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잡아도 됩니까?”
유리는 순간 대답하지 못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질문이었다. 자신은 사람의 손목을 하루에도 몇 번씩 잡았다. 조향실에서는 향료병이나 시향지를 건네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상대가 허락하기만 하면 피부 발향을 확인하기 위해 손등이나 손목 안쪽을 만지는 것도 특별할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잡는 사람이 권재헌이었으니까. 정확히는, 그가 너무 멀쩡한 얼굴로 자신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으니까. 재헌은 손을 내민 채 기다렸다. 재촉하지도 않았다. 유리는 괜히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봤다. 어제 그가 잡았던 자리였다. 이미 아무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데 이상하게 그 순간의 감각만 선명했다. “왜 제 손목을 잡고 싶은데요?” 결국 먼저 나온 질문은 허락도 거절도 아니었다. 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아까 본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뭘요?” “제가 한유리 조향사님에게 반응하는 건지 확인하고 싶다고.” 유리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그 표현 좀 잊으면 안 돼요?” “본인이 한 말입니다.” “향 얘기였어요.” “압니다.” “알면서 자꾸 그렇게 말하잖아요.” “제가 어떻게 말했는데요.” “그냥.” 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설명하려니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재헌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걸 본 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또 웃었죠?” “아닙니다.” “웃었어요.” “그럼 업무 중에 웃으면 안 됩니까?” “어제는 업무 중이라 안 웃는다고 했잖아요.” 재헌이 잠깐 멈췄다. 유리의 눈이 반짝였다. 잡았다. “말 바꿨네요.” “한유리 조향사님.” “네.” “손목 얘기로 돌아가죠.” “불리하면 자꾸 업무로 돌아가시네.” “허락합니까?” 이번에는 재헌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유리는 괜히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네.” “확실합니까?” “네.” “그럼 잡겠습니다.” 재헌의 손이 움직였다. 유리는 처음부터 그 손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언제 닿을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게 오히려 문제였다. 재헌의 손가락이 손목 바깥쪽을 감쌌고 엄지가 안쪽에 가볍게 닿았다. 어제와 같은 자리. 그러나 어제보다 훨씬 천천히. 유리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살짝 움츠렸다. 재헌이 곧바로 알아차렸다. “불편합니까?” “아뇨.” “그런데 왜 힘을 줍니까.” “제가요?” “네.” 유리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정말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냥 갑자기 잡혀서.” “미리 물었습니다.” “그러니까요.” 유리가 황급히 덧붙였다. “놀란 건 아니고.” “그럼 긴장했습니까?” 유리의 눈이 커졌다. “제가 왜요?” 재헌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까 저한테 물었던 질문 그대로 돌려드린 겁니다.” “이사님 은근 뒤끝 있죠?” “없습니다.”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말을 주고받는 사이 재헌의 엄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맥박을 찾는 듯 손목 안쪽에 닿았다. 유리의 말이 멈췄다. 재헌도 느꼈다. 쿵. 처음에는 일정했다. 그런데 그가 손가락을 조금 더 정확히 맥박 위로 옮기는 순간. 쿵. 쿵. 한 박자 빨라졌다. 유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재헌의 시선도 손목에서 얼굴로 올라왔다. “빨라졌는데요.” “…….” 어제 유리가 했던 말이었다. 완전히 똑같이 돌려받았다. 유리가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 이 정도예요.” “근거는?” “제 몸이니까 제가 알죠.” “객관적인 측정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재헌의 입꼬리가 또 아주 조금 움직였다. “과학적으로 하자고 하셨잖습니까.” “이사님.” “왜요.” “지금 저 놀리는 거죠?” “전혀.” “표정이 그런데.” “평소와 같습니다.” “아닌데.” 유리는 손목을 빼려고 했다. 그런데 재헌이 놓지 않았다. 세게 잡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유리가 조금 당겼는데도 손이 바로 빠지지 않았다. 그 순간 유리의 시선이 천천히 그의 손으로 내려갔다. 재헌도 그제야 자신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몇 초. 짧은 정적. 재헌이 먼저 손을 놓았다. “미안합니다.” 목소리가 조금 낮았다. 유리는 손목을 감싸듯 다른 손을 올렸다.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둘 사이의 분위기는 아까와 달라졌다. 장난처럼 이어지던 대화가 잠깐 끊겼다. 유리는 자신이 왜 손목을 감싸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픈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감각이 남아 있는 게 신경 쓰여서 무의식적으로 덮은 것이었다. 재헌의 시선이 그 손에 잠시 머물렀다. “확인됐습니까?” 유리가 먼저 물었다. “뭐가요?” “제가 긴장했는지.” 재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가 고개를 조금 들었다. “왜 대답 안 해요?” “한유리 조향사님.” “네.” “긴장한 게 맞다고 하면 인정할 겁니까?” 유리의 입이 다물렸다. 그런 질문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건…….” “아니라고 하면?” “그럼 아닌 거고.” “편리하군요.” “이사님도 어제 그랬잖아요.” “그래서요.” 재헌이 조금 몸을 숙였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는데도 유리는 바로 알아차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다시 조금 가까워졌다. “저 때문에 긴장한 겁니까?” 이번에는 질문의 방향이 완전히 반대였다. 유리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걸 본 재헌의 눈빛이 달라졌다. “지금 피했습니까?” “안 피했어요.” “한 걸음 갔는데.” “그냥 서 있기 불편해서.” “아까부터 계속 서 있었는데요.” 유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재헌은 더 다가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충분했다. 유리는 어제 자신이 했던 행동을 그대로 돌려받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가까이 가면 재헌의 심박이 올라갔다. 그리고 지금. 재헌이 가까이 오니 자신의 심장이 뛰었다. 너무 단순한 구조라 오히려 인정하기 싫었다. “이상하네.” 유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뭐가.” “그냥요.” 유리는 노트를 펼쳤다. 뭔가를 적으려다가 펜끝을 멈췄다. ‘상호 거리 감소 시 심박 변화.’ 그렇게 쓰려다 말았다. 재헌이 노트를 내려다봤다. “왜 안 적습니까?” “안 적을 거예요.” “데이터 아닙니까?” “이건 필요 없는 데이터예요.” “왜요?” “향 만드는 데 제 심박은 필요 없으니까.” “제 심박은 필요하고?” “이사님이 모델이잖아요.” “불공평하군요.” “원래 연구자는 관찰하는 쪽이에요.” “방금은 관찰당했는데요.” 유리가 그를 노려봤다. “오늘 왜 이렇게 말이 많아요?” “평소와 같습니다.” “그 말 오늘 세 번째예요.” 재헌은 대답 대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홉 시 회의가 있습니다.” “그럼 오늘 아침 측정은 여기까지.” 유리는 노트를 덮었다. 그런데 재헌은 바로 나가지 않았다. “한유리 조향사님.” “네.” “수요일 테스트.” 유리는 잠시 생각하다 알아들었다. “광고 모델?” “네.” “왜요?” “시간 다시 확인하려고요.” “열한 시.” “차선우 씨도 그 시간?” “네.” 재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유리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진짜 오려고요?” “말씀드렸습니다.” “총괄 책임자라서.”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유리는 더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재헌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제처럼 질투냐고 물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유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재헌은 잠시 서 있다가 결국 문으로 향했다. “이사님.” 유리가 불렀다. 재헌이 돌아봤다. “왜요.” “오늘 저녁 약속 있어요?” “없습니다.” “그럼 여섯 시 테스트는 길게 할게요.” “얼마나.” “삼십 분?” “십오 분.” “이십오.” “십오.” “이십.” “…….” 유리가 웃었다. “침묵은 동의.” “아닙니다.” “그럼 이십 분.” 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문을 열었다. “늦지 마십시오.” 문이 닫혔다. 유리는 한동안 그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재헌이 잡았던 자리. 손끝으로 살짝 눌러봤다. 맥박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유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왜 이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건. 재헌의 체향이 변하는 조건을 찾는 것보다 지금은 자기 심장이 왜 빨라졌는지가 더 궁금하다는 사실이었다. ⸻ 수요일 오전 열 시 오십 분. 메종 르비에 본사 7층 테스트룸은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20주년 프로젝트 광고 모델 최종 후보 세 명의 이미지 및 피부 발향 테스트가 있는 날이었다. 조향팀과 브랜드전략팀, 마케팅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한쪽에는 촬영용 카메라와 간단한 조명 장비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유리는 테스트할 향 샘플을 정리하고 있었다. “선배.” 옆에서 세아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응.” “이사님 진짜 오셨는데요.” “오겠다고 했잖아.” “그래도.” 세아가 턱짓했다.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재헌은 테스트룸 끝쪽에 서서 전략팀장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오늘은 짙은 네이비 슈트였다. 평소처럼 표정 변화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유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주 잠깐 시선이 멈췄다. 유리도 멈췄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유리였다. 세아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뭐예요?” “뭐가.” “둘이 왜 저래요?” “우리가 뭘 했다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왜 선배가 먼저 피해요?” 유리가 시향지를 정리하는 손에 힘을 줬다. “안 피했어.” “요즘 다들 그 말 자주 하네요.” “다들?” “이사님도 어제 선배랑 마주치고 나서 전략팀 직원이 표정 안 좋다고 했더니 평소와 같다고 했다던데.” 유리가 피식 웃었다. “진짜 그 말 좋아하네.” “뭐가 있어.” “없어.” “진짜?” “응.” 유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렸다. 테스트룸 안쪽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키가 크고 편한 미소를 가진 남자가 매니저와 함께 들어왔다. 차선우였다. 검은 셔츠 위에 밝은 재킷을 걸친 차림. 촬영이 아닌 테스트 일정이라 지나치게 꾸미지는 않았지만 화면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눈에 띄는 얼굴이었다. 몇몇 직원들이 조용히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선우는 방 안을 한번 둘러봤다. 그리고 유리를 발견하자 입꼬리를 올렸다. “한유리.” 재헌의 시선이 즉시 그쪽으로 향했다. 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회사에서 이름만 부르지 마.” “왜. 삼 년 전에도 유리라고 불렀는데.” “삼 년 전이랑 지금이 같아?” 선우가 가까이 왔다. “오랜만이다.” “그러게.” “잘 지냈어?” “사진으로 맨날 보는데 뭘.” “그래도 얼굴 보고 물어보는 거랑 다르지.” 선우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도 별 생각 없이 잡았다. 악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편한 손짓.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 특유의 거리였다. 재헌의 시선이 두 사람의 손으로 내려갔다. 유리는 몰랐다. 선우가 먼저 눈치챘다. 유리와 손을 놓으며 슬쩍 주변을 보던 그의 시선이 재헌과 마주쳤다. “저분이 새로 오신 총괄이사?” “응.” 유리가 고개를 돌렸다. “권재헌 이사님.” 재헌이 천천히 다가왔다. 유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소개했다. “이사님, 차선우 씨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재헌이 손을 내밀었다. 선우가 잡았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도요.” “유리한테요?” 재헌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 유리는 곧바로 끼어들었다. “아니거든.” 선우가 웃었다. “농담인데.” 재헌은 웃지 않았다. “테스트 곧 시작합니다.” “네.” 선우가 유리를 바라봤다. “내가 첫 번째야?” “두 번째.” “아쉽네.” “뭐가.” “오랜만에 네 손에 먼저 잡혀볼 수 있었는데.” 주변에 있던 세아가 눈을 크게 떴다. 유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말 이상하게 하지 마.” “또 왜.” “피부 발향 테스트라고.” “알아.” 선우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예전에도 많이 했잖아.” 재헌의 손가락이 서류 모서리를 눌렀다. 유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까 새삼스럽게 굴지 말라고.” “내가 언제.” “전화로 그랬잖아.” 두 사람의 대화는 지나치게 자연스러웠다. 그게 문제였다. 재헌에게는. ⸻ 첫 번째 후보의 테스트가 끝난 뒤 차선우의 차례가 됐다. 유리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 피부 발향을 확인할 때는 오히려 맨손이 편했다. 선우가 의자에 앉아 셔츠 소매를 걷었다. “오른손?” “응.” 유리는 시향할 향 세 종류를 준비했다. “손목 세 군데 나눠서 뿌릴 거야.” “네, 조향사님.” “장난치면 바로 탈락.” “권한 남용 아니야?” “내가 조향 총괄이야.” “무섭네.” 유리가 첫 번째 향을 뿌렸다. “십 분 뒤에 다시 볼게.” “지금은 안 맡아?” “초반 향만 볼 거야.” 유리는 그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평소와 똑같은 업무였다. 손목을 조금 돌려 피부 가까이 향을 확인했다. 한 번. 두 번. 재헌은 방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유리가 다른 사람의 손목을 잡는 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어제부터 알고 있었다. 업무라고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실제로 보니 생각보다 기분이 더 나빴다. 특히 상대가 차선우라는 사실이. 유리는 선우의 손목을 놓고 메모했다. “1번은 생각보다 시트러스가 너무 튄다.” “내 피부가 문제야?” “문제라기보다 너랑 안 맞는 거.” “나랑 맞는 건 뭔데.” “조금 있다가.” 유리는 두 번째 향을 뿌렸다. 이번에는 우디 계열이었다. 향을 맡기 위해 조금 더 가까이 몸을 숙였다. 그 순간. 재헌이 입을 열었다. “한유리 조향사님.”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네?” “잠깐.” “왜요?” “확인할 게 있습니다.” 유리는 선우의 손목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헌이 테스트룸 바깥쪽으로 걸어갔다. 유리도 따라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물었다. “뭔데요?” 재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가 기다렸다. “테스트.” “네.” “꼭 직접 접촉해야 합니까?” 유리의 눈썹이 올라갔다. “네?” “피부 발향을 보는 것까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요?” “향을 맡을 때 너무 가까운 것 같은데.” 유리는 몇 초 동안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물었다. “지금 그 얘기 하려고 불렀어요?” “업무 확인입니다.” “이사님.” “왜요.” “아까까지 첫 번째 후보 할 때는 아무 말 안 했잖아요.” 재헌의 표정이 굳었다. 정확히 찔렸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요?” “차선우 씨는.” 재헌이 말을 멈췄다. 유리는 기다렸다. “차선우 씨는?” “……과거에 한유리 조향사님과 교제한 적이 있으니까.” 유리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래서요?” “공과 사가 섞이지 않도록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유리는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재헌은 논리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혀 논리적으로 들리지 않았다. “이사님.” “말씀하세요.” “제가 선우랑 사적인 얘기하면서 테스트하는 것처럼 보여요?” “아닙니다.” “그럼 문제없잖아요.” “거리 자체가—” “향 맡으려면 가까이 가야 돼요.” “저한테는 삼십 센티미터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사님이 요구했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게.” 유리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재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웃습니까?” “아니.” 유리가 팔짱을 꼈다. “이사님 지금 되게 이상한 말 하는 거 알아요?” “무엇이.” “본인이 싫어서 만든 규칙을 왜 선우한테까지 적용해요?” 재헌이 대답하지 못했다. “저랑 이사님 사이에 정한 규칙이잖아요.” “안전한 업무 환경을 위한 기준이라면—” “이사님.” 유리가 말을 끊었다. “질투해요?” 정적. 이번이 두 번째였다. 어제는 장난이었다. 오늘은 아니었다. 유리는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재헌의 시선이 깊어졌다. “아닙니다.” “진짜?” “네.” “그럼.” 유리가 한 걸음 다가왔다. 이번에는 일부러였다. 재헌의 표정을 보려고. “제가 선우 손목 잡든, 목 가까이 향 맡든.” 한 걸음 더. “상관없는 거네요?” 재헌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유리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그렇죠?” “업무라면.” “업무예요.” “…….” “그러니까 괜찮죠?” 재헌이 유리를 내려다봤다. 유리는 웃고 있었다. 묘하게 얄미운 얼굴이었다. 재헌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낮게 말했다. “안 괜찮습니다.” 유리의 웃음이 멈췄다. 재헌 자신도 멈췄다. 말이 먼저 나왔다. 둘 사이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유리가 천천히 되물었다. “……뭐라고요?” 재헌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미 한 말을 주워 담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안 괜찮다고 했습니다.” “왜요?” 이번에는 유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재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왜. 그 질문에 가장 정확한 답을 자신도 알고 있었다. 싫었다. 한유리가 다른 남자의 손목을 잡는 게. 다른 남자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는 게. 특히 그 남자가 그녀와 한때 연인이었던 사람이라는 게.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말하는 순간 지금까지 유지해 온 선이 무너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재헌은 결국 가장 안전한 대답을 골랐다. “제 모델이니까.” 유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라고요?” “현재 BORDERLINE의 체향 모델은 접니다.” “그래서?” “조향사님이 다른 모델에게 집중하는 게.” 재헌이 잠시 말을 고르다가 덧붙였다. “데이터 관리 측면에서 비효율적입니다.” 유리는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십 초쯤 뒤. “푸흡.” 웃음이 터졌다. 재헌의 얼굴이 굳었다. “왜 웃습니까?” “아니.” 유리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미안해요. 근데 너무 웃겨서.” “뭐가.” “질투하는 게 아니라 데이터 관리 때문에 싫다는 거예요?” “질투 아닙니다.” “알았어요.” “진짜입니다.” “네네.” 유리의 대답에는 전혀 믿지 않는 기색이 가득했다. 재헌의 표정이 점점 더 나빠졌다. “한유리 조향사님.” “네.” “웃지 마십시오.” “알았어요.” 그러면서도 입꼬리가 계속 올라갔다. 재헌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가서 테스트 계속하시죠.” 유리가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런데 나가기 직전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봤다. “이사님.” “왜요.” “그래도.” 유리의 눈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아까 안 괜찮다고 한 건.” 재헌이 그녀를 바라봤다. “조금 마음에 드네요.” 말을 끝낸 유리가 먼저 문을 열고 나갔다. 재헌은 그대로 서 있었다. 몇 초 뒤. 그의 미간이 천천히 좁아졌다. “……뭐가 마음에 들어.” 하지만 귀 끝이 아주 조금 붉어져 있었다. ⸻ 테스트룸으로 돌아온 유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려고 했다. 실패했다. 세아가 보자마자 물었다. “선배.” “왜.” “왜 웃어요?” “내가 언제.” “입꼬리가 여기까지 올라갔는데.” “향이 좋아서.” “거짓말.” “일해.” 유리는 급히 선우 앞에 앉았다. 선우가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봤다. “무슨 얘기 했어?” “업무.” “이사님 표정은 업무 아닌 것 같던데.” 유리가 그의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남의 회사 일에 관심 끄세요, 차선우 씨.” “왜 갑자기 존댓말이야?” “모델이니까.” “아까는 반말했잖아.” “지금부터 공과 사 구분하려고.” 선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뭐래?” “아무도.” “저 이사님이?” “아니거든.” “맞네.” 유리가 향을 맡다가 고개를 들었다. “너 탈락하고 싶어?” “조용히 있겠습니다.” 선우가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유리는 다시 향에 집중했다. 하지만 조금 전 재헌이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안 괜찮습니다. 그 짧은 대답 하나가. 이상할 정도로 오래. 귓가에 남았다. 그리고 방 건너편에서 재헌은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었다. 유리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선우의 손목을 잡은 자신의 손이. 괜히 의식됐다. 그 순간 유리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문제는 재헌의 체향만이 아니었다. 자신도.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가 가까이 오면 심장이 뛰고. 그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닿는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면 기분이 좋아지고.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하던 행동조차 그가 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경 쓰였다. 유리는 시향지를 내려놓았다. “다음 향 갈게.” 선우가 팔을 내밀었다. “응.” 유리는 손을 뻗었다. 그런데 손끝이 닿기 직전. 아주 잠깐 멈췄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선우는 못 봤다. 세아도 못 봤다. 하지만. 재헌은 봤다. 늘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에게 닿던 한유리가. 처음으로. 누군가의 손목 앞에서 망설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유가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권재헌의 체향이 또 한 번. 조금 더 짙어졌다.“누가 들어온 거지.”유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휴대전화 화면에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떠 있었다.USER : HAN.YURI18:42:16BORDERLINE_MASTER_1.0PRINT : 1 COPY몇 번을 다시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좋은 것들로만 가득한 하루였다. 처음으로 회사 밖에서 재헌과 손을 잡았고, 별다른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걸었고, 카페에 앉아 파리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그런데 이제 가장 선명하게 남는 숫자는 18시 42분이었다.재헌이 휴대전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세아 씨는 아직 회사에 있습니까?”“네. 아카이브 확인하다가 발견한 것 같아요.”“혼자고요?”“아마도요.”재헌의 손이 곧바로 기어 쪽으로 향했다.유리가 그를 바라봤다.“회사로 가려고요?”“가야 합니다.”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유리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데이트하던 남자와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차가워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감정 때문에 판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일부러 더 단단해진 얼굴이었다.재헌이 시동을 걸기 전 유리를 돌아봤다.“유리 씨.”“네.”“지금부터는 제가 몇 가지를 물어볼 겁니다.”유리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재헌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당신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알아요.”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딱딱했다.재헌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정말 압니까?”유리가 그를 봤다.“아까 제가 아니라고 했을 때 바로 믿어줬잖아요.”“그건 지금도 같습니다.”“그런데요?”“믿는 것과 조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그 말이 정확해서 유리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재헌은 시선을 잠깐 화면으로 내렸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렸다.“제가 당신을 믿는 것과 회사가 이 기록을 확인해야 하는 건 별개입니다. 오히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제가 먼저
퇴근 시간보다 십오 분 먼저.한유리는 시계를 세 번째 봤다.17시 45분.별것도 아닌 숫자였다.평소라면 마무리해야 할 시향 기록이 남아 있으면 여섯 시가 넘든 일곱 시가 넘든 신경 쓰지 않았을 시간.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오늘은.데이트가 있었다.그 단어 하나 때문에 평범한 퇴근 시간이 이상하게 특별해졌다.유리는 작업대 위에 놓인 마지막 시향지를 들었다.B-9.이제는 더 이상 B-9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다.오늘 오후 회의에서 최종 확정된 〈BORDERLINE〉 마스터 포뮬러.첫 향에서는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의 차가운 초록빛이 열리고, 바이올렛 리프가 경계를 세운 뒤 아이리스가 그 선을 부드럽게 흐렸다. 마지막에는 시더우드와 아주 얇은 앰버, 피부 가까이에서만 살아나는 머스크가 남았다.멀리서는 차갑고.가까이 갈수록 따뜻한 향.유리는 시향지를 내려놓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이 향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몰랐다.결국 자신과 권재헌의 관계를 닮게 될 줄은.“선배.”옆에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유리는 바로 표정을 정리했다.“왜.”“지금 웃었죠?”“안 웃었어.”세아는 노트북 화면 너머로 유리를 빤히 바라봤다.“요즘 선배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거예요.”“뭐.”“안 웃었다. 안 피했다. 안 빨갛다.”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윤세아.”“네.”“퇴근 안 해?”“해야죠.”세아가 일부러 시계를 봤다.“근데 오늘은 선배가 더 급해 보여서.”“안 급해.”“오늘 데이트죠?”유리의 손이 잠깐 멈췄다.세아가 바로 웃었다.“맞네.”“목소리 낮춰.”“아무도 없어요.”“그래도.”세아가 의자에서 몸을 조금 당겨 앉았다.“어디 가는데요?”“몰라.”“네?”“그냥 저녁 먹고 걷고 커피 마시기로 했어.”세아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왜.”“아니.”“말해.”“생각보다.”세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엄청 평범해서.”유리의 눈썹이 올라갔다.“데이트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이사
사귀기로 한 다음 날.한유리는 출근길부터 이상했다.정확히 말하면 모든 게 전날과 똑같은데 자신만 달라져 있었다.같은 길.같은 엘리베이터.같은 사원증.같은 조향실.그런데.권재헌이 이제 남자친구였다.남자친구.유리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괜히 입술을 꾹 눌렀다.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어제 분명히 키스했고.좋아한다고 말했고.사귀기로 했다.심지어 비밀 연애 기간까지 정했다.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모든 게 꿈 같았다.휴대전화가 울렸다.유리는 화면을 내려다봤다.권재헌.이름만 떠도 심장이 반응했다.메시지는 짧았다.— 출근했습니까.유리는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지금 엘리베이터예요.몇 초 뒤.— 몇 층.유리는 눈을 깜빡였다.— 7층 가는 중인데요.— 내리면 기다리십시오.유리의 손이 멈췄다.왜.그 말을 묻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문이 열렸다.그리고.바로 앞에 권재헌이 서 있었다.유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멈췄다.재헌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짙은 슈트.단정한 넥타이.완벽하게 회사 사람 같은 모습.그래서 더 이상했다.저 사람이.어제 자기한테 키스한 사람이라고?유리는 순간 그의 입술을 봤다.아차 싶어 바로 시선을 올렸다.재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봤구나.유리는 괜히 헛기침했다.“왜 여기 있어요?”재헌이 주위를 한번 봤다.복도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기다리라고 했잖습니까.”“그러니까 왜.”“보고 싶어서.”유리의 눈이 커졌다.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마치 오늘 회의가 몇 시냐고 묻는 것처럼.유리는 주변을 급히 확인했다.“회사예요.”“압니다.”“누가 들으면 어떡해요.”“아무도 없습니다.”“있을 수도 있잖아요.”재헌은 유리를 내려다봤다.“어제는 회사 밖에서는 비밀 아니라고 했습니다.”“지금은 안이잖아요.”“복도도 포함됩니까.”“당연하죠.”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유리는 그 표정이 괜히 얄미웠다.
다음에는 누가 방해해도 안 멈출 겁니다.한유리는 그 말을 정확히 스물세 번쯤 떠올린 뒤 세는 걸 포기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 번.세수하다가 한 번.화장대 앞에서 립밤을 바르다가 두 번.회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는 신호에 걸릴 때마다 생각났다.그리고 지금.조향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또 한 번.“미쳤다.”유리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문을 열어야 했다.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가 어제 조정해 둔 샘플을 확인하고, 오전 열 시 회의 전에 최종 시향 후보를 세 개로 줄이면 됐다. 권재헌이 오면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고, 향을 맡기고, 필요한 의견을 받는다.그게 전부였다.그런데 문제는.오늘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 어제 일이 떠오를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던 순간.자신의 등을 막고 있던 문.얼굴을 조금만 들면 닿을 것 같던 거리.그리고.다음에는 안 멈출 겁니다.유리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가 다시 잡았다.“일하자.”문을 열었다.다행히 아무도 없었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안도인지.실망인지.구분하고 싶지 않았다.조향실 안은 이른 시간 특유의 고요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환기 장치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 보관함의 미세한 진동만 들렸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마지막으로 조정한 세 개의 샘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B-7.B-8.B-9.유리는 가운을 입고 머리를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창문을 조금 열었다.향을 보기 전에는 공간을 비워야 했다.가능하다면 머릿속도.첫 번째 시향지를 집었다.B-7.차가운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선명한 초록빛.십 초.이십 초.이후 아이리스가 올라오고, 시더우드와 머스크가 천천히 따라왔다.유리는 시향지를 코끝에서 떼었다.“아직 빨라.”따뜻해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선을 넘기 직전의 향이라면 이렇게 쉽게 안심하게 해서는 안 됐다.다가가고 싶고.그런데 조금은 망설여지고.그 망설임 때문에 상대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
권재헌은 파리 본사에서 온 메일을 세 번 읽었다.내용은 길지 않았다.메종 르비에 창립 20주년 프로젝트 〈BORDERLINE〉의 개발 과정에서 보여준 한유리의 조향 방향성과 감각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그리고 파리 본사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차기 글로벌 라인의 수석 조향사 후보로 그녀를 검토하고 싶다는 내용.아직 공식 제안은 아니었다.사전 인터뷰.역량 확인.향후 이동 가능성에 대한 의사 파악.그 정도였다.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장기적으로 파리 상주 가능 여부 확인 예정.재헌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파리.상주.한유리.단어 세 개가 묘하게 거슬렸다.정확히는 마지막 두 개가 함께 붙어 있는 게.비서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압니다.”“본사에서도 우선 인터뷰부터 진행하려는 것 같습니다.”“언제.”“다음 주 화요일 화상 미팅 가능 여부를 물어왔습니다.”재헌은 화면을 끄지 않았다.“한유리 조향사님한테도 갔습니까?”“네. 개인 메일과 회사 메일 둘 다 전달된 걸로 확인됐습니다.”“답변은.”“아직 공식 회신은 없습니다.”재헌의 시선이 멈췄다.아직.그 말에 이상하게 안도했다.하지만 바로 불쾌해졌다.자신이 왜 안도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본사에서 이 정도까지 보는 줄은 몰랐군요.”비서가 말했다.“이번 프로젝트 반응이 꽤 좋습니다. 특히 초기 샘플 리뷰에서 방향성이 좋다고—”“알고 있습니다.”재헌은 말을 끊었다.한유리가 잘하는 건 알고 있었다.누구보다.회의실에서 수치로만 향을 보는 사람들과 싸울 때도.샘플 17을 버리자고 했을 때도.사람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향과 실제로 돈을 내고 다시 사는 향은 다르다고 했을 때도.처음에는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지금은 안다.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기 향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그래서.파리에서도 탐낼 것이다.당연했다.재헌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조건이 좋겠죠.”비서는 질문처럼 들리지
좋아한다.그 단어 하나를 인정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아니.정확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한유리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몇 시간째 소파에 앉아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다.권재헌.좋아한다.권재헌을.좋아한다.말로 붙여놓고 보니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아니.”유리는 쿠션을 끌어안았다.“아직 좋아하는 건 아닐 수도 있지.”호감.흥미.신경 쓰임.그 정도일 수도 있었다.자꾸 생각난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가까이 오면 심장이 뛴다고 해서 꼭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반드시—유리는 생각을 멈췄다.쿠션에 얼굴을 묻었다.“아, 진짜.”이쯤 되면 변명도 성의가 없었다.자신이 조향사라는 게 이런 순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평소라면 아주 작은 향의 차이도 구분할 수 있었다.베르가못과 비터 오렌지의 차이.건조한 시더우드와 크리미한 샌들우드의 차이.같은 머스크라도 피부 위에서 어떻게 다른 온도로 올라오는지.그런데 자기 마음 하나는 왜 이렇게 구분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아니.사실은 구분이 됐다.그래서 더 문제였다.유리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테이블 위에는 오늘 가져온 〈BORDERLINE〉 샘플이 놓여 있었다.작은 유리병.아직 완성되지 않은 향.유리는 손목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처음은 차가웠다.시트러스와 그린 노트.선명하고 가벼운 시작.그러다 몇 분 뒤 아이리스가 올라왔다.조금 부드러워지고.조금 가까워지고.마지막에는 우디 머스크.체온 가까이 붙는 향.유리는 자신의 손목을 맡다가 눈을 감았다.그리고 떠올랐다.권재헌.처음에는 차갑고.선을 분명히 긋고.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하던 사람.그런데 자신이 자꾸 그 선을 건드렸고.어느 순간부터는.그가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유리는 눈을 떴다.“……이거.”향이 문제였다.아니.더 정확히는 자신이 만든 향이 지나치게 솔직해지고 있었다.요즘 조정한 〈BORDERLINE〉은 유리 자신도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