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차선우의 세 번째 시향이 끝났을 때, 한유리는 자신이 평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손목을 어느 각도로 잡는지. 얼마나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는지. 향을 맡기 위해 몇 초나 머무르는지. 원래는 생각조차 하지 않던 것들이 하나하나 의식됐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주 분명했다. 권재헌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는 선우의 손목을 놓으며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3번이 제일 낫네.” 선우가 손목을 내려다봤다. “어떤데?” “첫 향은 시트러스가 너무 가볍고, 2번은 우디가 피부에서 너무 마르게 올라와. 3번이 제일 자연스러워.” “그럼 합격?” “향 테스트만 보면.” “다른 건?” “이미지, 카메라 테스트, 소비자 반응까지 봐야지.” “까다롭네.” “20주년이잖아.” 유리는 시향지를 정리했다. 그때 선우가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물었다. “근데.” “왜.” “저 사람 너 좋아하냐?” 유리의 손이 멈췄다. “누구?” 선우가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고 시선만 옆으로 보냈다. 유리는 따라 보지 않았다. “헛소리하지 마.” “왜, 너무 티 나는데.” “뭐가.” “보는 눈.” 유리는 시향지 몇 장을 괜히 다시 맞춰 정리했다. “이사님 원래 저런 얼굴이야.” “무슨 얼굴.” “그냥.” “내가 보기엔.” 선우가 웃었다. “내 손목 잘라버리고 싶은 얼굴인데.” 유리가 결국 선우를 쳐다봤다. “과장 좀 하지 마.” “진짠데.” “네가 괜히 신경 쓰는 거야.” “왜 내가 신경을 써.” 선우는 아주 태연했다. “난 너랑 끝난 지 삼 년 됐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선우도 알아차렸다. “봐.” “뭘.” “넌 내가 아직 미련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잖아.”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우가 웃음을 거뒀다. “유리야.” “왜.” “저 사람한테 마음 생겼어?” 이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유리는 바로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입이 생각보다 늦게 열렸다. “……아니.”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한 박자 늦었냐.” “생각하고 대답한 거지.” “네가 이런 질문에 생각하고 대답한다고?” “나도 사람인데.” “넌 마음 없으면 바로 없다고 하는 사람이야.” 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선우는 그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았다. “됐어.” “뭐가.” “대답 안 해도 알겠다.” “뭘 안다고.” “아직 본인만 모르는 단계.”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연애 상담하러 왔어?” “아니. 광고 모델 테스트하러 왔지.” 선우가 손목을 흔들었다. “근데 향 테스트보다 이쪽이 더 재밌어서.” “차선우.” “네, 조향사님.” “입 다물어.” “알겠습니다.” 선우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몇 초 뒤 아주 작게 덧붙였다. “저쪽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유리는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귀는 정확히 들었다. 그리고 더 문제는. 자신도 아주 조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테스트가 모두 끝난 뒤 최종 후보 세 명은 각자 대기실로 이동했다. 브랜드전략팀은 촬영본과 현장 반응을 정리했고, 마케팅팀은 이미지 적합도 점수를 취합했다. 유리는 조향실로 돌아와 향 데이터부터 정리했다. 차선우는 세 후보 중 가장 균형이 좋았다. 브랜드가 원하는 세련됨과 친근함이 동시에 있었고, 피부 발향도 메종 르비에가 준비한 세 종류의 테스트 향 가운데 두 가지와 잘 맞았다. 업무적으로만 보면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유리는 노트에 점수를 적었다. 차선우. 피부 발향 9. 이미지 적합도 8. 향 지속력 9. 그리고 펜끝이 잠시 멈췄다. 개인 관계. 그 항목은 원래 없었다. 유리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미쳤나.” 왜 그걸 생각해. 그때 문이 열렸다. 유리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발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게 된 건지, 아니면 자신이 괜히 그 사람의 기척을 신경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끝났습니까?” 재헌의 목소리였다. “거의요.” 유리는 계속 노트만 보았다. 재헌이 작업대 맞은편에 섰다. “점수는.” “세 명 다 정리 중이에요.” “차선우 씨는?” 유리의 펜이 멈췄다. “왜 선우부터 물어요?” 재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후보니까.” “전략팀이 그렇게 말했어요?” “시장 조사 결과는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유리는 다시 노트를 봤다. “향 테스트도 잘 나왔어요.” “어느 정도.” “피부 발향은 세 명 중 제일 좋아요.” 재헌의 눈빛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렇습니까.” “응.” 무심코 반말이 나왔다. 유리도 바로 알아차렸다. 재헌도.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아.” “방금.” 재헌이 천천히 말했다. “저한테 반말한 겁니까?” “실수.” “차선우 씨랑 계속 반말하더니 습관이 됐나 보군요.”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말은 담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시가 있었다. “그게 왜 선우랑 연결돼요?” “방금까지 반말로 대화했으니까.” “친구처럼 지낸 기간이 길어서 그래요.” “친구.” “헤어진 뒤에도 연락은 했고.” 재헌의 시선이 유리에게 고정됐다. “계속 연락했습니까?” 유리는 눈썹을 올렸다. “이사님.” “왜요.” “그거 업무 질문이에요?” 재헌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참고 사항입니다.” “무슨 참고.” “광고 모델과 실무 책임자 사이에 개인적 관계가 있으면 프로젝트 진행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헤어진 지 삼 년 됐다고 했잖아요.” “연락은 계속했다면서요.” “가끔.” “얼마나 가끔.” 유리는 기가 막혔다. “이사님.” “네.” “지금 취조해요?” “아닙니다.” “그럼 왜 이렇게 물어요?” “업무상—” “또 업무.” 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 “질투 아니면 업무. 이사님은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어요?” 재헌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유리는 그 표정을 보다 문득 이상한 향을 느꼈다. 아주 희미하게. 익숙한. 그 향. 유리의 표정이 바뀌었다. 재헌이 알아차렸다. “왜요.”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재헌의 눈썹이 올라갔다. “또 향입니까?” “네.” “지금?” “지금.” 유리는 노트를 집었다. 그리고 재헌 앞에 섰다. “손목 잡을게요.” “아까 테스트 끝난 것 아닙니까?” “추가 측정.” “이유.” “방금 향이 변했어요.” 재헌의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조금 전에.” “언제부터.” 유리는 재헌을 빤히 바라봤다. “제가 선우 얘기할 때.” 정적. 재헌의 시선이 조금 차가워졌다. “우연입니다.” “확인해 보면 되죠.” 유리는 손을 내밀었다. 재헌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사님.” “…….” “손목.” 결국 재헌이 손을 내주었다. 유리의 손가락이 감겼다. 이번에는 유리도 조금 긴장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접촉인데, 이제는 그의 손목을 잡는 순간부터 자신도 그 감각을 의식했다. 그래도 일에 집중했다. 향을 맡았다. 한 번. 두 번. “진해졌어.” 재헌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합니까?” “네.” 유리는 체온계를 가져왔다. 삑. “33.7.” “평소 범위 아닙니까.” “아침보다 높아요.” “오늘 일정이 많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유리는 바로 인정했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확인할게요.” “뭘.” “기분.” 재헌이 미간을 좁혔다. “기분을 어떻게 측정합니까?” “질문할 거예요.” “싫습니다.” “왜요?” “심리 상담 받으러 온 게 아니니까.” “향이 감정이랑 연결돼 있을 수도 있어요.” “확정된 게 아닙니다.” “그래서 확인하는 거예요.” 유리는 노트를 펼쳤다. “지금 기분 어때요?” “평범합니다.” “거짓말.” 재헌의 눈썹이 올라갔다. “근거는.” “향.” “향이 거짓말 탐지기입니까?” “아직은 모르죠.” 유리는 진지했다. “근데 며칠 동안 보니까 패턴이 있어요.” “무슨 패턴.” “이사님 감정이 움직일 때 향이 진해지는 것 같아요.” 재헌의 표정이 처음으로 아주 조금 달라졌다. 유리는 놓치지 않았다. “봐.” “뭘.” “지금도.” 유리는 그의 손목 가까이 코를 가져갔다. 향은 더 선명했다. “진해졌어요.” “한유리 조향사님.” “네.” “가까이 오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유리가 멈췄다. “그럴 수도 있고.” 재헌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 감정 때문이라는 근거는 없군요.” “있어요.” “뭔데.” 유리는 그를 바라봤다. “아까 제가 선우 얘기할 때는 제가 멀리 있었는데도 향이 변했거든요.” 재헌이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천천히 정리했다. “첫날은 제가 가까이 왔을 때.” 한 줄. “둘째 날은 제가 가까이 왔다가 물러났을 때.” 한 줄. “어제는 제가 선우 얘기했을 때.” 또 한 줄. “오늘도 선우 얘기하니까.” 펜끝이 멈췄다.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공통점이 거리만은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유리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감정 변화.” 재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어떤 감정.” “그걸 찾는 중.” “추측은.” 유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도 되나. 괜히 말했다가 또 업무니 데이터니 변명할 게 뻔했다. 그런데 지금은 연구자의 호기심이 더 컸다. “긴장.” 유리는 하나씩 말했다. “짜증.” 재헌의 미간이 움직였다. “당황.” 조금 더. “그리고.” 유리는 아주 작게 웃었다. “질투.” 재헌이 손목을 빼냈다. 너무 빠른 움직임이었다. 유리의 눈이 커졌다. “왜 빼요?” “충분히 확인한 것 같군요.” “아직 안 끝났는데.” “저는 끝났습니다.” “이사님.” 재헌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유리가 팔을 뻗어 재헌의 소매를 붙잡았다. 둘 다 멈췄다. 유리는 자기 손을 봤다. 허락 없이 잡았다. “아.” 재헌의 시선도 그 손으로 향했다. 유리는 바로 놓으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헌이 먼저 말했다. “그대로.” 유리의 손이 멈췄다. “네?” “놓지 마세요.” 낮은 목소리였다.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재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재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의 손가락은 아직 셔츠 소매 위에 걸려 있었다. 직접 피부에 닿지도 않았다. 그런데 향은. 방금 전보다 훨씬 짙어졌다. 유리의 눈이 커졌다. “……진짜네.” 재헌의 턱이 굳었다. “뭐가.” “향.” 유리는 소매를 잡은 채 재헌에게 한 걸음 가까이 갔다. “가만히 있어요.” “한유리.” “이번엔 진짜 중요한 것 같아서.” 유리는 조심스럽게 향을 확인했다. 손목이 아니라. 팔. 그리고 셔츠 가까이. “와.” 작은 탄성이 나왔다. 재헌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뭡니까.” “완전 달라.” “어떻게.” “아까보다 훨씬 따뜻해요.” 유리는 설명할 말을 찾았다. “시더우드가 마른 나무 같았다면 지금은 햇빛 받은 나무 같고, 머스크도 더 깊어졌고.” 재헌은 향에 대한 설명보다 유리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더 신경이 쓰였다. 소매를 잡은 손. 자신의 가슴 가까이에 있는 얼굴.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닿을 듯한 거리. 재헌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확인 끝났습니까?” “조금만 더.” “얼마나.” “십 초.” “…….” 유리는 정말 십 초만 집중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유리는 이제 그 거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숨이 한 박자 늦게 나왔다. 재헌의 시선이 유리의 눈에서 입술로 아주 잠깐 내려갔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봤다. 그리고 재헌도. 유리가 그걸 봤다는 걸 알았다. 정적. 먼저 물러난 건 유리였다. 손도 바로 놓았다. “됐어요.” 목소리가 조금 빨랐다. 재헌은 그대로 서 있었다. “다 확인했습니까?” “네.” “결론은.” 유리는 노트를 내려다봤다. 펜을 들었지만 손이 생각보다 말을 듣지 않았다. “감정이 강해질수록 향이 진해지는 것 같아요.” “어떤 감정이든?” “아직 모르겠어요.” “그럼 질투라고 단정할 수 없군요.”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질투만 부정해요?” “아니니까.” “그럼 아까 선우 얘기할 때 왜 향이 진해졌는데요?” “불쾌해서.”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뭐가 불쾌했어요?” “…….” 재헌이 말을 멈췄다. 유리는 기다렸다. “차선우 씨가.” “네.” “너무 편하게 구니까.” 유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한테?” “네.” “왜 그게 이사님을 불쾌하게 해요?” 재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혹시. 정말. 선우 말이 맞나. 재헌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프로젝트 안에서 불필요하게 사적인 분위기가 생기는 게 싫습니다.” 유리의 기대가 어이없게 꺼졌다. “또 업무.” “사실이니까.” “알았어요.” 이번에는 유리가 먼저 돌아섰다. 재헌이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반짝이던 눈이 미세하게 식어 있었다. 재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그리고 그게 왜 자신에게 신경 쓰이는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날 오후. 광고 모델 최종 회의에서 차선우는 예상대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브랜드전략팀장은 화면에 점수를 띄웠다. “종합 점수 기준으로는 차선우 씨가 1위입니다. 피부 발향 테스트와 이미지 적합도 모두 가장 높고, 글로벌 인지도도 다른 후보보다 우수합니다.” 회의실에서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케팅팀도 차선우 씨를 1순위로 추천합니다.” 재헌은 자료를 내려다봤다. 모든 수치가 차선우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펜끝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한유리 조향사님 의견은요?” 전략팀장이 물었다. 유리가 화면을 보며 대답했다. “저도 차선우 씨요.” 재헌의 시선이 곧바로 유리에게 향했다. 유리는 이어 말했다. “〈BORDERLINE〉의 첫 향이 너무 차갑게만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선우는 피부에서 우디 계열이 부드럽게 올라와서 균형이 좋아요.” “개인적 친분은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까?” 재헌의 질문이었다. 회의실이 아주 조금 조용해졌다. 유리는 천천히 재헌을 바라봤다. “네.” “확실합니까?” “확실해요.” “과거 연인이었다는 사실도.” 누군가 숨을 아주 작게 들이마셨다. 유리의 눈빛이 굳었다. 그건 굳이 이 자리에서 꺼낼 필요 없는 말이었다. “이사님.” “공정성 확인입니다.” “그럼 다른 후보와 아는 사이인지도 다 확인했어요?”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저는 조향사로서 의견 낸 거예요.” “알겠습니다.” “모르시는 것 같은데.” 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 “차선우가 제 전 남친이라서 뽑는 게 아니라, 모델로 가장 적합해서 뽑는 거예요.” 재헌의 턱이 굳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그리고.” 유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일을 감정으로 결정할 사람처럼 보였다면 그건 좀 기분 나쁘네요.” 회의실의 분위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재헌은 몇 초 동안 유리를 바라봤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질문이었어요.” 유리는 다시 자료를 들었다. “제 의견은 차선우 씨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재헌을 보지 않았다. 회의는 계속됐다. 최종적으로 차선우가 〈BORDERLINE〉 광고 모델로 결정됐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한 사람만 빼고. ⸻ 회의가 끝난 뒤 유리는 가장 먼저 회의실을 나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재헌이 질투하는 건가 싶었던 것도 우스웠다. 결국 그는 자신을 의심했다. 전 남자친구라는 이유로 판단이 흐려질 사람처럼. 유리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한유리.”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유리 조향사님.” “들었어요.” “잠깐 이야기하죠.” “나중에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리가 들어가려는 순간 재헌의 손이 문 사이를 막았다. 문이 다시 열렸다. 유리가 그를 바라봤다. “뭐 하세요?” “사과하려고.” 유리의 표정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재헌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둘뿐이었다. “회의에서 한 질문.” 재헌이 말했다.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유리는 그 표현에 잠깐 멈췄다. “이사님이요?” “네.” “선을 넘었다고 인정도 하네요.” “잘못한 건 인정합니다.” 유리는 버튼 쪽을 바라봤다. “됐어요.” “안 된 얼굴인데.” “제가 무슨 얼굴인데요.” “화났습니다.” “향으로 알아요?” 재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유리는 비꼬듯 말했다. “이사님도 이제 제 향 맡으면 감정 알겠네.” “한유리.” “왜요.”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18층. 17층. 재헌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당신을 의심한 게 아닙니다.” 유리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럼요?” “제가.” 재헌은 말을 멈췄다. 처음으로 단어를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제가 불편했던 겁니다.” 유리가 완전히 돌아봤다. “뭐가요?” 재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됐다. “차선우 씨가.” 또 잠깐. “당신과 너무 가까운 게.” 유리의 숨이 멎었다. 엘리베이터 안이 갑자기 좁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재헌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에서 쓸데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 “그건 제 잘못입니다.” 유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15층. 14층. 숫자만 내려갔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향이 느껴졌다. 아까 조향실에서보다 더 짙었다. 유리는 무의식적으로 재헌을 바라봤다. “지금.” “뭡니까.” “향 나요.” 재헌의 입술이 굳었다. 유리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이 향은 단순히 체온이 오를 때 나는 향이 아니었다. 분노만도 아니고. 스트레스만도 아니었다. 감정이 억눌리지 못할 정도로 강해지는 순간. 권재헌은 향으로 먼저 들켰다. “이사님.” “왜요.” “진짜 신기하네.” 유리가 아주 작게 말했다. “입으로는 그렇게 숨기면서.” 재헌의 눈빛이 깊어졌다. “향은 하나도 못 숨겨요.” 12층. 11층. 엘리베이터가 계속 내려갔다. 재헌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유리 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유리의 등이 엘리베이터 벽에 가까워졌다. “그럼.” 재헌이 낮게 물었다. “지금 제 향에서는.” 유리의 심장이 뛰었다. “뭐가 느껴집니까?” 유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향을 맡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니까. 질투. 긴장.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감정. 재헌은 유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10층. 9층. 유리의 시선이 재헌의 눈에서 잠시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 순간. 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밖에 서 있던 직원이 내부를 보고 당황한 얼굴로 멈췄다. “아…….” 유리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저 내려요.” 재헌 옆을 지나가려 했다. 그 순간. 손목이 잡혔다. 유리가 멈췄다. 이번에는 재헌이 먼저 잡았다. 그리고 놓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한유리 조향사님.” 유리가 돌아봤다. 재헌의 시선이 그녀에게만 고정돼 있었다. “아직 대답 안 했습니다.” “……뭘요.” “제 향.” 재헌의 엄지가 유리의 손목 안쪽에 닿았다. 쿵. 유리의 맥박이 뛰었다. 재헌의 시선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도 느꼈다. “무슨 감정인지.” 유리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향사가 향 앞에서 도망쳤다. “……모르겠어요.” 손목을 빼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재헌의 얼굴이 보였다. 이번에는 그가 웃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유리는 닫힌 문 앞에 서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심장은 아직도 빠르게 뛰었다. 향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였다. 권재헌의 향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가는 동안. 자신의 심장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솔직해진 걸까.조향사에게 자신을 소개할 향을 고르라는 말은 어떤 사람에게 가장 좋아하는 책 한 권을 고르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좋아하는 향은 많았다. 오래 사용한 원료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만든 포뮬러도 있었다. BORDERLINE을 가져가면 가장 명확한 답이 될 수 있었다. 지금의 유리를 설명하는 데 그보다 적절한 작품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이상하게 바로 손이 가지 않았다.유리는 캐리어에서 BORDERLINE 002를 꺼냈다. 세아가 파리 첫 출근 때 뿌리라며 건네준 병이었다. 유리는 병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동안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 안에 담긴 향은 서울에서의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첫 시향과 수정 과정, 재헌과의 수많은 대화, 세아가 맡아 완성한 생산 기준까지.그 향을 가져가면 사람들은 한유리를 BORDERLINE을 만든 조향사로 기억할 것이다.틀린 소개는 아니었다.하지만.그게 전부는 아니었다.유리는 병을 다시 내려놓았다.그리고 노트북 옆에 놓인 빈 시향지 케이스를 바라봤다.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휴대전화를 들었다.한국은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재헌에게 연락하기로 했지만, 지금 전화하면 잠을 깨울지도 몰랐다. 유리는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멈췄다. 그러다 먼저 짧게 적었다.유리: 혹시 아직 안 자요?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재헌: 안 잡니다.유리는 눈을 크게 떴다.유리: 왜요?재헌: 유리 씨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보고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영상통화를 걸었다.화면이 켜지자 재헌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는 집 서재에 앉아 있었다. 넥타이는 풀었지만 아직 셔츠 차림이었고,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서류가 펼쳐져 있었다.“안 자고 뭐 해요?”유리가 물었다.“일 조금 정리하고 있었습니다.”“또 일해요?”“이제 끝났습니다.”“거짓말.”재헌이 웃었다.“정말입니다.”유리는 화면 속 그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봤다. 불과 하루 전까지는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화면 너머에 있었
파리에 도착한 첫날, 한유리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낭만적인 모습으로 새로운 도시와 마주했다.비행기에서 제대로 잠들지 못한 탓에 눈은 뻑뻑했고, 장시간 앉아 있었던 다리는 묵직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수하물 두 개를 찾아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때는 커피보다 따뜻한 물 한 잔이 더 간절했다. 공항 픽업 담당자는 유리의 이름이 적힌 태블릿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고, 그녀는 서툴지 않은 프랑스어로 인사를 건넨 뒤 차량에 올랐다.차창 밖으로 파리의 풍경이 흘러갔다. 낮은 건물과 오래된 석조 외벽, 좁은 발코니와 가로수들이 이어졌다. 관광객이었을 때는 그 모든 것이 특별해 보였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앞으로 이곳에서 출근하고 장을 보고 세탁소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아름다운 풍경 사이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느 골목에 슈퍼마켓이 있는지, 지하철역은 얼마나 가까운지, 밤늦게 돌아와도 길을 찾기 어렵지 않을지 같은 것들.유리는 창밖을 보다가 휴대전화를 켰다. 한국은 이미 늦은 밤이었다. 재헌에게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던 순간, 화면에 먼저 알림이 떠 있었다.재헌: 비행기 도착한 것 확인했습니다. 입국심사 끝나면 연락하십시오.유리는 웃었다. 도착 예정 시간을 확인하고 있었을 모습이 쉽게 상상됐다. 자신에게 빨리 답장하라고 재촉하지 않으면서도 비행기 도착 여부만큼은 확인했을 것이다.유리: 입국심사 끝났어요. 지금 숙소 가는 중.메시지를 보내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려는데 곧바로 답장이 왔다.재헌: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많이 피곤합니까?유리: 엄청요. 지금 얼굴 보면 놀랄걸요.재헌: 보고 판단하겠습니다.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유리: 영상통화는 안 돼요.재헌: 아직 요청하지 않았습니다.유리: 요청할 것 같아서 미리 말했어요.잠시 뒤 답장이 왔다.재헌: 그럼 숙소 도착하면 물부터 마시고 쉬십시오. 내일 연락해도 됩니다.유리는 그 문장을 한동안 바라봤다. 보고 싶다는 말이 먼저 나올 줄 알았는데 재헌
유리는 알람이 울리기 삼십 분 전에 눈을 떴다.처음에는 자신이 왜 이렇게 일찍 깨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새벽빛도 평소와 같았고, 침대 옆에서 느껴지는 체온도 익숙했다. 재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한쪽 팔은 유리의 허리 아래에 놓여 있었고, 다른 손은 베개 옆에 느슨하게 펼쳐져 있었다. 유리는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침대 맞은편에 세워둔 캐리어를 발견했다.아.오늘이구나.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조금 내려앉았다. 어제까지는 출국을 앞두고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오늘은 정말 비행기를 타야 했다. 몇 시간 뒤면 이 방을 나서고, 공항으로 향하고, 여권과 탑승권을 내밀어야 한다. 그렇게 익숙한 풍경들을 하나씩 지나면 어느 순간 서울은 비행기 창밖으로 멀어질 것이다.유리는 조심스럽게 몸을 돌렸다. 재헌을 깨우지 않으려던 것이었는데 허리에 놓인 팔에 힘이 들어왔다.“어디 갑니까.”잠이 덜 깬 목소리였다.유리는 고개를 돌렸다. 재헌은 눈도 제대로 뜨지 않은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 회사에서 보던 단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앞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고,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유리는 그 얼굴을 보자 괜히 웃음이 났다.“화장실.”“몇 시입니까?”“여섯 시 조금 넘었어요.”“아직 시간 있습니다.”“알아요.”재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팔을 풀었다. 유리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가 다시 멈췄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재헌의 품으로 들어갔다.“왜요?”그가 물었다.“그냥.”유리는 그의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조금만 더.”재헌은 대답 대신 이불을 끌어올려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유리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어젯밤에는 오늘 아침이 오면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아침이 되니 눈물보다 이상한 평온함이 먼저 찾아왔다. 어쩌면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일 수도 있었다.“재헌 씨.”“네.”“나 오늘 진짜 가요.”“알고 있습니다.”“당신은 안 가고.”“네.”유리는
출국까지 여덟 날이 남은 아침, 유리는 파리에서 온 메일을 읽다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유럽 테스트 론칭을 위한 광고 문구의 사전 소비자 반응 조사 결과였다. 세아가 제안했던 **Closer is a choice.**는 가장 높은 즉각 구매 의향을 기록한 문구는 아니었다. 오히려 ‘거부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향’이라는 표현을 조금 순화한 다른 후보가 첫인상 평가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제품 설명을 읽은 뒤의 이해도와 향을 직접 맡은 뒤의 만족도에서는 결과가 달랐다. 세아의 문구를 본 소비자들이 향의 전개를 더 정확하게 이해했고, 자신이 예상했던 향과 실제 향 사이의 차이도 적게 느꼈다.유리는 자료를 끝까지 읽은 뒤 세아에게 전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맞은편 자리에서 키보드 소리가 빨라졌다. 세아는 결과표를 확대하고, 국가별 응답 차이를 확인하고, 정성 평가 문장들을 따로 추출했다. 유리는 그런 세아를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자기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같으면 같은 자료를 나란히 펼쳐놓고 누가 먼저 문제를 찾아내는지 경쟁하듯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유리는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확인했다. 마지막까지 모든 자료를 함께 검토하는 것이 좋은 인수인계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십오 분쯤 지났을 때 세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선배, 잠깐 봐주세요.”유리는 의자를 돌렸다. 세아는 태블릿을 들고 와 결과표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프랑스와 독일의 응답에서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탈리아 테스트 그룹에서는 문장이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향수 광고답지 않다는 평가가 일부 있었다. 세아는 그 차이를 설명한 뒤, 국가마다 완전히 다른 문구를 쓰는 대신 메인 카피는 유지하고 보조 설명만 현지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그렇게 하면 콘셉트는 지키면서도 표현의 온도는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만 이탈리아 쪽은 재테스트를 한번 더 해야 할 것 같고요.”“비용은?”“브랜드팀이랑 확인했어요. 기존 예산 안에서 가능
출국까지 열흘이 남은 월요일 아침, 유리는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자기 책상 위에 놓인 서류 봉투를 발견했다. 파리로 가져갈 자료는 이미 대부분 정리했고,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없었으니 누군가 잘못 가져다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봉투 앞면에는 분명히 한유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발신인은 메종 르비에 파리 글로벌 브랜드팀이었다.유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BORDERLINE의 유럽 테스트 론칭을 위한 최종 캠페인 자료가 들어 있었다. 패키지 디자인과 제품 사진, 매장 진열 가이드는 서울에서 승인한 것과 거의 같았다. 문제는 마지막 페이지에 있었다. 유럽 소비자를 대상으로 새롭게 작성한 광고 문구가 검토 요청 표시와 함께 첨부돼 있었다.You can’t help coming closer.거부할 수 없이 가까워지는 향.유리는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에는 번역 과정에서 의미가 조금 달라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읽자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글로벌 브랜드팀은 BORDERLINE의 차가운 첫 향과 피부에 가까워질수록 부드러워지는 잔향을 ‘본능적으로 상대에게 끌리게 되는 경험’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매력적인 문구인 건 맞았다. 짧고 기억하기 쉬웠으며, 소비자에게 즉각적인 기대를 줄 수 있었다. 다만 그 기대가 유리가 만든 향의 의도와 정반대라는 게 문제였다.“선배, 뭐 봐요?”커피를 들고 들어온 세아가 물었다. 유리는 말없이 마지막 페이지를 내밀었다. 세아는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읽다가, 세 번째 줄에서 눈썹을 찌푸렸다.“이거 이상한데요.”“어디가?”“가까워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잖아요. 우리 향은 그런 거 아닌데.”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세아가 끝까지 읽도록 기다렸다. 세아는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원래 한국 캠페인의 문구가 적힌 모니터를 바라봤다.가까워질지는, 당신이 정합니다.두 문장은 얼핏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 다 거리와 가까워짐을 말하고 있었
재헌이 지방 사업장에서 돌아온 날, 유리는 그가 서울에 도착했다는 메시지를 받고도 곧장 만나러 가지 못했다. BORDERLINE 유럽 테스트 물량의 대체 시더가 최종 품질 검증을 통과한 데다, 그 과정에서 생산 기준서를 새 원료에 맞춰 갱신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아가 대부분의 작업을 맡았지만 유리가 파리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해야 할 인수인계 항목도 남아 있었다. 결국 저녁 아홉 시가 넘어서야 노트북을 닫은 유리는 연구실에 혼자 남아 휴대전화를 확인했다.재헌 씨: 아직 회사입니까?한 시간 전 메시지였다. 그 아래에는 삼십 분 전에 하나가 더 와 있었다.재헌 씨: 재촉하는 건 아닙니다. 끝나면 연락하십시오.유리는 가방을 챙기면서 답했다.유리: 지금 끝났어요.답은 거의 동시에 왔다.재헌 씨: 1층입니다.유리의 손이 멈췄다.유리: 언제부터요?재헌 씨: 십오 분 정도.유리: 기다리지 말라니까.잠시 뒤 답이 왔다.재헌 씨: 오늘은 제가 기다리고 싶었습니다.그 문장을 읽는 순간 유리는 아침부터 쌓였던 피로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데 익숙해지자 기다리고 싶다는 말도 전과는 다르게 들렸다. 상대에게 빨리 내려오라는 요구가 아니라, 자기가 선택해서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리는 더 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1층 로비에는 야간 경비 직원 몇 명과 늦게 퇴근하는 직원들이 있었다. 그리고 정문 가까이에 재헌이 서 있었다. 지방에서 곧장 돌아온 듯 짙은 회색 정장에 코트만 걸친 차림이었다. 유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재헌도 바로 그녀를 발견했다. 예전 같으면 둘 다 주변부터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유리가 먼저 그에게 걸어갔다.“언제 도착했어요?”“한 시간쯤 됐습니다.”“집에 갔다 오지.”“그러려고 했는데.”재헌은 잠깐 말을 멈추더니 유리의 얼굴을 바라봤다.“보고 싶어서요.”영상통화로 이미 들었던 말인데 직접 얼굴을 보고 들으니 전혀 달랐다. 유리는 순간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