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알파의 상처 입은 힐러: Chapter 11 - Chapter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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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무너지다

전자 쪽을 택하는 편이 현명하리라는 결론을 내렸다.금속 문고리 몇 치 위에서 얼어붙어 있던 손이 마침내 움직였다. 머릿속에서 당장 멈추라고 소리치기도 전에 손가락이 손잡이를 비틀었다. 카펫을 스치는 나직한 쓸림과 함께 연결된 문이 스르르 열렸고, 나는 그 틈을 넘어섰다.알파 디미트리는 셔츠를 벗은 맨몸이었다.그는 방 한가운데에 서서 한 손으로는 두꺼운 침대 기둥을 거세게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어깨가 팽팽히 굳어졌고, 등 근육은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형벌인 양 잔뜩 뒤틀려 있었다. 척추를 따라 땀방울이 번들거렸다. 그의 가슴은 짧고 불규칙하게 오르내렸는데, 매 호흡이 처절한 사투처럼 쌕쌕거렸다. 집중하느라 가늘어진 짙은 숲빛 눈동자는 그 선명한 색감 탓에 오히려 그의 창백한 얼굴을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할 뿐이었다.그 밖의 모든 것이 시야에서 지워졌다.수많은 협박도, 또 다른 알파의 곁에 갇혔다는 사실도, 스칼렛 베인이라는 거짓 신분도, 옷 속에 숨겨둔 아이도, 내 온 존재를 뒤흔들었던 혈통의 비밀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헐떡이는 모습을 마주한 순간 잡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치유사로서의 본능이 이성을 집어삼켰고, 나는 달렸다.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차가운 타일 바닥을 맨발로 박차며 그에게 짓쳐 들었다. 내 두 손은 지체 없이 그를 찾아갔다. 한 손은 병세가 도사린 가슴을 짓눌렀고, 다른 한 손은 목덜미에서 요동치는 가쁜 맥박을 짚었다. 의식적인 계산도 없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온기가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고, 내 능력은 필사적인 격류가 되어 그에게 쏟아져 들어갔다. 그 뒤에 따를 후폭풍 따윈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그의 몸이 휘청거렸다.맨살을 더 강하게 짓누르며 어떻게든 그를 지탱하려 애썼지만, 그는 이미 균형을 완전히 잃은 뒤였다. 그의 무릎이 꺾였다. 그가 뒤로 쓰러지며 본능적으로 뻗은 한쪽 팔이 내 허리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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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스칼렛 베인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방 안은 고요한 난장판이었다.나는 처소 한가운데에 서서 팔짱을 낀 채, 국경 정세 보고서나 동맹 협상 문서를 대할 때와 똑같이 무심한 시선으로 참상을 훑어보았다. 창가 옆의 묵직한 목제 의자는 제자리를 벗어나 밀려나 있었다. 작은 탁자 하나는 뒤집혀 있었고, 그 위의 서류들은 낙엽처럼 카펫 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은 저편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고, 석벽 위에는 짙은 얼룩이 남았다.시선이 침대로 향했다. 쓰러졌던 여파로 여전히 뒤틀리고 구겨진 이불은 내가 어디로 고꾸라졌는지… 그리고 그녀가 내 밑에 어떻게 깔려 있었는지를 소리 없이 증언하고 있었다.매트리스 위에 남은 그녀의 몸 자국에 시선을 오래 두지 않으려 애썼다. 아직은 아니었다.이번 발작은 지난번보다 훨씬 지독했다. 이번에는 피 속에 도사린 그림자가 더 빠르게 번져나갔고, 혈관을 타고 근육 속으로 스며들어 두 발로 서 있는 것조차 처절한 의지의 싸움으로 만들었다. 강장제는 약효를 다해가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은 늘 알고 있었다.내 이전의 모든 알파들은 이 저주를 짊어지다 결국 목숨을 내주었고, 내 운명 또한 다르리라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문제는 내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그 시기가 언제인가였다.블러드팽은 수장의 나약함을 용납할 여유가 없었다. 아이언클로가 우리 국경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우리 동맹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첫 조짐만을 기다리는 작은 무리들이 도사리고 있는 한 결코 안 될 일이었다.한 손으로 의자를 바로 세운 뒤, 뒤집힌 탁자를 일으켜 세웠다. 유리 파편들은 하녀들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치워낼 터였다. 늘 그래왔듯이.그럼에도 생각은 자꾸만 그녀에게로 되돌아갔다.스칼렛 베인.그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을 가로질러 뛰어들었다. 그녀의 다급했던 몸짓, 내 가슴을 짓누르던 손길의 압박, 그리고 병세를 밀어내며 혈관 속을 불태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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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용의자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치유소 서고 안으로 발을 들이며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아걸었고, 딸깍 소리를 확인한 뒤 짙은 색 바지 주머니에 열쇠를 찔러 넣었다.이곳은 내 새 방보다 두 배는 족히 넓었으며, 수세기에 걸친 치유의 지혜와 현대 의학이 오직 블러드팽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높게 솟은 목제 서가에는 가죽 장정의 고서와 스프링으로 제본된 의학 학술지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서가 통로 끝마다 놓인 충전 거치대 위에는 날렵한 태블릿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천장에 매립된 조명이 서고 안을 밝고 고르게 비추었고, 서가 사이로 깊숙이 걸어 들어갈 때마다 동작 감지 센서가 작동하며 보조등이 차례로 불을 밝혔다. 윤이 나는 돌바닥에는 무수한 발걸음이 남긴 희미한 닳은 자국이 배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낡은 종이 냄새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미세한 전자기기의 웅웅거림이 감돌았다.오늘 아침에 벌어졌던 그 모든 일들 탓에 여전히 가라앉지 않는 심장을 안은 채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서고의 고요가 온몸을 감싸도록 내버려 두었다.블러드팽에 발을 들인 이래 처음으로 생존이나 다음 실수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온전한 치유사로서의 사고가 돌아왔다. 수세기에 걸친 기록과 현대 연구 자료들이 잠들어 있는 이 서가 어딘가에, 알파 디미트리를 속에서부터 갉아먹고 있는 그 병세의 해답이 숨겨져 있을 터였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 주였다.아니, 이제는 이 주도 채 남지 않았다.엉뚱한 곳을 뒤지며 낭비하는 매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의 처형대를 향해 한 걸음씩 다가서고 있는 셈이었다.가장 왼쪽 서가부터 조사를 시작하며, 닳아 해진 책등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책 제목들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서너 개의 서가를 지나칠 때마다 근처에 비치된 태블릿으로 다가가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북부 산맥의 치유 약초학.’‘고급 혈통 의식과 유전적 저주.’‘여신의 선물: 현대적 응용.’그 어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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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무고한 희생자들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그 자리에 얼어붙어 선 채, 방 안의 모두에게 들릴까 두려울 만큼 갈비뼈를 세차게 두드리는 심장 박동을 억눌렀다.불안감이 방 전체로 물결치듯 번져나갔다. 몇몇 치유사들은 차트나 태블릿을 쥔 손에 힘을 주었고, 다른 이들은 불안한 눈빛을 교환하다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머리 위 조명의 나지막한 웅웅거림과 거칠게 날뛰는 내 심장 소리만이 적막을 채웠다.베타 페트루가 알파 디미트리의 곁을 벗어나 곧장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 태연한 표정을 더는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천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다.숨이 턱 막혔다.베타 페트루의 손이 닿기 직전, 알파 디미트리가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그 아이는 아니다.”베타 페트루가 그 즉시 걸음을 멈췄다.“알파, 이자부터 먼저 수색해야 합니다. 그날 밤 강장제를 전달한 자입니다. 방랑자 출신인 데다, 알파께 접근하기 위해 독을 썼을 동기가 이 방의 그 누구보다도 충분합니다.”디미트리의 초록빛 눈동자는 자신의 베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그 아이가 내 방으로 들어오기 전, 나는 이미 독을 섭취한 상태였다. 그 추궁은 사실이 아니다.”방 안으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자네의 다른 우려를 묵살하겠다는 건 아니다.” 모두가 귀를 기울이게 만들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가 직접 수색하겠다.”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굳어졌다.“아니면, 알파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건가?”모두가 숨을 죽였다.베타 페트루는 하마터면 반론을 뱉어낼 뻔한 입술을 짓씹으며 찰나의 순간 동안 굳어 있었다. 마침내 그가 고개를 숙였다.“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알파.”숨을 쉴 수가 없었다.머릿속에서 생각들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쳤다. 그날 밤 내가 처소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알파 디미트리의 몸에 이미 독이 퍼져 있었다면, 도대체 왜 치유소를 수색하는 것인가? 그들이 진짜로 찾고 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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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비밀을 지키는 법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잠시도 가만히 서 있지 못한 채 방 안을 서성였다. 천 가방을 가슴팍에 꼭 끌어안은 채였다.수색이 끝난 뒤 성 안에는 불안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치유사들은 모두 일찌감치 물러났고, 심지어 다크문 부인조차 날 선 말 한마디 던지지 않은 채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를 처음 만난 이래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그 꼿꼿한 침착함이 엘비스에게 닥친 일의 무게에 짓눌려 금이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손목을 파고들던 은 수갑. 타들어 가는 살갗에서 피어오르던 가느다란 연기. 그가 등을 돌려 떠나기 전 찰나의 순간 마주쳤던 눈빛,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조차 전하지 못하고 날려버린 유일한 기회까지.양심의 가책이 나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같은 비난이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너는 무언가 말할 수 있었잖아. 진실을 밝힐 수도 있었잖아.’하지만 진실을 밝히는 순간 알파 디미트리의 혈통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날 터였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그 어떤 핑계도 죄책감을 덜어주지는 못했다.아직은 감추기 쉬운 완만한 곡선을 손바닥으로 감싸 쥐며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손끝 아래서 미세한 태동이 느껴지며, 내가 진짜로 지켜내야 할 목숨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다. 여신께 다시금 기도를 속삭였으나, 이번만큼은 그 말들이 공허하게 흩어졌다.방문에서 날카로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심장이 목구멍까지 덜컥 튀어 올랐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방을 가로질러 문을 열었다.알파 디미트리가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문간에 서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은 숲빛 눈동자가 침묵 속에 나를 응시했으나, 그 너머에 도사린 감정은 조금도 읽어낼 수 없었다. 자각하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숙여지며 시선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그의 시선이 내 천 가방 쪽으로 잠시 향했다.“그 책은,”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 찾았지?”제어할 틈도 없이 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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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책, 그리고 더 많은 책들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치유소 서고 안으로 다시 발을 들이며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마침내 잠금쇠가 맞물릴 때까지 열쇠를 쥔 손가락이 헛돌았다. 금속이 제자리를 찾아 미끄러지는 나직한 긁힘에 가슴속에 팽팽하게 엉켜 있던 긴장이 조금은 풀려나갔다. 내가 결코 손대서는 안 될 책들에 둘러싸여 있는 꼴을 누군가 들이닥쳐 보게 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특히 다크문 부인은 더더욱.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이곳에서 나를 꿰뚫는 상상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웠다. 오늘 밤에는 또 다른 충돌을 감당해 낼 여력이 없었다.깊은 밤의 서고는 사뭇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천장의 매립등이 서가 위로 창백한 불빛을 드리우며 좁은 통로마다 짙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거치대에 꽂힌 태블릿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내가 스쳐 지날 때마다 검은 화면 위로 희미한 빛이 반사되었다. 서늘하고 고요한 공기 속에는 낡은 종이와 말린 약초 냄새, 그리고 전자기기 특유의 희미한 쇠 냄새가 배어 있었다. 서가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매끄러운 돌바닥 위로 발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발걸음을 뗄 때마다 옆구리에 찬 천 가방이 조금씩 더 무거워지는 듯했다.분명한 목적을 품고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서가에서 책을 한 권씩 뽑아 불빛 아래서 재빨리 내용을 훑어본 뒤, 천 가방에 집어넣을지 아니면 다시 선반에 꽂아둘지 가늠했다. 피로로 눈이 타들어 갈 듯 시렸지만 멈추지 않았다.어느 책 한 권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의학 전문서라기보다는 동화책에 더 가까워 보이는 얄팍한 책자였다. 삽화는 세월에 바래 있었고, 책장은 닳고 닳아 부드러웠다.그 책은 피가 기묘한 그림자에 집어삼켜진 어느 알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그저 민담에 불과함이 분명했고, 알파 디미트리를 괴롭히는 그 지병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그러나 그의 명령이 머릿속을 울렸다.‘모조리 찾아내 치워라.’요행을 바라고 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그 책은 내 천 가방 속으로 사라졌다.서가를 훑으며 태블릿의 데이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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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시식의 연회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방 한가운데 놓인 낮은 의자에 앉아 있는 내 주위로, 쳐다보지 않으려 애쓰다 결국 실패한 치유사들이 둘러서 있었다. 잔혹한 구경거리의 원치 않는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으나, 그들의 시선이 몇 번이고 내게로 닿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은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고, 다른 이들은 거의 동정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대다수는 그저 거리를 유지했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어깨를 안으로 웅크리며, 최대한 작고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되려 애썼다.위장이 비틀리듯 쥐어짜며 날카로운 허기의 고통에 절로 낯이 찌푸려졌다. 밤새도록 차오른 굶주림은 이제 외면하기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당장이라도 바닥이 입을 벌려 나를 삼켜버렸으면 싶다가도, 탈진에 찌든 또 다른 내면은 이것도 엄연한 음식이라며 나를 다독였다.먹을거리를 찾아 헤매던 차에, 마침 알아서 음식이 내게로 오고 있지 않은가. 치유소 전체의 감시 어린 눈초리 아래서 한 접시 한 접시 맛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은 먹을 수만 있다면 그만이었다. 그 생각 하나에 매달려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텼다.어느 젊은 치유사의 손에 들려 첫 번째 쟁반이 도착했다. 접시를 내려다보기도 전에 향긋한 냄새가 먼저 코끝을 스쳤다. 향기로운 약초로 간을 한 구운 고기, 빵 껍질 사이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빵, 아침 햇살 아래 번들거리는 버터에 버무린 채소들.입안에 침이 고였다.그 소중한 찰나의 순간, 그 밖의 모든 것이 시야에서 지워졌다.수색도. 엘비스도. 천 가방 속에 숨겨둔 책들도. 알파 디미트리의 비밀도.쟁반이 내 앞에 놓이는 순간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오직 음식에 대한 생각뿐이었다.떨리는 손가락으로 작은 시식용 포크를 집어 들고 첫 조각을 입에 넣었다.고기는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만큼 연했고, 약초 향이 풍부하게 배어 있었으며 주방의 열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빵은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찢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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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비겁함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그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천 가방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그녀의 몸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내가 먼저 움직였다. 무릎이 꺾이며 맥없이 허물어지는 그녀를 한쪽 팔로 감싸 안아 지탱하자, 축 늘어진 육신이 내게 와닿았다.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미간을 찌푸렸다.몇 걸음 만에 침대로 가닿았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를 매트리스 위에 뉘였다. 그녀의 짧은 붉은 머리칼이 어두운 침대 시트 위로 흐트러졌고, 그 선명한 결은 마치 흘린 피처럼 도드라져 보였다.시선으로 그녀의 온몸을 훑었다.입술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목덜미에는 시뻘건 두드러기가 얼룩덜룩 돋아나 스카프 자락 아래를 지나 턱선을 향해 번져가고 있었다. 그녀의 한쪽 손이 힘없이 목덜미로 올라오더니, 멈출 수 없다는 듯 손끝으로 부어오른 살갗을 긁어댔다.호흡은 마땅히 그래야 할 박자보다 훨씬 가빴다. 얕고 불규칙했으나, 다행히 기도가 완전히 막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창백했던 본래의 안색 위로 기이할 정도의 붉은 열꽃이 번져 있었다.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맥박이 빨라졌다.주먹을 꽉 쥔 채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그녀는 한낱 치유사일 뿐이었다. 오늘 밤 목숨을 잃는다 한들 내 처소에 다른 치유사를 배정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내 강장제를 확인하고, 매일 밤 진맥을 올리며 똑같은 소임을 다하면 될 일이었다.말도 안 되는 헛된 생각이었다.수년간 수십 명의 치유사들이 나를 거쳐 갔다. 그들은 나를 살피고, 상태를 감시하며, 기력을 북돋아 주리라 믿는 온갖 강장제를 달여 올렸다. 하지만 그들 중 단 한 명도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눈에 나는 그저 쉽게 피로해지거나 무리하게 일을 도맡는 알파로 보였을 뿐이었다. 의문을 품은 자도, 그 이면을 파고든 자도 아무도 없었다.오직 그녀만이 달랐다.남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지나칠 때, 나를 마주하고 지병의 존재를 꿰뚫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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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아이언클로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온몸의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얕은 숨만을 몰아쉬며 누워 있었다. 입술은 퉁퉁 부어올라 낯설게만 느껴졌다. 성난 두드러기가 돋아난 목덜미와 턱선을 따라 뜨거운 열기가 번져나갔다. 손이 힘없이 목덜미로 올라가 짓무른 살갗을 긁어대려다 가까스로 멈추었다. 매 호흡이 이전보다 더 무겁게 짓눌려왔다.알파 디미트리가 침대 곁에 서서 짙은 숲빛 눈동자로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 위로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턱 근육이 굳어지는 모양새가 마치 무슨 말이라도 내뱉으려는 듯 보였다.그러나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그가 즉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들어와라.”다크문 부인이 작은 쟁반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뚜껑이 덮인 음식 접시 옆에 놓인 찻잔에서는 탕약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따스한 육수와 갓 구운 빵의 구수한 냄새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여느 때 같았으면 군침이 돌았을 냄새였다. 하지만 지금은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메스꺼움이 미처 입맛을 느낄 틈도 없이 식욕을 짓눌러버렸다.그녀가 침대로 다가오자 알파 디미트리의 미간이 좁아졌다. “음식을 가져오라 명한 적은 없다만.”다크문 부인의 목소리는 내가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어조보다 부드러웠다. 다정하기까지 했다. 그녀에게 그런 면모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염려의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환자에게는 제대로 된 영양 공급이 필요합니다, 알파.” 그녀가 말했다. “스칼렛의 건강이… 염려스러워 챙겨왔습니다.”헛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부어오른 목구멍에 걸려 소리가 되지 못했다.내가 알던 다크문 부인의 모습이 아니었다.내 간곡한 애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종일 내 목구멍 속으로 견과류를 억지로 쑤셔 넣던 여자가… 치유소 전체가 보는 앞에서 나를 처참하게 짓밟고 모욕하던 여자가… 이제 와서 불현듯 내가 살든 죽든 진심으로 신경 쓰는 척 굴고 있었다.대신 억지 미소를 지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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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불청객

스칼렛 / 레이븐의 시점등 뒤로 연결된 문을 닫고 몸을 기댔다. 차가운 나무 감촉이 등을 짓눌러왔다.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으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알파 디미트리가 남긴 마지막 말에 심장이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다.아이언클로.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온몸에 서늘한 한기가 내달렸고, 아무리 필사적으로 묻어두려 애써도 루칸의 기억들이 걷잡을 수 없이 수면 위로 끌려 올라왔다.손으로 배를 감싸 쥔 채 떨리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며, 가슴을 짓누르는 공포를 억지로 가라앉히려 했다.잠. 잠을 자야 했다. 내가 준비되었든 아니든 내일은 어김없이 찾아올 터였다.후들거리는 다리로 방을 가로질러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목에 두른 스카프가 평소보다 더 답답하게 조여왔고, 거친 천 자락이 알레르기 반응이 남긴 두드러기 위를 스쳤다.눈을 감고 억지로 몸의 긴장을 풀어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잠에 빠져들려 할 때마다 루칸이 어김없이 나를 찾아왔다. 그의 서늘한 눈빛. 뺨을 후려치던 손찌검의 화끈거림. 내가 결코 될 수 없는 모든 것을 품고 있다는 듯 라일리를 바라보던 그의 시선까지.몸을 옆으로 돌려 본능적으로 배를 웅크려 감쌌다.만약 그가 나를 알아본다면?물들인 머리와 목덜미의 짓무른 흉터만으로는 본모습을 감추기에 역부족이라면 어쩌지?내가 그의 아이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채기라도 한다면?그 생각에 온몸이 마비되는 듯했다. 숨은 가빠졌고 가슴이 답답하게 죄어들었다. 그를 피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필사적으로 찾으며 머리를 굴려보았으나, 생각은 언제나 같은 결론으로 되돌아왔다.나는 한낱 전속 치유사에 불과했다.다른 무리에서 방문한 알파와 같은 공간에 발을 들일 만큼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다.루칸의 눈에 띌 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었다.그저 아침 일찍 알파 디미트리의 상태를 진맥하고, 남은 하루는 치유소 깊숙한 곳에 숨죽이고 숨어있기만 하면 그만이었다.그렇게 간단한 일이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은가?그 생각이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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