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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불온한 정착: Chapter 41 - Chapter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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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일본에서의 마지막 아침은 유난히 맑았다. 사라는 평소보다 일찍 로비에 내려와 있었다. 한 손에는 커피, 다른 손에는 태블릿을 든 채 마지막 일정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실장님, 오늘 현장 미팅 끝나면 바로 호텔 복귀죠?” “네. 내일 오전 비행기라 저녁 일정은 없습니다.” “오.” 사라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럼 오늘 저녁은 자유네.” 뒤에서 걸어오던 강수의 걸음이 미세하게 느려졌다. 정민이 먼저 그를 발견하고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회장님, 좋은 아침.” 사라도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다. 강수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어젯밤 충전기를 빌려 간 뒤 사라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아침에 마주친 지금도 별다른 기색은 없었다. “잘 잤어?” “네. 완전 꿀잠.” 사라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먼저 호텔 밖으로 향했다. 강수의 손이 바지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 들소였다. 버리지도 않았고 캐리어에 넣지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오늘 입은 바지 주머니에 다시 챙겨 넣었다. 차량에 오른 뒤부터는 누구도 사적인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마지막 현장 미팅은 예상보다 길어졌다. 설계 변경을 두고 일본 측과 의견이 엇갈렸고 통역이 몇 차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사라가 조용히 자료를 넘겨받았다. 한동안 일본어로 대화를 주고받던 그녀가 도면 한쪽을 짚었다. “이쪽이 문제예요. 상대 쪽은 공사 기간보다 추가 비용 부담을 우리 쪽으로 넘기는 게 목적이에요.” 강수가 상대를 바라봤다. “확실해?” “네.” 사라는 망설이지 않았다. 강수는 그대로 협상을 중단시켰다. 조건을 다시 가져오라는 지시가 떨어졌고, 결국 상대 측이 한발 물러났다. 건물을 나서자 사라가 길게 기지개를 켰다. “끝!” 며칠 동안 회장 바로 옆에서 냉정하게 숫자를 읽던 사람과 같은 여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강수가 피식 웃었다. “뭐가 좋아.” “출장 끝났잖아요.” “일하는 게 그렇게 싫어?” “일은 좋은데 집에 가는 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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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도쿄의 밤거리는 낮보다 화려했다. 건물마다 빼곡하게 걸린 간판들이 거리를 환하게 밝혔고, 좁은 골목 사이로 음식 냄새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여 흘러나왔다. 사라는 그 틈을 혼자 느긋하게 걸었다. 내일이면 한국으로 돌아간다. 출장 마지막 밤까지 호텔 방에 박혀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마음에 드는 가게가 보이면 들어갔고, 길거리 음식도 하나씩 사 먹었다. 작은 잡화점에서는 한참을 구경하다 쓸데없이 귀여운 양말까지 두 켤레 샀다. 목적지는 없었다. 원래 사라의 여행이 그랬다. 발길 닿는 곳으로 걷다가 재미있는 게 보이면 멈추고, 사람이 마음에 들면 말을 섞었다. 작은 이자카야 앞에서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도 그랬다. “여기 처음이에요?” 옆에서 들려온 일본어에 사라가 고개를 돌렸다.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한 셔츠 차림에 웃는 인상이 꽤 괜찮았다. “티 나요?” “조금요.” 사라가 웃었다. “그럼 뭐가 맛있는지 추천해 줘요.” 그 한마디가 시작이었다. 혼자 온 사라와 친구를 기다리다 약속이 취소됐다는 남자는 자연스럽게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음식 몇 가지를 나눠 먹고 술잔도 오갔다. 처음 만났다는 게 무색할 만큼 대화는 잘 통했다. 남자가 한국에 가본 적이 있다고 하면 사라는 자기가 돌아다닌 도시 이야기를 했고, 일본어를 어디서 배웠느냐는 질문에는 여행하면서 주워 배웠다며 웃었다. 두 시간쯤 지나 가게를 나왔을 때는 제법 늦은 시간이었다. “호텔 어디예요?” 사라가 대략적인 위치를 말하자 남자가 같은 방향이라며 따라나섰다.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두 사람은 편의점에도 들르고 길 한쪽에 멈춰 사진도 찍었다. 남자가 찍어준 사진을 확인한 사라가 마음에 안 든다며 다시 찍어달라고 우기기도 했다. 그렇게 호텔 앞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강수는 1층 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정민과 간단히 술을 마신 뒤 방으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무심코 유리창 밖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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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다음 날 오전, 일본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사라는 창가에 기대 어젯밤 찍은 사진들을 넘겨보고 있었다. 음식 사진, 번쩍이는 간판, 골목에서 산 양말, 흔들려서 얼굴이 반쯤 날아간 사진까지. 혼자 보면서 피식피식 웃는 모습은 여행 마지막 날을 아쉬워하는 평범한 관광객과 다를 게 없었다. 강수는 맞은편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보는 척하고 있었다. 몇 장째 같은 페이지였다. 사라가 휴대전화를 만질 때마다 시선이 한 번씩 그쪽으로 향했다. 어젯밤 호텔 앞까지 그녀를 데려다준 남자가 머릿속에 남아 있는 탓이었다. 하지만 더 묻지는 않았다. 물어봤자 자신에게 돌아올 대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의 사생활이었다. 강수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 “회장님.” 사라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왜.” “그거 안 넘길 거예요?” 강수가 시선을 내렸다. 같은 페이지를 붙들고 있는 서류가 보였다. 옆에 앉은 정민이 조용히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수가 서류를 덮었다. “시끄러워.”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사라는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 강수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그렇게 일본을 떠났다.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가 훌쩍 지나 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친 사라는 캐리어 손잡이를 끌어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아, 한국이다.” 정민이 웃었다. “좋습니까?” “당연하죠. 집 가서 침대에 누울 거예요.” “저녁은?” “배달.” 대답은 즉시 나왔다. 사라는 이미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강수는 두 사람보다 몇 걸음 앞서 걷고 있었다. 자동문이 열리고 입국장 밖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오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수의 걸음이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사람들 사이에서 서희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강수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분명 나오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서희는 꽃무늬 원피스 위에 얇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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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사라는 두 사람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며 전화를 받았다. 밝아진 얼굴로 통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강수는 말없이 바라봤다. 목소리까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가끔 터지는 웃음만으로도 누구와 통화하는지는 충분히 짐작됐다. 강수의 엄지가 휴대전화 옆면을 천천히 문질렀다. “오빠.” 서희가 팔을 잡아당겼다. “응?” “뭐 먹고 싶어?” 강수가 뒤늦게 시선을 내렸다. “아무거나.” “또 아무거나래.” 그 사이 통화를 끝낸 사라가 돌아왔다. “누구야?” 서희가 먼저 물었다. “여행할 때 만난 친구.” “남자?” “응.” “잘생겼어?” 강수의 미간이 바로 구겨졌다. 사라는 잠깐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게 생겼지.” “사진 있어?” “있을걸?” 두 여자가 자연스럽게 휴대전화를 들여다봤다. 강수는 관심 없는 척 서 있었지만 어느새 몸이 사라 쪽으로 반쯤 돌아가 있었다. “얘.” 사라가 사진 하나를 찾아냈다. 서희 옆으로 화면이 기울어지는 순간 강수의 시선도 내려갔다. 낯선 남자가 사라와 나란히 서 있었다. 사라는 남자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강수의 혀끝이 뺨 안쪽을 세게 밀었다. “둘이 잘 어울린다.” 서희의 말이 떨어지자 강수가 손을 내밀어 사라의 휴대전화를 가져갔다. 사라가 눈을 크게 떴다. “뭐 해요?” 강수는 대답하지 않고 사진을 내려다봤다. “오빠도 궁금했어?” 서희가 웃었다. 그제야 강수는 휴대전화를 사라에게 돌려줬다. “별로네.” “뭐가요?” “그냥.” 사라의 입꼬리가 묘하게 올라갔다. “준호가 뭐래?” “오늘 보자는데.” 강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오늘?” “네.” “너 방금 한국 왔잖아.” “그러니까 한국 왔으니 보죠.” “피곤하다며.” “친구 만나면 안 피곤해요.” 강수의 턱이 단단해졌다. “오늘은 우리랑 밥 먹기로 했잖아.” “밥 먹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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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청담동 펜트하우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며칠 만에 돌아온 집은 변한 게 없었다. 현관에는 서희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거실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은은한 향이 남아 있었다. 강수가 익숙했던 자리였다. “오빠, 먼저 씻을래?” 서희가 그의 재킷을 받아 들며 물었다. “너 먼저 해.” “피곤하지?” “괜찮아.” 서희는 강수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침실로 향했다. 강수는 소파에 앉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고요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당연했던 고요함인데 오늘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테이블 위에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몇 초 뒤 다시 집어 들었다. 시간은 밤 열 시가 조금 넘었다. 강수의 엄지가 화면 위에서 멈췄다. 민사라. 이름을 찾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화를 걸 이유는 없었다. 내일 출근할 직원이었다. 이미 업무도 끝났고, 퇴근 후 누구를 만나든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강수는 화면을 껐다. 잠시 후 다시 켰다. “씨발.” 낮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 결국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길게 이어졌다. 받지 않았다. 강수의 표정이 굳었다. 한 번 더 걸려던 순간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수는 바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오빠.” 샤워를 마친 서희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싼 채 나왔다. “왜 안 씻어?” “이제 가려고.” “누구랑 통화했어?” 강수의 손이 잠깐 멈췄다. “회사.” 거짓말은 너무 쉽게 나왔다. 서희는 의심하지 않았다. “출장 끝났는데 또 회사야?” 투덜거리면서도 웃는 서희를 보며 강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아니야.” 강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희의 젖은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말려. 감기 걸려.” “알았어.” 서희가 웃었다. 강수는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표정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방금 자신이 한 거짓말이 귓가에 남았다. 회사. 민사라에게 전화한 것을 감추기 위해 아내에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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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수화기 너머가 잠시 조용해졌다. 사라는 휴대전화를 귀에서 살짝 떼어 화면을 확인했다. 시간을 잘못 본 것도 아니었다. 밤 열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옆에서는 준호가 주문한 안주가 막 테이블 위에 놓이고 있었다. “친구랑 만나는데 왜 회장님이 오세요?” 대답을 기다릴 생각도 없었다. “끊습니다.” 통화가 끝났다. 사라는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엎어놓고 아무렇지 않게 젓가락을 들었다. “뭐래?” “몰라.” “회장이 이 시간에 직접 전화해서 어딘지 묻는데 모른다고?” 준호가 수상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자 사라가 어묵 하나를 그의 접시에 던져줬다. “먹기나 해.” “야, 아무리 봐도 이상한데?” “뭐가.” “너희 회장.” 사라는 대답 대신 술잔을 비웠다. 이상하긴 했다. 일본에서부터 계속 그랬다. 준호가 누구인지 캐묻고, 만나지 말라고 하고, 처음 만난 일본 남자에게까지 예민하게 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강수에게는 서희가 있었다. 그러니 사라가 굳이 그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붙일 이유도 없었다. “한잔 더.” “너 내일 출근 아니야?” “맞아.” “미친년.” “새삼스럽게.” 사라가 웃으며 빈 잔을 내밀었다. 그 시각 강수는 한동안 꺼진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끊겼다. 자기 말을 듣기도 전에. 강수의 입안에서 낮은 욕설이 굴렀다. “누구야?” 침실에서 나온 서희가 물었다. 강수는 고개를 들었다.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서희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그를 보고 있었다. “회사 사람.” 또 거짓말이었다. “문제 생겼어?” “아니.” “근데 표정이 왜 그래?” 강수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잠깐 나갔다 올게.” 서희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확인할 게 있어.” “회사 가게?”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어.” 서희는 별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늦지 마.” 강수의 시선이 그녀에게 머물렀다. 서희는 자신을 믿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오늘따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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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사라의 눈썹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러니까 왜 회장님이 저를 데리러 오는데요?” 사라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준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데려다줄 사람이 앞에 있는데.” 강수의 시선이 준호에게 향했다. 아까 사라의 얼굴로 향하던 손도 거슬렸는데 이제는 데려다주기까지 한단다. “쟤가 왜 널 데려다줘.” “같이 놀았으니까요.” “내가 왔잖아.” “그러니까 왜 왔냐고요.” 막힘없이 돌아오는 대답에 강수의 입이 다물렸다. 준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회장과 직원 사이의 대화는 아니었다. “사라야.” “응?” “나 그냥 택시 불러줄까?” 준호가 끼어들자 강수의 눈빛이 즉시 차가워졌다. “넌 빠져.” 낮은 한마디에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사라의 표정도 굳었다. “회장님.” 강수의 시선이 돌아왔다. “내 친구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요.” 단호했다. 강수의 턱이 굳었다. 자신을 겁내지 않는 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았다. 그런데 다른 남자 앞에서까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은 이상할 만큼 속을 뒤집었다. “민사라.” “왜요.” “일어나.” 사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싫어요.” 그리고 소주병을 들어 제 잔을 채웠다. 강수의 시선이 그 손을 따라 내려갔다. “얼마나 마셨어.” “별로 안 마셨어요.” “그만 마셔.” “싫은데.” 사라가 그대로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강수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잔이 입술에 닿기 직전 사라의 손에서 소주잔을 빼앗았다. “아, 뭐 해요!” 강수는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가자.” “나 아직 안 간다고요.” “취했어.” “안 취했거든요?” 사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밀렸다. 몸이 순간 휘청하자 준호가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준호의 손이 닿기도 전에 강수의 큰 손이 사라의 허리를 붙잡았다. 작은 몸이 그대로 강수 쪽으로 끌려왔다. “이래도?” 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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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사라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준호를 쳐다봤다. “아니, 내가 왜 회장님을 좋아해?” 강수의 굳어 있던 발끝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사라는 그것조차 보지 못한 채 준호의 팔을 툭 쳤다. “미친놈.”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너나 솔직히 말해.” “뭘?” “너가 날 좋아하는 거 아니고?” 준호가 그대로 굳었다. 몇 걸음 앞에 서 있던 강수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왔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이었다. “뭐?” 준호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야, 뭔 개소리야.” “왜 발끈해?” “내가 너를?” “응. 너.” 사라는 장난스럽게 제 얼굴을 가리켰다. “나 정도면 좋아할 만하지.” “미친.” “봐. 또 욕하지. 수상해.” 준호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포르투갈에서 네 술주정 받아준 것만 생각하면 여자로도 안 보여.” “야, 그 얘기 하지 마.” “네가 먼저 시작했잖아.” 두 사람은 금세 평소처럼 투닥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강수의 표정만 점점 굳어갔다. 사라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보다 그다음 말이 더 거슬렸다. 준호가 사라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강수는 다시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사라의 캐리어를 끌었다. “회장님?” “가자.” “아니, 나 준호랑 간다니까요.” “들었어.” “근데요?” 강수가 준호를 한번 바라봤다. “저 새끼는 혼자 가면 돼.” “저 새끼라니.” 사라가 바로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강수의 손과 겹쳤다. “놔요.” “너나 놔.” “내 캐리어거든요?” “알아.” “근데 왜 회장님이 가져가요?” 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잡이를 쥔 손에 힘만 들어갔다. 사라 역시 놓지 않았다. 한 캐리어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팽팽하게 버티자 준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야, 사라야.” “왜.” “그냥 가라.” 사라가 홱 돌아봤다. “너까지 왜 그래?” “나 갑자기 저 사람한테 맞을 것 같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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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뭐가요?” 사라가 돌아봤다. 붙잡힌 손목을 한번 내려다본 뒤 다시 강수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뭐가 아닌데요?” 강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준호까지 옆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사라가 기다리다 눈썹을 찌푸렸다. “회장님.” “……몰라.” “네?” “나도 모른다고.” 사라의 얼굴에 황당함이 번졌다. “뭐야. 술은 내가 마셨는데 왜 회장님이 취했어요?” 준호가 웃음을 참듯 고개를 돌렸다. 강수의 시선이 즉시 그쪽으로 향했다. “넌 웃기냐?” “아뇨.” “준호한테 시비 걸지 마요.” 사라가 바로 막아섰다. 강수의 눈빛이 다시 그녀에게 내려왔다. 그게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과 준호 사이를 막아서는 작은 몸도, 조금 전까지 그 남자와 웃고 떠들었던 것도, 이제 그와 함께 돌아가겠다는 것도. 전부. “쟤랑 가지 마.” “또 시작이네.” 사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강수의 입이 다물렸다. “이번엔 이유 말해봐요.” 사라가 손목을 비틀었다. 그러나 강수는 놓지 않았다. “내가 준호랑 가면 왜 싫은데요?” “싫으니까.” “그게 무슨 이유예요?” “나한텐 이유야.” 사라가 기가 막힌 듯 그를 바라봤다. “회장님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예요?” “그래.” “자랑이다.” 강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사라의 손목을 잡은 손을 아래로 내렸다. 놓는 대신 손목에서 손으로 위치만 바뀌었다. 작은 손이 그의 손안에 완전히 들어왔다. 사라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준호도 봤다. “회장님.” “왜.” “손.” “알아.” “알면 놔요.” “싫어.” 이번에는 사라가 말문이 막혔다. 강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를 자신 쪽으로 한 걸음 당겼다. “준호랑 가는 것도 싫고.” 사라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저 새끼가 너 만지는 것도 싫어.” “…….” “전화하는 것도 거슬리고, 둘이 술 마시는 것도 싫어.” 낮고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고백이라기에는 거칠었고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엉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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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다음 날 아침, 사라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다. 전날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갔지만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조차 없었다. 커피를 한 손에 들고 비서실로 들어온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컴퓨터를 켰다. “좋은 아침.” 정민이 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좋은 아침이긴 한데.” “왜요?” “아닙니다.” 정민은 괜히 서류만 정리했다. 어젯밤 강수에게 전화를 받은 사람이 자신이었다. 민사라의 위치를 알아보라는 지시도 모자라 오늘 일정까지 전부 가져오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침 일찍 출근해 확인한 일정표는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사라 씨.” “네.” “오늘 열 시 외부 미팅 취소됐습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왜요?” “취소라기보다 담당자가 바뀌었습니다.” “누구로요?” 정민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저요.” 사라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럼 저는요?” “회장님 수행.” 이번에는 완전히 손이 멈췄다. “오늘 회장님 외부 일정 없잖아요.” “그러니까.” 정민이 한숨처럼 덧붙였다. “내부 수행입니다.” “그게 뭐예요?” “저도 처음 들어봅니다.” 사라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정민을 빤히 바라봤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젯밤 마지막까지 제멋대로 굴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짜 유치하네.” 그때 회장실 문이 열렸다. 강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민사라.” 사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네, 회장님.” “들어와.” 사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블릿을 챙겼다. 회장실로 들어가자 강수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책상으로 향했다. “오전 보고서.” 사라가 서류를 건넸다. “여기요.” 강수는 받아 들고 첫 장을 넘겼다. 사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시선이 계속 느껴지자 강수가 고개를 들었다. “왜.” “제 일정 바꿨어요?” “어.” 너무 쉽게 인정했다. “왜요?” “필요해서.” “뭐가 필요한데요?” “네가.” 사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강수는 아무렇지 않게 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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