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알파의 상처 입은 힐러: Chapter 31 - Chapter 40

50 Chapters

제31장: 침대 하나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그의 발소리가 아득히 멀어진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굳게 닫힌 욕실 문만을 망연자실 응시했다.그는 모든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어찌 된 영문인지, 그 사실을 자각하자 스스로 인정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덜컥 겁이 났다.알파 루칸은 제게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눈여겨보지 않는 위인이었다. 내가 종일 탈진에 허덕이고 과로로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어도, 몸이 성치 않으냐며 먼저 물어올 인간이 아니었다. 설령 눈치를 챘다 한들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을 터였다.알파 디미트리는 달랐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그 생각에 가슴속으로 날카로운 공포가 파고들었다.지난 세월 동안 나는 스스로를 지워내고 투명한 존재가 되는 법만을 악착같이 배워왔다. 고통을 삼키고, 필요할 때면 거짓 미소를 지으며, 의문이 위험으로 번질 때면 침묵 뒤로 숨어드는 짓 따위는 이미 몸에 밴 본능이었다. 루칸의 손아귀에서 살아남으며 뼈저리게 배운 바가 있었다. 나약함을 드러내는 대가로 온정을 베풀어주는 이는 세상에 거의 없다는 사실을.그럼에도 알파 디미트리는 내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어 하는 것들을 자꾸만 들춰내어 보고 있었다.이제 나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비단 내 임신 사실만이 아니었다.바로 그 사내 자신이었다. 어느 틈엔가 나는 그가 결코 나를 해치지 않으리라 믿기 시작하고 있었고, 그 깨달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위안이 되어야 마땅할 그 생각이, 도리어 나를 소름 끼치도록 두렵게 만들었다.누군가를 신뢰한다는 것은 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게 주어지던 친절이란 언제나 은밀한 대가가 뒤따르는 법이었고, 미소와 번지르르한 약속 뒤에 숨어 있다가 마침내 내 목을 옥죄는 쇠사슬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알파 디미트리가 이토록 손쉽게 건네는 담담한 온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지켜보고 알아챌 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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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장: 침대 하나 2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잠이 도무지 오지 않았다.눈을 몇 번이나 감고 억지로 생각을 지워내려 애써보아도, 머릿속은 완강하게 버티며 쉬기를 거부했다. 길고 긴 여정이었기에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곯아떨어졌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나는 희미하게 불이 켜진 방의 천장만을 올려다보며, 내 곁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스칼렛의 일정한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짜증스러운 노릇이었다.오랜 운전으로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으나, 정신은 지독할 만큼 잠들기를 거부했다. 눈을 감을 때마다 하루 동안 있었던 파편들이 불청객처럼 밀려들었다. 속을 게워낸 뒤 차 밖에서 파들파들 떨고 있던 스칼렛의 모습. 셀 수도 없이 들락거리던 화장실. 조수석에서 눈조차 제대로 뜨고 있지 못할 만큼 그녀를 짓누르던 피로. 그리고 제 몸이 일으키는 모든 불편함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그 “죄송합니다, 알파”라는 사과까지.앞뒤가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스칼렛은 나와 함께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전혀 멀쩡하지 않은 행색을 하고서 완벽히 멀쩡한 척 우기며 보냈다. 오늘 역시 다르지 않았다.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별안간 탈이 났단 말인가?베개 위로 고개를 살짝 돌리자, 내 곁에 뻣뻣하게 누워 있는 여인에게 시선이 닿았다. 스칼렛은 무언가에 대비해 몸을 웅크린 사람처럼 이불 아래서 온몸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 고집스럽게 천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어깨에 맺힌 긴장감과, 양옆으로 부자연스러울 만큼 미동도 없이 얌전히 붙여둔 두 손이 또렷이 보였다.잠을 청하려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처형을 기다리는 죄인의 모습에 가까웠다.그 꼴을 보고 있자니 마땅히 그래야 할 수준 이상으로 부아가 치밀었다.온종일 함께 붙어 있었건만, 스칼렛은 여전히 감히 침대 절반을 차지했다는 이유로 내가 당장이라도 방 밖으로 내던져버리기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몸을 옆으로 돌려 그녀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자라, 스칼렛.”그녀의 온몸이 상관 앞에서 차렷 자세를 취하는 군인처럼 즉각 굳어졌다. 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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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장: 침대를 부수다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뜨거운 물로 샤워를 마쳤으나 머릿속을 가득 메운 생각들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질서를 되찾아주는 정도는 되었다. 몸에 꼭 맞는 검은 셔츠와 짙은 색 바지를 챙겨 입었을 무렵에는, 이미 스칼렛에 대해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며 스스로를 거의 설득해 낸 상태였다.거의, 말이다.방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창가 쪽 자리에 앉아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업무의 흔적들이 오히려 반가웠다. 레이븐 문섀도의 수색에 관해 페트루가 보내온 보고들이 국경 이동 동향과 내 처결을 요하는 몇몇 사소한 분쟁에 관한 참모진의 보고서 곁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필요한 곳마다 회신을 남기며, 화면 위로 손가락을 거침없이 놀려 하나씩 처리해 나갔다.일은 나를 현실에 단단히 발붙이게 만들었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사방의 벽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다.나는 블러드팽의 알파였다.내 치유사가 밤새 잘 잤는지 따위를 궁금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막중한 일들을 짊어진 몸이었다.나직한 바스락거림이 마침내 손에 쥔 보고서에서 내 주의를 낚아챘다.스칼렛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그녀는 천천히 눈을 몇 번 끔빡이며 잠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이내 방 안을 훑어보고는 내게 시선을 멎었다. 내가 이미 옷을 다 차려입고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어제의 태반을 탈진으로 허덕였던 사람이라기엔 지나치게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그녀의 눈길이 제 곁의 빈 공간으로 잠시 향하더니, 이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아주 미세하게 커졌다.목덜미를 타고 옅은 붉은 기운이 서서히 번져나갔고, 수치심이 그녀의 얼굴 전체를 뒤덮었다. 제 알파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조용히 앉아 일하고 있는 동안 아침 늦게까지 곯아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어찌 된 영문인지, 그 반응이 마땅히 그래야 할 수준 이상으로 우스웠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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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장: 마녀의 따뜻한 환대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그 여자가 스칼렛과 나를 전혀 다른 여행객 한 쌍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가슴 한구석에 다시금 짜증이 치밀어 오르며 턱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한 쌍이라니. 그 단어 자체가 터무니없었다. 스칼렛은 내 치유사였다. 우리 사이에 그 이상의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암시조차 황당무계한 억측에 불과했다.그러나 불행히도 여인은 내 침묵을 수줍음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걱정 마세요.” 그녀가 비밀이라도 공유하듯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 바닥에서 볼 건 다 본 사람이니까요. 신혼의 달콤함이 남아있을 때 실컷 즐겨둬요.”어떻게 이토록 짧은 시간에 대화가 이 지경으로 파국을 맞이할 수 있는지, 찰나의 순간 동안 묵묵히 그녀를 응시했다. 오해를 바로잡으려 들었다간 더 많은 꼬리 질문을 부를 뿐이었고, 아침 식사도 들기 전에 이 지나치게 참견하기 좋아하는 여관 주인과 스칼렛 베인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음식이나 올려보내시오.” 서늘하게 답했다.그녀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한 번 더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말 한마디 없이 로비를 빠져나왔으나, 그 대화는 방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마땅히 그래야 할 수준 이상으로 속을 긁어놓았다.신혼부부라니.떠올릴 수 있는 그 수많은 결론들 중에서, 하필이면 신혼부부라는 망상으로 귀결되어야 한단 말인가.방문 앞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이 황당한 대화를 무덤까지 고이 묻어두리라 굳게 결심했다. 실재하지도 않는 결혼을 축하받고, 그와 동시에 여관 기물을 파손했다는 모함까지 한숨에 뒤집어썼다는 사실을 블러드팽의 그 누구도 알 필요는 없었다.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스칼렛은 이미 옷을 단정히 갖춰 입고 창가 곁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목에 두른 스카프는 다시 단단히 여며져 있어 그 아래의 흉터는 단 한 치도 드러나지 않았다. 흉터를 감추기 위해 그녀가 쏟는 지극정성을 모른 척 지나치기란 불가능했다.굳이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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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장: 니사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일어나라, 스칼렛.”알파 디미트리의 음성에 거의 즉각적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두 눈이 번쩍 뜨이며 경악 속에 벌떡 상체를 일으키자 심장이 갈비뼈를 사정없이 쳐올렸다. 방탄 차량. 도로. 기나긴 주행. 모든 현실이 어지러운 파도처럼 한꺼번에 밀려들었다.조수석에서 몸을 흠칫 굳히며, 채 수습하기도 전에 입술 사이로 사죄의 말이 허둥지둥 비어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알파— 일부러 잠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그는 내 사과를 완벽히 묵살했다.“차에서 내려라.” 그의 어조에는 의문을 품을 여지 따윈 조금도 없었다.안전벨트를 허겁지겁 풀고 문을 밀어젖혀 서늘한 저녁 공기 속으로 발을 디뎠다. 몇 시간 동안 차 안에 갇혀 있던 탓에 다리가 후들거렸고, 잠에서 갑작스럽게 깨어난 탓에 찰나의 순간 방향 감각조차 잡히지 않았다.그때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도드라질 만큼 아름다운 어두운 피부에 시선을 빼앗는 은빛 감도는 금발을 늘어뜨린 한 여인이, 차량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이 그녀의 곱슬머리를 부드럽게 흩날렸고, 그녀가 풍기는 기운에는 발걸음을 뚝 멈추게 만드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이었다.목덜미의 잔털들이 곤두섰고 온몸으로 서늘한 한기가 내달렸다.알 수 있었다. 영문은 몰라도, 그저 본능으로 똑똑히 알아차렸다.마녀였다.공포가 사납게 치밀어 오르며 뱃속이 거칠게 뒤틀렸다. 마침내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우리가 진짜로 그자들을 찾아내고 만 것이다. 위험천만한 신화에 불과하다고 배워왔던 바로 그 존재들을. 내 이전 무리에서는 입에 올리는 것조차 엄히 금기시했던 그자들을.만약 저 여자가 내 실체를 꿰뚫어 본다면 어쩌지? 임신의 기운을 맡아내기라도 한다면? 내가 자처하고 있는 신분이 새빨간 거짓이라는 사실을 이미 눈치채고 있다면 어떡한단 말인가?알파 디미트리가 운전석에서 내려 등 뒤로 묵직한 소리를 내며 문을 닫아걸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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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마녀의 동굴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반 박자쯤 그 자리에 굳어 있다가 억지로 발을 떼어 걸음을 옮겼다. 그의 경고가 귓가를 맴돌며 가슴을 쓰라리게 죄어왔다. 목숨을 잃는다는 말. 그 위협은 단호하고 직설적이었으며 결코 오해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곧바로 입을 굳게 다물고 눈앞의 좁은 오솔길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자 혈관 속으로 공포가 스며들었다.‘더 이상의 질문 따윈 삼가라.’저녁의 잔광마저 거의 자취를 감추어 우리 주위로 어둠이 끈덕지게 기어들었다. 빽빽한 나무들조차 한층 더 거대하게 솟아오른 듯 보였다. 공기는 한층 서늘해졌으나, 살갗 아래로 맺히는 서늘한 한기는 기온 탓만은 아니었다. 두 팔로 몸을 단단히 감싸 쥔 채 묵묵히 걸음을 이었다.니사는 군말 한마디 없이 우리를 숲속 더 깊은 곳으로 이끌었다.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는 생각들을 애써 누르며, 가라앉지 않는 심장 박동을 품은 채 알파 디미트리의 등 뒤에서 숨을 죽였다.드리운 그림자 하나하나가 우리를 지켜보는 듯했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 하나에도 간담이 서늘해졌다.이윽고 저 앞쪽에 어두운 틈새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짙어가는 저녁 어스름 속에서 간신히 윤곽만을 드러낸 동굴 입구였다.니사는 그 입구 바로 바깥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녀의 손바닥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밝고 흔들림 없이 피어올라 주변 나무들 위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드리웠다.너무 놀라 헛발을 디딜 뻔하며 목구멍에서 숨이 턱 막혔다.니사가 나를 힐끔 돌아보며 나직이 웃음을 흘렸다. “너무 놀라지 마요.” 그녀가 가볍게 던졌다. “곧 어머니를 뵙게 될 테니.”그녀는 몸을 돌려 동굴 안으로 발을 디뎠고, 그녀의 손에 핀 불꽃이 유일한 빛이 되어 어둠을 갈랐다.알파 디미트리가 한 걸음 내딛다 말고 불현듯 멈춰 섰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화면을 두드리기 시작했다.“그럴 필요 없어요.” 니사가 뒤도 돌아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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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7장: 태초의 마녀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셨습니까, 알파 디미트리?” 그녀가 말을 맺었다.그녀의 물음 뒤로 적막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알파 디미트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스하고 아늑했던 석실의 공기마저 불현듯 팽팽하게 죄어들었다.그의 곁에 선 채로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꼭 그러쥐며 숨을 죽였다.알파 디미트리는 완전히 굳어 있었다. 표정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었고, 그는 어머니를 빤히 바라보며 한마디 말도 없이 턱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내 안에서 자라나는 비밀이 별안간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짓눌려왔다. 이곳에서 일이 잘못된다면, 나로서는 내 목숨 하나보다 훨씬 더 막대한 것을 잃게 될 터였다.“그렇다.”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 방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 기꺼이 대가를 치르겠다.”방 안은 다시 고요에 잠겼다.어머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담하게 일렀다. “앉으시지요.”그 한마디가 입술을 떠나는 순간, 우리 앞쪽 바닥에서 두 개의 돌의자가 이음매 하나 없이 매끄럽게 솟아올랐다.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자리였다. 이곳에 발을 들인 이래 보아온 그 수많은 기이한 광경들 뒤라면 이토록 손쉽게 움직이는 바위쯤이야 덜 놀라워해야 마땅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알파 디미트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어머니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고, 나 역시 조용히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어머니는 석실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돌 가마솥으로 돌아섰다. 그 표면에는 기묘한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으나,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상징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마치 수천 번은 족히 해본 일인 양 가마솥 안의 내용물을 천천히 휘젓기 시작했다.약초 냄새와 무어라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달콤한 향기가 공기 중에 은은하게 감돌았다.마침내 입을 열었을 때, 그녀는 우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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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8장: 비밀의 대가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키르케의 손가락이 내 뺨 위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다정하게 느껴졌어야 마땅할 손길이었으나, 그녀의 손톱은 내 살갗을 천천히 덧그리며 스쳐 지나갔다.가슴이 턱 막혀왔다.나를 두렵게 만든 것은 그녀의 손길이 아니었다. 내 안의 그 무엇 하나 꿰뚫어 보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듯, 내게서 그 어떤 것도 숨길 수 없다는 듯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빛이었다.그녀의 말이 귓전을 맴돌며 갈비뼈 안쪽에서 심장이 아프도록 난타하기 시작했다.‘피에는 피를. 아이에게는 아이를.’그 말들이 머릿속에서 도무지 떠나지 않았다.알파 디미트리의 서슬 퍼런 음성이 정적을 갈랐고, 우리 둘을 번갈아 바라보는 그의 어조는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대체 무슨 수작인가?”키르케는 그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내 얼굴에서 손을 가볍게 거두면서도 시선은 오롯이 내게만 고정하고 있었다.“입 다무십시오, 알파.” 마침내 그에게 곁눈질을 한 번 던지며 그녀가 말했다. “당신은 답을 얻기 위해 수년을 기다려왔습니다. 몇 번의 숨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겠지요.”“이 아이는 이번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낮고 단호한 어조로 알파 디미트리가 즉각 받아쳤다.그가 다음 말을 뱉어내기도 전에, 키르케가 손가락을 튕겼다.딱, 소리는 나직했고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 여파는 즉각적이었다.알파 디미트리가 사라졌다.불과 찰나 전까지만 해도 내 곁에 앉아 있던 그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곁에 남겨진 빈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안 숨이 목구멍에 턱 걸렸고, 심장은 갈비뼈를 부술 듯 사납게 요동쳤다.“그분을 어디로 보낸 겁니까?” 나조차 깜짝 놀랄 만큼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몸을 옭아맨 덩굴을 비틀어 풀려 애를 쓰는 동안 속에서 공포가 사납게 치밀어 올랐다. 알파 디미트리는 사라졌고, 손가락 하나 튕겨 알파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릴 만큼 막강한 힘을 지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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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9장: 레이븐의 죽음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키르케는 가마솥 옆에 놓여 있던 돌잔을 집어 들더니, 물 흐르듯 유려한 손놀림으로 그 안에 내용물을 따랐다. 그녀가 잔을 내밀자 약초와 들꽃의 은은한 향기가 내 쪽으로 풍겨왔다.“대신에,” 그녀는 내게 잔을 내밀며 담담하게 말했다. “너는 이 탕약을 마셔야 한다.”그녀의 옅은 초록빛 눈동자가 잠시 내 얼굴에 머물렀다가 말을 이었다.“이 약은 지금의 네 겉모습을 그대로 유지해 줄 것이다. 머리의 염색약은 이미 물이 빠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더 이상 허용되어서는 안 되니까.”그녀는 마치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진실이라도 되는 양 다음 말을 덤덤히 뱉어냈다.“내일 정오가 되면 레이븐 문섀도의 시신이 발견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누구도 너를 다시 찾지 않을 테지. 세상은 네가 죽었다고 믿게 될 것이다.”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너는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스칼렛.”그녀의 손에 들린 잔을 멍하니 바라보며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려왔다. 차마 그것을 받아들 수가 없었다.뱃속에서 공포가 똬리를 틀었다.마녀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라왔다. 그들이 내미는 것 중에 대가가 따르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만약 내일 누군가가 레이븐 문섀도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레이븐 문섀도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야 한다는 뜻이었다.그 생각에 위장이 사납게 뒤틀렸다. 그럴 수는 없었다. 또다시 그런 짓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치유사의 죽음이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도와주었던 무고한 사내가 나 때문에 처형당했다. 나는 여전히 그날의 죄책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었으며, 그의 희생에 대한 기억은 단 한 순간도 나를 온전히 떠나지 않았다.즉시 손을 거두며 고개를 내저었다.“싫습니다.” 나직이 말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누군가가 나를 대신해 죽어야 한다는 생각에 속이 거북하게 뒤집혔다.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마른침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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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장: 마녀의 대가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나는 길고 긴 몇 번의 호흡 동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아이를 갖지 못한다.내 혈통의 단절.턱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고, 코로 천천히 숨을 내뿜는 동안 양옆에 둔 손이 단단한 주먹을 쥐었다. “이 저주를 끝장내기 위해 내 혈통이 끊어져야만 한다면,” 키르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지.”그녀의 얼굴 위로 흡족함에 가까운 기색이 스치더니, 입술에 느릿한 미소가 번져나갔다. “좋습니다.” 그녀가 나직이 읊조렸다. “허나 알파, 태초의 마녀와 맺는 거래는 말 한마디만으로 봉인될 수 없는 법이지요.”무슨 뜻이냐고 따져 묻기도 전에, 그녀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며 내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내 머리칼을 스치더니, 머리에서 검은 머리카락 한 올을 툭 뽑아냈다.미간을 찌푸렸으나, 그녀가 손가락 사이에 그것을 들어 올려 보이는 동안 침묵을 지켰다.“모든 거래에는 마땅히 바쳐야 할 무언가가 필요한 법입니다.” 그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그녀는 머리카락을 가마솥 안으로 떨어뜨렸다. 보글거리며 끓어오르던 액체에 닿는 순간, 그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그리고 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키르케가 내 가슴 위에 손바닥을 거세게 내리얹었다.익숙한 통증이 온몸을 거세게 후려쳤고, 그 날카로운 격통에 온몸의 근육이 일순간 굳어버렸다. 통증은 혈관을 타고 순식간에 퍼져나가더니,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기이할 정도로 불현듯 사라졌다.그 뒤로 침묵이 내려앉았다.결코 가능하리라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는 순간 두 눈이 살짝 커졌다. 고통이 사라져 있었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무언가가 내 안쪽을 서서히 갉아먹고 있다는 느낌 없이 온전히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저주와 함께 살아왔던 탓에, 내 몸 안에 서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조차 낯설 지경이었다.키르케는 손을 거두며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당신에게 약조했던 그 평온의 작은 맛보기라 여기십시오.” 그녀가 담담하게 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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