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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281 - Chapter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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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강수는 서희의 질문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처음 만난 날로 돌아간다면.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던 때였다. 서희와 결혼해 살고 있었고, 사라는 술에 취한 친구를 데려다주러 왔을 뿐이었다.그날로 돌아가면 피할 수는 있었다.며칠 뒤 회사에서 다시 만났을 때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고, 일본 출장에서도 선을 넘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을 전부 알고 돌아간다면 더 쉬웠을지도 몰랐다.서희가 상처받는 것도.사라가 친구를 잃는 것도.뜬금이가 왔다가 떠나는 것도.강수의 턱이 천천히 굳었다.그 모든 걸 알고도 같은 길을 가겠느냐는 질문이었다.“어.”짧은 대답이 떨어졌다.서희의 눈이 흔들렸다.사라도 아무 말 없이 강수를 바라봤다.강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또 선택해.”서희의 입술이 벌어졌다.“이렇게 될 걸 다 알아도?”“알아도.”“내가 망가지는 것도?”강수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그건 미안해.”“뜬금이까지 그렇게 되는 것도?”이번에는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사라의 손가락이 움찔했다.그 이름 하나만으로 조금 전까지의 감정과는 전혀 다른 침묵이 내려앉았다.강수가 사라의 손을 잡았다. 반지가 맞닿았다.“그건 달라.”“뭐가.”“뜬금이 일까지 다시 똑같이 만들겠다는 뜻 아니야.”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알고 돌아가면 지켜.”사라가 입술을 깨물었다.“근데 사라는 선택해.”서희가 눈을 감았다.결국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이었다.“당신 진짜 잔인하다.”“알아.”“나한테 미안하면서도 쟤를 또 선택한다고?”“어.”“조금도 망설이지 않고?”강수는 잠시 침묵했다.“망설이겠지.”서희가 눈을 떴다.“근데 결국 갈 거야.”사라에게.강수는 그 뒷말을 굳이 붙이지 않았다.서희도 알아들었다.눈물이 다시 흘렀다.사라는 가만히 있다가 강수의 손을 놓았다.강수가 그녀를 봤다.“왜.”“잠깐.”사라는 서희를 향해 돌아섰다.“김서희.”서희는 대답하지 않았다.“나도 하나 말할게.”“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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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는 서희를 바라봤다.조금 전까지 끝까지 거부하겠다고 하던 사람이었다.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송 절차가 시작되자 회장실까지 찾아와 소리를 질렀고, 사라와 서로 뺨까지 때렸다.그런 서희가 이제 와서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강수는 곧바로 소송을 취하하겠다고 하지 않았다.“무슨 얘기.”서희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이혼 얘기.”“그러니까.”“둘이서 하자고.”강수의 눈이 조금 좁아졌다.서희는 사라를 한번 봤다.“민사라 없이.”사라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강수가 말했다.“그래.”서희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를 봤다.“대신 소송은 안 멈춰.”“차강수.”“네가 얘기하자고 했으니까 듣는 거야.”강수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취하는 별개고.”서희의 얼굴이 다시 굳었지만 이번에는 소리치지 않았다.“언제.”“네가 정해.”“오늘.”강수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회의 끝나고.”“집으로 와.”강수의 시선이 멈췄다.집.서희가 말하는 곳이 어디인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두 사람이 부부로 살았던 청담동 펜트하우스였다.강수에게는 한때 당연하게 돌아가던 곳이었다.지금은 아니었다.“거기로 갈게.”사라가 강수를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서희 역시 그 짧은 대답만 듣고 돌아섰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강수는 움직이지 않았다.잠시 후 사라가 제 뺨을 문질렀다.“아우, 이제 아프네.”강수의 시선이 바로 돌아왔다.“보자.”“괜찮아.”강수가 턱을 잡았다.“아까도 봤잖아.”“더 올라왔어.”“서희도 똑같이 맞았어.”“그게 네 얼굴 안 아프게 해?”사라가 입을 다물었다.강수는 엄지로 붉게 올라온 부분 주변을 아주 조심스럽게 눌렀다. 사라가 얼굴을 찡그리자 손이 바로 떨어졌다.“아프네.”“그러니까 병원.”“싫다니까.”“그럼 얼음.”“그건 할게.”강수가 비서실 쪽을 봤다.“정민아.”멀찍이 물러나 있던 정민이 바로 다가왔다.“네, 형님.”“얼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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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끝낸 강수가 청담동 펜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비밀번호는 바뀌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현관과 거실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한때 매일 돌아왔던 집이었다. 자신의 옷과 물건이 있었고, 서희와 밥을 먹고 잠들었던 곳이었다.그런데 오랜만에 들어선 공간은 이상할 만큼 남의 집처럼 느껴졌다.강수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서희는 거실에 앉아 있었다.낮에 부었던 눈은 가라앉아 있었지만 뺨에는 사라에게 맞은 흔적이 아직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강수 역시 그걸 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왔어?”“어.”“앉아.”강수는 소파 반대편에 앉았다.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서류도, 도장도 없었다. 이혼 이야기를 하자고 불러놓고 서희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강수도 재촉하지 않았다.먼저 말하겠다고 한 사람은 서희였다.얼마나 지났을까.“오빠.”연애할 때부터 결혼하고 나서까지 익숙하게 들었던 호칭이었다.“왜.”“오늘 하루 나랑 있어.”강수의 눈이 서희에게 향했다.서희는 울지 않았다.“무슨 뜻이야.”“그냥 오늘 하루.”“…….”“저녁 먹고.”서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우리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밥 먹고, 같이 TV 보고.”잠깐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잠도 같이 자고.”강수의 눈빛이 조금 가라앉았다.서희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부부 관계도 하고.”“안 돼.”대답은 즉시 떨어졌다.서희의 입술이 굳었다.“왜?”“그건 안 해.”“아직 나 당신 아내야.”“알아.”“법적으로도 아직 부부고.”“그것도 알아.”“그런데 왜 안 돼?”강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법적으로는 서희의 말이 맞았다. 아직 이혼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에게 프러포즈까지 했다.그렇다고 지금 서희와 몸을 섞는 게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오히려 반대였다.“사라 만나고 있어.”“그건 나도 알아.”“결혼할 거고.”“그것도 알아!”서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가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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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는 벽에 걸린 시계를 한번 봤다.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세 시간.그 시간을 달라는 뜻이었다.서희가 원한 건 다시 시작하자는 약속도 아니었고, 오늘 밤 이 집에서 자고 가라는 것도 아니었다. 자정이 지나면 협의이혼에 응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자신이 아직 차강수의 아내였던 시간을 갖고 싶은 거였다.강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희의 입술이 떨렸다.“진짜?”“자정까지 있을게.”“……고마워.”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서희는 다시 TV를 켰다. 채널을 몇 번 돌리다 예전에 둘이 자주 보던 영화를 찾았다.“이거 기억나?”“어.”“우리 연애할 때 극장에서 봤잖아.”“기억나.”서희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그 뒤로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영화는 흘러갔고 거실은 조용했다. 서희는 몇 번이나 강수 쪽을 바라봤지만 이번에는 기대거나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다.강수도 약속한 자리를 지켰다.열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서희가 먼저 일어났다.“맥주 마실래?”“운전해야 돼.”“기사 부르면 되잖아.”“안 마셔.”“그래.”예전 같으면 한 잔만 하라고 졸랐을지도 몰랐다.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서희는 냉장고에서 자기 것만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나도 안 마실래.”물을 두 잔 가져와 하나를 강수 앞에 놓았다.강수가 잔을 들었다.그 손에 낀 반지가 다시 보였다.서희는 한참 그걸 바라보다 물었다.“그 반지, 사라가 끼워줬어?”“어.”“당신이 먼저 사라한테 끼워주고?”“어.”“프러포즈하면서?”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서희는 더 묻지 않으려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우리 결혼할 때는 내가 먼저 반지 보러 가자고 했었지.”“그랬지.”“당신 아무거나 고르라고 했고.”“어.”“그때 나 서운했어.”강수의 시선이 서희에게 향했다.“말하지.”“그때는 당신이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서희가 희미하게 웃었다.“지금 보니까 아니었네.”“…….”“하고 싶으면 하는 사람이었네.”강수는 부정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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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이혼 절차는 생각보다 조용하게 흘러갔다.서희가 협의이혼에 응하면서 강수가 시작했던 소송은 더 이상 이어갈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각각 변호사를 통해 필요한 내용을 정리했고, 재산 문제 역시 길게 다투지 않았다.둘이 부부로 함께 살았던 청담동 펜트하우스는 서희가 갖기로 했다.강수가 먼저 그렇게 정했다.서희도 거절하지 않았다.그 집에는 삼 년의 결혼생활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처음 신혼집에 들어오던 날 서희가 골랐던 가구와 커튼, 둘이 함께 앉아 영화를 봤던 소파, 강수가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켜져 있던 현관 조명까지.한때는 둘의 집이었다.이제는 서희의 집이 됐다.나머지 재산도 양쪽 변호사가 정리했다. 강수는 줄 것을 아끼지 않았고 서희 역시 마지막에 와서는 더 가져가겠다며 싸우지 않았다.사 년의 연애와 삼 년의 결혼을 돈으로 계산할 수는 없었다.그래서 둘 다 계산하려 하지 않았다.법적으로 남아 있던 절차까지 끝난 날, 서희는 한참 동안 서류를 바라봤다.김서희.차강수.종이 위에 나란히 적혀 있던 이름은 이제 부부라는 관계로 묶이지 않았다.그날 저녁 서희는 사라에게 메시지를 보냈다.한참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끝에 남긴 말은 짧았다.‘나 한번만 만나줄래?’답장은 늦게 왔다.‘아니.’서희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뒤이어 한 줄이 더 왔다.‘아직은 너 만나고 싶지 않아.’서희의 손가락이 멈췄다.예전의 사라라면 만나줬을 거라고 생각했다.싸우든 욕을 하든, 얼굴을 보고 끝내자고 했을지도 몰랐다.하지만 지금의 사라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서희는 전화를 걸지 않았다.‘알았어.’그 한마디만 보냈다.사라에게 사과하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있었다. 뜬금이의 일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고, 그날 자신이 사라의 머리채를 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하지만 그 답을 사라에게서 받아낼 수는 없었다.미안하다고 말한다고 해서 사라가 용서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서희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며칠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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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의 결혼식 날, 사라는 강수와 함께 예식장에 도착했다.준호는 해외여행 중 만난 친구였다. 사라가 어느 나라에 있든 연락이 이어졌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자연스럽게 만났던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 준호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사라는 당연하다는 듯 참석하겠다고 했고, 이번에는 강수도 함께였다.“형님.”신랑 대기실에서 강수를 발견한 준호가 먼저 웃었다.“진짜 같이 오셨네요.”“왜.”“아니, 그냥. 두 분 나란히 결혼식장 들어오는 게 신기해서요.”사라가 옆에서 끼어들었다.“뭐가 신기해. 우리도 곧 하는데.”준호의 시선이 사라의 왼손으로 떨어졌다.“그러네. 진짜 받았네?”“예쁘지?”사라가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들었다.준호가 반지를 보다가 강수를 봤다.“형님이 고른 겁니까?”“어.”“오빠가 내 사이즈도 알고 있었어.”“그게 더 무섭다.”“그치?”“둘 다 조용히 해.”강수의 한마디에 준호가 웃었다.사라도 따라 웃으며 신부대기실 쪽으로 향했다.결혼식이 시작되고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서희는 보이지 않았다.신부와 대학 시절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었고, 오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사라는 찾지 않았다.강수 역시 둘러보지 않았다.궁금하지 않았다.서희는 이제 두 사람 사이에 확인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준호가 신부의 손을 잡고 버진로드를 걸었다.사라는 박수를 치다가 슬쩍 강수의 옆구리를 찔렀다.“오빠.”“왜.”“우리도 저거 해야 돼?”“뭐.”“저렇게 사람들 앞에서 걸어가는 거.”“싫어?”“아니. 그냥 생각보다 되게 결혼식 같아서.”강수가 사라를 내려다봤다.“결혼식이니까.”“아, 그렇네.”사라는 혼자 납득하고 다시 앞을 봤다.강수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준호의 결혼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결혼 준비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날짜를 정하고.예식장을 보고.초대할 사람을 정하고.미화에게도 일정을 알려주고.결혼식에 가져갈 뜬금이의 사진을 어떤 액자에 넣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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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준비는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다.드레스를 정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었고, 예식장과 식사, 사진, 꽃, 음악, 청첩장까지 하나를 정하면 그다음 선택지가 기다렸다. 사라는 처음 며칠은 신이 나서 전부 직접 보겠다고 덤볐다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소파에 엎어져 말했다.“결혼 한 번 하기 힘드네.”강수는 맞은편에서 태블릿을 넘기고 있었다.“하지 마?”사라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미쳤어?”“힘들다며.”“힘들다고 안 한다는 건 아니지.”“그럼 해.”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사라는 쿠션을 집어 던졌고 강수는 한 손으로 받아 옆에 내려놓았다.“차강수, 요즘 나 놀리는 거 재미 들렸지?”“아니.”“표정부터 너무 아니잖아.”강수는 대꾸하지 않고 태블릿을 사라 쪽으로 돌렸다.신혼여행지를 고르는 것도 둘이 함께했다.한 군데에 오래 머무는 여행보다는 여러 곳을 돌아보고 싶다는 건 사라의 의견이었다. 강수는 일정표를 보다가 기간부터 물었다.“얼마나.”“한 달?”강수가 고개를 들었다.“왜. 길어?”“아니.”“진짜 한 달 가도 돼?”“가자.”사라는 오히려 자신이 놀랐다.“회사 어떡하고?”“정민이 해.”“정민이 또 죽겠네.”“안 죽어.”“사뇌파는?”“덕배.”“덕배도 죽겠는데.”“둘이 알아서 해.”결국 여행지는 사라가 예전부터 다시 가보고 싶었던 곳들과 강수가 가보지 않았던 곳을 섞어 정했다. 예전처럼 혼자 떠나는 여행도 좋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옆에 강수가 있었다.그래도 사라는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포기하지 않았고, 강수도 자신에게 맞추라고 하지 않았다.청첩장이 나오고 나서는 사람들을 만나는 날이 늘었다.사라는 친구들을 하나씩 만나 직접 청첩장을 건넸다.“나 진짜 결혼한다.”“네가?”“왜 다 그 반응이야?”“민사라가 결혼한다고 하니까 그렇지.”“나도 할 수 있거든?”“정착은 절대 안 한다며.”사라는 청첩장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내가 잘못 알았어.”“뭘?”“정착.”친구가 사라를 빤히 봤다.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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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손님이 돌아가고 현관문이 닫히자 조금 전까지 시끄럽던 집이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테이블 위에는 빈 잔과 접시가 남아 있었고, 소파에는 누군가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쿠션이 굴러다녔다. 사라는 현관에 기대 사람들이 탄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소리를 듣다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다 갔다.”강수가 뒤에서 식탁을 정리했다.“어.”“재밌었지?”“어.”사라가 돌아봤다.“오늘도 어만 하네.”강수는 빈 잔을 내려놓고 사라를 봤다.그 시선이 평소보다 오래 머물렀다.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왜 그렇게 봐?”대답은 없었다.강수가 다가왔다.사라는 그가 가까워지는 만큼 고개를 들었다. 키 차이 때문에 목이 완전히 젖혀지고서야 시선이 맞았다.“뭐야.”강수의 손이 허리를 잡았다.몸이 단번에 끌려갔다.“아.”사라의 웃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겹쳤다.처음부터 가볍지 않았다.사라가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조금 전 사람들 앞에서 무표정하게 음식이나 챙겨주던 남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강수의 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사라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잠깐.”강수가 멈췄다.“왜.”“설거지.”“내일 해.”다시 입술이 내려왔다.사라가 웃으며 고개를 피했다.“차강수, 너 아까는 정리하고 있었잖아.”“마음 바뀌었어.”“왜?”강수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왔다.“너 때문에.”사라가 웃었다.“나 뭐 했는데?”“계속 붙었잖아.”“내 집에서 내 남자한테 붙은 건데?”“그러니까.”그 한마디 뒤로 사라의 등이 벽에 닿았다.이번에는 웃음이 오래가지 못했다.강수의 입술이 다시 겹치자 사라는 눈을 감았다. 짧게 끊기던 숨이 점점 흐트러졌다. 목에 팔을 감자 작은 몸이 자연스럽게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오빠.”낮게 부른 목소리에 강수의 움직임이 잠깐 멈췄다.“왜.”“침실 가.”강수는 말없이 사라를 들어 올렸다.“아, 잠깐.”사라가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나 걸어갈 수 있어.”“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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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이 흘렀다.결혼식까지 정확히 이 주가 남아 있었다.청첩장은 이미 돌렸고 신혼여행 일정도 끝났다. 미화는 결혼식에 입을 옷을 맞췄고, 정민과 덕배는 강수가 한 달 가까이 자리를 비울 동안의 일정을 넘겨받느라 죽겠다는 소리를 했다.사라는 여전히 출근했고 강수 역시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날도 CH건설 회장실에서는 임원회의가 한창이었다.긴 테이블 위로 서류가 펼쳐져 있었고 강수는 상석에 앉아 보고를 듣고 있었다. 정민은 한쪽에 서서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다음 분기 착공 일정은.”강수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회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임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돌아갔다.사라였다.평소 같으면 아무리 제멋대로인 사라라도 회의 중인 회장실에 이렇게 들어오지는 않았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얼굴이 이상했다.웃고 있는데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정민이 먼저 몸을 바로 세웠다.“사라야?”강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왜.”사라는 대답하지 않고 강수에게 걸어갔다.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눈물이 먼저 떨어졌다.“오빠.”회사였다.임원들이 전부 보고 있었다.평소라면 회장님이라고 불렀을 사라가 그런 것까지 잊었다.“돌아왔어.”강수의 움직임이 멈췄다.“뭐가.”사라는 울면서 웃었다.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작은 초음파 사진이었다.강수의 눈이 그대로 굳었다.사라의 목소리가 떨렸다.“우리 뜬금이.”숨을 한번 삼켰다.“돌아왔다고.”회의실 안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강수는 사진을 받지 못했다.정확히는 손이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시선만 사진에 박혔다.검은 화면 속 작고 하얀 형체.한 번 잃어봤기에 알아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강수가 겨우 입을 열었다.“……병원 갔다 왔어?”“응.”“혼자?”“응. 나도 몰랐어.”사라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았다.“요즘 결혼 준비 때문에 피곤한 줄 알았거든. 생리도 정신없어서 제대로 계산 안 했고.”그러다 문득 이상해서 병원에 갔다.그리고 들었다.임신이라고.강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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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는 정말 다시 병원으로 갔다.사라가 오전에 이미 진료를 받았다는 말도 소용없었다. 차에 타자마자 병원에 연락한 정민이 상황을 설명했고, 두 사람이 도착했을 때는 담당 의사가 다시 초음파를 봐주기로 한 뒤였다.진료실에 들어가면서도 사라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나 오늘 여기 두 번째야.”“알아.”“아까 다 보고 왔어.”“어.”“사진도 받았고.”“알아.”“근데 또 왔어.”강수가 사라를 내려다봤다.“누워.”“진짜 말 안 통해.”투덜거리면서도 사라는 진료대에 누웠다.강수는 바로 옆에 섰다.처음 뜬금이를 가졌을 때도 그랬다. 임신을 확인한 뒤부터 검진일을 단 한 번도 빠뜨리지 않았고, 초음파 화면을 볼 때마다 의사가 하는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그래서 사라는 오히려 알았다.지금 강수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하지만 사라의 손을 잡은 손가락에 평소보다 힘이 들어가 있었다.“오빠.”“왜.”“나 괜찮대.”“알아.”“뜬금이도.”“직접 볼 거야.”사라는 더 말하지 않았다.의사가 웃으며 초음파 검사를 시작했다.모니터에 검은 공간이 나타나고 그 안으로 작은 형체가 잡혔다.강수의 시선이 그대로 고정됐다.“여기 보이시죠?”“네.”“아기는 잘 있습니다. 크기도 주수에 맞고요.”사라가 화면을 바라봤다.오전에 이미 봤는데도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작았다.정말 작았다.그런데 있었다.분명히 자기 안에 있었다.“심장도 다시 들어보실게요.”잠시 후 진료실 안에 빠르고 규칙적인 소리가 퍼졌다.두근두근두근두근.강수의 손이 굳었다.사라는 화면보다 강수를 먼저 봤다.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오빠.”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들려?”“어.”낮게 떨어진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그리고 그때였다.모니터 안의 작은 형체가 움직였다.통.사라가 눈을 크게 떴다.“어?”다시 한번.통통.아직 너무 작아 팔다리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구분하기는 어려웠지만 화면 속 작은 아기가 몸 전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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