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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61 - Chapter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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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정민의 시선이 사라의 손목에서 강수에게로 천천히 옮겨갔다. 표정은 멀쩡했지만 눈빛만큼은 묘했다. “예쁩니다. 잘 어울리네요.” “그쵸?” 사라는 팔찌를 손끝으로 만지며 웃었다. “회장님 보는 눈 있더라고요.” 강수는 서류에서 눈도 들지 않았다. “할 말 있냐.” “없습니다.” “그럼 일해.” “예.” 정민이 돌아서자 사라도 아무렇지 않게 제 자리로 향했다. 잠시 후 서류를 들고 회장실에 들어온 정민이 문을 닫았다. 강수는 보고서를 넘기다 자신을 빤히 보는 시선을 느끼고 눈을 들었다. “뭐.” “언제부터 직원 선물을 직접 고르셨습니까?” “신경 꺼.” “사라 씨라서 여쭤보는 겁니다.” 강수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정민은 일본 출장 이후부터 이어진 일들을 모를 수 없었다. 준호 때문에 위치까지 알아보라던 사람이 갑자기 모든 조사를 중단했고, 이제는 팔찌까지 직접 골라 선물했다. “사라 씨는 별생각 없어 보이던데요.” 강수의 미간이 구겨졌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입니다.” 정민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회장님만 신경 쓰시는 것 같아서요.” “나가.” 정민은 더 건드리지 않고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날 오후에도 사라는 팔찌를 빼지 않았다. 서류를 넘길 때마다 가느다란 손목에서 작은 장식이 반짝였다. 강수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몇 번이나 그곳을 따라갔다. “회장님.” 사라가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여기 사인해 주세요.” 강수는 펜을 들면서도 손목을 한번 더 봤다. “계속 차고 있네.” “주고 바로 빼면 서운할 거잖아요.” “내가?” 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내가 별 반응 안 하니까 서운해했잖아요.” “내가 언제.” “그게 다냐면서요.” 사라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되게 귀찮은 타입이네.” 강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민사라.” “그래도 마음에 들어요.” 장난스럽던 목소리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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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강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자신이 직접 골라 사준 팔찌였다. 그것도 서희가 바로 옆에 있던 매장에서 몰래. 그런데 아내의 입에서 다른 남자 이름이 나오자 기분이 더럽게 뒤틀렸다. “왜 걔라고 생각해.” “요즘 자주 만나잖아.” 서희는 침대에 앉아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묶었다. “전에 같이 밥도 먹었고. 준호가 사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아니야.” 대답이 지나치게 빨랐다. 서희가 고개를 들었다. “오빠가 어떻게 알아?” 강수의 입이 닫혔다. “그냥 그렇게 안 보였어.” “난 좀 그런 것 같던데.” 서희는 대수롭지 않게 웃고 욕실로 들어갔다. 강수는 혼자 남아 넥타이를 풀었다. 준호가 사라에게 팔찌를 사준 것도 아닌데 괜히 그 새끼가 거슬렸다. 더 우스운 건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팔찌는 자신이 샀다고. 아내와 데이트하던 중 다른 여자가 떠올라 몰래 결제했다고. 말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강수가 출근했을 때 사라는 팔찌를 그대로 차고 있었다. 별것 아닌 듯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목에서 작은 장식이 흔들렸다. “민사라.” “네.” “들어와.” 사라는 하던 일을 저장하고 회장실로 따라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강수가 물었다. “서희 만났다며.” “네.” “팔찌 얘기했어?” 사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서희가 말했어.” “아.” 사라는 금세 이해한 얼굴이었다. “남자가 줬다고 했다며.” “남자가 준 거 맞잖아요.” 강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나라고 말 안 했는데.” 이번에는 사라가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말했어야 돼요?” “그건 아닌데.” “그럼 됐잖아요.” 강수는 할 말을 잃었다. 사라는 팔찌를 한번 내려다봤다. “서희가 누구냐고 물어보길래 그냥 비밀이라고 했어요.” “왜.” “굳이 회장님이라고 말하면 설명할 게 많아지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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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왜요?” 수화기 너머 사라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가벼웠다. 강수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보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고 집 앞으로 가겠다고까지 해놓고, 막상 이유를 묻자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었다. “잠깐 보자.” “아까 회사에서 봤잖아요.” “알아.” “근데 또 왜 봐요?” 강수는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보고 싶어서.”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이내 사라가 웃었다. “회장님 진짜 많이 이상해졌네.” “나도 알아.” “근데 나 씻었어요.” “그래서.” “화장도 지웠고 잠옷 입었고. 지금 나가기 귀찮은데.” 그게 거절의 이유 전부였다. 강수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럼 내가 올라가.” “안 돼요.” “왜.” “집에는 아무나 안 들여요.” “나도?” “회장님이 뭐 특별해요?” 강수의 입이 다물렸다. 사라는 그 반응이 재미있는지 작게 웃었다. “삐졌어요?” “안 삐졌어.” “목소리는 삐졌는데.” “창문으로 얼굴만 보여줘.” 이번에는 사라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진짜 우리 집 앞까지 올 거예요?” “가는 중이야.” “미쳤네.” “알아.” 삼십 분 뒤 강수의 차가 사라의 오피스텔 앞에 멈췄다. 몇 층인지 묻지도 않았다.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자 휴대폰이 울렸다. [왼쪽 위에서 세 번째.] 고개를 들었다. 커튼이 걷히고 창문 하나가 열렸다. 사라가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긴 머리는 대충 틀어 올렸고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이었다. 아래를 두리번거리다 그의 차를 발견하자 손까지 흔들었다. 강수의 입가가 저절로 풀렸다. [봤죠? 이제 가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잠깐 내려와.” “싫다니까요.” “먹을 거 가져왔어.” “먹을 거요?” 목소리가 대번에 달라졌다. 강수가 웃었다. “어.” “잠깐 기다려요.” 통화가 끊겼다. 몇 분 뒤 공동현관이 열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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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강수는 한참 사라를 바라보다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냈다. 살면서 자신의 차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운전기사나 정민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손바닥 위에 놓인 키를 본 사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진짜?” “대신 얌전히 몰아.” “그건 장담 못 하는데.” “민사라.” “알았어요, 알았어.” 말과 달리 사라는 신이 나 있었다. 먹을 것을 집에 두고 내려오는 데도 채 오 분이 걸리지 않았다. 얇은 후드집업 하나만 걸친 채 뛰어나온 사라가 당연하다는 듯 운전석으로 향했다. 강수는 조수석 문을 열다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차 조수석에 앉는 것부터가 낯설었다. 사라는 시트를 한참 앞으로 당겼다. 189센티미터인 강수에게 맞춰진 운전석은 160센티미터인 사라에게 지나치게 멀었다. “와, 회장님 진짜 크긴 크구나.” “이제 알았냐.” “맨날 올려다보니까 목 아프긴 했죠.” 사라가 사이드미러까지 야무지게 맞춘 뒤 시동을 걸었다. 엔진음이 울리자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좋다.” “천천히.” “출발도 안 했는데 잔소리하지 마요.” 차가 도로로 미끄러져 나갔다. 처음에는 제법 얌전했다. 딱 오 분이었다. 큰 도로로 들어서자 사라가 오디오를 만졌다. “노래 틀어도 되죠?” 강수가 대답하기도 전에 경쾌한 음악이 차 안을 채웠다. “야.” “왜요. 드라이브하는데 음악이 있어야지.” 볼륨이 한 칸 더 올라갔다. 사라의 손가락이 핸들 위에서 박자를 탔다. 신호에 걸리자 어깨까지 들썩였고, 익숙한 후렴이 나오자 거리낌 없이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강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노래를 잘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초혼》을 부르던 사라는 사람을 조용하게 만드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전혀 달랐다. 신나는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고, 가사를 흥얼거리다 모르는 부분은 제멋대로 넘겼다. 신호가 바뀌자 다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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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바다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을 훌쩍 넘긴 뒤였다. 차를 세우자마자 사라가 안전벨트를 풀었다. “안 내린다며.” “바다까지 왔는데 어떻게 안 내려요.” “잠옷이라며.” “밤인데 누가 봐.” 문이 먼저 열렸다.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차 안으로 밀려들었다. 강수는 슬리퍼를 끌며 모래사장으로 뛰어가는 작은 뒷모습을 보다가 결국 따라 내렸다. “와, 좋다!” 사라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파도가 가까워지자 달려갔다가 발끝에 물이 닿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아, 차가워!” 강수의 입에서 웃음이 터졌다. 사라가 홱 돌아봤다. “비웃었죠?” “그러게 누가 들어가래.” “바다 왔으면 물에는 들어가 봐야죠.” “그럼 더 들어가.” “싫어요. 추워.” 말은 그렇게 하면서 다시 파도 쪽으로 달려갔다. 강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런 사라를 바라봤다. 혼자서도 잘 놀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맞춰줘야 즐거운 사람도 아니었다. 마음이 가면 뛰었고, 재미있으면 웃었다. 싫으면 돌아섰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사라가 갑자기 강수에게 달려왔다. “회장님, 여기 있어요.” “왜.” “가지 말고 기다려요.” 대답할 틈도 없이 사라가 모래사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야, 어디 가!” “기다려요!” 멀리서 목소리만 돌아왔다. 강수는 어이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십 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 사라가 양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뛰어오는 게 보였다. 가까워진 봉투 안을 본 강수의 눈썹이 올라갔다. “이걸 다 샀어?” “네.” 폭죽이었다. 손에 들고 하는 것부터 바닥에 놓는 것까지 봉투 두 개가 꽉 차 있었다. “이걸 언제 다 해.” “하면 되죠.” 사라는 쪼그려 앉아 신나게 포장을 뜯었다. “회장님도 해요.” “난 됐어.” “같이 하려고 잔뜩 사왔는데.” 강수는 거절하려다 멈췄다. 사라는 벌써 불을 붙이고 있었다. 치익. 곧 어두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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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차 안에 한동안 웃음이 남아 있었다. 사라는 숨을 고르면서도 자꾸 웃었다. “진짜 웃겨. 회장님이 나랑 도망갔어.” “누구 때문에.” “재밌었잖아요.” “잡혔으면 너 혼자 알아서 했어야 돼.” “왜요. 같이 했으니까 공범이지.” 강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전국 어디를 가도 사람들이 먼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자신이 고작 폭죽 몇 개 때문에 관리원을 피해 뛰었다. 그것도 사라의 손을 잡고. 아니, 정확히는 사라가 먼저 잡았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바닥에 남은 감각이 자꾸 신경 쓰였다. 사라는 벌써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내가 운전할래요.” “피곤하지 않아?” “완전 멀쩡해요.” 결국 강수가 차 키를 내밀자 사라는 냉큼 받아 들었다. 도로에 올라서자 음악부터 켰다. 조금 전 바닷가의 흥이 그대로 남았는지 노래를 따라 부르고, 핸들을 두드리며 박자를 탔다. 강수는 조수석에 기대 그런 사라를 바라봤다. “여행할 때도 이랬어?” “맨날 그랬죠.” “갑자기 바다 가고?” “바다도 가고 다른 도시도 가고. 아침에 눈 떴는데 가고 싶으면 그냥 갔어요.” “계획도 없이?” “네. 그게 재밌잖아요.” “또 갈 거야?” 사라가 잠시 생각했다. “가고 싶으면요.” 강수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회사는.” “그때도 다니고 있으면 그만두면 되고.” “쉽네.” “직장 그만두는 게 뭐 어렵다고.” 사라는 아무렇지 않았다. 강수에게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사도, 한국도, 사람도. 사라는 마음만 먹으면 놓고 갈 수 있는 여자였다. “그럼 사람도 그래?” 사라가 슬쩍 그를 봤다. “뭐가요?” “떠날 때.” “사람 때문에 못 떠난 적은 없어요.” 강수의 턱이 굳었다. 그러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사라가 아직도 좋아한다고 했던 남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착하고 싶었다던 사람. 죽어서 다시는 만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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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강수의 시선이 천천히 옆으로 향했다. 사라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자신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창문에 기대 있던 머리가 흔들릴 때마다 묶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볼을 간질였다. 강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민서후.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사라가 아직도 좋아한다고 말했던 남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착하고 싶었다던 사람. 그게 얼마나 깊은 감정인지 굳이 더 알아보지 않겠다고 스스로 멈췄었다. 그런데 잠든 순간 가장 무방비하게 흘러나온 한마디가 그 남자를 향한 것 같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거슬렸다. 죽은 사람이다. 질투할 상대조차 아니었다. 알면서도 싫었다. 오늘 자신과 바다를 달리고, 손을 잡고 뛰고, 환하게 웃었던 여자가 잠든 뒤에는 다른 남자를 찾는다는 게. 강수는 한동안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다 사라의 몸이 차가운 창문 쪽으로 기울자 한 손으로 어깨를 잡아 세웠다. “민사라.” 대답이 없었다. 다시 몸이 기울었다. 강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차를 갓길에 세웠다. 조수석 등받이를 조금 눕힌 뒤 자신의 재킷을 벗어 사라 위에 덮었다. 사라는 그제야 편해졌는지 몸을 웅크렸다. 강수는 잠든 얼굴을 내려다봤다. “나는 안 되냐.” 낮은 목소리는 사라에게 닿지 않았다. 잠시 뒤 차가 다시 움직였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강수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이상했다. 준호가 싫은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살아 있고, 사라 곁에 있었고, 언제든 그녀를 좋아할 가능성이 있는 남자였다. 그런데 민서후는 달랐다. 빼앗을 수도, 밀어낼 수도 없었다. 사라에게 잊으라고 할 권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도 그 남자에게만 허락됐던 자리가 탐났다. 누군가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과 함께라면 머물고 싶었다는 마음. 강수가 원하는 건 어쩌면 처음부터 그거였는지도 몰랐다. 사라가 자신을 좋아하느냐보다. 자신 때문에 떠나지 않는 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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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었을 때 강수는 이미 회장실에 앉아 있었다. 잠은 거의 자지 못했다. 책상 위에는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가 쌓여 있었지만 시선은 자꾸 한쪽으로 향했다. 작은 조개껍데기. 어젯밤 사라가 바닷가에서 예쁘다며 주워 들었던 것이었다.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 그런데 출근하자마자 서랍 안에 있던 들소 열쇠고리 옆에 나란히 놓아버렸다. 강수는 두 물건을 내려다보다 서랍을 닫았다. 아홉 시가 가까워지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좋은 아침!” 익숙한 목소리였다. 강수가 유리문 너머를 바라봤다. 사라는 멀쩡했다. 어젯밤 새벽 세 시가 다 되어 헤어졌는데 피곤한 기색조차 없이 정민에게 커피를 내밀고 있었다. “실장님 거.” “제 것도 있어요?” “오는 길에 샀어요.” “회장님 건?” 사라가 잠깐 멈췄다. “아.” 정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없구나.” “본인이 사 먹으면 되죠.” 강수의 미간이 좁아졌다. 잠시 후 사라가 태블릿을 들고 회장실로 들어왔다. “오늘 오전 열 시 경영회의 있고요. 오후 한 시 반에 현장 보고, 세 시에는—” “내 커피는.” 사라의 말이 끊겼다. “네?” “한정민 건 있던데.” 사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회장님은 커피 알아서 잘 드시잖아요.” “한정민은 손이 없어?” “왜 아침부터 실장님한테 질투해요?” 강수의 입이 닫혔다. 사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귀찮은 타입 맞네.” “시끄러워.” “내일부터 사다 드려요?” 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없으면 안 사요.” “사 와.” 사라가 결국 까르륵 웃었다. “알았어요.” 그 웃음에 어젯밤이 겹쳤다. 폭죽을 들고 환하게 웃던 얼굴. 자신의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뛰던 여자.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었던 얼굴까지. 강수의 시선이 사라에게 오래 머물렀다. “왜 그렇게 봐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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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강수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었다. 정민은 제 앞에 선 남자의 표정을 살피다가 작게 웃었다. “사라 씨 성격 아시잖아요.” 강수가 걸음을 멈췄다. “좋으면 하고, 재미있으면 가고. 거기에 일일이 의미 붙이는 스타일 아니잖습니까.”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 자신과 잔 것도 그랬다. 좋았고, 하고 싶었고, 그래서 했다고 했다. 어젯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드라이브가 하고 싶었고, 바다가 좋았고, 폭죽이 재미있었으니까 따라온 것뿐. 자신이어서가 아니라. “형님은 아닌 것 같지만.” 강수의 시선이 돌아갔다. “뭐가.” “의미 없는 거.” 정민은 그 말만 남기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점심을 먹는 동안 강수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반대로 사라는 잘 먹고 잘 떠들었다. “실장님, 다음에 같이 가요.” “바다요?” “네. 폭죽도 하고.” 강수의 젓가락이 멈췄다. “왜 한정민이 가.” 사라가 고개를 들었다. “가면 안 돼요?” “어.” “왜요?” 어젯밤은 둘만의 시간이었다. 사라가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과도 할 수 있는 일로 만드는 게 싫었다. “싫으니까.” 사라가 피식 웃었다. “회장님은 싫은 것도 많다.” 정민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조용히 밥만 먹었다. 오후에는 각자 일정이 이어졌다. 강수가 회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사라는 외국 거래처와 통화 중이었다. 유창한 영어가 빠르게 이어졌고 평소의 장난스러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통화를 마친 사라가 그제야 그를 발견했다. “나 칭찬받았어요.” “누구한테.” “거래처 담당자한테요.” “남자야?” 사라가 눈을 깜빡였다. “……회장님.” 그제야 강수도 자신이 무슨 질문을 했는지 깨달았다. “됐어.” “다시 시작됐네.” “뭐가.” “남자냐, 누구냐, 친하냐.” 사라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꼽았다. “안 하기로 했잖아요.” “조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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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사라는 잠시 강수를 바라보다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근데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라가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그 질투에 내가 응할 필요는 없잖아요?” 강수의 턱이 굳었다. “회장님이 질투하는 건 회장님 마음이고, 내가 준호 만나는 건 내 마음이고.”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더 할 말이 없었다. 강수는 지금껏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허락을 구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조직에서도, 사업에서도 자신의 결정이 곧 결과였다. 사라에게만 그 방식이 통하지 않았다. 붙잡으면 놓으라고 했고, 싫으면 싫다고 했다. 자신이 회장이든 누구든 사라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수도 바뀌려고 했다. 조사하지 않았고, 싫다는 말에 멈췄고, 궁금해도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래야 했다. “나 갈게요.” 사라가 그를 지나쳤다. 강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보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사라가 화면을 보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어, 준호야. 지금 내려가. 기다려.” 강수의 눈빛이 변했다. 고작 이름 하나였다. 그런데 어젯밤이 한순간에 떠올랐다. 자신과 바다를 달리고, 손을 잡고 뛰고, 자신의 차에서 잠들었던 여자. 강수에게는 그 모든 게 아직 생생한데 사라는 오늘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간다. 그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참으려고 했던 것이 그 순간 끊어졌다. 강수가 성큼 다가가 손목을 붙잡았다. “뭐 해요?” “가자.” “어딜.” “나랑.” “나 약속 있다고 했잖아요.” 사라가 손을 빼려 했다. “놔요.” 강수의 손아귀가 반사적으로 느슨해졌다. 놓아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손가락이 완전히 펴지지 않았다. 사라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차강수.” 낮게 불린 이름에 강수의 눈썹이 움직였다. “나 지금 화내기 전에 놔요.” “…….” “회장님 질투 때문에 내가 준호 안 만날 이유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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