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알파의 상처 입은 힐러: Chapter 41 - Chapter 50

50 Chapters

제41장: 밀월여행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있었다.나는 몸을 완전히 그녀 쪽으로 돌렸고, 그녀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이는 꼴을 즉각 눈치챘다. 그녀는 말을 하려 애쓰고 있었다—필사적으로 애를 쓰고 있었으나—단 한마디의 음성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나를 마주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당혹감과 좌절감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이다.순식간에 상황이 파악되었다.차를 갓길에 세우고 시동을 껐다. 차 안을 가득 메운 침묵 속에서 시트에 등을 기대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고, 지친 한숨과 함께 콧날을 쥐어뜯었다.“당연히 목소리를 앗아갔겠지.” 나직이 짓씹듯 내뱉었다.그 사실은 스스로 인정하고 싶은 것 이상으로 부아를 돋우었다. 마녀란 마땅한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는 그 무엇도 베풀지 않는 족속들이었다. 어머니라는 그 마녀에게도 진작 예상했어야 마땅한 짓이었다.그럼에도 스칼렛의 목소리를 앗아간 것은 상황을 심각하게 꼬이게 만들었다.운전석에 등을 깊숙이 기댄 채, 앞유리창 너머 짙은 어둠 속을 멍하니 응시했다.이런 꼴로는 블러드팽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질문들이 쏟아질 테고, 의구심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갈 것이다. 지금도 페트루는 이미 스칼렛을 지나칠 만큼 주시하고 있지 않던가.거칠게 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지금 당장은 블러드팽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앞쪽 도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그 어떤 의심도 사서는 안 되니.”다시 시동을 걸고 좁은 산길 위로 차량을 올렸다. 오늘 밤을 어디서 묵어가야 할지 이미 답은 나와 있었고, 그 생각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졌다.그 여관이라니.하필 그 수많은 곳 중에서 그 여관이어야 한단 말인가.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솟구쳤다. 안내 데스크의 그 여편네와, 우리를 신혼부부라 제멋대로 지껄여대던 그 해괴망측한 착각은 한 번 겪은 것만으로도 이미 넌더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녀의 두서없는 주절거림을 또다시 견뎌낼 인내심 따윈 추호도 없었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곳이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제42장: 글로 적어라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손가락으로 펜을 그러쥐었으나, 차마 종이 위로 펜촉을 내리지 못했다. 아프도록 요동치는 심장 박동에 가슴이 뜯겨 나갈 것만 같았고, 온몸 구석구석으로 공포가 끈덕지게 기어들었다.만약 알파 디미트리에게 진실을 고한다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날 터였다.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내가 진짜 누구인지 밝힐 수도 없었다. 잘못 짚은 문장 하나만으로도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이 풀려나갈 것이다. 루칸. 내 아이. 스칼렛 베인이라는 이름으로 쌓아 올린 위태로운 삶. 내가 목숨 걸고 지켜온 모든 비밀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말리라.다른 모든 것을 들키지 않으면서도 그를 납득시킬 수 있을 만한 안전한 거짓말을 찾아 머릿속을 필사적으로 굴렸다.그때 번뜩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펜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종이 위로 펜촉을 내렸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 글씨가 삐뚤빼뚤하게 번져나갔다.‘키르케가 당신을 보낸 곳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하려면 대가를 바쳐야만 했습니다. 그 대가로 일주일 동안 제 목소리를 그녀에게 넘겨주었습니다.’느리게 숨을 들이쉬며 메모지를 그를 향해 돌려놓았다.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종이 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찰나의 순간, 철저히 통제되던 그의 무표정 위로 경악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늘 그렇듯 손쉽게 둘러쓰는 냉정함의 가면 아래로 순식간에 묻혀 사라졌다.그가 일정한 호흡으로 숨을 가다듬었다.“그럴 필요까진 없었다.” 이전보다 한층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키르케는 결국 날 풀어주었을 텐데.”깨끗한 다음 장을 넘겨,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문장을 적어 내렸다.‘죄송합니다, 알파.’가장자리를 쥔 손가락을 파르르 떨며 메모지를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종이를 내려다보더니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방 안의 공기가 별안간 숨이 턱 막힐 만큼 무겁게 가라앉았다.차마 털어놓지 못한 모든 말들이 가슴을 짓눌러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키르케가 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2
Read more

제43장: 내 전속 치유사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레이븐 문섀도가 죽었다.”화면 위로 번쩍이는 메시지에 시선을 못 박은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평온한 목소리로 그 말을 뱉어냈다. 주변의 매장 안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손님들은 진열대 사이를 조용히 오가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내 주의를 끌지 못했다.나는 그저 전해진 소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이다.레이븐 문섀도의 시신은 이제 블러드팽의 손에 들어왔다. 알파 루칸은 버림받은 제 루나를 찾아 헤매며 몇 주를 허비했고, 그 과정에서 주변 무리들의 이목까지 끌어모았다. 이제 진실을 쥐고 있는 것은 우리였다. 앞으로 이어질 그 어떤 협상이든 블러드팽이 정한 규칙 위에서 이루어질 터였다.전화기를 내리고 스칼렛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검은색 전화기 진열대 앞에 서서, 자신이 고른 것을 확인시켜 주려던 참이었던 듯 한쪽 손을 어정쩡하게 반쯤 들어 올린 채 굳어 있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두 눈은 초점을 잃은 채 크게 뜨여 있었고, 입술은 소리 없는 충격에 살짝 벌어져 있었다. 매장의 조명 아래서 그녀의 붉은 머리칼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으며, 창백하게 질린 살결 위로는 목에 두른 스카프만이 유일하게 색채를 띠고 있었다.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마땅히 그래야 할 수준 이상으로 오래 그녀를 응시했다. 놀라워할 것쯤이야 예상했으나, 얼굴에서 이토록 피가 모조리 빠져나갈 줄은 몰랐다.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그녀를 분명히 심하게 뒤흔들어 놓은 모양이었다.손가락을 한 번 딱 튕겨 날카롭고 명확한 소리를 냈다.스칼렛이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여전히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그녀의 고개가 내 쪽으로 홱 돌아왔다. 그러더니 즉각 진열대로 몸을 돌려 투박한 검은색 전화기를 가리켰다. 유리판을 한 번 톡 두드리더니, 내가 곧바로 반응하지 않자 한 번 더 두드렸다.알아들었다.“아. 그걸로 하겠다는 거군.”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그것을 한 번 더 가리켰다.예의를 차리며 조금 떨어진 곳에 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Read more

제44장: 제드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내 목소리보다 더 잘 아는 목소리였다.평생을 함께하며 들어온 음성이었다. 몇 달 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었더라도, 세상 어디서 들었든 단번에 알아챘을 터였다.‘내 암컷이다.’제드.찰나의 터무니없는 순간, 나는 내 가슴 위에 두 손을 얹고 있는 스칼렛을 그저 멍하니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녀는 내 늑대가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여전히 제 치유 능력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제드가 마침내 깨어났을 때 들으리라 예상했던 그 수많은 말들 중, 내 치유사를 제 짝이라 선언하는 독점욕 어린 외침 따윈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앞뒤가 전혀 맞지 않았다.처음 든 생각은 환청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키르케가 내게 베푼 일시적인 해방이란 나 자신도, 그 누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힘이었다. 수년 동안 오로스타는 내 육신을 갉아먹으며 늑대와의 연결을 서서히 끊어놓았고, 결국 그를 깊숙이 가두어두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그런데 몇 달간의 침묵 끝에, 스칼렛이 나를 만지는 순간 제드가 별안간 깨어나다니.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기이한 착각이 일어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내가 들은 말에는 논리적인 설명 따윈 존재할 수 없었다.스칼렛 베인은 내 짝도, 내 루나도 아니었으며, 내 늑대가 제 암컷이라며 소유권을 주장할 상대는 더더욱 아니었다.아니다. 이 모든 것이 황당무계한 헛소리에 불과했다.잠시 후, 스칼렛은 내 가슴에서 천천히 손을 떼더니 고개를 가볍게 한 번 내저었다. 그녀는 방을 가로질러 가 메모지와 펜을 가져오더니, 빠르게 글을 적어 내게 내밀어 보였다.‘병마의 흔적은 없습니다. 그 어떤 어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습니다.’미처 막을 틈도 없이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나직한 웃음이 터져 나왔는데, 그것은 낯설 만큼 꾸밈없는 진심이었다. 수년 동안 내가 내린 모든 결정은 내 안에 도사린 병마의 손아귀 안에서 좌지우지되어 왔다. 아주 오랜만에, 나는 고통이나 질병, 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Read more

제45장: 거짓말쟁이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스칼렛의 두 눈이 어찌나 크게 뜨였는지, 숨 쉬듯 자연스러워야 할 눈 깜빡임조차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그녀의 시선은 찰나의 피할 수 없는 순간 아래로 툭 떨어졌다가, 이내 화들짝 놀라 내 얼굴로 치솟았다. 두 뺨 위로 번져나가는 붉은 기운은 실로 대단할 지경이었다. 그녀는 즉각 고개를 홱 돌리더니, 마치 주변의 소나무 한 그루가 이 온 숲에서 가장 경이로운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그곳에 시선을 처박았다.나는 아무런 말도 얹지 않았다.이 상황에서 뱉어봐야 쓸모 있는 말 따윈 없었다. 옷가지를 얹어두었던 바위 쪽으로 걸어가 옷을 챙겨 들고는, 가장 가까운 나무 뒤편으로 몸을 숨겨 옷을 꿰어 입었다.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뒤에도, 온 힘을 다해 질주했던 육신에는 여전히 들뜬 여운이 남아있었다. 제드의 기척은 살갗 바로 아래 맴돌며, 지난 몇 달간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공터로 다시 걸어 나왔을 때, 스칼렛은 뚫어져라 바닥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 끝까지 발갛게 물들어 있었고, 내 쪽으로는 눈길 한 번 주려 하지 않았다.차량의 운전석 문을 열며 그녀를 힐끔 돌아보았다.“타라.”그녀는 군말 없이 따랐다. 시동을 걸고 차를 큰길 쪽으로 돌려 숲을 등 뒤로 남겨두었다.처음 몇 분 동안 제드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으나, 내 머릿속 가장 앞자리에 그의 기척이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다시 달릴 수 있게 된 뒤라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상태였다. 이따금씩 그의 신경은 내 곁에 숨죽여 앉아 있는 여인에게로 슬그머니 향하곤 했다.그를 모른 척 무시했다.달리기는 내가 바랐던 바를 완벽히 이루어주었다. 병마의 기운은 여전히 자취를 감추고 있었고, 내 늑대와의 연결은 기억 속 그 어느 때보다도 한층 더 강렬하게 되살아났다.그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골치 아플 만큼 복잡해졌을 뿐이다.여관으로 돌아와 차를 대고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 구역은 절반쯤 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Read more

제46장: 거짓말쟁이 2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속으로 일갈했다.‘닥쳐라.’‘난 그 암컷이 우리 곁에 있는 게 좋은데.’ 제드가 뻔뻔스럽게 실토했다.그따위 소리에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해 무시해 버렸다.‘조용하고, 좋은 냄새가 나고, 널 웃게 만들잖아.’‘난 웃지 않는다.’제드의 웃음소리가 즐겁다는 듯 나직하게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거짓말쟁이.’그를 철저히 묵살한 채, 스칼렛이 남은 설정 화면들을 넘길 수 있도록 계속 도왔다.마침내 기본 화면이 떠오르자, 그녀는 잠시 전화기를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어 내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얼굴에 번진 안도감은 결코 모른 척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고작 전화기 한 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내가 훨씬 더 값진 무언가를 건네주기라도 한 것처럼 벅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모든 설정이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서 물러섰다. “끝났다.” 내가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문자를 보내라. 충전은 꼬박꼬박 해두고.”그녀는 여전히 그것이 제 물건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손으로 전화기를 소중히 받쳐 든 채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창가로 다가가 팔짱을 끼고 유리창 너머 짙어져 가는 밤하늘을 응시했다. 지난 며칠 사이 이 방은 기묘할 만큼 편안해져 있었고,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스스로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당연하게도, 제드는 바로 그 틈을 타 다시 입을 열었다.‘원하는 만큼 실컷 시치미 떼어봐.’ 그가 나태하게 읊조렸다. ‘난 다 느껴지니까.’‘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군.’‘네가 그 암컷을 마음에 품고 있다는 걸.’그런 엉뚱한 광기 어린 헛소리 따위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대신 침묵 속에 창가에 서서, 내 등 뒤에 얌전히 앉아 있는 여인을 마땅히 그래야 할 수준 이상으로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할 뿐이었다.그저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 결론지었다.밤은 서서히 여관 위로 내려앉았다. 창밖의 불빛들은 유리창을 어두운 거울로 바꾸어 놓았다. 스칼렛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Read more

제47장: 침묵의 엿새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불은 꺼져 있었다.나는 이불을 어깨까지 바짝 끌어올린 채 침대 내 쪽 자리에 모로 누워 어둠 속을 멍하니 응시했다. 매트리스는 서로의 몸이 닿지 않을 만큼 충분히 넓었으나,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그가 누워 있다는 사실이 뼈저리도록 의식되었다. 시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하나가 적막한 방 안에서 유독 크게 울려 퍼졌다. 그의 고른 숨소리조차 모른 척 지나치기란 불가능했다.그는 나를 보고 있었다.어둠 속이라 그의 눈빛이 보이지는 않았으나,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침묵 속에는 그 사실을 확신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이곳에서의 첫날밤이 그러했듯, 알파 디미트리는 내가 완전히 잠에 빠져들기를 기다렸다가 제 쉼을 청하려는 것이었다.그 사실을 깨닫자 긴장을 풀기가 한층 더 어려워졌다.눈을 질끈 감았다.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때까지 이불 속에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집요하게 머릿속을 맴돌며 떠나지 않는 그 기억에 파르르 떨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매어 주는 것은 손바닥을 찌르는 날카로운 통증뿐이었다.그의 알몸을 보아버렸다.기억은 불청객처럼, 그리고 너무나도 또렷하게 되살아났다. 변신 직후의 열기로 아직 촉촉이 젖어 있던 짙은 머리칼. 떡 벌어진 어깨. 가슴과 복부의 단단한 근육선, 그리고 질주의 긴장감을 여전히 머금고 있던 그의 육신.그리고 그 아래쪽—얼굴로 열기가 너무나 순식간에 치솟아, 어둠이 이 붉은 기운을 감춰주고 있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감사할 지경이었다.나는 빤히 쳐다보고 말았다.길지는 않았다. 결코 불순하다 여겨질 만큼 긴 시간은 아니었다.아마도.아, 달의 여신이시여, 내가 알파 디미트리의 완벽한 알몸을 보아버리다니.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변신은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났다. 찰나 전까지만 해도 나무들 사이에서 걸어 나오는 거대한 검은 늑대였는데, 다음 순간 공터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우뚝 서 있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이성이 제어하기도 전에 눈길이 먼저 아래로 떨어져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Read more

제48장: 감사

레이븐 / 스칼렛의 시점그보다 먼저 눈을 떴다.눈을 떴을 때 방 안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알파 디미트리는 여전히 제 쪽 침대에 누워 한쪽 팔을 머리 아래 괸 채, 느리고 일정한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잠시 동안 그저 그가 잠든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럴 때의 그는 한결 온화해 보였다. 눈빛 하나만으로 무리 전체를 짓누르던 그 무시무시한 알파라기보다는, 마침내 스스로에게 온전한 쉼을 허락한 한 사내에 가까워 보였다.더 오래 빤히 쳐다보기 전에, 매트리스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불 밑에서 몸을 빠져나왔다.방 안을 조심스럽게 돌아다녔다.욕실은 하루를 준비할 수 있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몇 분의 시간을 내어주었다. 씻고 나서 새 옷으로 갈아입은 뒤 양치를 하고, 습관처럼 목에 스카프를 단단히 여며 둘렀다.거울 속으로 시선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짧은 붉은 머리와 갈색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았다. 스칼렛 베인. 여전히 이곳에 있었다.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레이븐 문섀도는 죽었고, 세상은 그 거짓을 진실로 믿어버렸다.방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창가 쪽 안락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새 전화기를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잠금을 풀자 화면이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온전히 내게 속한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생소하게만 느껴졌다.메모장을 열고 제목을 적어 넣었다.‘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들’처음에는 천천히, 이내 꼬리를 물고 생각들이 쏟아져 나왔다.지금껏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했던 간단한 요리법들을 찾아보았다. 원팬 갈릭 버터 파스타. 꿀과 산딸기를 얹은 오버나이트 오트밀. 전자레인지만 있으면 완성되는 초콜릿 컵케이크. 그저 내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먹는 기분이 얼마나 근사할지 머릿속에 그리며, 조심스레 조리법들을 하나하나 화면 캡처로 저장해 두었다.다음으로는 소원 팔찌를 만드는 법을 찾아보았다. 알록달록 고운 색감의 설명서에는 자수 실과 간단한 매듭짓기,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Read more

제49장: 짝을 먹이다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계단을 절반쯤 내려왔을 때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눈 깜짝할 사이에 주방 조리대 위에 다리를 쩍 벌리고 드러눕게 되는 거예요, 남편이 샅샅이 잡아먹을 준비를 하는 동안에 말이죠.”발걸음이 느려졌다.그것은… 결코 평범한 대화의 결이 아니었다.남은 계단을 내려와 로비로 들어섰다.“스칼렛.” 무슨 해괴한 짓이든 당장 멈추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녀를 불렀다.그녀는 마치 중범죄라도 저지르다 현행범으로 딱 걸린 사람처럼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한 손에는 여전히 전화기를 꼭 쥐고 있었고, 얼굴은 머리칼과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스카프 위로 드러난 모든 살결이 극심한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쥐구멍에라도 숨어 바닥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안내 데스크 뒤에서 나를 발견한 여인은 아주 흡족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꼬리를 한층 더 찢어 올렸다.“좋은 아침이에요.” 데스크의 여편네는 방금 제 입으로 내 치유사를 음탕하기 짝이 없는 자세로 묘사해댔다는 사실 따윈 까맣게 잊은 듯 쾌활하게 지껄였다. “아내분이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며 케이크를 구울 수 있는지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저 다정하게 조언을 좀 건네던 참이었죠.”데스크 옆에서 스칼렛은 차마 말로 터져 나오지 못한 작은 질식할 듯한 신음을 삼켰다.그녀를 한 번 쳐다본 뒤 다시 안내원에게 시선을 돌렸다.내 표정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불행하게도, 다른 녀석이 이미 그 틈을 타 한마디 얹기로 작정한 상태였다.‘우리 아내가 우리를 먹이고 싶어 해.’제드는 마땅히 그래야 할 수준 이상으로 지나치게 또렷하게 깨어 있었다.제드를 묵살하고 스칼렛을 쳐다보았다.그녀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귓바퀴 끝까지 발갛게 물든 채 한 손에는 전화기가 힘없이 매달려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허리춤에서 하얗게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부적절한 농담 한마디만 더 얹어졌다간 당장 뒤돌아 여관 밖으로 내달릴 기세였다.안내원은 제멋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Read more

제50장: 가장 가까운 유곽

알파 디미트리의 시점스칼렛이 없으니 방 안은 기묘할 만큼 휑하고 적막했다.침대로 걸어가 전화기 잠금을 풀고 블러드팽으로 연결되는 보안 회선을 열었다. 아래층에서 벌어진 일 따위에 미련을 둘 이유는 없었다. 일거리는 우리가 이 여관에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밀려 있었고, 떠난 뒤에도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내 결단을 요하는 보고서와 당면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편이, 이미 지나가 버려 되돌릴 수도 없는 대화를 곱씹는 것보다 훨씬 유익했다.신호가 두 번 울리자마자 통화가 연결되었다.“알파.” 페트루가 인사를 건넸다.“보고해라.” 내가 말했다.페트루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법이 없었고, 그의 보고 역시 그러했다. 국경 순찰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블러드팽의 국경을 시험하듯 넘보던 소규모 무리들은 지난번 무력 시위 이후 물러간 상태였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원로원의 청원들이 쌓여 있었으나, 대부분 몇 달마다 되풀이되는 영토 분쟁이나 교역로 문제, 케케묵은 앙금 따위였다. 내 즉각적인 복귀를 요하는 긴급한 사안은 없었다.끼어들지 않고 경청하며 모든 세부 사항을 뇌리에 새겨 넣었다.보고가 끝나자,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시신은?”잠시 침묵이 흘렀다.“레이븐 문섀도의 유해는 안전하게 확보했습니다.” 페트루가 답했다. “신원은 확인되었고, 아이언클로 측에도 공식 통보를 마쳤습니다. 알파 루칸의 수하들이 벌써 시신 인도를 요구하며 으름장을 놓고 있으나, 인도를 거부했습니다.”그의 목소리는 차분함을 유지했다.“현재로서는 이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지렛대가 되어주고 있습니다.”“그대로 쥐고 있어라.” 내가 일렀다. “내가 돌아갈 때까지 그 누구에게도 넘기지 마라.”“알겠습니다.” 페트루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물었다. “수색대는 어찌할까요?”“끝났다.” 내가 답했다. “레이븐 문섀도는 죽었다. 더 이상 뒤쫓을 사냥감은 없어.”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덧붙였다. “그 인원들을 동부 국경으로 재배치해라. 추후 지시가 있을 때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Read more
PREV
12345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