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로맨스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 향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Share

향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1 11:17:55

차선우의 세 번째 시향이 끝났을 때, 한유리는 자신이 평소보다 훨씬 많은 것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손목을 어느 각도로 잡는지.

얼마나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는지.

향을 맡기 위해 몇 초나 머무르는지.

원래는 생각조차 하지 않던 것들이 하나하나 의식됐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주 분명했다.

권재헌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리는 선우의 손목을 놓으며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3번이 제일 낫네.”

선우가 손목을 내려다봤다.

“어떤데?”

“첫 향은 시트러스가 너무 가볍고, 2번은 우디가 피부에서 너무 마르게 올라와. 3번이 제일 자연스러워.”

“그럼 합격?”

“향 테스트만 보면.”

“다른 건?”

“이미지, 카메라 테스트, 소비자 반응까지 봐야지.”

“까다롭네.”

“20주년이잖아.”

유리는 시향지를 정리했다.

그때 선우가 느긋하게 몸을 뒤로 기대며 물었다.

“근데.”

“왜.”

“저 사람 너 좋아하냐?”

유리의 손이 멈췄다.

“누구?”

선우가 굳이 이름을 말하지 않고 시선만 옆으로 보냈다.

유리는 따라 보지 않았다.

“헛소리하지 마.”

“왜, 너무 티 나는데.”

“뭐가.”

“보는 눈.”

유리는 시향지 몇 장을 괜히 다시 맞춰 정리했다.

“이사님 원래 저런 얼굴이야.”

“무슨 얼굴.”

“그냥.”

“내가 보기엔.”

선우가 웃었다.

“내 손목 잘라버리고 싶은 얼굴인데.”

유리가 결국 선우를 쳐다봤다.

“과장 좀 하지 마.”

“진짠데.”

“네가 괜히 신경 쓰는 거야.”

“왜 내가 신경을 써.”

선우는 아주 태연했다.

“난 너랑 끝난 지 삼 년 됐고,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유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선우도 알아차렸다.

“봐.”

“뭘.”

“넌 내가 아직 미련 있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하잖아.”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우가 웃음을 거뒀다.

“유리야.”

“왜.”

“저 사람한테 마음 생겼어?”

이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유리는 바로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입이 생각보다 늦게 열렸다.

“……아니.”

선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왜 한 박자 늦었냐.”

“생각하고 대답한 거지.”

“네가 이런 질문에 생각하고 대답한다고?”

“나도 사람인데.”

“넌 마음 없으면 바로 없다고 하는 사람이야.”

유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선우는 그 표정을 보고 더 이상 몰아붙이지 않았다.

“됐어.”

“뭐가.”

“대답 안 해도 알겠다.”

“뭘 안다고.”

“아직 본인만 모르는 단계.”

유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연애 상담하러 왔어?”

“아니. 광고 모델 테스트하러 왔지.”

선우가 손목을 흔들었다.

“근데 향 테스트보다 이쪽이 더 재밌어서.”

“차선우.”

“네, 조향사님.”

“입 다물어.”

“알겠습니다.”

선우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몇 초 뒤 아주 작게 덧붙였다.

“저쪽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유리는 못 들은 척했다.

하지만 귀는 정확히 들었다.

그리고 더 문제는.

자신도 아주 조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테스트가 모두 끝난 뒤 최종 후보 세 명은 각자 대기실로 이동했다.

브랜드전략팀은 촬영본과 현장 반응을 정리했고, 마케팅팀은 이미지 적합도 점수를 취합했다.

유리는 조향실로 돌아와 향 데이터부터 정리했다.

차선우는 세 후보 중 가장 균형이 좋았다.

브랜드가 원하는 세련됨과 친근함이 동시에 있었고, 피부 발향도 메종 르비에가 준비한 세 종류의 테스트 향 가운데 두 가지와 잘 맞았다.

업무적으로만 보면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다.

유리는 노트에 점수를 적었다.

차선우.

피부 발향 9.

이미지 적합도 8.

향 지속력 9.

그리고 펜끝이 잠시 멈췄다.

개인 관계.

그 항목은 원래 없었다.

유리는 피식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미쳤나.”

왜 그걸 생각해.

그때 문이 열렸다.

유리는 고개를 들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발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게 된 건지, 아니면 자신이 괜히 그 사람의 기척을 신경 쓰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끝났습니까?”

재헌의 목소리였다.

“거의요.”

유리는 계속 노트만 보았다.

재헌이 작업대 맞은편에 섰다.

“점수는.”

“세 명 다 정리 중이에요.”

“차선우 씨는?”

유리의 펜이 멈췄다.

“왜 선우부터 물어요?”

재헌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후보니까.”

“전략팀이 그렇게 말했어요?”

“시장 조사 결과는 그렇습니다.”

“그렇구나.”

유리는 다시 노트를 봤다.

“향 테스트도 잘 나왔어요.”

“어느 정도.”

“피부 발향은 세 명 중 제일 좋아요.”

재헌의 눈빛이 아주 조금 굳었다.

“그렇습니까.”

“응.”

무심코 반말이 나왔다.

유리도 바로 알아차렸다.

재헌도.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아.”

“방금.”

재헌이 천천히 말했다.

“저한테 반말한 겁니까?”

“실수.”

“차선우 씨랑 계속 반말하더니 습관이 됐나 보군요.”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말은 담담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가시가 있었다.

“그게 왜 선우랑 연결돼요?”

“방금까지 반말로 대화했으니까.”

“친구처럼 지낸 기간이 길어서 그래요.”

“친구.”

“헤어진 뒤에도 연락은 했고.”

재헌의 시선이 유리에게 고정됐다.

“계속 연락했습니까?”

유리는 눈썹을 올렸다.

“이사님.”

“왜요.”

“그거 업무 질문이에요?”

재헌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참고 사항입니다.”

“무슨 참고.”

“광고 모델과 실무 책임자 사이에 개인적 관계가 있으면 프로젝트 진행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헤어진 지 삼 년 됐다고 했잖아요.”

“연락은 계속했다면서요.”

“가끔.”

“얼마나 가끔.”

유리는 기가 막혔다.

“이사님.”

“네.”

“지금 취조해요?”

“아닙니다.”

“그럼 왜 이렇게 물어요?”

“업무상—”

“또 업무.”

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

“질투 아니면 업무. 이사님은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어요?”

재헌의 턱이 미세하게 굳었다.

유리는 그 표정을 보다 문득 이상한 향을 느꼈다.

아주 희미하게.

익숙한.

그 향.

유리의 표정이 바뀌었다.

재헌이 알아차렸다.

“왜요.”

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만요.”

재헌의 눈썹이 올라갔다.

“또 향입니까?”

“네.”

“지금?”

“지금.”

유리는 노트를 집었다.

그리고 재헌 앞에 섰다.

“손목 잡을게요.”

“아까 테스트 끝난 것 아닙니까?”

“추가 측정.”

“이유.”

“방금 향이 변했어요.”

재헌의 표정이 굳었다.

“어떻게.”

“조금 전에.”

“언제부터.”

유리는 재헌을 빤히 바라봤다.

“제가 선우 얘기할 때.”

정적.

재헌의 시선이 조금 차가워졌다.

“우연입니다.”

“확인해 보면 되죠.”

유리는 손을 내밀었다.

재헌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사님.”

“…….”

“손목.”

결국 재헌이 손을 내주었다.

유리의 손가락이 감겼다.

이번에는 유리도 조금 긴장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접촉인데, 이제는 그의 손목을 잡는 순간부터 자신도 그 감각을 의식했다.

그래도 일에 집중했다.

향을 맡았다.

한 번.

두 번.

“진해졌어.”

재헌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합니까?”

“네.”

유리는 체온계를 가져왔다.

삑.

“33.7.”

“평소 범위 아닙니까.”

“아침보다 높아요.”

“오늘 일정이 많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죠.”

유리는 바로 인정했다.

“그러니까 다른 것도 확인할게요.”

“뭘.”

“기분.”

재헌이 미간을 좁혔다.

“기분을 어떻게 측정합니까?”

“질문할 거예요.”

“싫습니다.”

“왜요?”

“심리 상담 받으러 온 게 아니니까.”

“향이 감정이랑 연결돼 있을 수도 있어요.”

“확정된 게 아닙니다.”

“그래서 확인하는 거예요.”

유리는 노트를 펼쳤다.

“지금 기분 어때요?”

“평범합니다.”

“거짓말.”

재헌의 눈썹이 올라갔다.

“근거는.”

“향.”

“향이 거짓말 탐지기입니까?”

“아직은 모르죠.”

유리는 진지했다.

“근데 며칠 동안 보니까 패턴이 있어요.”

“무슨 패턴.”

“이사님 감정이 움직일 때 향이 진해지는 것 같아요.”

재헌의 표정이 처음으로 아주 조금 달라졌다.

유리는 놓치지 않았다.

“봐.”

“뭘.”

“지금도.”

유리는 그의 손목 가까이 코를 가져갔다.

향은 더 선명했다.

“진해졌어요.”

“한유리 조향사님.”

“네.”

“가까이 오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유리가 멈췄다.

“그럴 수도 있고.”

재헌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럼 감정 때문이라는 근거는 없군요.”

“있어요.”

“뭔데.”

유리는 그를 바라봤다.

“아까 제가 선우 얘기할 때는 제가 멀리 있었는데도 향이 변했거든요.”

재헌이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는 천천히 정리했다.

“첫날은 제가 가까이 왔을 때.”

한 줄.

“둘째 날은 제가 가까이 왔다가 물러났을 때.”

한 줄.

“어제는 제가 선우 얘기했을 때.”

또 한 줄.

“오늘도 선우 얘기하니까.”

펜끝이 멈췄다.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공통점이 거리만은 아니에요.”

“그럼 뭡니까.”

유리는 잠깐 망설였다.

그리고 말했다.

“감정 변화.”

재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어떤 감정.”

“그걸 찾는 중.”

“추측은.”

유리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말해도 되나.

괜히 말했다가 또 업무니 데이터니 변명할 게 뻔했다.

그런데 지금은 연구자의 호기심이 더 컸다.

“긴장.”

유리는 하나씩 말했다.

“짜증.”

재헌의 미간이 움직였다.

“당황.”

조금 더.

“그리고.”

유리는 아주 작게 웃었다.

“질투.”

재헌이 손목을 빼냈다.

너무 빠른 움직임이었다.

유리의 눈이 커졌다.

“왜 빼요?”

“충분히 확인한 것 같군요.”

“아직 안 끝났는데.”

“저는 끝났습니다.”

“이사님.”

재헌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유리가 팔을 뻗어 재헌의 소매를 붙잡았다.

둘 다 멈췄다.

유리는 자기 손을 봤다.

허락 없이 잡았다.

“아.”

재헌의 시선도 그 손으로 향했다.

유리는 바로 놓으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재헌이 먼저 말했다.

“그대로.”

유리의 손이 멈췄다.

“네?”

“놓지 마세요.”

낮은 목소리였다.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재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요?”

재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의 손가락은 아직 셔츠 소매 위에 걸려 있었다.

직접 피부에 닿지도 않았다.

그런데 향은.

방금 전보다 훨씬 짙어졌다.

유리의 눈이 커졌다.

“……진짜네.”

재헌의 턱이 굳었다.

“뭐가.”

“향.”

유리는 소매를 잡은 채 재헌에게 한 걸음 가까이 갔다.

“가만히 있어요.”

“한유리.”

“이번엔 진짜 중요한 것 같아서.”

유리는 조심스럽게 향을 확인했다.

손목이 아니라.

팔.

그리고 셔츠 가까이.

“와.”

작은 탄성이 나왔다.

재헌의 눈빛이 더 깊어졌다.

“뭡니까.”

“완전 달라.”

“어떻게.”

“아까보다 훨씬 따뜻해요.”

유리는 설명할 말을 찾았다.

“시더우드가 마른 나무 같았다면 지금은 햇빛 받은 나무 같고, 머스크도 더 깊어졌고.”

재헌은 향에 대한 설명보다 유리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더 신경이 쓰였다.

소매를 잡은 손.

자신의 가슴 가까이에 있는 얼굴.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닿을 듯한 거리.

재헌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확인 끝났습니까?”

“조금만 더.”

“얼마나.”

“십 초.”

“…….”

유리는 정말 십 초만 집중했다.

그러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가까웠다.

유리는 이제 그 거리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숨이 한 박자 늦게 나왔다.

재헌의 시선이 유리의 눈에서 입술로 아주 잠깐 내려갔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봤다.

그리고 재헌도.

유리가 그걸 봤다는 걸 알았다.

정적.

먼저 물러난 건 유리였다.

손도 바로 놓았다.

“됐어요.”

목소리가 조금 빨랐다.

재헌은 그대로 서 있었다.

“다 확인했습니까?”

“네.”

“결론은.”

유리는 노트를 내려다봤다.

펜을 들었지만 손이 생각보다 말을 듣지 않았다.

“감정이 강해질수록 향이 진해지는 것 같아요.”

“어떤 감정이든?”

“아직 모르겠어요.”

“그럼 질투라고 단정할 수 없군요.”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왜 그렇게 질투만 부정해요?”

“아니니까.”

“그럼 아까 선우 얘기할 때 왜 향이 진해졌는데요?”

“불쾌해서.”

유리가 눈을 깜빡였다.

“뭐가 불쾌했어요?”

“…….”

재헌이 말을 멈췄다.

유리는 기다렸다.

“차선우 씨가.”

“네.”

“너무 편하게 구니까.”

유리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한테?”

“네.”

“왜 그게 이사님을 불쾌하게 해요?”

재헌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혹시.

정말.

선우 말이 맞나.

재헌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프로젝트 안에서 불필요하게 사적인 분위기가 생기는 게 싫습니다.”

유리의 기대가 어이없게 꺼졌다.

“또 업무.”

“사실이니까.”

“알았어요.”

이번에는 유리가 먼저 돌아섰다.

재헌이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조금 전까지 반짝이던 눈이 미세하게 식어 있었다.

재헌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그리고 그게 왜 자신에게 신경 쓰이는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날 오후.

광고 모델 최종 회의에서 차선우는 예상대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브랜드전략팀장은 화면에 점수를 띄웠다.

“종합 점수 기준으로는 차선우 씨가 1위입니다. 피부 발향 테스트와 이미지 적합도 모두 가장 높고, 글로벌 인지도도 다른 후보보다 우수합니다.”

회의실에서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케팅팀도 차선우 씨를 1순위로 추천합니다.”

재헌은 자료를 내려다봤다.

모든 수치가 차선우를 가리키고 있었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펜끝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한유리 조향사님 의견은요?”

전략팀장이 물었다.

유리가 화면을 보며 대답했다.

“저도 차선우 씨요.”

재헌의 시선이 곧바로 유리에게 향했다.

유리는 이어 말했다.

“〈BORDERLINE〉의 첫 향이 너무 차갑게만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선우는 피부에서 우디 계열이 부드럽게 올라와서 균형이 좋아요.”

“개인적 친분은 판단에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까?”

재헌의 질문이었다.

회의실이 아주 조금 조용해졌다.

유리는 천천히 재헌을 바라봤다.

“네.”

“확실합니까?”

“확실해요.”

“과거 연인이었다는 사실도.”

누군가 숨을 아주 작게 들이마셨다.

유리의 눈빛이 굳었다.

그건 굳이 이 자리에서 꺼낼 필요 없는 말이었다.

“이사님.”

“공정성 확인입니다.”

“그럼 다른 후보와 아는 사이인지도 다 확인했어요?”

재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유리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저는 조향사로서 의견 낸 거예요.”

“알겠습니다.”

“모르시는 것 같은데.”

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

“차선우가 제 전 남친이라서 뽑는 게 아니라, 모델로 가장 적합해서 뽑는 거예요.”

재헌의 턱이 굳었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그리고.”

유리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일을 감정으로 결정할 사람처럼 보였다면 그건 좀 기분 나쁘네요.”

회의실의 분위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재헌은 몇 초 동안 유리를 바라봤다.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질문이었어요.”

유리는 다시 자료를 들었다.

“제 의견은 차선우 씨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재헌을 보지 않았다.

회의는 계속됐다.

최종적으로 차선우가 〈BORDERLINE〉 광고 모델로 결정됐다.

모두가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한 사람만 빼고.

회의가 끝난 뒤 유리는 가장 먼저 회의실을 나왔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재헌이 질투하는 건가 싶었던 것도 우스웠다.

결국 그는 자신을 의심했다.

전 남자친구라는 이유로 판단이 흐려질 사람처럼.

유리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한유리.”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리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유리 조향사님.”

“들었어요.”

“잠깐 이야기하죠.”

“나중에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유리가 들어가려는 순간 재헌의 손이 문 사이를 막았다.

문이 다시 열렸다.

유리가 그를 바라봤다.

“뭐 하세요?”

“사과하려고.”

유리의 표정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재헌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둘뿐이었다.

“회의에서 한 질문.”

재헌이 말했다.

“제가 선을 넘었습니다.”

유리는 그 표현에 잠깐 멈췄다.

“이사님이요?”

“네.”

“선을 넘었다고 인정도 하네요.”

“잘못한 건 인정합니다.”

유리는 버튼 쪽을 바라봤다.

“됐어요.”

“안 된 얼굴인데.”

“제가 무슨 얼굴인데요.”

“화났습니다.”

“향으로 알아요?”

재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유리는 비꼬듯 말했다.

“이사님도 이제 제 향 맡으면 감정 알겠네.”

“한유리.”

“왜요.”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18층.

17층.

재헌은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당신을 의심한 게 아닙니다.”

유리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럼요?”

“제가.”

재헌은 말을 멈췄다.

처음으로 단어를 고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제가 불편했던 겁니다.”

유리가 완전히 돌아봤다.

“뭐가요?”

재헌의 시선이 그녀에게 고정됐다.

“차선우 씨가.”

또 잠깐.

“당신과 너무 가까운 게.”

유리의 숨이 멎었다.

엘리베이터 안이 갑자기 좁아진 것처럼 느껴졌다.

재헌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래서 회의에서 쓸데없는 질문을 했습니다.”

“…….”

“그건 제 잘못입니다.”

유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15층.

14층.

숫자만 내려갔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향이 느껴졌다.

아까 조향실에서보다 더 짙었다.

유리는 무의식적으로 재헌을 바라봤다.

“지금.”

“뭡니까.”

“향 나요.”

재헌의 입술이 굳었다.

유리는 이상하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제 알 것 같았다.

이 향은 단순히 체온이 오를 때 나는 향이 아니었다.

분노만도 아니고.

스트레스만도 아니었다.

감정이 억눌리지 못할 정도로 강해지는 순간.

권재헌은 향으로 먼저 들켰다.

“이사님.”

“왜요.”

“진짜 신기하네.”

유리가 아주 작게 말했다.

“입으로는 그렇게 숨기면서.”

재헌의 눈빛이 깊어졌다.

“향은 하나도 못 숨겨요.”

12층.

11층.

엘리베이터가 계속 내려갔다.

재헌은 몇 초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유리 쪽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유리의 등이 엘리베이터 벽에 가까워졌다.

“그럼.”

재헌이 낮게 물었다.

“지금 제 향에서는.”

유리의 심장이 뛰었다.

“뭐가 느껴집니까?”

유리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향을 맡지 않아도 알 것 같았으니까.

질투.

긴장.

그리고 그보다 훨씬 더 위험한 감정.

재헌은 유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10층.

9층.

유리의 시선이 재헌의 눈에서 잠시 입술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왔다.

그 순간.

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밖에 서 있던 직원이 내부를 보고 당황한 얼굴로 멈췄다.

“아…….”

유리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저 내려요.”

재헌 옆을 지나가려 했다.

그 순간.

손목이 잡혔다.

유리가 멈췄다.

이번에는 재헌이 먼저 잡았다.

그리고 놓지 않은 채 낮게 말했다.

“한유리 조향사님.”

유리가 돌아봤다.

재헌의 시선이 그녀에게만 고정돼 있었다.

“아직 대답 안 했습니다.”

“……뭘요.”

“제 향.”

재헌의 엄지가 유리의 손목 안쪽에 닿았다.

쿵.

유리의 맥박이 뛰었다.

재헌의 시선이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도 느꼈다.

“무슨 감정인지.”

유리는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조향사가 향 앞에서 도망쳤다.

“……모르겠어요.”

손목을 빼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직전.

재헌의 얼굴이 보였다.

이번에는 그가 웃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유리는 닫힌 문 앞에 서서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심장은 아직도 빠르게 뛰었다.

향은 감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였다.

권재헌의 향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가는 동안.

자신의 심장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솔직해진 걸까.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믿는 것과 조사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누가 들어온 거지.”유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휴대전화 화면에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떠 있었다.USER : HAN.YURI18:42:16BORDERLINE_MASTER_1.0PRINT : 1 COPY몇 번을 다시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볼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늘은 좋은 것들로만 가득한 하루였다. 처음으로 회사 밖에서 재헌과 손을 잡았고, 별다른 목적도 없이 거리를 걸었고, 카페에 앉아 파리와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그런데 이제 가장 선명하게 남는 숫자는 18시 42분이었다.재헌이 휴대전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세아 씨는 아직 회사에 있습니까?”“네. 아카이브 확인하다가 발견한 것 같아요.”“혼자고요?”“아마도요.”재헌의 손이 곧바로 기어 쪽으로 향했다.유리가 그를 바라봤다.“회사로 가려고요?”“가야 합니다.”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유리는 잠깐 입술을 다물었다. 조금 전까지 데이트하던 남자와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차가워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감정 때문에 판단이 흔들리지 않도록 일부러 더 단단해진 얼굴이었다.재헌이 시동을 걸기 전 유리를 돌아봤다.“유리 씨.”“네.”“지금부터는 제가 몇 가지를 물어볼 겁니다.”유리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재헌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당신을 의심해서가 아닙니다.”“알아요.”대답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딱딱했다.재헌은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정말 압니까?”유리가 그를 봤다.“아까 제가 아니라고 했을 때 바로 믿어줬잖아요.”“그건 지금도 같습니다.”“그런데요?”“믿는 것과 조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그 말이 정확해서 유리는 오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재헌은 시선을 잠깐 화면으로 내렸다가 다시 그녀에게 돌렸다.“제가 당신을 믿는 것과 회사가 이 기록을 확인해야 하는 건 별개입니다. 오히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제가 먼저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첫 데이트는 퇴근 후부터

    퇴근 시간보다 십오 분 먼저.한유리는 시계를 세 번째 봤다.17시 45분.별것도 아닌 숫자였다.평소라면 마무리해야 할 시향 기록이 남아 있으면 여섯 시가 넘든 일곱 시가 넘든 신경 쓰지 않았을 시간.그런데 오늘은 달랐다.오늘은.데이트가 있었다.그 단어 하나 때문에 평범한 퇴근 시간이 이상하게 특별해졌다.유리는 작업대 위에 놓인 마지막 시향지를 들었다.B-9.이제는 더 이상 B-9라고 부를 필요도 없었다.오늘 오후 회의에서 최종 확정된 〈BORDERLINE〉 마스터 포뮬러.첫 향에서는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의 차가운 초록빛이 열리고, 바이올렛 리프가 경계를 세운 뒤 아이리스가 그 선을 부드럽게 흐렸다. 마지막에는 시더우드와 아주 얇은 앰버, 피부 가까이에서만 살아나는 머스크가 남았다.멀리서는 차갑고.가까이 갈수록 따뜻한 향.유리는 시향지를 내려놓으며 아주 작게 웃었다.이 향을 만들기 시작했을 때는 몰랐다.결국 자신과 권재헌의 관계를 닮게 될 줄은.“선배.”옆에서 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유리는 바로 표정을 정리했다.“왜.”“지금 웃었죠?”“안 웃었어.”세아는 노트북 화면 너머로 유리를 빤히 바라봤다.“요즘 선배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거예요.”“뭐.”“안 웃었다. 안 피했다. 안 빨갛다.”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윤세아.”“네.”“퇴근 안 해?”“해야죠.”세아가 일부러 시계를 봤다.“근데 오늘은 선배가 더 급해 보여서.”“안 급해.”“오늘 데이트죠?”유리의 손이 잠깐 멈췄다.세아가 바로 웃었다.“맞네.”“목소리 낮춰.”“아무도 없어요.”“그래도.”세아가 의자에서 몸을 조금 당겨 앉았다.“어디 가는데요?”“몰라.”“네?”“그냥 저녁 먹고 걷고 커피 마시기로 했어.”세아의 표정이 순간 묘해졌다.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왜.”“아니.”“말해.”“생각보다.”세아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엄청 평범해서.”유리의 눈썹이 올라갔다.“데이트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이사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회사에서는 모르는 사이처럼

    사귀기로 한 다음 날.한유리는 출근길부터 이상했다.정확히 말하면 모든 게 전날과 똑같은데 자신만 달라져 있었다.같은 길.같은 엘리베이터.같은 사원증.같은 조향실.그런데.권재헌이 이제 남자친구였다.남자친구.유리는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괜히 입술을 꾹 눌렀다.아직도 그 단어가 낯설었다.어제 분명히 키스했고.좋아한다고 말했고.사귀기로 했다.심지어 비밀 연애 기간까지 정했다.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모든 게 꿈 같았다.휴대전화가 울렸다.유리는 화면을 내려다봤다.권재헌.이름만 떠도 심장이 반응했다.메시지는 짧았다.— 출근했습니까.유리는 잠깐 고민하다 답했다.— 지금 엘리베이터예요.몇 초 뒤.— 몇 층.유리는 눈을 깜빡였다.— 7층 가는 중인데요.— 내리면 기다리십시오.유리의 손이 멈췄다.왜.그 말을 묻기도 전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문이 열렸다.그리고.바로 앞에 권재헌이 서 있었다.유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멈췄다.재헌은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짙은 슈트.단정한 넥타이.완벽하게 회사 사람 같은 모습.그래서 더 이상했다.저 사람이.어제 자기한테 키스한 사람이라고?유리는 순간 그의 입술을 봤다.아차 싶어 바로 시선을 올렸다.재헌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변했다.봤구나.유리는 괜히 헛기침했다.“왜 여기 있어요?”재헌이 주위를 한번 봤다.복도에는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다.“기다리라고 했잖습니까.”“그러니까 왜.”“보고 싶어서.”유리의 눈이 커졌다.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마치 오늘 회의가 몇 시냐고 묻는 것처럼.유리는 주변을 급히 확인했다.“회사예요.”“압니다.”“누가 들으면 어떡해요.”“아무도 없습니다.”“있을 수도 있잖아요.”재헌은 유리를 내려다봤다.“어제는 회사 밖에서는 비밀 아니라고 했습니다.”“지금은 안이잖아요.”“복도도 포함됩니까.”“당연하죠.”재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유리는 그 표정이 괜히 얄미웠다.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이번에는 허락부터 받겠습니다

    다음에는 누가 방해해도 안 멈출 겁니다.한유리는 그 말을 정확히 스물세 번쯤 떠올린 뒤 세는 걸 포기했다.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 번.세수하다가 한 번.화장대 앞에서 립밤을 바르다가 두 번.회사로 가는 택시 안에서는 신호에 걸릴 때마다 생각났다.그리고 지금.조향실 문손잡이를 잡은 채 또 한 번.“미쳤다.”유리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문을 열어야 했다.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가 어제 조정해 둔 샘플을 확인하고, 오전 열 시 회의 전에 최종 시향 후보를 세 개로 줄이면 됐다. 권재헌이 오면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고, 향을 맡기고, 필요한 의견을 받는다.그게 전부였다.그런데 문제는.오늘 그 남자의 얼굴을 보면 어제 일이 떠오를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던 순간.자신의 등을 막고 있던 문.얼굴을 조금만 들면 닿을 것 같던 거리.그리고.다음에는 안 멈출 겁니다.유리는 손잡이에서 손을 떼었다가 다시 잡았다.“일하자.”문을 열었다.다행히 아무도 없었다.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안도인지.실망인지.구분하고 싶지 않았다.조향실 안은 이른 시간 특유의 고요함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환기 장치가 낮게 돌아가는 소리와 냉장 보관함의 미세한 진동만 들렸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마지막으로 조정한 세 개의 샘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B-7.B-8.B-9.유리는 가운을 입고 머리를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창문을 조금 열었다.향을 보기 전에는 공간을 비워야 했다.가능하다면 머릿속도.첫 번째 시향지를 집었다.B-7.차가운 베르가못과 쁘띠그랭.선명한 초록빛.십 초.이십 초.이후 아이리스가 올라오고, 시더우드와 머스크가 천천히 따라왔다.유리는 시향지를 코끝에서 떼었다.“아직 빨라.”따뜻해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선을 넘기 직전의 향이라면 이렇게 쉽게 안심하게 해서는 안 됐다.다가가고 싶고.그런데 조금은 망설여지고.그 망설임 때문에 상대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시간.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가지 말라는 말은 못 하면서

    권재헌은 파리 본사에서 온 메일을 세 번 읽었다.내용은 길지 않았다.메종 르비에 창립 20주년 프로젝트 〈BORDERLINE〉의 개발 과정에서 보여준 한유리의 조향 방향성과 감각을 높이 평가한다는 말.그리고 파리 본사 연구소에서 진행 중인 차기 글로벌 라인의 수석 조향사 후보로 그녀를 검토하고 싶다는 내용.아직 공식 제안은 아니었다.사전 인터뷰.역량 확인.향후 이동 가능성에 대한 의사 파악.그 정도였다.그런데 마지막 문장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장기적으로 파리 상주 가능 여부 확인 예정.재헌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봤다.파리.상주.한유리.단어 세 개가 묘하게 거슬렸다.정확히는 마지막 두 개가 함께 붙어 있는 게.비서는 그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아직 확정된 건 아닙니다.”“압니다.”“본사에서도 우선 인터뷰부터 진행하려는 것 같습니다.”“언제.”“다음 주 화요일 화상 미팅 가능 여부를 물어왔습니다.”재헌은 화면을 끄지 않았다.“한유리 조향사님한테도 갔습니까?”“네. 개인 메일과 회사 메일 둘 다 전달된 걸로 확인됐습니다.”“답변은.”“아직 공식 회신은 없습니다.”재헌의 시선이 멈췄다.아직.그 말에 이상하게 안도했다.하지만 바로 불쾌해졌다.자신이 왜 안도하는지 너무 잘 알아서.“본사에서 이 정도까지 보는 줄은 몰랐군요.”비서가 말했다.“이번 프로젝트 반응이 꽤 좋습니다. 특히 초기 샘플 리뷰에서 방향성이 좋다고—”“알고 있습니다.”재헌은 말을 끊었다.한유리가 잘하는 건 알고 있었다.누구보다.회의실에서 수치로만 향을 보는 사람들과 싸울 때도.샘플 17을 버리자고 했을 때도.사람이 좋아한다고 말하는 향과 실제로 돈을 내고 다시 사는 향은 다르다고 했을 때도.처음에는 고집스럽다고 생각했다.지금은 안다.그녀는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자기 향을 지키는 사람이었다.그래서.파리에서도 탐낼 것이다.당연했다.재헌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조건이 좋겠죠.”비서는 질문처럼 들리지

  • 조향사님, 선을 넘으셨습니다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좋아한다.그 단어 하나를 인정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아니.정확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한유리는 집에 돌아온 뒤에도 몇 시간째 소파에 앉아 같은 생각을 반복하고 있었다.권재헌.좋아한다.권재헌을.좋아한다.말로 붙여놓고 보니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아니.”유리는 쿠션을 끌어안았다.“아직 좋아하는 건 아닐 수도 있지.”호감.흥미.신경 쓰임.그 정도일 수도 있었다.자꾸 생각난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아니고.가까이 오면 심장이 뛴다고 해서 꼭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질투하는 것처럼 보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서 반드시—유리는 생각을 멈췄다.쿠션에 얼굴을 묻었다.“아, 진짜.”이쯤 되면 변명도 성의가 없었다.자신이 조향사라는 게 이런 순간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평소라면 아주 작은 향의 차이도 구분할 수 있었다.베르가못과 비터 오렌지의 차이.건조한 시더우드와 크리미한 샌들우드의 차이.같은 머스크라도 피부 위에서 어떻게 다른 온도로 올라오는지.그런데 자기 마음 하나는 왜 이렇게 구분이 안 되는지 모르겠다.아니.사실은 구분이 됐다.그래서 더 문제였다.유리는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테이블 위에는 오늘 가져온 〈BORDERLINE〉 샘플이 놓여 있었다.작은 유리병.아직 완성되지 않은 향.유리는 손목에 한 방울 떨어뜨렸다.처음은 차가웠다.시트러스와 그린 노트.선명하고 가벼운 시작.그러다 몇 분 뒤 아이리스가 올라왔다.조금 부드러워지고.조금 가까워지고.마지막에는 우디 머스크.체온 가까이 붙는 향.유리는 자신의 손목을 맡다가 눈을 감았다.그리고 떠올랐다.권재헌.처음에는 차갑고.선을 분명히 긋고.가까이 오지 말라고 말하던 사람.그런데 자신이 자꾸 그 선을 건드렸고.어느 순간부터는.그가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유리는 눈을 떴다.“……이거.”향이 문제였다.아니.더 정확히는 자신이 만든 향이 지나치게 솔직해지고 있었다.요즘 조정한 〈BORDERLINE〉은 유리 자신도 모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