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맨스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 이사님을 향의 모델로 쓰겠습니다

공유

이사님을 향의 모델로 쓰겠습니다

작가: 유월
last update 게시일: 2026-09-11 10:31:25

다음 날 오전 아홉 시 십 분.

권재헌은 자신이 잘못된 장소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문 옆에는 분명히 ‘수석 조향사 한유리’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다. 일정표에도 오전 아홉 시부터 20주년 프로젝트 콘셉트 미팅이라고 적혀 있었고, 비서가 알려 준 장소 역시 이곳이었다.

그러니 방을 잘못 찾은 건 아니었다.

문제는 방 안이었다.

재헌이 생각했던 회의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선반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갈색 유리병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고, 각각의 병에는 손으로 적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베르가못, 네롤리, 아이리스, 샌들우드, 앰버, 통카빈. 창가 쪽에는 작은 화분 몇 개와 말린 꽃이 놓여 있었으며 중앙의 기다란 작업대에는 비커와 스포이트, 시향지와 메모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한유리가 앉아 있었다.

어제와 달리 머리를 느슨하게 하나로 묶고 흰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모습이었다. 코끝 가까이 가져간 시향지에 집중한 나머지 문이 열린 것도 모르는 듯했다.

재헌은 문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

유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시향지를 한 번 맡고, 메모를 남기고, 다시 다른 병을 열었다.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유리막대로 섞은 뒤 또다시 향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제 회의실에서 자신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던 여자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때는 지나치게 거리낌이 없었고, 지금은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재헌이 결국 입을 열었다.

“한유리 조향사님.”

반응이 없었다.

“한유리 조향사님.”

“……조금만요.”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재헌의 눈썹이 올라갔다.

“회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알아요.”

“알고 있는데 계속 이러고 있는 겁니까?”

“네.”

유리가 짧게 대답하더니 새로운 시향지를 꺼냈다.

재헌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

오전 아홉 시 십이 분.

이 회사에서 자신에게 회의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을 먼저 제공한 직원은 한유리가 처음이었다.

“얼마나 기다리면 됩니까?”

“삼 분.”

“정확합니까?”

“아마도요.”

“아마도라는 말은 정확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제야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재헌을 발견하자 눈이 조금 커졌다.

“어?”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 오셨어요?”

“제가 두 번 불렀고 방금 대화까지 했습니다.”

“아.”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이사님이었구나.”

재헌은 어이가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고 대답한 겁니까?”

“집중하면 가끔 그래요.”

“상당히 효율적인 업무 방식이군요.”

“칭찬이죠?”

“아닙니다.”

“역시.”

유리가 웃으며 시향지를 내려놓았다.

“그래도 거의 끝났어요. 진짜 삼 분만 기다려주세요.”

재헌은 대답 대신 조향실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히자 수십 가지 향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머리가 아프거나 독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제 회의실보다 공기가 깨끗했다.

재헌이 주변을 둘러보자 유리가 말했다.

“생각보다 향이 안 세죠?”

“그렇군요.”

“환기 계속하거든요. 향을 오래 맡으면 코가 둔해져서.”

“그러면 조향사는 하루 종일 향을 맡을 수 없는 겁니까?”

“당연하죠.”

유리는 병 하나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후각도 쉬어야 해요. 계속 자극하면 정확하게 못 맡아요. 그래서 작업하다가 밖에 나가기도 하고, 아무 향도 없는 천을 맡기도 하고.”

“커피 원두를 맡는다고 들었습니다.”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저는 잘 안 해요. 원두도 향이 강하니까요.”

재헌이 그녀를 바라봤다.

유리가 피식 웃었다.

“왜요?”

“설명은 잘하는군요.”

“제가 원래 설명은 잘해요.”

“회의 시간 지키는 건 못하고.”

“이제 이 분이면 끝나요.”

유리가 마지막 시향지를 들어 올렸다.

한 번.

두 번.

천천히 향을 확인한 뒤 메모지에 무언가를 적었다.

그리고 정말 펜을 내려놓았다.

“끝.”

재헌이 시계를 봤다.

“이 분 사십칠 초.”

“빨랐죠?”

“늦은 겁니다.”

“깐깐하시네.”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유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알았어요.”

그리고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재헌은 의자를 한번 내려다봤다.

“여기서 회의합니까?”

“네.”

“회의실을 예약해 뒀습니다.”

“취소하세요.”

“이유는?”

“오늘은 향을 만들어야 하니까.”

“콘셉트 미팅이라고 들었습니다.”

“콘셉트를 만들려면 향을 맡아야죠.”

유리는 너무 당연하게 말했다.

“이사님은 향수 개발이 회의실에서 되는 줄 알았어요?”

“최소한 사업 계획은 회의실에서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어제 17번 같은 향이 나온 거예요.”

재헌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회사의 지난 결과물을 전부 부정하는 겁니까?”

“아뇨.”

유리의 표정도 조금 진지해졌다.

“그동안의 르비에가 틀렸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번에는 다르게 해야 한다는 거죠.”

“왜.”

“20주년이니까.”

“그게 이유입니까?”

“충분하지 않아요?”

유리는 작업대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사람도 스무 살쯤 되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지 고민하잖아요. 브랜드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과거를 기념하는 향이 아니라 앞으로 르비에가 어떤 향을 만들 건지를 보여주고 싶어요.”

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어제와 같은 이야기였다.

다만 회의실에서 들었을 때보다 이 공간에서 들으니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 BORDERLINE.”

“네.”

“경계에서 시작되는 향.”

“정확해요.”

유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사님 기억력 좋네요.”

“업무니까 기억합니다.”

“그럼 어제 제가 넥타이 잡은 것도 업무라서 기억하고 계시는 거예요?”

재헌의 표정이 굳었다.

유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재미없습니다.”

“저는 재밌는데.”

“회의 시작하시죠.”

“알았어요.”

유리가 작업대 위에 놓인 향료병 몇 개를 앞으로 가져왔다.

“우선 제가 생각한 BORDERLINE의 핵심은 두 가지예요. 익숙함과 낯섦.”

“모순되는군요.”

“그래서 좋은 거예요.”

유리는 병 하나를 열어 시향지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

“이건 베르가못.”

재헌에게 건넸다.

“맡아보세요.”

재헌이 시향지를 받았다.

상큼한 향이 먼저 올라왔다.

“어떻게 느껴져요?”

“시트러스.”

“그건 향료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하는 대답이고.”

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향료 말고 느낌.”

“느낌을 말하라고요?”

“네.”

“상큼합니다.”

“……이사님.”

“왜요.”

“연애 못하시죠?”

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질문이 왜 나옵니까?”

“감상이라는 게 너무 건조해서.”

“향을 맡는데 연애 경험까지 필요합니까?”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유리가 웃음을 참으며 다른 시향지를 건넸다.

“이건요?”

재헌이 향을 맡았다.

조금 전보다 부드러웠다.

“꽃.”

“무슨 꽃 같아요?”

“제가 꽃 종류까지 알아야 합니까?”

“아뇨. 그냥 떠오르는 거.”

재헌은 잠시 생각했다.

“……비 온 다음 날.”

유리의 표정이 달라졌다.

“뭐라고요?”

“비가 그치고 나서 창문 열었을 때 나는 냄새와 비슷합니다.”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헌이 시향지를 내려다봤다.

“틀렸습니까?”

“아뇨.”

유리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게 훨씬 좋아요.”

“뭐가.”

“방금 같은 대답.”

유리는 자신의 노트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었다.

‘비가 그친 다음 날 열린 창문.’

재헌이 그것을 보았다.

“그걸 왜 적습니까?”

“쓸 수 있으니까.”

“어디에.”

“향에요.”

“말을 향에 넣습니까?”

“기억을 넣는 거죠.”

유리가 말했다.

“좋은 향은 맡았을 때 설명보다 장면이 먼저 떠올라요. 어디였는지, 누구랑 있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녀의 손이 다음 향료병을 향했다.

“그래서 저는 향 만들기 전에 사람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소비자 인터뷰 말입니까?”

“그것도 하고.”

유리의 시선이 재헌에게 향했다.

“모델 이야기도 듣고.”

“모델?”

“네.”

그녀가 뭔가 생각난 듯 움직임을 멈췄다.

몇 초 동안 재헌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재헌이 먼저 물었다.

“왜 그렇게 봅니까?”

“이사님.”

불길했다.

재헌은 어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한유리가 저런 눈으로 자신을 볼 때는 대개 정상적인 요구가 나오지 않았다.

“안 됩니다.”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표정을 보니 거절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일단 들어봐요.”

“싫습니다.”

“이사님을 모델로 쓰면 안 돼요?”

재헌이 침묵했다.

역시나였다.

“무슨 모델.”

“향 모델.”

“광고 모델은 이미 후보군이 있습니다.”

“그거 말고.”

유리가 그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BORDERLINE의 첫 번째 향 모델이요.”

“제가 왜.”

“어제 맡은 향 때문이에요.”

재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제 체향 말입니까?”

“네.”

“그게 제품 개발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직 모르죠.”

유리는 솔직했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어요.”

“한유리 조향사님.”

“네.”

“저는 회사의 총괄이사입니다.”

“알아요.”

“향수 실험 대상이 아니고.”

“실험 대상이라니. 모델이라니까요.”

“표현만 바뀌었습니다.”

“완전히 다른데.”

재헌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을 찾으세요.”

“싫어요.”

“왜.”

“이사님 향이 필요하니까.”

이번에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재헌의 시선이 유리에게 멈췄다.

“그 표현.”

“네?”

“조금 바꿀 생각 없습니까?”

“왜요?”

“오해하기 좋으니까.”

유리는 몇 초 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정말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어디가요?”

재헌은 대답을 포기했다.

“됐습니다.”

“그럼 허락이에요?”

“아닙니다.”

“이사님.”

“안 됩니다.”

“딱 일주일만.”

“안 됩니다.”

“사흘.”

“기간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오늘 하루.”

“협상하지 마세요.”

유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재헌은 그런 그녀를 무시하고 자료를 펼쳤다.

“오늘 회의 안건부터 정리하죠.”

“…….”

“한유리 조향사님.”

“네.”

대답은 했지만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재헌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타깃 소비자와 가격대부터—”

말이 멈췄다.

유리가 갑자기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

재헌의 손이 자료 위에서 멈췄다.

“뭡니까.”

“가만히 있어 봐요.”

“또 왜.”

유리가 코끝을 조금 찡그렸다.

“어제 그 향.”

“…….”

“지금도 나요.”

재헌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허락 없이 가까이 오지 않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유리의 움직임이 멈췄다.

“아.”

그제야 생각난 모양이었다.

한 걸음 물러났다.

“미안해요.”

재헌은 그녀를 바라봤다.

어제와 달랐다.

어제였다면 이미 손목부터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약속을 기억하고 물러났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재헌은 그 한 걸음이 신경 쓰였다.

“확인해도 돼요?”

유리가 이번에는 물었다.

“무엇을.”

“향.”

“어디에서.”

유리가 잠시 고민했다.

손목을 한번 보고, 셔츠를 보고, 다시 얼굴을 올렸다.

“목 근처가 제일 정확할 것 같은데.”

“…….”

“싫으면 손목부터 볼게요.”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기다렸다.

어제와 달리 정말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재헌이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목만.”

유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아요.”

그녀의 손이 재헌의 손목을 잡았다.

어제와 똑같은 접촉이었다.

그런데 재헌에게는 전혀 똑같지 않았다.

이번에는 언제 손가락이 닿을지 알고 있었다.

유리가 얼마나 가까이 올지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니 오히려 더 선명했다.

손목 안쪽에 닿는 손끝.

고개를 숙이며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짧게 들이마시는 숨.

재헌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유리는 온전히 향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이상하다.”

“뭐가 말입니까.”

“어제보다 조금 달라요.”

“체향이 하루 만에 바뀝니까?”

“당연히 바뀌죠.”

유리는 그의 손목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먹은 거, 수면 상태, 스트레스, 체온. 전부 영향을 줘요. 같은 향수를 뿌려도 사람마다 다르게 나는 이유도 피부 상태나 체온 때문이고.”

“그래서 오늘은 어떻게 다릅니까?”

“조금 더 건조해요.”

“그걸 느낍니까?”

“네.”

유리가 다시 향을 확인했다.

그러다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런데 이상한 건.”

“뭡니까.”

“이 향이 처음부터 있었던 게 아닌 것 같아요.”

재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뜻이죠?”

“어제 회의 시작할 때는 거의 안 났거든요.”

유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그런데 회의 중간부터 났어요.”

“제가 어디 다녀온 것도 아닌데요.”

“그러니까 이상하죠.”

유리의 눈에 흥미가 어렸다.

재헌은 그 눈빛을 보고 깨달았다.

이 여자는 지금 자신을 사람이 아니라 흥미로운 향료처럼 보고 있었다.

“손 놔주시죠.”

“잠깐만요.”

“한유리 조향사님.”

“진짜 조금만.”

그녀가 손목을 살짝 돌렸다.

엄지가 재헌의 맥박 위를 스쳤다.

순간 재헌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

유리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알아차리지 못했어야 했다.

“맥박 빨라졌는데요?”

재헌의 눈이 내려갔다.

유리의 엄지가 정확히 손목 안쪽에 닿아 있었다.

“원래 이 정도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어제 제 맥박까지 확인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럼 비교할 근거가 없군요.”

“이사님 지금 긴장했어요?”

재헌이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왜.”

“제가 손목 잡아서?”

“그럴 리가.”

“그렇죠?”

유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저도 그럴 것 같진 않았어요.”

그 말이 묘하게 자존심을 건드렸다.

재헌은 그녀의 손에서 자신의 손목을 빼냈다.

“회의나 하죠.”

“잠깐.”

“이번에는 또 뭡니까?”

“확인할 게 하나 더 있어요.”

“손목만이라고 했습니다.”

“알아요. 그러니까 만지진 않을게요.”

유리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재헌의 눈이 가늘어졌다.

“뭘 하려고.”

“가까이만 갈게요.”

“그게 더 문제인 것 같은데.”

“왜요?”

“……됐습니다.”

재헌은 자신이 왜 이런 설명까지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유리는 허락으로 받아들였는지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정말로.

두 손을 등 뒤로 가져간 채 상체만 조금 기울였다.

재헌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안 만지고 있잖아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유리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셔츠 깃.

목선.

그리고 조금 더 위.

재헌은 자신도 모르게 턱에 힘을 주었다.

유리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역시.”

“뭐가 역시입니까.”

유리가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가까이 왔다.

재헌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유리.”

처음이었다.

조향사님이라는 호칭이 빠졌다.

유리도 그걸 느꼈는지 움직임을 멈췄다.

“네?”

“거기까지.”

낮아진 목소리.

그제야 유리는 자신이 생각보다 가까이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눈앞에 재헌의 셔츠 칼라가 있었다.

고개를 조금만 들면 턱선이 보일 거리였다.

“아.”

유리가 바로 물러났다.

“죄송해요.”

이번에는 장난기도 없었다.

재헌은 그녀를 바라봤다.

“향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진짜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집중하면 거리 감각이 좀 없어져서.”

“그것도 어제 들었습니다.”

“불편했죠?”

재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불편했다.

분명 그래야 했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이 불편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녀가 가까이 온 것인지.

아니면 가까이 왔다가 너무 쉽게 물러난 것인지.

재헌은 결국 다른 대답을 골랐다.

“업무와 사생활의 경계는 필요합니다.”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앞으로 지켜주시죠.”

“네.”

너무 순순한 대답이었다.

재헌은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리는 이미 작업대로 돌아가 노트를 펼쳤다.

“대신 결정했어요.”

“뭘.”

“BORDERLINE 첫 향.”

유리가 펜으로 빠르게 무언가를 적었다.

재헌이 가까이 다가가 노트를 내려다봤다.

TOP — BERGAMOT / PETITGRAIN

MIDDLE — IRIS / VIOLET LEAF

BASE — CEDARWOOD / AMBER / MUSK

그리고 그 아래.

MODEL — KWON JAEHEON.

재헌의 눈썹이 올라갔다.

“허락 안 했습니다.”

“아직요.”

“그런데 왜 제 이름을 적습니까?”

“설득할 거니까.”

“자신감이 상당하군요.”

“향에는 자신 있어요.”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사님도 궁금하잖아요.”

“뭐가.”

“자기한테서 어떤 향이 나는지.”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가 웃었다.

“맞네.”

“아닙니다.”

“궁금하지 않으면 바로 아니라고 했을 텐데.”

“방금 아니라고 했습니다.”

“늦었어요.”

재헌은 그녀와 말싸움을 이어 가는 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일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유리의 눈이 커졌다.

“진짜요?”

“일주일.”

“…….”

“왜 대답이 없습니까.”

“아까는 하루도 안 된다면서요.”

“마음 바뀌었습니다.”

유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왜요?”

“프로젝트에 도움이 되는지 확인해 보는 겁니다.”

“그것뿐이에요?”

“그것 말고 무슨 이유가 필요합니까?”

“없죠.”

유리는 금세 웃었다.

“좋아요. 일주일이면 충분해요.”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요?”

“모든 접촉은 사전에 말하십시오.”

유리의 표정이 묘해졌다.

“손목 잡을게요, 이렇게?”

“네.”

“목 근처 향 맡을게요.”

“그것도.”

“셔츠 만질게요.”

“그것도.”

“넥타이 잡을게요.”

재헌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유리가 웃었다.

“농담.”

“두 번째입니다.”

“뭐가요?”

“재미없는 농담.”

“이사님은 웃음이 너무 없어요.”

“업무 중이니까.”

“업무 아닐 때는 잘 웃어요?”

“확인할 필요 없습니다.”

“왜요?”

재헌은 자료를 정리하며 말했다.

“한유리 조향사님 업무 범위가 아니니까.”

유리의 입이 다물렸다.

그런데 잠시 후.

“그러네요.”

이번에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상하게도 재헌은 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전 회의가 끝난 것은 열한 시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재헌이 조향실을 나간 뒤 유리는 혼자 남아 조금 전 작성한 노트를 바라봤다.

MODEL — KWON JAEHEON.

그 아래에 한 줄을 추가했다.

‘체온 상승 시 잔향 변화 확인 필요.’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 한 줄 더.

‘특정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향인가?’

유리의 펜끝이 멈췄다.

어제 처음 느꼈던 향.

오늘 다시 나타난 향.

두 번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자신이 가까이 갔을 때였다.

“설마.”

유리는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사람의 체향이 타인의 존재 하나 때문에 갑자기 바뀔 리는 없었다. 긴장이나 체온 변화라면 가능했지만, 권재헌이 자신 때문에 긴장할 이유도 없었다.

아까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유리는 노트를 덮었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그때 조향실 문이 열렸다.

윤세아가 종이컵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선배.”

“응.”

“이사님 갔어요?”

“방금.”

세아는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유리 앞으로 다가왔다.

“어땠어요?”

“뭐가?”

“둘이 두 시간이나 있었잖아요.”

“회의했지.”

“진짜 회의만?”

유리가 황당한 얼굴로 쳐다봤다.

“그럼 뭘 해?”

“아니, 어제 봤거든요.”

“뭘.”

“선배가 이사님 넥타이 잡는 거.”

유리의 손이 멈췄다.

“봤어?”

“유리문이잖아요.”

세아가 눈을 반짝였다.

“나 진짜 키스하는 줄 알았잖아.”

“미쳤어?”

“거리가 그랬다니까.”

“향 맡은 거야.”

“그 거리에서?”

“향이 거기서 났으니까.”

세아는 잠시 유리를 바라봤다.

“선배.”

“왜.”

“진짜 조향사라서 다행이다.”

“갑자기?”

“다른 직업이었으면 진작 신고당했어.”

유리가 종이컵을 빼앗아 들었다.

“커피나 줘.”

세아가 웃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이사님 향 좋았어요?”

“응.”

유리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대답했다.

“좋더라.”

“어느 정도로?”

“BORDERLINE 모델로 쓸 정도.”

세아의 눈이 커졌다.

“허락했어요?”

“일주일.”

“대박.”

“뭐가 대박이야.”

“그 권재헌이요?”

“왜?”

“선배 아직 소문 못 들었어요? 권우그룹에서 유명하잖아요. 사람한테 선 긋기로.”

“그래?”

“비서도 일정 거리 이상 안 둔다는 말 있던데.”

유리가 커피를 마시다 멈췄다.

“그건 좀 과장 아니야?”

“아무튼 사람하고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거 엄청 싫어한대요.”

유리는 아침 일을 떠올렸다.

손목.

목.

그리고.

한유리.

낮아졌던 목소리.

거기까지.

유리는 괜히 컵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래서 계속 선 얘기했구나.”

“뭐라고 했는데요?”

“접촉할 때 미리 말하래.”

세아가 눈을 깜빡였다.

“접촉?”

“향 확인하려면 만져야 할 때 있잖아.”

“아.”

“손목 잡는다, 셔츠 만진다, 이런 거 미리 말하라고.”

세아가 묘한 얼굴로 유리를 바라봤다.

“왜.”

“아니에요.”

“뭔데.”

“그냥.”

세아가 커피를 마셨다.

“굉장히 건전한 계약이네.”

“너 지금 이상한 생각 했지?”

“제가요? 전혀.”

“표정이 그런데.”

“선배가 더 이상해요.”

“내가 왜.”

“아무튼 됐고.”

세아가 들고 온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전략팀에서 이거 주고 갔어요. 광고 모델 최종 후보.”

“벌써?”

“오늘 오후 회의에서 세 명으로 줄인대요.”

유리는 봉투를 열었다.

첫 번째 후보.

두 번째 후보.

그리고 세 번째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손이 멈췄다.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차선우.

유리는 몇 초 동안 사진을 바라봤다.

세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뭐가?”

“차선우 씨.”

“왜 안 괜찮아?”

“전 남친이잖아요.”

“헤어진 지 삼 년이야.”

유리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일인데.”

“선우 씨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걔도 프로야.”

유리는 정말 별일 아니라는 얼굴이었다.

“모델로 제일 잘 맞으면 쓰는 거지.”

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유리의 노트에 적힌 이름을 발견했다.

MODEL — KWON JAEHEON.

그리고 다시 서류 속 차선우의 얼굴을 봤다.

“선배.”

“응?”

“이번 프로젝트.”

세아가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향보다 다른 게 더 먼저 터질 것 같은데요.”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뭐가 터져.”

그 시각.

같은 건물 17층.

권재헌의 책상에도 동일한 후보 명단이 올라와 있었다.

재헌은 첫 번째 후보를 넘겼다.

두 번째도.

그리고 세 번째.

차선우.

사진 아래 적힌 프로필보다 먼저 어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한유리와 과거 교제.

재헌은 잠시 사진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전략팀장이 물었다.

“세 후보 모두 이미지 테스트 진행할까요?”

“그렇게 하시죠.”

“피부 발향 테스트도 한유리 조향사님이 직접 진행한다고 합니다.”

재헌의 손이 멈췄다.

“직접?”

“네.”

“세 명 모두?”

“아마 그럴 겁니다.”

재헌은 말없이 서류를 내려다봤다.

손목.

목 가까이.

필요하면 셔츠까지.

그리고 어제 한유리가 했던 말.

필요하면요.

재헌은 펜을 내려놓았다.

“테스트 일정 언제입니까?”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제 일정 비워두세요.”

팀장이 눈을 깜빡였다.

“이사님께서 직접 참석하시게요?”

“20주년 프로젝트입니다.”

재헌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서류를 집었다.

“총괄 책임자가 참석하는 게 이상합니까?”

“아닙니다.”

팀장이 나간 뒤에도 재헌은 한동안 같은 페이지를 펼쳐 두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차선우의 사진이 있는 페이지를 덮었다.

아직은 몰랐다.

자신이 방금 비워 달라고 한 일정이 프로젝트 때문인지.

한유리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가 다른 남자의 손목을 잡는 모습을 굳이 직접 확인하려는 것인지.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한유리가 어제 만든 이름.

BORDERLINE.

그 경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흐려지고 있었다.

이 작품을 무료로 읽으실 수 있습니다
QR 코드를 스캔하여 앱을 다운로드하세요

최신 챕터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믿는 것과 조사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누가 들어온 거지.”유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휴대전화 화면에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떠 있었다.USER : HAN.YURI18:42:16BORDERLINE_MASTER_1.0PRINT : 1 COPY몇 번을 다시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좋은 것들로만 가득한 하루였다. 처음으로 회사 밖에서 재헌과 손을 잡았고, 별다른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걸었고, 카페에 앉아 파리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그런데 이제 가장 선명하게 남는 숫자는 18시 42분이었다.재헌이 휴대전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세아 씨는 아직 회사에 있습니까?”“네. 아카이브 확인하다가 발견한 것 같아요.”“혼자고요?”“아마도요.”재헌의 손이 곧바로 기어 쪽으로 향했다.유리가 그를 바라봤다.“회사로 가려고요?”“가야 합니다.”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유리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데이트하던 남자와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차가워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감정 때문에 판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일부러 더 단단해진 얼굴이었다.재헌이 시동을 걸기 전 유리를 돌아봤다.“유리 씨.”“네.”“지금부터는 제가 몇 가지를 물어볼 겁니다.”유리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재헌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당신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알아요.”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딱딱했다.재헌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정말 압니까?”유리가 그를 봤다.“아까 제가 아니라고 했을 때 바로 믿어줬잖아요.”“그건 지금도 같습니다.”“그런데요?”“믿는 것과 조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그 말이 정확해서 유리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재헌은 시선을 잠깐 화면으로 내렸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렸다.“제가 당신을 믿는 것과 회사가 이 기록을 확인해야 하는 건 별개입니다. 오히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제가 먼저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첫 데이트는 퇴근 후부터

    퇴근 시간보다 십오 분 먼저.한유리는 시계를 세 번째 봤다.17시 45분.별것도 아닌 숫자였다.평소라면 마무리해야 할 시향 기록이 남아 있으면 여섯 시가 넘든 일곱 시가 넘든 신경 쓰지 않았을 시간.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오늘은.데이트가 있었다.그 단어 하나 때문에 평범한 퇴근 시간이 이상하게 특별해졌다.유리는 작업대 위에 놓인 마지막 시향지를 들었다.B-9.이제는 더 이상 B-9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다.오늘 오후 회의에서 최종 확정된 〈BORDERLINE〉 마스터 포뮬러.첫 향에서는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의 차가운 초록빛이 열리고, 바이올렛 리프가 경계를 세운 뒤 아이리스가 그 선을 부드럽게 흐렸다. 마지막에는 시더우드와 아주 얇은 앰버, 피부 가까이에서만 살아나는 머스크가 남았다.멀리서는 차갑고.가까이 갈수록 따뜻한 향.유리는 시향지를 내려놓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이 향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몰랐다.결국 자신과 권재헌의 관계를 닮게 될 줄은.“선배.”옆에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유리는 바로 표정을 정리했다.“왜.”“지금 웃었죠?”“안 웃었어.”세아는 노트북 화면 너머로 유리를 빤히 바라봤다.“요즘 선배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거예요.”“뭐.”“안 웃었다. 안 피했다. 안 빨갛다.”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윤세아.”“네.”“퇴근 안 해?”“해야죠.”세아가 일부러 시계를 봤다.“근데 오늘은 선배가 더 급해 보여서.”“안 급해.”“오늘 데이트죠?”유리의 손이 잠깐 멈췄다.세아가 바로 웃었다.“맞네.”“목소리 낮춰.”“아무도 없어요.”“그래도.”세아가 의자에서 몸을 조금 당겨 앉았다.“어디 가는데요?”“몰라.”“네?”“그냥 저녁 먹고 걷고 커피 마시기로 했어.”세아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왜.”“아니.”“말해.”“생각보다.”세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엄청 평범해서.”유리의 눈썹이 올라갔다.“데이트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이사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회사에서는 모르는 사이처럼

    사귀기로 한 다음 날.한유리는 출근길부터 이상했다.정확히 말하면 모든 게 전날과 똑같은데 자신만 달라져 있었다.같은 길.같은 엘리베이터.같은 사원증.같은 조향실.그런데.권재헌이 이제 남자친구였다.남자친구.유리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괜히 입술을 꾹 눌렀다.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어제 분명히 키스했고.좋아한다고 말했고.사귀기로 했다.심지어 비밀 연애 기간까지 정했다.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모든 게 꿈 같았다.휴대전화가 울렸다.유리는 화면을 내려다봤다.권재헌.이름만 떠도 심장이 반응했다.메시지는 짧았다.— 출근했습니까.유리는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지금 엘리베이터예요.몇 초 뒤.— 몇 층.유리는 눈을 깜빡였다.— 7층 가는 중인데요.— 내리면 기다리십시오.유리의 손이 멈췄다.왜.그 말을 묻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문이 열렸다.그리고.바로 앞에 권재헌이 서 있었다.유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멈췄다.재헌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짙은 슈트.단정한 넥타이.완벽하게 회사 사람 같은 모습.그래서 더 이상했다.저 사람이.어제 자기한테 키스한 사람이라고?유리는 순간 그의 입술을 봤다.아차 싶어 바로 시선을 올렸다.재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봤구나.유리는 괜히 헛기침했다.“왜 여기 있어요?”재헌이 주위를 한번 봤다.복도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기다리라고 했잖습니까.”“그러니까 왜.”“보고 싶어서.”유리의 눈이 커졌다.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마치 오늘 회의가 몇 시냐고 묻는 것처럼.유리는 주변을 급히 확인했다.“회사예요.”“압니다.”“누가 들으면 어떡해요.”“아무도 없습니다.”“있을 수도 있잖아요.”재헌은 유리를 내려다봤다.“어제는 회사 밖에서는 비밀 아니라고 했습니다.”“지금은 안이잖아요.”“복도도 포함됩니까.”“당연하죠.”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유리는 그 표정이 괜히 얄미웠다.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이번에는 허락부터 받겠습니다

    다음에는 누가 방해해도 안 멈출 겁니다.한유리는 그 말을 정확히 스물세 번쯤 떠올린 뒤 세는 걸 포기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 번.세수하다가 한 번.화장대 앞에서 립밤을 바르다가 두 번.회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는 신호에 걸릴 때마다 생각났다.그리고 지금.조향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또 한 번.“미쳤다.”유리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문을 열어야 했다.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가 어제 조정해 둔 샘플을 확인하고, 오전 열 시 회의 전에 최종 시향 후보를 세 개로 줄이면 됐다. 권재헌이 오면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고, 향을 맡기고, 필요한 의견을 받는다.그게 전부였다.그런데 문제는.오늘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 어제 일이 떠오를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던 순간.자신의 등을 막고 있던 문.얼굴을 조금만 들면 닿을 것 같던 거리.그리고.다음에는 안 멈출 겁니다.유리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가 다시 잡았다.“일하자.”문을 열었다.다행히 아무도 없었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안도인지.실망인지.구분하고 싶지 않았다.조향실 안은 이른 시간 특유의 고요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환기 장치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 보관함의 미세한 진동만 들렸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마지막으로 조정한 세 개의 샘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B-7.B-8.B-9.유리는 가운을 입고 머리를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창문을 조금 열었다.향을 보기 전에는 공간을 비워야 했다.가능하다면 머릿속도.첫 번째 시향지를 집었다.B-7.차가운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선명한 초록빛.십 초.이십 초.이후 아이리스가 올라오고, 시더우드와 머스크가 천천히 따라왔다.유리는 시향지를 코끝에서 떼었다.“아직 빨라.”따뜻해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선을 넘기 직전의 향이라면 이렇게 쉽게 안심하게 해서는 안 됐다.다가가고 싶고.그런데 조금은 망설여지고.그 망설임 때문에 상대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가지 말라는 말은 못 하면서

    권재헌은 파리 본사에서 온 메일을 세 번 읽었다.내용은 길지 않았다.메종 르비에 창립 20주년 프로젝트 〈BORDERLINE〉의 개발 과정에서 보여준 한유리의 조향 방향성과 감각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그리고 파리 본사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차기 글로벌 라인의 수석 조향사 후보로 그녀를 검토하고 싶다는 내용.아직 공식 제안은 아니었다.사전 인터뷰.역량 확인.향후 이동 가능성에 대한 의사 파악.그 정도였다.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장기적으로 파리 상주 가능 여부 확인 예정.재헌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파리.상주.한유리.단어 세 개가 묘하게 거슬렸다.정확히는 마지막 두 개가 함께 붙어 있는 게.비서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압니다.”“본사에서도 우선 인터뷰부터 진행하려는 것 같습니다.”“언제.”“다음 주 화요일 화상 미팅 가능 여부를 물어왔습니다.”재헌은 화면을 끄지 않았다.“한유리 조향사님한테도 갔습니까?”“네. 개인 메일과 회사 메일 둘 다 전달된 걸로 확인됐습니다.”“답변은.”“아직 공식 회신은 없습니다.”재헌의 시선이 멈췄다.아직.그 말에 이상하게 안도했다.하지만 바로 불쾌해졌다.자신이 왜 안도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본사에서 이 정도까지 보는 줄은 몰랐군요.”비서가 말했다.“이번 프로젝트 반응이 꽤 좋습니다. 특히 초기 샘플 리뷰에서 방향성이 좋다고—”“알고 있습니다.”재헌은 말을 끊었다.한유리가 잘하는 건 알고 있었다.누구보다.회의실에서 수치로만 향을 보는 사람들과 싸울 때도.샘플 17을 버리자고 했을 때도.사람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향과 실제로 돈을 내고 다시 사는 향은 다르다고 했을 때도.처음에는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지금은 안다.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기 향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그래서.파리에서도 탐낼 것이다.당연했다.재헌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조건이 좋겠죠.”비서는 질문처럼 들리지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좋아한다.그 단어 하나를 인정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아니.정확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한유리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몇 시간째 소파에 앉아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다.권재헌.좋아한다.권재헌을.좋아한다.말로 붙여놓고 보니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아니.”유리는 쿠션을 끌어안았다.“아직 좋아하는 건 아닐 수도 있지.”호감.흥미.신경 쓰임.그 정도일 수도 있었다.자꾸 생각난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가까이 오면 심장이 뛴다고 해서 꼭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반드시—유리는 생각을 멈췄다.쿠션에 얼굴을 묻었다.“아, 진짜.”이쯤 되면 변명도 성의가 없었다.자신이 조향사라는 게 이런 순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평소라면 아주 작은 향의 차이도 구분할 수 있었다.베르가못과 비터 오렌지의 차이.건조한 시더우드와 크리미한 샌들우드의 차이.같은 머스크라도 피부 위에서 어떻게 다른 온도로 올라오는지.그런데 자기 마음 하나는 왜 이렇게 구분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아니.사실은 구분이 됐다.그래서 더 문제였다.유리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테이블 위에는 오늘 가져온 〈BORDERLINE〉 샘플이 놓여 있었다.작은 유리병.아직 완성되지 않은 향.유리는 손목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처음은 차가웠다.시트러스와 그린 노트.선명하고 가벼운 시작.그러다 몇 분 뒤 아이리스가 올라왔다.조금 부드러워지고.조금 가까워지고.마지막에는 우디 머스크.체온 가까이 붙는 향.유리는 자신의 손목을 맡다가 눈을 감았다.그리고 떠올랐다.권재헌.처음에는 차갑고.선을 분명히 긋고.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하던 사람.그런데 자신이 자꾸 그 선을 건드렸고.어느 순간부터는.그가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유리는 눈을 떴다.“……이거.”향이 문제였다.아니.더 정확히는 자신이 만든 향이 지나치게 솔직해지고 있었다.요즘 조정한 〈BORDERLINE〉은 유리 자신도 모르

더보기
좋은 소설을 무료로 찾아 읽어보세요
GoodNovel 앱에서 수많은 인기 소설을 무료로 즐기세요! 마음에 드는 작품을 다운로드하고,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앱에서 작품을 무료로 읽어보세요
앱에서 읽으려면 QR 코드를 스캔하세요.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