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Chapter 21 - Chapter 30

31 Chapters

21화: 거북선의 아버지, 나대용 1

​"내 이름은 나대용이라 하오. 나주 살고. 앞으로 잘 좀 부탁하네, 동업자."​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내 등골을 타고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나대용.임진왜란의 숨은 영웅. 이순신 장군이 바다의 신이라면, 이 사람은 그 신에게 번개를 쥐여준 대장장이다. 역사 교과서 귀퉁이에 작게 실려있지만, 밀덕들 사이에서는 레전드로 통하는 그가 내 손을 잡고 있다.​그의 손은 거칠었다. 쇠를 만지고, 나무를 깎고, 화약을 주무르느라 굳은살이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반갑습니다. 김덕령입니다."​나는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형님 김덕홍이나 담양 현감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존경심이었다.​"거, 자네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 인사는 그쯤 하고. 아까 하던 거나 마저 수습합시다. 저 귀한 재료들 다 똥물 되기 전에."​나대용은 감상에 젖을 시간도 없다는 듯 내 손을 놓고 솥단지 앞으로 갔다.​"아궁이 불부터 줄이시오! 은근하게 달여야지, 그렇게 센 불로 하면 다 타버려!"​그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지휘를 시작했다. 엉터리였던 현장이 순식간에 체계를 잡아가기 시작했다.​서백설이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저 사람, 진짜 기술자 맞아요? 행색은 영락없는 샌님인데."​"샌님은 무슨. 조선 최고의 엔지니어... 아니, 장인이셔. 잘 모셔라. 우리 밥줄이 될 분이니까."​"밥줄요? 돈만 까먹게 생겼는데."​서백설은 의심스런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나대용이 익호군 녀석들을 부려먹으며 흙물을 걸러내는 솜씨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동작 하나하나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진짜배기였다.​한참 후, 작업이 얼추 정리되자 우리는 객주 안채로 자리를 옮겼다.​술상이 차려졌다. 서백설이 내온 탁주 한 사발을 나대용이 단숨에 들이켰다.​"캬아! 이제야 좀 살겠구만."​그는 입가에 묻은 술을 소매로 쓱 닦으며 나를 쳐다봤다.​"그래, 김덕령이라 했나? 자네, 아까 내 배를 띄워주겠다고 했지?"​"그렇습니다."​"내가 어떤 배를 만들려는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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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거북선의 아버지, 나대용 2

"그냥 밥 먹고 할 짓 없어서 상상이나 좀 해 본 겁니다."나는 어깨를 으쓱했다.​나대용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도면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철심을 박아... 그래, 뚜껑 위에 십자형 길을 내고 나머지는 전부 칼을 꽂아. 그리고 용머리에서 포를 쏘면 전방 시야도 확보되고... 세상에, 이거야! 내가 찾던 게 이거였어!"​그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막혔던 혈이 뚫린 기술자의 희열이 느껴졌다.​"근데 형씨."​내가 찬물을 끼얹듯 물었다.​"그거 만들려면 돈이랑 쇠가 엄청나게 들 텐데요. 나무는 또 어디서 구하고요?"​나대용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현실의 벽.​"그렇소. 내 가산을 다 털어도 판옥선 반 척도 못 만드오. 관아에 지원 요청을 해봤지만, 현감 그 작자가 콧방귀도 안 뀌더군."​"당연하죠. 그 양반은 자기 뱃살 불리는 데만 관심 있으니까."​나는 서백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주판알을 튕기고 있었다.​"서 행수. 견적 나오나?"​"어림없어요. 지금 우리 가진 돈으로는 배는커녕 나룻배도 힘들어요. 하지만..."​그녀가 눈을 반짝였다.​"화약을 팔면 얘기가 달라지죠."​"화약?"​"네. 나 나으리께서 화약을 만들어주시면, 그걸로 돈을 벌 수 있어요. 사냥꾼들한테 팔아도 되고, 아니면 관아에 납품할 수도 있고요. 멧돼지 핑계로 허가증도 따왔잖아요."​역시. 돈 냄새 맡는 건 귀신이다.​"좋아. 그럼 계획 수정이다."​나는 탁자를 두드려 주의를 집중시켰다.​"우리는 지금부터 '주식회사 익호'다. 목표는 전쟁 준비."​나는 서백설을 가리켰다.​"서 행수는 자금 담당. 화약을 팔든, 호랑이를 잡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불려. 배 만들 자재 살 돈, 그리고 우리 애들 밥값."​"알았어요. 대신 수익 배분은 확실히 해요."​"나대용 형씨."​"말씀하시오, 대장."​호칭이 바뀌었다. 그가 나를 리더로 인정했다는 신호였다.​"형씨는 기술 담당입니다. 화약 제조, 그리고 거북선 설계. 필요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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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똥지게 대란 1

​"없소! 턱도 없단 말이오!"​나대용의 쩌렁쩌렁한 고함 소리가 객주 뒷마당을 울렸다.​그는 흙더미를 발로 툭툭 차며 울상을 지었다. 허름한 갓은 뒤로 넘어가고, 도포 자락은 흙투성이가 된 지 오래였다. 천재 기술자의 풍모보다는 밭 갈다 화난 농사꾼에 가까워 보였다.​"아니, 형씨. 흙이 이렇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뭐가 없다는 겁니까?"​내가 묻자, 나대용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이건 그냥 흙이잖소! 내가 말한 건 '염초기'가 잔뜩 낀, 혀에 대면 찌릿하고 짭짤한 그런 흙이란 말이오!"​"짭짤한지 아닌지 형씨가 먹어봤습니까?"​"척 보면 모르오? 이건 그냥 마당 흙이오. 이런 걸로 끓여봤자 거름밖에 안 나와요. 화약을 만들려면 최소한 10년은 묵은, 오줌과 재가 푹 섞여서 하얗게 꽃이 핀 흙이 필요하단 말이오!"​나대용은 깐깐했다.그냥 깐깐한 게 아니라, 미친 듯이 깐깐했다. 지난 사흘간 익호군 녀석들이 담양 바닥을 훑으며 퍼 온 흙이었지만, 이 양반 눈에는 그저 '불량품'이었다.​"하... 미치겠네."​나는 머리를 긁적였다.​나대용이 흙 한 줌을 집어 들고 혀를 쯧쯧 찼다.​"취토(取土)가 제대로 돼야 함수를 만들고, 그걸 졸여서 염초를 얻는 법이오. 헌데 이 흙은 기운이 너무 약해. 아무리 끓여도 맹탕인 게야. 흙 속에 숨어있는 정기(精氣)를 뽑아내야 하는데, 애초에 흙에 정기가 없으니 어쩌겠소?"​그의 말인즉슨, 원료가 부실해서 수율이 안 나온다는 소리였다. 조선 최고의 화약 장인이 안 된다고 하니, 안 되는 거다.​서백설이 장부를 끼고 다가왔다.​"왜들 싸우고 그래요? 흙이 모자라요?"​"모자란 게 아니라, 쓸 만한 게 없다는구려."​나대용이 혀를 찼다.​"질 좋은 염초 흙을 구하려면 인가(人家) 깊숙이 들어가야 하오. 사람 사는 집 구들장 밑이나, 뒷간 주변 흙이 최고지. 근데 남의 집 안방이나 뒷간을 함부로 팔 수가 있나? 도둑 취급이나 당하지."​맞는 말이다. 아무리 우리가 호랑이 잡은 영웅 대접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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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똥지게 대란 2

나는 정색을 했다.​"우리의 취지가 뭐냐? 나라 지키고 백성 지키는 놈들 아냐? 백성들이 똥독 올라서 고생하는데 그걸 모른 척해? 그게 사내대장부야?"​"아니, 그건 그렇지만..."​"그리고 똥을 퍼내려면 바닥을 긁어야지? 바닥에 굳어있는 묵은 흙까지 싹싹 긁어낸다. 그게 바로 청소의 기본 아니겠냐?"​나대용의 눈이 번쩍 뜨였다.​"오오! 그거요! 뒷간 바닥의 묵은 흙! 그게 바로 최상급 염초 밭이오!"​"들었지? 우리는 똥을 푸는 게 아니라, 전략 물자를 확보하는 거다. 그리고 명분은 '마을 환경 미화'고."​관아에서 국토 유실 죄를 걸었다고?우리는 청소를 해주는 거다. 똥 치워준다는데 나라 땅이 없어지네 마네 시비 걸 수 있을까? 만약 그랬다간 똥통 넘치는 꼴을 봐야 하는 마을 아낙네들이 현감 멱살을 잡으러 갈 거다.​"자, 지게 챙겨라. 똥장군도 챙기고."​나는 손뼉을 쳤다.​"오늘부터 작전명 변경이다.""작전명. [무진장개끗(無盡藏開끗(?))]. 실시!"​지옥의 행군이 시작되었다.​익호군 30명이 지게에 똥통을 싣고 마을로 진입했다. 비장한 표정들이었지만, 몸에서는 벌써부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계십니까! 뒷간 청소해 드립니다! 공짜입니다!"​최가가 대문 밖에서 소리쳤다. 목소리에 울음기가 섞여 있었다.​처음에는 의심하던 마을 사람들도, '공짜'라는 말과 건장한 청년들이 똥통을 메고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대문을 활짝 열어주었다.​"아이고, 이게 웬일이여. 덕령이네 청년들이 똥도 퍼준대?""워매, 고마워라. 안 그래도 영감이 허리 아파서 똥통이 넘칠 판이었는데."​아낙네들이 물을 떠다 주며 환영했다.​익호군 녀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뒷간에 들어갔다.​"으윽... 냄새...""야, 숨 참아! 입으로 숨 쉬어!"​푸세식 화장실의 악취는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녀석들은 내 '저녁밥 박탈' 협박을 떠올리며 삽을 들었다.​퍼내고, 또 퍼냈다.똥오줌을 퍼내고 나면 바닥에 눌어붙은 시커먼 흙이 드러났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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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화약, 첫 번째 폭발 1

​매캐한 연기가 산바람을 타고 흩어졌다.​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와 숯 타는 냄새. 그 너머로 드러난 광경은 참혹했다. 아니, 아름다웠다.​어른 허리춤까지 오던 단단한 화강암 바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검게 그을린 흙구덩이만이 흉터처럼 패어 있었다. 주변의 나무들은 폭풍이라도 맞은 듯 껍질이 벗겨지고 가지가 꺾여 나갔다.​"허..."​나대용이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숯 검댕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눈만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보았소? 자네, 저걸 보았소?"​그가 떨리는 손으로 구덩이를 가리켰다.​"이게... 이게 내가 만든 화약이란 말이오? 천둥소리보다 크고 벼락보다 매서운 이것이?"​"그렇습니다. 형씨가 만든 겁니다."​나도 침을 꿀꺽 삼켰다.​위력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이건 폭죽이 아니다. 살상 무기다.​"이 정도면 왜놈들 배도 한 방에 뚫겠소! 아니, 성벽도 무너뜨릴 수 있겠어!"​나대용은 어린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평생을 바쳐 연구한 결실이 눈앞에서 터졌으니 오죽하겠는가.​서백설은 멍한 표정으로 부서진 돌조각을 주워 들었다.​"이게... 흙이랑 숯으로 만든 거라고요?"​"그렇다니까."​"미쳤네. 진짜 미쳤어."​그녀가 중얼거렸다.​"이거 팔면 대박이겠어요. 사냥꾼들이 환장하겠는데요? 아니, 관아에 납품하면..."​역시. 충격받은 와중에도 계산기를 두드리는 저 프로 정신. 존경스럽기까지 했다.​"팔긴 뭘 팔아. 우리가 쓰기도 모자란데."​나는 구덩이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도 땅에서 열기가 올라왔다.​"이건 시작이야. 이제 이걸 대량으로 생산해서 비축해야 해. 전쟁 터지면 이게 쌀보다 더 귀해질 테니까."​"알았어요. 뒷간 청소, 더 열심히 시킬게요."​서백설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화약 가루가 금가루로 보이는 모양이었다.​그때, 산 아래 마을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방금 무슨 소리여?""천둥 친 거 아니여? 마른하늘에 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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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화약, 첫 번째 폭발 2

화약은 똥으로 만든다 쳐도, 철은 땅에서 캐내거나 녹여야 한다.​"농기구라도 녹여야 하나..."​내가 중얼거리자 나대용이 고개를 저었다.​"그걸로 어느 세월에? 그리고 농기구 쇠는 약해서 화포를 만들면 터져버리거나 금이 가오. 강도 높은 정철(正鐵)이 필요하오."​상황이 꼬였다.총알은 만들었는데 총이 없는 꼴이다.​나는 팔짱을 끼고 고민에 잠겼다. 1591년 조선. 철의 생산지는 대부분 관이 장악하고 있다. 사설 광산이 있긴 하겠지만, 규모가 작을 테고.​어디서 대량의 철을 구한단 말인가.​그때,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조선왕조실록, 혹은 야사집 어딘가에서 읽었던 구절.​임진왜란 직전, 호남과 영남의 경계 산악 지대에 도적 떼가 창궐했다. 그들은 관아의 물자를 탈취하고, 심지어는 왜관(倭館)의 일본 상인들과 밀거래를 하며 철과 화약을 팔아먹었다...​'밀거래.'​왜놈들이 조선의 철을 탐내서 몰래 사들였다는 기록. 그렇다면 그 도적 놈들 창고에는 밀수출 대기 중인 철이 쌓여있다는 소리다.​"서 행수."​내가 불렀다.​"네?"​"이 근처에 도적 떼 없나? 좀 규모 크고, 질 나쁜 놈들."​"도적요? 갑자기 그건 왜요?"​"있어, 없어?"​서백설이 잠시 생각하더니 무릎을 쳤다.​"아, 있어요! '흑산채(黑山砦)'라고."​"흑산채?"​"네. 담양이랑 순창 경계에 있는 산적인데, 아주 악질이에요. 보부상들도 그쪽 고개는 피해서 다닐 정도라니까요. 소문에 의하면 관아랑 결탁해서 밀수도 한다던데."​빙고. 찾았다.내 철광석 창고.얼른 가서, 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창고 지키느라 고생했다고 격하게 쓰담쓰담 해주고 싶네.​관아랑 결탁했다면 놈들이 가진 물건은 장물(臟物)이다. 털어도 뒤탈이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도적 토벌이라는 명분까지 챙길 수 있다.​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나대용 형씨."​"말하시오."​"쇠, 구해드리죠. 아주 많이."​"어디서? 관아 곳간이라도 털 셈인가?"​"아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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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산적 토벌 작전 1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다.은밀하게 움직이기 딱 좋은 날씨였다.​"발소리 죽여."​내 나직한 명령에 뒤따르던 50명의 장정들이 숨을 죽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술 먹고 고성방가나 하던 놈들이 제법 군인의 태가 났다. 역시 똥지게 훈련... 아니, PT 체조가 효과가 있었다니까.​우리는 담양과 순창의 경계인 추월산 자락을 넘고 있었다. 흑산채(黑山砦). 이름부터가 음침한 그곳은 험준한 절벽 사이에 요새처럼 틀어박혀 있었다.​"대장님, 진짜 괜찮을까요?"​최가가 내 옆으로 바짝 붙으며 속삭였다. 녀석의 손에 들린 몽둥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뭐가."​"흑산채 놈들 말입니다. 듣기로는 두목 놈이 사람 목을 무 베듯이 벤다고 하던데..."​"무 베듯이 베는 건 식당 아줌마도 해."​나는 피식 웃었다.​"걱정 마라. 놈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훈련 안 된 오합지졸이야. 너희랑 다를 게 없어."​"저희는 훈련받았지 않습니까!"​"그래. 똥지게 훈련."​내 말에 녀석들이 킥킥거렸다. 긴장이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잘 들어라. 놈들은 도적이다. 술 먹고 뻗어있거나, 기집질이나 하고 있을 거야. 방심한 놈들 뒤통수 까는 것만큼 쉬운 싸움은 없다."​나는 녀석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그리고 놈들 창고에 뭐가 있다고?"​"술! 고기! 돈!"​"그래. 그거 다 너희 거다. 오늘 밤만 지나면 배 터지게 먹고 마시게 해 주마."​욕망은 공포를 이기는 가장 강력한 동기부여다. 녀석들의 눈빛이 다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한 시간쯤 더 걸었을까.드디어 흑산채 입구가 보였다.​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진 목책(木柵). 입구 양옆에는 망루가 서 있고,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멈춰."​나는 손을 들어 행군을 멈췄다.​망루 위에는 졸개 둘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역시, 군기 빠진 놈들.​"최가야."​"예, 대장님."​"저거 보이지? 망루."​"예."​"네가 가서 처리해라."​"예?! 저, 저 말입니까? 혼자서요?"​최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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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산적 토벌 작전 2

​"비켜라."​나는 뒷걸음질 치는 부하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나갔다.​내 앞을 막아선 도적 하나. 험상궂게 생긴 놈이 칼을 겨누고 있었다.​"넌 뭐냐? 덩치만 믿고 까부는 거냐?"​놈이 칼을 휘둘렀다. 목을 노린 예리한 일격.​나는 피하지 않았다.대신 왼손을 뻗었다.​탁.​칼날이 내 손바닥에 잡혔다.​"......?"​도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맨손으로 칼날을 잡았다. 피가 철철 흘러야 정상인데, 내 손에선 오히려 쇳소리가 나는 듯했다.금강불괴.​"이런 건 과일 깎을 때나 쓰는 거야."​나는 놈의 눈을 보며 손에 힘을 주었다.​빠각!​강철로 만든 칼날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부러졌다.​"히익!"​놈이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내 오른주먹이 놈의 명치에 꽂혔다.​퍼억!​놈의 몸이 'ㄱ' 자로 꺾이며 10미터 뒤로 날아갔다. 흙바닥에 처박힌 놈은 꿈틀거리지도 않았다.​정적.전장의 소음이 일순간 멈췄다. 도적들도, 익호군들도 얼어붙었다.​나는 부러진 칼날 조각을 바닥에 툭 던졌다.​"다음."​낮게 깔린 내 목소리가 산채를 울렸다.​도적들의 눈빛이 흔들렸다.저건 인간이 아니다. 칼을 맨손으로 부러뜨리는 괴물.​"대... 대장님 만세!"​최가가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봤냐! 우리 대장님은 칼도 안 들어간다! 다 죽여!"​"와아아아!"​사기가 다시 역전되었다. 우리 편 대장이 천하무적이라는 사실만큼 든든한 백은 없다. 익호군 녀석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으아악! 살려줘!""도망쳐! 저 괴물한테서 도망쳐!"​도적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칼이 안 통하는 상대랑 어떻게 싸운단 말인가. 놈들은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기 바빴다.​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누구냐! 내 구역에서 행패 부리는 놈이!"​산채 가장 안쪽, 두목의 처소 문이 열렸다.곰 가죽을 두르고, 양손에 쌍칼을 든 거구의 사내가 걸어 나왔다.​흑산채 두목.키는 나보다 조금 작았지만, 덩치는 만만치 않았다. 얼굴에는 길게 칼자국이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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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주식회사 익호의 신입 여직원들 1

"심 봤다! 아니, 철 봤다!"최가의 호들갑스러운 고함 소리가 산채를 울렸다.창고 안은 그야말로 보물섬이었다.시커먼 무쇠 덩어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한쪽에는 일본으로 밀반출되려던 곡식과 포목이 가득했다. 심지어 관아 마크가 찍힌 무기 상자까지 있었다.현감 이 자식, 도적들이랑 짬짜미를 아주 제대로 해 먹었구만.아... 현감. 자꾸 보고 싶게 만드네.그 포동포동한 뺨따귀, 손맛이 아주 짜릿할 것 같은데 말이야."싹 다 챙겨. 못 하나, 쌀 한 톨 남기지 마."내 명령에 익호군 녀석들이 신나서 짐을 날랐다. 지게가 부족해 산적들이 쓰던 수레까지 동원해야 했다.이 정도 양이면 충분하다.나대용이 노래를 부르던 거북선의 철갑을 두르고도 남을 양이다. 거기에 우리 애들 무장시킬 칼과 창, 조총까지 만들 수 있다.'오늘 밤 일당은 제대로 챙겼네.'나는 흐뭇하게 짐 나르는 꼴을 구경하며 육포를 씹었다. 짭짤한 게 술안주로 딱이었다.그때였다."대... 대장님! 이쪽으로 좀 와보셔야겠습니다!"안쪽 건물을 뒤지던 춘식이가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왜? 뭐 또 좋은 거라도 나왔냐? 금괴라도 있어?""아닙니다! 그게... 사람이 있습니다.""사람? 도적 놈들 남았어? 그럼 그냥 보내줘. 우린 살생은 안 하니까.""그게 아니라... 여자들입니다."춘식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나는 씹던 육포를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춘식이가 안내한 곳은 산채 가장 구석진 곳, 바위굴을 개조해 만든 감옥이었다. 입구부터 지린내와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빗장이 걸린 쇠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횃불을 비추자 참혹한 광경이 드러났다.열 명 남짓한 여인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구석에 몰려 있었다. 옷은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드러난 살결에는 멍 자국과 채찍 자국이 선명했다.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눈빛은 공포와 절망 그 자체였다.산적 놈들이 납치해 온 양민의 딸, 혹은 부녀자들이었다. 놈들이 이들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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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주식회사 익호의 신입 여직원들 2

아. 맞다.여기는 2025년이 아니지.1591년, 조선이다.여자의 정절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미친 나라. 납치당해서 강간을 당해도, 피해자가 위로받기는커녕 '화냥년' 소리를 들으며 손가락질받는 야만의 시대. 심지어 미령이처럼 아직 당하지 않았더라도, 산적 소굴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낙인이 찍히는 세상.가족들도 반기지 않는다. 오히려 "왜 혀 깨물고 죽지 않았냐"며 은장도를 던져주는 게 이 시대의 '도덕'이었다."죽여주십시오."미령이가 바닥에 엎드려 오열했다."아직 몸은 더럽혀지지 않았으나, 마음은 이미 죽었습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여기서 죽게 해주십시오."그러자 다른 여인들도 줄줄이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했다."죽여주세요!""제발 죽여주세요!"기가 찼다.살려놨더니 죽여달라니.이게 나라냐.전생의 나는 '헬조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진짜 헬조선은 여기 있었다. 피해자가 죄인이 되는 세상.내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치밀었다. 도적 놈들에게? 아니, 이따위 세상을 만든 꼰대들에게."그만!"내가 고함을 지르자 통곡 소리가 뚝 그쳤다. 여인들이 겁에 질려 나를 쳐다보았다."죽긴 왜 죽습니까? 당신들이 뭘 잘못했다고?"나는 씩씩거리며 말했다."잘못은 납치한 도적 놈들이 했고, 못 지켜준 나라가 했고, 힘없는 가장들이 한 거지. 당신들은 피해잡니다. 살아서 돌아가는 게 복수고, 잘 먹고 잘사는 게 이기는 겁니다."하지만 여인들의 눈빛은 여전히 죽어 있었다. 내 말이 그들에게는 딴 세상 언어처럼 들리는 모양이었다. 미령이마저 고개를 젓고 있었다.'그렇다고 버리고 갈 수는 없잖아.'나는 머리를 굴렸다.이 여자들을 받아줄 곳이 있을까. 편견 없이, 능력으로만 사람을 봐줄 곳.있다.딱 한 군데.바로 나, 그리고 서백설이 있는 곳."좋습니다. 집으로 못 가시겠다면, 취직이나 하시죠.""네...? 취... 뭐요?"미령이가 젖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갈 곳 없으면 저 따라오십쇼. 밥 주고, 옷 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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