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알파의 상처 입은 힐러: Chapter 21 - Chapter 30

50 Chapters

제21장: 진정한 벗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머릿속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내 주위를 분주히 오가는 치유사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망연자실 서 있었다. 매끄러운 바닥 위로 우아한 드레스 자락이 스치고 지나갔고, 말쑥한 정장 차림들이 시야를 어지럽히며 들뜬 대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잦아들었으나,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소음으로 흩어질 뿐이었다.만약 루칸이 나를 알아본다면?짧은 붉은 머리와 목덜미의 짓무른 흉터만으로는 본모습을 감추기에 역부족이라면 어쩌지?스칼렛 베인이라는 거짓을 꿰뚫어 보고, 제 앞에 선 여인이 자신이 내다 버렸던 루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내가 품은 아이의 기운을 눈치채기라도 한다면?손이 본능적으로 배를 찾아가, 헐렁한 옷 아래 아직은 숨길 수 있을 만큼 완만하게 부풀어 오른 자리를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공포가 가슴을 사정없이 옥죄어왔다.머릿속에서 그 끔찍한 광경이 이미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언클로로 질질 끌려가는 내 모습. 다시 루칸의 앞에 무릎 꿇려 세워지는 광경.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내 뺨을 후려치는 그의 손바닥의 서슬 퍼런 작열감까지.소름 끼치는 가정이 꼬리를 물고 밀려들며 숨이 가빠졌다. 아무리 떨쳐내려 발버둥 쳐도 파도처럼 덮쳐와, 그 무게 아래 산 채로 익사할 것만 같았다.다크문 부인이 시야를 가로막고 설 때까지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을 거의 인지하지 못했다.눈을 깜빡였다.처음 만난 이래 처음으로, 그녀는 내게 노골적인 경멸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표정은 애써 차분하게 다잡고 있었으나, 무언가 분명히 달라져 있었다. 자세는 여전히 꼿꼿했지만, 앞으로 모아 쥔 두 손에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짙은 경계심이 그녀의 두 눈에 서려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러워 보였다.“왜 의복을 갖춰 입지 않았지?”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물었다.순간 번뜩이는 묘수가 떠올랐고, 스스로 망설이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가벼운 기침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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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오로스타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평소 같았더라면 그녀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을 것이다. 알레르기 반응도, 다크문 부인의 돌변한 공포도, 알파 디미트리의 위협도. 망설임 없이 마지막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이야기했을 터였다.하지만 알파 디미트리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내 병에 대해 단 한 영혼에게라도 다시 입을 열었다간, 내가 직접 네 목을 벨 것이다.’그는 피오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네가 애지중지하는 그 계집 전사.’우리 둘 중 누구의 목숨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었다.“그게… 이야기가 좀 길어.” 대신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어제 생각보다 기운을 너무 많이 뺐거든.”피오나는 납득하지 못한 채 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정말 그게 다야?”배 위에 손을 얹고 그녀에게 가장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지금은 말이야, 네 조카가 설명보다는 밥에 훨씬 더 관심이 많은 것 같거든.”그녀는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씰룩였다.“아이를 방패막이로 쓰시겠다?” 그녀가 물었다.“통해?”피오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너도 참 대단하다.”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사하겠다고 약속이나 해… 그리고 그 아이는 꼭 딸이어야만 해.”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어린 레이—”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황급히 말을 멈췄다. “어린 스칼렛을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니까.”입술 사이로 작은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어떻게 해볼게.”“그래야지.”가끔은 피오나가 저지르는 일들의 절반이라도 어떻게 무사히 넘어가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이나 조심성도 없이 주방을 유유히 누비며, 마치 이 구역 전체의 총책임자라도 된 양 갓 구운 빵과 구운 고기, 과일과 채소를 거침없이 쓸어 담았다. 바구니를 다 채웠을 때쯤에는 깨끗한 천 아래 가려진 채 하루 종일 먹고도 남을 만큼의 음식이 들어차 있었다.가득 넘쳐나는 바구니를 보았다가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피오나…”그녀는 그저 씩 웃을 뿐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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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장: 거래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내 순찰대원 일곱 명이 목숨을 잃었소.” 억누르기 힘든 분노를 담아 한 음절 한 음절 거칠게 씹어 뱉듯 루칸이 입을 열었다. “그들의 시신은 블러드팽 국경에서 일 마일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습되었고,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당신들의 전사들에게 베여 쓰러졌더군.”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그렇다면 넘어오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탓이겠지.”그의 눈매가 사납게 굳어졌다.“그들은 떠돌이 늑대들을 쫓고 있었소.”“그렇다면 아이언클로의 영토 안에서 쫓았어야 마땅했소.”그의 주먹이 윤이 나는 목제 탁자를 내리쳤고, 그 충격에 탁자 위에 펼쳐져 있던 지도들이 덜컹거렸다.“내 순찰대를 도륙해 놓고 그걸 국경 통제라 부르는 거요?”“나는 그것을 국경 수호라 부른다오.” 내가 받아쳤다. “아이언클로가 제멋대로 무시한다 해서 블러드팽의 규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길고 긴 몇 번의 호흡 동안 우리 둘 다 입을 열지 않았다.탁자 주변에 둘러앉은 내 회의 석상의 수하들은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이 이상의 참견을 삼가고 침묵을 지키는 현명한 선택을 내렸다. 내 오른쪽 어깨 뒤편에 버텨 선 베타 페트루는 흉터 난 얼굴에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을 띠고 있었으나, 루칸의 안색에 스치는 미세한 변화 하나 놓치지 않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정적을 먼저 깬 것은 루칸이었다.“내 전사들을 도륙하는 데 쏟는 시간 대신 당신의 영토를 통제하는 데 더 신경 썼더라면, 우리 둘 다 여기서 이토록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오.”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의 시선을 받아쳤다.“블러드팽의 문장을 품은 전사라면 누구나 우리 국경이 어디서 끝나는지 정확히 알고 있소.” 손가락으로 조각된 팔걸이를 한 번 톡 두드린 뒤 멈추었다. “만약 당신의 순찰대가 아이언클로의 땅과 내 영토조차 분간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자들을 가르친 알파에게 문제가 있다는 뜻이겠지.”루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으나, 눈동자에는 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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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장: 병마와 이름들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나는 그 제안을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가늠해 보았다.일리가 있는 방안이기는 했다. 사라진 아이언클로의 루나를 손에 쥐는 것은 그 어떤 알파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막강한 무기가 되어줄 터였다.그럼에도 나는 거의 망설임 없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다른 방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무고한 여인을 협상 카드로 이용해 선을 넘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그만두지.” 잠시 후 내가 답했다. “레이븐 문섀도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자취를 감추었다면, 그녀에겐 다시 발견되고 싶은 마음 따윈 없는 것이오. 내게 아무런 득도 되지 않을 여인을 찾아내느라 블러드팽의 시간과 자원을 낭비할 생각은 조금도 없소.”페트루는 고개를 숙이며 군말 없이 내 결정을 받아들였다.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왔고, 개인 처소로 향하는 동안 돌로 된 복도를 따라 내 발소리만이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처소로 돌아왔을 때, 시선은 자연스레 연결된 문으로 멎었다.문은 오늘 아침 자리를 비웠을 때와 똑같이 닫혀 있었다.회의가 시작되기 전 이후로 스칼렛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제의 알레르기 반응에서 아직 회복 중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으나, 이내 머릿속에서 털어내 버렸다.그 아이의 안위를 살피는 것은 내 몫이 아니었다.적어도 스스로에게는 그렇게 되뇌었다.그러나 내 발걸음은 그 생각을 완전히 무시한 채, 내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문을 두 번 두드렸다.거의 즉각적으로 문이 열렸다.스칼렛이 내 앞에 서 있었고, 찰나의 순간 나는 내가 알던 그 여인을 보고 있는 것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그녀의 갈색 눈동자는 들뜬 흥분으로 환하게, 거의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늘 그녀를 옭아매고 있던 위태로운 불안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몸을 움츠리거나 바닥에 시선을 처박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순간이나마 자신이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티끌만 한 망설임도 없이 내 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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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마녀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마녀.그 단어는 마치 당연히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인 양 너무나 무심하게 그의 입술을 빠져나왔다.과거 내 삶에서 마녀라는 존재를 소리 내어 입에 올리는 것조차 위험한 짓이었다. 그들은 멸족되었어야 마땅했다. 그들을 언급하는 아득한 옛이야기들과 함께 무덤에 묻혀 사라진 존재들이었다. 말썽을 피우는 어린 강아지들에게 들려주던 무서운 옛날이야기나 굳게 닫힌 문 뒤에서 은밀히 속삭이던 경고 속에서만 살아 숨 쉬는 것들이었다.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금기시되었고, 차라리 잊어버리는 편이 낫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그런데도 알파 디미트리는 마치 그들이 실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내가 자라며 들어온 옛이야기들 너머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라도 한 듯이. 애초에 단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듯이.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한기가 내달렸고, 속이 고통스럽게 뒤틀렸다. 본능적으로 내 안에서 자라나는 작은 비밀 위에 손을 얹으려던 충동을 억눌러야만 했다.마녀가 실재한다면, 내게 감춰진 또 다른 진실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신화나 미신에 불과하다고 배워온 것들 중 또 무엇이 진실이란 말인가? 나는 아이언클로의 성벽 너머 세상을 잘 알고 있다고 믿으며 수년을 살아왔건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만을 깨달았을 뿐이었다.불현듯 목구멍을 턱 막아오는 조여듦을 억누르며 마른침을 삼켰고, 눈앞의 나무 바닥에 시선을 처박았다. 본능적으로 어깨가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직하게 가라앉아 끝자락이 미세하게 떨려 나왔다.“마녀들은 이미 멸족하지 않았습니까, 알파?” 목을 죄어오는 갑작스러운 압박감을 뚫고 억지로 말을 쥐어짰다.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그의 날카로운 초록빛 눈동자가 늘 그렇듯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내 눈을 마주했다. 알파 디미트리가 사람을 빤히 바라볼 때면 묘하게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거의 존재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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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장: 거짓말의 냄새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예, 알파.”후들거리는 다리로 뒷걸음질 쳐 연결된 문으로 향하는 동안,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 요란하게 요동쳤다. 목에 두른 스카프를 고쳐 매며 내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등 뒤로 닫히는 문의 나지막한 딸깍 소리가 비정상적일 만큼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문에 등을 기댄 채 한참 동안 눈을 감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었다.알파 디미트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끊임없이 맴돌며 양옆으로 늘어뜨린 손끝을 여전히 파르르 떨리게 만들었다.‘네가 모르는 것은 세상에 아주 많다, 스칼렛.’‘내일 마녀들을 만나러 갈 것이다.’그 말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어느 쪽이 나를 더 끔찍하게 뒤흔드는지조차 분간할 수 없었다.머릿속을 비워내기 위해 억지로 몸을 움직여 무엇이든 손에 잡히는 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침대 위로 어지러이 흩어져 있던 책들이 먼저였다. 닳아 해진 표지들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며 한 권씩 모아 작은 선반 위에 책등을 맞추어 정갈하게 쌓아 올렸다.‘어둠의 혈통 저주’에 손이 닿았을 때,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다. 페이지들이 거칠게 뜯겨 나간 상처투성이 가장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내리는 동안, 빛바랜 책 제목이 나를 빤히 마주 보았다.오로스타라는 이름이 마음 한구석에 불안하게 가라앉았다. 불과 한 시간 전과는 사뭇 다르게, 어딘가 훨씬 더 묵직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그 책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다음 정리를 이어갔다.다음은 식기들이었다. 먹고 남은 잔여물을 작은 쓰레기통에 털어 넣은 뒤, 그릇을 씻어 본래의 자리에 정돈해 두었다. 탁자와 협탁, 심지어 바닥에 떨어진 몇 조각의 부스러기까지 훔쳐내며, 마치 아무도 머물지 않았던 것처럼 방 안을 말끔히 닦아냈다.몸에 밴 오랜 습관이란 이토록 떨쳐내기 어려운 법이었다.루칸이 광기에 휩쓸려 난동을 부리고 난 뒤, 피로 얼룩진 바닥을 박박 문질러 닦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것을 깨끗하게 되돌려놓기만 하면 그 끔찍한 일들도 없던 일로 지워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모든 정리를 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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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장: 레이븐 문섀도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입안쪽 살을 질끈 깨물자 비릿한 피 맛이 번졌고, 그 통증으로 어지러이 흩어지던 생각들을 본래 처박혀 있어야 할 어둠 속으로 거칠게 밀어 넣었다.고개를 숙이며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감사합니다, 알파.”손가락 끝에 맴돌던 미세한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었다.아침 식사라니.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맴돌았다.그저 내 곁에 있어 주길 바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 나를 식사 자리에 초대한 적이 대체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이번 일은 그런 게 아니었다.결코 그럴 리가 없었다.주변의 방 안은 멈추는 법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하녀들은 알파 디미트리의 남은 옷가지들을 개켜 넣었고, 경비병들은 수백 번은 족히 해본 일인 양 능숙하게 짐을 묶어 고정했다. 오직 나만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얼어붙어 있는 듯했다.알파 디미트리는 군말 없이 몸을 돌렸다.그의 걸음걸이는 길고 여유로웠으나, 나는 그를 따르며 거의 본능적으로 그의 보폭에 발을 맞추고 있었다. 반 걸음쯤 뒤처진 채, 그가 말을 건네면 즉각 답할 수 있을 만큼 가깝고, 내 분수를 잊지 않을 만큼은 떨어진 거리였다.복도를 따라 늘어선 거대한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방탄유리에 부서지더니, 윤이 나는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시종들은 조용히 옆으로 물러섰고, 복도 곳곳에 배치된 경비병들은 알파 디미트리가 지나갈 때마다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어두운 제복에 권총집을 찬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빈틈없이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정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병사들이 아니었다.이 성 그 자체였다.시종들은 일하는 와중에도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젊은 경비병 둘은 보급품을 싣다 말고 농담을 주고받다가, 알파 디미트리가 다가오자 곧바로 차려자세로 돌아섰다.발걸음이 절로 느려졌다.마냥 자유분방한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숨이 턱턱 막히는 공기도 아니었다. 아이언클로와는 완전히 달랐다.그의 뒤편에서 은은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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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장: 출장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입안에 든 빵 조각은 납덩이처럼 무겁게 내려앉았다. 순식간에 메마르고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식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접시 옆에 팽개쳐진 포크 곁에서, 식탁 가장자리를 쥔 내 손가락만이 미세하게 떨려왔다.맞은편에 앉은 베타 페트루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아침 식사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그대로였고, 그의 온 신경은 오롯이 알파 디미트리에게만 쏠려 있었다.우리 둘 다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레이븐 문섀도.내 진짜 이름이 내면 깊숙한 곳을 사정없이 짓찧었다. 소규모 무리들은 이미 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고, 잃어버린 전리품이라도 되찾아 바치듯 나를 루칸에게 넘겨줄 속셈이었다.그런데 나는 지금 블러드팽의 알파의 식탁머리에 흉터 난 치유사이자 버림받은 루나, 스칼렛 베인이라는 이름으로 앉아 있었다.무릎 위에 얹은 손가락을 꽉 그러쥐며, 배를 감싸 안으려는 익숙한 충동이 나를 배신하지 않도록 억눌렀다. 이제 나 혼자만의 목숨을 짊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기가 점점 더 버거워지고 있었다.말 한마디의 실수. 한 번의 부주의한 몸짓. 그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파멸하기엔 충분했다.‘제발.’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동의하지 말아줘. 수색대를 보내지 마.’알파 디미트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식사를 이어갔다. 차분하고 철저히 속을 알 수 없는 태도로, 그는 고기 한 조각을 더 썰어 조금의 조급함도 없이 입으로 가져갔다. 얼굴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떡 벌어진 어깨선은 편안하게 이완되어 있었고, 자세는 늘 그렇듯 흐트러짐이 없었다.마치 베타 페트루가 방금 알파 루칸에게 버림받은 짝을 사냥하자는 제안 따윈 꺼내지도 않은 것처럼.알파 디미트리는 여유롭게 마지막 한 입을 삼킨 뒤 포크를 내려놓았다. 도자기 접시에 금속이 부딪히는 나직한 챙그랑 소리가 비현실적일 만큼 크게 울려 퍼졌다.“네 말이 맞다, 페트루.”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그의 한마디가 내 안의 무언가를 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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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멀미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알파 디미트리는 큼직한 한쪽 손을 운전대 위에 무심히 얹은 채 도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잠시 후 그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득한 세월 동안 감춰져 온 비밀스러운 병의 실마리를 찾으러 가는 길에 운전기사를 대동하는 건 그리 현명한 처사가 아니지 않겠나?”나는 입을 다물었다.그의 말이 맞았다.우리는 마녀들이 지독하게 감추고 있는 답을 찾아 나서는 길이었다. 이토록 위험천만한 일에 불필요한 인원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무런 득도 되지 않았다.상황의 모순이 뼈저리게 와닿았다.알파 디미트리는 자신의 병에 얽힌 진실을 쫓고 있었고, 나는 그의 곁에 앉아 나만의 진실들을 숨기고 있었다.마른침을 삼키며 손 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렇습니다, 알파.”블러드팽의 성채가 뒤로 물러나고 영토 곳곳에 흩어진 굽이치는 도로와 작은 마을들이 이어지는 동안, 몇 마일의 거리가 고요 속에서 지나갔다.성벽 바깥에서 알파 디미트리와 단둘이 남겨진 기분은 성 안에서와는 사뭇 달랐다.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억지로 시선을 못 박으며, 그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의식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밀폐된 차량 내부에서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처음에는 엔진의 잔잔한 웅웅거림과 부드러운 차량의 흔들림이 묘하게 마음을 달래주는 듯했다.그러나 이내 뱃속이 뒤틀리기 시작했다.처음에는 미세했다.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을 만큼 희미한 울렁거림이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코로 천천히 숨을 들이쉬어 그 감각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지금은 안 돼.’‘제발, 지금은 아니야.’뼛속까지 사무치는 피로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던 터라, 어리석게도 최악의 입덧 증상은 훨씬 나중에나 닥쳐올 고민거리일 것이라 기대하기 시작했었다.내 착각이었다.또 한 번의 울렁거림이 밀려왔고, 이번에는 훨씬 더 거셌다. 좌석 위에서 숨죽여 몸을 뒤척이는 동안 이마의 머리칼을 따라 식은땀이 맺혔다. 차 안의 공기가 별안간 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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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장: 불편한 밤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안도감과 새로운 공포가 내 안에서 사납게 부딪쳤다.당장이라도 침대로 기어 들어가 앞으로 사흘 동안 내리 잠만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 상상만으로도 맥박이 요동치며 나를 배신했다. 설마 오늘 하루가 이보다 더 최악으로 치달을 수야 없겠지.정말 그럴까?알파 디미트리가 마침내 차량의 속도를 늦췄을 무렵, 밤은 이미 하늘을 완전히 집어삼킨 뒤였다. 전조등 불빛이 어둠을 갈라내며 고속도로 바로 옆에 자리 잡은 소박한 도로변 여관을 비추었다.탈진으로 온몸이 쑤셔오는 가운데 조수석에서 불편하게 몸을 뒤척였다. 방광을 압박하는 익숙한 무게감이 또다시 차오르기 시작했으나, 입술 안쪽을 질끈 깨물며 침묵을 지켰다.이미 내 탓에 너무 많은 지체를 겪은 뒤였다.알파 디미트리가 차를 주차하고 마침내 시동을 껐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간다.”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알파 디미트리의 뒤를 따랐다. 자갈밭을 가로지르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여관은 소박했으나 현대적이었다. 깔끔한 구조에 자동 유리문이 설치되어 있었고, 작은 로비에서는 은은한 원두커피 향이 풍겼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여인이 안내 데스크 뒤에 앉아 있다가 우리가 다가서자 예의 바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제 앞에 선 사내가 블러드팽의 알파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우리는 그저 하룻밤 묵어가려는 지친 길손 둘에 불과했다.“좋은 저녁입니다. 남은 방이 있습니까?” 알파 디미트리가 늘 그렇듯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여인은 카운터 위에 놓인 태블릿을 두드리더니 미안한 기색의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으시네요. 딱 한 방 남아있습니다. 스탠더드 킹 스위트룸인데, 괜찮으시겠어요?”방이 하나라니.속이 덜컥 내려앉았다.안 돼.안 돼, 절대로 안 돼.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튀어나올 듯 거세게 요동치는 가운데, 그의 곁에 선 채로 얼어붙어 버렸다.오늘 벌어진 그 모든 일들을 겪고 나서 알파 디미트리와 한 방을 쓰는 것은, 단순한 불편함을 넘어 신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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