵례로 사과에 답했다. 그러나 불과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럴 때마다 프레드의 얼굴엔 찰나의 서늘한 긴장감이 스치곤 했다. 프레데릭으로 오해 받는 것이 유쾌한 일은 아닐것이다. 그는 무려 내 정인이니까.​그때, 비음섞인 낮은 음의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하트먼 백작 영애, 듣기론 하트먼에서 요즘 농기구 사업에 열심이라던데, 이런 데 올 여유도 있나 봐요?”​드디어 노리던 인물이 접근해 왔다. 아델린 시온이었다. 아델린은 내게 은근한 경쟁의식 같은 게 있었다. 내 평판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보려 안달난 그녀가 이전과 다름없는 화려한 차림으로 나타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역시나 그녀의 은근한 질투심은 내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Read more
PREV
123456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