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마치 고장 난 사람처럼 굴었다. 찻잔을 제대로 들지도 못해 찻물을 흘리질 않나, 혼자 공상에 빠져 묻는 말에 답하지 못하기도 하고, 얼굴을 붉히다 별안간 그의 얼굴빛이 점점 어두워지기도 했다. 변화무쌍한 표정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의 약혼이 내 결정이었다는 것이 이렇게 감정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동요할 만한 일이었을까. ‘기분이 이상해.’ 가슴이 답답한 것도 같고 지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그와의 약혼이 온전히 나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일찍 알렸다면 그와의 관계가 조금은 달랐을까. ‘허튼 생각!’ 이미 끝나버린 사이에 새로이 감정을 덧입혀서는 안 된다. 그에게 남은 감정 따위는 없다. 있어서도 안 된다. 머릿속으로 그가 동요할 만한 이유를 억지로 끄집어내고 보탰다. 마침내 폭동을 잠재우던 때를 떠올렸다. 검제라 불리는 그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곡예나 다름없는 방법으로 성난 군중들 사이에서 조그마한 아이를 끄집어 올렸다는 것을 억지로 끄집어냈다. 거기에 그의 오만함을 덧대어 자존심을 지키려고 다친 것을 숨긴 건 아닐까, 하는 억지스러운 이유를 만들어냈다. “소공작, 어디 다친 것은…….” 무심코 뻗어낸 손에 화들짝 놀란 리하르트가 작게 억눌린 신음을 뱉어냈다. 순식간에 터질 듯이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더듬 말을 얼버무렸다. “읏…… 저는, 그…… 괜찮습니다. 저는 먼저 자리를…….” 여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뚝딱대는 모습이라니.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얹은 손등마저 붉어진 채 황급히 도망치듯 자리를 뜨던 그 낯선 등짝이 도무지 적응되지 않았다. 그 밤, 그와 처음 대면했던 날의 꿈을 꾸었다.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부서지는 금빛 머리칼, 부드럽게 휘어진 새파란 눈동자. 아직은 소년의 풋풋함이 남아 있는 이목구비로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그. 그가 손등 위에 입을 맞추던 순간이 빛바랜 삽화처럼 아련했다. 결국 잠을
Last Updated : 2026-09-14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