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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271 - Chapter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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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1

다음 날 아침부터 장미화는 부산스러웠다. 서울로 돌아간다는 두 사람을 앉혀놓고 아침을 먹이더니, 식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냉장고와 장독대를 오갔다. 며칠 전 오일장에서 산 나물은 무쳐서 통에 담았고, 김치는 종류별로 꺼냈다. 멸치볶음이며 장조림, 깻잎까지 작은 반찬통에 차곡차곡 들어갔다. 사라는 처음에는 식탁에 앉아 구경했다. 그러다 반찬통이 하나, 둘, 셋 늘어나자 눈이 반짝였다. “엄마.” 미화의 손이 순간 멈췄다. 아직도 사라가 부르는 그 한마디에는 매번 반응이 조금 늦었다. “응?” 사라가 식탁 위를 가리켰다. “더 없어?” 옆에서 보냉 가방에 반찬을 넣던 강수가 고개를 들었다. “민사라.” “왜.” “그만 가져가.” “왜?” “지금도 많아.” 사라는 식탁 위를 둘러봤다. “안 많은데?” “많아.” “우리 둘이 먹으면 금방 먹어.” 미화가 바로 사라 편을 들었다. “잘 먹으면 됐지. 더 싸줄게.” “봐.” 사라가 강수를 향해 턱을 들었다. “엄마가 더 준대.” 강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냉장고 털어갈 거야?” “엄마가 해준 거잖아.” “내 어머니야.” 사라가 코웃음을 쳤다. “또 시작이네.” “뭐가.” “엄마 뺏겼다고 질투하는 서른일곱 살 차강수.” “안 해.” “아궁.” “하지 마.” “우리 열 살 차강수 엄마 반찬 뺏길까 봐 속상해요?” 강수가 들고 있던 반찬통을 보냉 가방에 조금 세게 넣었다. 미화가 웃음을 터뜨렸다. “강수 것도 많이 넣었어.” “저 안 좋아합니다.” 사라가 바로 물었다. “뭘?” “반찬.” “거짓말. 며칠 동안 잘만 먹었잖아.” 강수는 입을 다물었다. 미화는 그사이 냉장고 안쪽에서 유리통 하나를 더 꺼냈다. “사라야, 이거 먹을래?” “뭔데?” “소고기장조림.” 사라가 벌떡 일어나려다 강수의 손에 어깨가 눌렸다. “앉아.” “나 볼 건데.” “내가 가져와.” 강수가 통을 받아 식탁에 내려놨다. 사라는 뚜껑을 열어 안을 확인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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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장미화는 냉장고를 한 번 더 열었다.강수의 표정이 굳었다.“어머니.”“왜. 하나만 더.”“이미 두 가방입니다.”“이건 반찬 아니야.”미화가 안쪽에서 꺼낸 건 작은 통에 담긴 식혜였다.사라가 바로 강수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뭔데?”“식혜. 어제 해놨어.”“나 식혜 좋아해.”“알아. 장에서 잘 먹길래.”사라의 눈이 동그래졌다.오일장에서 컵에 든 식혜를 하나 사 먹었던 걸 기억하고 있었다.“엄마가 나 먹으라고 만든 거야?”“너도 먹고 강수도 먹으라고.”“차강수 식혜 안 좋아해.”강수가 내려다봤다.“내가 언제.”“그럼 좋아해?”“먹어.”“그건 안 좋아하는 거잖아.”“둘이 가서 나눠 먹어.”미화가 통을 보냉 가방 위에 올렸다.강수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사라는 신발을 신으면서도 뒤를 돌아봤다.“엄마.”“응.”“다음에 진짜 또 올 거야.”“알았어.”“그때 냄비 새로 사올게.”미화가 웃었다.“그건 잊어버려.”“내가 태웠잖아.”“강수가 다 닦아놨어.”사라가 옆을 봤다.“오빠, 그거 닦았어?”“어.”“잘했네.”강수의 눈이 가늘어졌다.“네가 태웠어.”“그래서 오빠가 닦았잖아. 완벽한 분업.”“다음에는 네가 해.”“싫어.”며칠 동안 수도 없이 반복된 대화였다.그런데 현관에 서 있던 미화는 웃으면서도 자꾸 손끝을 만지작거렸다.보내야 하는 걸 아는데 쉽게 보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강수가 먼저 알아챘다.“들어가세요.”“차 조심하고.”“네.”“도착하면 연락하고.”강수가 잠시 어머니를 바라봤다.예전 같으면 짧게 대답하고 끝냈을 말이었다.“연락할게요.”미화가 고개를 끄덕였다.사라는 현관문을 나갔다가 다시 고개만 쏙 들이밀었다.“엄마!”“왜 또.”“사랑해.”미화가 그대로 굳었다.사라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밖으로 사라졌다.강수가 뒤따라 나가려는데 미화가 그의 팔을 잡았다.“강수야.”강수가 돌아봤다.미화는 한동안 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열 살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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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베르로 돌아오자마자 사라는 짐보다 먼저 작은 액자를 챙겼다.장미화의 집에 갈 때 품에 안고 갔던 뜬금이 사진이었다.강수는 현관에 보냉 가방 두 개와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신발을 벗었다. 사라는 이미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민사라.”“응.”“짐.”“오빠가 해.”“네 짐이야.”“응. 고마워.”강수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사라는 돌아보지도 않았다.침실로 들어간 사라는 협탁 위를 손으로 한번 쓸었다.그리고 그 자리에 액자를 놓았다.작은 초음파 사진.처음 병원에서 받아 지갑에 넣고 다녔고, 카페에 두고 온 줄 알고 울면서 찾았던 사진이었다. 이제는 작은 액자 안에서 두 사람의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사라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뜬금아.”손가락으로 액자 가장자리를 만졌다.“우리 할머니 집 또 가자.”뒤늦게 침실로 들어온 강수의 걸음이 멈췄다.사라는 사진만 바라봤다.“할머니가 너 사진도 봤잖아.”입가에 작은 웃음이 걸렸다.“다음에는 엄마 아빠 손잡고 가자.”강수의 시선이 액자에 닿았다.사라는 양손을 내려다봤다.한쪽에는 자신.다른 한쪽에는 강수.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아주 작은 뜬금이가 있는 모습을 생각했다.“이번에는 엄마가 들고 갔으니까.”사라가 액자를 살짝 바로 세웠다.“다음에는 네가 알아서 와.”강수의 턱이 굳었다.사라는 울지 않았다.“오는 길 멀어도 천천히 와. 엄마 아빠 기다리기로 했어.”강수가 다가와 사라 옆에 앉았다.큰 손이 사라의 머리를 한번 쓸어내렸다.사라는 자연스럽게 그 어깨에 기댔다.“오빠.”“어.”“엄마 반찬부터 넣어야 돼.”“알아.”“장조림 얼리면 안 되지?”“냉장.”“김치는?”“냉장.”“식혜도?”“어.”사라는 잠깐 생각하다가 물었다.“우리 저녁 뭐 먹어?”강수가 사라를 내려다봤다.“온 지 십 분 됐어.”“그래서?”“차에서 간식 먹었잖아.”“그건 간식이고.”강수는 말없이 일어났다.사라가 바로 웃었다.“뭐 해줄 건데?”“냉장고부터.”“엄마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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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사라와 강수는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뜬금이를 보내고 잠시 멈춰 있던 시간 동안 밀린 일이 많았다.사라는 CH건설에 다시 출근했고, 책상 위에 쌓인 자료부터 하나씩 정리했다. 해외 거래처에서 밀려 있던 메일에 답했고, 일본 쪽 협력사와 화상회의도 잡았다. 강수 역시 미뤄두었던 결재와 회의를 몰아서 처리했다.둘 다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사라의 협탁에는 여전히 뜬금이 사진이 있었고, 출근할 때면 가끔 액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엄마 돈 벌고 올게.”강수는 그런 사라를 재촉하지 않았다.그저 현관에서 가방을 받아 들었다.“늦어.”“알아. 뜬금이한테 인사하잖아.”“차에서 해.”“사진이 집에 있는데 차에서 어떻게 해.”“그러니까 빨리 나와.”말은 여전히 무뚝뚝했다.회사에서도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짧게 지시했고, 필요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회의에서 강수의 표정이 굳으면 임원들은 여전히 긴장했다.다만 사라만 알아보는 변화가 생겼다.회의를 마치고 회장실로 들어온 사라가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놨다.“회장님, 여기 서명해주세요.”강수가 서류를 확인하고 펜을 들었다.사라가 기다리며 책상 위 사탕 하나를 집으려는 순간 강수가 먼저 가져갔다.“뭐 해요?”“내 거야.”“회장님 사탕 안 드시잖아요.”“오늘은 먹어.”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사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지금 장난하시는 거죠?”“아닌데.”“맞는데.”강수는 사탕을 서랍에 넣었다.“나가.”“유치해.”“민 비서.”“네, 회장님.”사라가 돌아서자 강수가 서랍을 다시 열었다.“민사라.”“왜.”던져진 사탕을 사라가 받아냈다.강수는 이미 서류를 보고 있었다.사라가 피식 웃었다.“귀여운 척하지 마.”“나가.”그런 식이었다.표정도 없고 목소리도 그대로인데 가끔 사라가 먹으려는 걸 숨겼고, 지나가다 머리를 눌렀고, 먼저 엘리베이터를 닫는 척했다가 다시 열어줬다.사라는 그때마다 기가 막혀하면서도 웃었다.사뇌파 역시 정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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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곧?”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끝까지 읽고 사인했다. 펜 뚜껑까지 닫아 책상 위에 놓는 동안 사라는 소파 팔걸이에 앉아 그를 빤히 바라봤다.“차강수.”“왜.”“방금 곧 맞는다며.”“어.”“뭐가?”“형수.”덕배가 눈치를 보며 슬쩍 정민 쪽으로 움직였다.정민도 바로 알아챘다.“저희 나가 있겠습니다.”“왜 나가?”사라가 물었지만 두 사람은 이미 문 쪽이었다.덕배가 웃으며 말했다.“형수님, 잘해봐.”“뭘 잘해?”문이 닫혔다.사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강수를 봤다.“쟤들 왜 저래?”강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사라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강수의 손에 작은 반지 케이스가 들려 있었다.“어?”강수는 케이스를 열지도 않은 채 사라 앞으로 걸어왔다.사라의 눈이 점점 커졌다.“잠깐.”강수는 멈추지 않았다.“오빠.”“왜.”“그거 뭐야?”“보면 몰라?”“알겠는데.”강수는 사라 앞에 섰다.189센티미터의 큰 몸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사라는 반지 케이스와 강수 얼굴을 번갈아 봤다.“지금?”“어.”“여기서?”“어.”“회사에서?”“어.”사라가 황당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차강수, 내가 프러포즈 제대로 하랬잖아.”“알아.”“평생 바가지 긁히기 싫으면 제대로 하라고 했잖아.”“기억해.”“근데 이게 뭐야?”강수는 케이스를 열었다.반지가 드러났다.사라가 입을 다물었다.화려하게 꾸민 공간도 없었다.꽃도 없었고 촛불도 없었다.음악도 없었다.그저 매일같이 함께 일하는 회장실 한가운데였다.강수는 무릎도 꿇지 않았다.원래 그런 남자였다.사라가 반지를 보며 물었다.“언제 샀어?”“며칠 됐어.”“나 몰래?”“프러포즈를 너한테 말하고 준비해?”“그건 그렇네.”강수가 반지를 꺼냈다.그리고 사라의 왼손을 잡았다.“손.”“이미 잡았잖아.”“가만있어.”사라는 순순히 손을 맡겼다.강수의 큰 손 안에 사라의 작은 손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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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한동안 왼손을 들여다봤다.손가락을 펴봤다가 접고, 다시 펴봤다.반지가 움직일 때마다 빛이 달라졌다.강수는 이미 자리로 돌아가 앉아 있었다. 프러포즈를 끝낸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태연하게 다음 서류를 펼쳤다.사라가 어이없는 얼굴로 그를 봤다.“오빠.”“왜.”“일해?”“어.”“방금 프러포즈 해놓고?”“했잖아.”“그러니까 그다음이 없어?”강수가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뭐 해야 돼.”“몰라. 프러포즈한 사람이 알겠지.”“끝났어.”“와.”사라는 혀를 차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진짜 차강수답다.”“싫다며.”“언제 싫대. 좋은데 황당하다고.”강수는 다시 서류를 봤다.사라는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계속 반지만 보고 있었다.사진도 찍었다.손만 찍었다가 각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창가로 갔다. 햇빛 아래에서도 찍고, 검은 소파 위에서도 찍었다.강수가 결국 말했다.“안 닳아.”“알아.”“그만 봐.”“싫어. 내 건데.”그 말에 강수의 시선이 잠깐 사라의 손에 머물렀다.사라는 바로 알아챘다.“왜.”“아무것도 아니야.”“오빠도 좋아?”“어.”“내가 반지 낀 게?”“어.”사라가 씩 웃었다.“아궁, 결혼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민사라.”“우쭈쭈.”강수가 대꾸하지 않았다.그때 회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들어와.”정민이 먼저 들어왔고, 뒤로 덕배가 따라 들어왔다.둘의 시선은 거의 동시에 사라의 왼손으로 떨어졌다.덕배가 입꼬리를 올렸다.“됐습니까?”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너 알고 있었어?”“반지는 몰랐고. 아까 형님이 우리 내보내는데 모르면 바보지.”정민도 사라의 손을 한번 보고 강수를 봤다.“축하드립니다, 형님.”강수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사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나는?”정민이 웃었다.“축하해.”“그래. 나는 반말하면서 왜 오빠한테는 형님이야.”“그럼 회장님한테도 말 놓을까?”사라가 강수를 봤다.강수의 표정은 그대로였다.“해봐.”정민이 즉시 고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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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너머 미화가 눈물을 닦으면서도 웃었다.“그건 생각해봐야지.”사라의 눈이 커졌다.“엄마.”“왜.”“벌써 이러면 안 되지.”“내 아들도 불쌍하잖아.”“뭐가 불쌍해.”사라는 회장실 문을 한번 돌아봤다.“차강수 나보다 힘도 세고 돈도 많고 부하도 많아.”“그래도 네가 이길 것 같은데.”“그건 맞아.”미화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사라도 따라 웃었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라는 호칭이 자연스러웠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엄마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사라는 그것을 굳이 고치지 않았다.“엄마, 반지 예쁘지?”“예뻐. 손 좀 제대로 보여줘.”사라는 휴대전화를 책상 위에 세워두고 왼손을 이리저리 돌렸다.“이렇게?”“응. 너한테 잘 어울린다.”“내 사이즈도 정확히 알더라.”“강수가?”“응. 무섭지?”“걔 원래 그런 건 잘 봐.”사라가 화면을 빤히 봤다.“엄마 아들 자랑하는 거야?”“조금.”“아궁.”“또 놀리지 마.”“열 살 차강수 지금 들었으면 엄청 좋아했겠다.”미화의 얼굴에 잠깐 그리움이 스쳤지만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지금 강수도 좋아할 거야.”사라가 회장실 쪽을 흘겨봤다.“표정은 똑같아.”“원래 그래.”“프러포즈하고 바로 일해.”“그것도 원래 그래.”“엄마.”“응.”“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미화가 잠깐 멈췄다.그러다 아주 작게 웃었다.“내 아들이잖아.”사라는 아무 말 없이 그 얼굴을 바라봤다.예전이었다면 쉽게 나오지 못했을 말이었다.“응.”사라는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들 맞아.”통화는 한참 더 이어졌다.결혼식은 언제 할 거냐, 날짜는 정했느냐, 사라가 입고 싶은 드레스는 있느냐.사라는 대부분 모른다고 답했다.“아직 반지만 받았어.”“그래도 천천히 알아봐.”“응.”“강수한테 다 맡기지는 말고.”“왜?”“걔한테 맡기면 결혼식도 회의처럼 할 것 같아.”사라가 크게 웃었다.“진짜 그럴 것 같아.”그때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뭘.”사라가 흠칫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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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뒤 강수는 변호사를 선임했다.서희가 끝까지 협의이혼을 거부한 이상 더 기다릴 이유는 없었다. 강수는 변호사에게 필요한 자료를 넘겼고, 이혼소송 절차를 진행하라고 했다.그 소식이 서희에게 전달된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오후 회의가 한창이던 시간이었다.사라는 회장실 앞 자기 자리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안에서는 강수와 임원들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서희였다.빠르게 걸어오는 얼굴이 이미 잔뜩 굳어 있었다.“차강수!!”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김서희.”서희가 회장실 문으로 곧장 향했다.사라가 앞을 막았다.“조용히 해. 안에 회의 중이야.”“비켜.”“회의 끝나면 들어가.”“네가 뭔데 나를 막아?”“지금은 내가 여기 비서니까.”서희의 시선이 사라를 향했다.“너 때문에 이혼소송까지 하겠다는 거잖아.”“그건 나한테 따질 일이 아니야.”“비켜.”“싫어.”사라가 단호하게 막아선 순간이었다.짝!고개가 옆으로 세게 돌아갔다.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사라는 그대로 멈췄다.뺨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서희 역시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굳어 있었다.사라가 천천히 얼굴을 바로 했다.혀끝으로 입안부터 확인했다.그리고 서희를 봤다.짝!이번에는 서희의 목이 돌아갔다.복도 전체가 조용해졌다.사라는 손을 내렸다.“너만 때리는 거 아니야.”서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사라를 돌아봤다.“민사라.”“왜.”“너 지금 나 때렸어?”“응.”사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맞았으니까.”“네가 나한테 이럴 자격이 있어?”“자격?”사라의 눈빛이 달라졌다.“나 그날 이후로 너 용서한 적 없어.”서희의 입이 닫혔다.둘 사이에 카페에서의 일이 그대로 내려앉았다.잡아당겨진 머리카락.바닥으로 쓰러졌던 몸.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던 피.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뜬금이를 붙잡아달라며 울었던 자신의 목소리까지.사라는 잊은 적이 없었다.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내가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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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는 왼손을 내리지 않았다.“어.”서희의 시선이 반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프러포즈 받았어.”순간 서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사라는 담담했다.자랑하려는 것도, 일부러 보여주려는 것도 아니었다. 물었으니 대답했을 뿐이었다.“김서희.”서희가 사라를 봤다.“깨끗이 끝내.”“뭘?”“오빠랑.”서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네가 나한테 그 말을 해?”“응.”“네가 끼어들어서 이렇게 만들어놓고?”“내가 끼어든 거 맞아.”사라는 피하지 않았다.“그건 내가 잘못한 거고.”“그런데 끝내라고?”“응.”“왜 내가?”“안 끝낸다고 다시 돌아오는 거 아니잖아.”서희의 입술이 떨렸다.“그건 네가 정할 일이 아니야.”“맞아.”사라는 바로 인정했다.“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이혼하라고 너 찾아간 적 없잖아.”서희는 아무 말도 못 했다.“오빠가 끝내겠다고 했어. 네가 안 하니까 소송하는 거고.”“민사라.”“나랑 오빠가 결혼할 거니까 이혼해달라는 말 아니야.”사라는 반지 낀 손을 내렸다.“이미 끝난 관계 붙들고 서로 더 망가지지 말라는 거야.”그때 회장실 문이 열렸다.복도에서 이어진 소란이 결국 안까지 들린 모양이었다.먼저 임원 몇 명이 굳은 얼굴로 나왔고, 그 뒤로 강수가 모습을 드러냈다.사라의 붉어진 뺨을 본 순간 걸음이 멎었다.눈빛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누가 했어.”사라가 먼저 말했다.“나도 때렸어.”강수의 시선이 서희에게 갔다.서희의 뺨 역시 붉었다.“둘이?”“한 대씩.”“민사라.”“됐어. 내가 알아서 했어.”강수는 아무 말 없이 사라의 얼굴을 확인했다.손을 뻗어 턱을 잡고 옆으로 돌렸다. 손가락 자국이 올라오는 뺨을 보는 눈이 더 차가워졌다.“아파?”“따가워.”“병원.”“이걸로 무슨 병원을 가.”“가.”“싫어.”평소와 다를 것 없는 대화였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서희의 시선이 강수의 손으로 내려갔다.그리고 멈췄다.반지.강수의 손에도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서희는 눈을 깜빡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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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언제부터였느냐는 질문에 정확한 날짜를 댈 수 없었다.일본 출장도 아니었다.처음 선을 넘었던 밤도 아니었다.사라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인정한 날도, 르베르를 사준 날도 아니었다.그보다 훨씬 전이었다.강수는 한동안 서희를 바라보다 낮게 말했다.“몰라.”서희의 눈물이 멈췄다.“……뭐?”“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몰라.”“그게 말이 돼?”“어.”강수는 자기 감정을 하나씩 확인하며 움직인 사람이 아니었다.처음에는 그저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했다.술에 취한 서희를 데리고 청담동 펜트하우스에 나타났던 여자.작은 몸으로 서희를 부축하면서도 낯선 자신을 보고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던 여자.며칠 뒤 CH건설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우연이라고 생각했다.그 뒤로도 한동안 그랬다.눈이 가는 것도.말 한마디를 더 듣게 되는 것도.사라가 다른 사람과 웃고 있으면 시선이 머무는 것도.자신에게 겁먹지 않고 엉뚱한 말을 던질 때마다 그다음을 기다리는 것도.그때는 이름 붙이지 않았다.이름을 붙일 이유도 없었다.자신은 결혼한 사람이었고.서희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실제로 사랑했다.그런데 지금 돌아보면.강수의 시선이 사라에게 향했다.사라도 조용히 그를 보고 있었다.“아마.”강수가 다시 서희를 봤다.“사라 처음 봤을 때였던 것 같아.”서희의 얼굴이 굳었다.사라 역시 눈을 깜빡였다.“처음?”“어.”서희가 헛웃음을 흘렸다.“말도 안 돼.”강수는 반박하지 않았다.“처음부터 사라를 사랑했다는 거야?”“아니.”대답은 단호했다.“그때는 아니야.”“그럼 무슨 말인데.”강수는 잠시 말을 골랐다.“시작이 그때였던 것 같다고.”사라를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는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그저 처음으로 눈이 갔다.다시 보게 됐고.기억했다.그리고 회사에서 재회했을 때 알아봤다.그 작은 시작들이 쌓였다.“그때는 몰랐어.”강수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다.“내가 어디까지 갈지도.”서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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